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บททั้งหมดของ 햇살이 머문 소나무: บทที่ 11 - บทที่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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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바람이 잠든 오후

주말 한낮, 햇살이 우식의 집으로 송아지를 보러 간 사이 전원주택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빛나는 거실 창을 열어둔 채 식탁 위에 널린 물감과 붓을 정리하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볕을 머금은 나뭇잎이 느릿하게 흔들렸고, 멀리 논에서는 물 대는 소리가 졸졸 이어졌다. 대문 앞에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빛나는 손을 멈췄다. 잠시 뒤 현관문이 열리고 태만이 들어섰다. 검은 머리를 반듯하게 넘긴 채였지만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얼굴에는 며칠 제대로 쉬지 못한 사람 같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 “왔어?” “응.” 빛나는 곧장 시계를 봤다. “햇살이 우식이네 갔어. 송아지 태어났다고 아침부터 신나서 갔는데, 데려올까? 당신 보면 좋아할 텐데.” 태만은 대답 대신 빛나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오늘은 그냥 두자.” “왜?” “우리 둘만 좀 있자.” 빛나가 그를 바라봤다. 짧은 말이었는데 괜히 가슴 한구석이 내려앉았다. 태만은 늘 바빴다. 만나도 햇살 이야기를 하고, 필요한 걸 챙기고, 돌아갈 시간을 먼저 확인했다. 둘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빛나가 작게 웃었다. “산책할래?” “응.” 두 사람은 나란히 대문을 나섰다. 비가 그친 뒤라 흙길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올라왔다. 논둑 가장자리에는 작은 들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밭에서 일하던 할머니가 빛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빛나 씨, 신랑 왔는가?” 빛나는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잠깐 왔어요.” 태만은 아무 말 없이 옆에 서 있었다. 할머니가 멀어진 뒤 빛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들 당신을 내 남편인 줄 알아.” 태만의 걸음이 느려졌다. “싫어?” 빛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길가에 핀 들꽃 하나를 발끝으로 피해 걸었다. “싫었으면 여기까지 안 왔겠지.” 태만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빛나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얽혔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아무 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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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손을 맞잡은 오후

빛나는 한참 뒤에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 기울어진 햇살이 침대 끝까지 들어와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쓸어 넘긴 빛나는 옆에 누운 태만을 내려다봤다. 태만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든 얼굴은 아니었다. 빛나가 작게 웃으며 몸을 숙였다. 입술이 짧게 맞닿았다. “일어나.” 태만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벌써?” “햇살 데리러 가야지.” 빛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떨어진 옷을 하나씩 주워 들었다. “아빠 왔는데 말도 안 해주고, 아빠 금방 간다고 하면 난리 날걸?” 셔츠 단추를 채우던 태만의 손이 멈췄다. “오늘 안 가.” 빛나가 돌아봤다. “뭐?” “자고 갈 거야.” 태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셔츠 소매를 정리했다. 빛나는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진짜?” “응.” 그 짧은 대답 하나에 빛나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 “햇살 알면 좋아 죽겠네.” “당신은?” 빛나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다 말고 그를 흘겨봤다. “뭘 물어.” 태만이 가까이 다가왔다. 빛나는 괜히 그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됐어. 빨리 입어. 해 지겠다.” 태만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나섰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은 태만이 먼저 마당으로 내려갔다. 빛나가 뒤따라 나오자 그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빛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뭐야.” “가자.” 마치 당연하다는 듯 내민 손이었다. 빛나는 피식 웃고 그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얽혔다. 언덕길 아래로 내려가자 볕에 데워진 흙냄새가 올라왔다. 논에는 잔바람이 지나가며 연둣빛 물결을 만들었고, 담장 너머 어디선가 된장찌개 끓이는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마주 오던 할머니가 두 사람을 보고 웃었다. “아이고, 빛나 씨. 오늘은 신랑하고 어디 가는가?” 빛나가 태만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웃었다. “햇살 데리러 가요.” “애가 우식이네 갔제? 송아지 났다고 아침부터 동네가 시끌시끌허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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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장날의 따뜻한 한 끼

다음 날 아침, 햇살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거실에서는 빛나가 작은 보온병에 물을 담고 있었고, 태만은 소매를 걷어 올린 채 현관 앞에서 신발끈을 묶고 있었다. “어디 가?” 햇살이 방문에 기대 묻자 빛나가 웃었다. “오늘 시내에 오일장 선대. 구경 갈까 해서.” “진짜?” 잠기던 목소리가 단번에 밝아졌다. 아침밥도 대충 먹은 세 사람은 마을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장터 입구에 들어서자 사람 냄새와 음식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참기름 짜는 고소한 냄새, 갓 부친 부침개의 기름 냄새, 흙 묻은 채소 냄새가 뒤섞였고, 상인들 목소리가 골목마다 쩌렁쩌렁 울렸다. “콩나물 천 원어치 더 얹어드려!” “참외 달어! 한번 잡숴봐!” 햇살은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느라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색색의 천이 걸린 포목점 앞에서는 한참을 서 있었고, 오래된 유리병에 든 사탕을 보고는 태만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빠, 저거 봐. 예쁘다.” 태만은 햇살이 고른 사탕 한 봉지를 말없이 계산했다. “나 사달라고 안 했는데.” “알아.” 햇살이 씩 웃었다. 조금 뒤에는 빛나가 작은 화분 앞에 멈춰 섰다. 노란 꽃이 조그맣게 피어 있었다. 태만은 가격부터 묻지 않았다. 화분 하나를 들어 빛나에게 내밀었다. “이거 좋아하잖아.” 빛나가 피식 웃었다. “당신은 왜 자꾸 내가 좋아하는 걸 기억해.” “기억나니까.” 햇살이 둘 사이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나도 있는데?” 빛나가 웃으며 딸의 이마를 손끝으로 밀었다. “누가 너 빼고 둘이만 좋아한대?” 셋은 장터 끝까지 천천히 걸었다. 해가 머리 위로 올라오자 햇살이 배를 움켜쥐었다. “배고파.” “뭐 먹을래?” 태만이 묻자 햇살의 시선이 길 건너 간판에 멈췄다. ‘한우구이 전문.’ “고기.” 빛나가 웃었다. “아침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장 구경하면 배고파.” 세 사람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불판이 달궈지자 숯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잠시 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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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멀리서 사 온 마음

오일장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해가 서쪽으로 한참 기울어 있었다. 햇살은 장에서 산 사탕 봉지를 품에 안고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신발부터 벗어 던졌다. “아, 다리 아파.” 빛나가 뒤에서 혀를 찼다. “아까는 장 하나 더 돌 수 있다며.” “고기 먹기 전 얘기지.” 태만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장에서 산 짐을 식탁 위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빛나는 채소와 과일을 정리했고, 햇살은 사탕 봉지를 뜯어 알록달록한 사탕을 유리병에 옮겨 담았다. 집 안에는 장터에서 묻혀온 참기름 냄새와 햇볕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햇살아.” “응?” 태만이 거실 한쪽에 두었던 여행 가방을 열었다. 햇살은 사탕 하나를 입에 넣은 채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언제 가져왔어?” “어제.” 태만은 가방 안쪽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빛나.” 주방에 있던 빛나가 돌아봤다. “왜?” 태만이 상자를 내밀었다. 빛나는 손에 묻은 물기를 앞치마에 닦고 받아 들었다. 뚜껑을 열자 가느다란 은빛 팔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하지 않은 얇은 줄 가운데 작은 푸른 돌이 하나 달려 있었다. 빛나의 손이 멈췄다. “이게 뭐야?” “출장 갔다가 봤어.” “봤다고 또 샀어?” 태만은 대답 대신 팔찌를 집어 들었다. “손.” 빛나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손목을 내밀었다. 태만은 가느다란 손목에 팔찌를 채우고 잠금장치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예쁘다.” 옆에서 구경하던 햇살이 먼저 감탄했다. 빛나도 손목을 살짝 돌려봤다. 창문으로 들어온 저녁빛이 푸른 돌에 닿아 작게 반짝였다. “비싼 거 아니지?” “아니야.” “당신 그 말 못 믿겠어.” 태만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햇살이 두 사람 사이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나는?” “있어.” 태만이 다시 가방에 손을 넣었다. 이번에는 작은 종이봉투가 나왔다. 햇살은 기다렸다는 듯 식탁 앞에 바짝 붙었다. 봉투 안에는 조그만 열쇠고리 네 개가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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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작은 소 하나

월요일 아침, 햇살은 평소보다 일찍 교실에 들어왔다. 창문을 열자 밤새 식은 공기와 젖은 운동장 흙냄새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햇살은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지퍼 끝에 달린 들꽃 열쇠고리를 한번 흔들어봤다. 달랑. 작은 금속 소리가 조용한 교실 안에 맑게 울렸다. 햇살은 곧 가방 안을 뒤적였다. 아빠가 출장지에서 사온 나머지 세 개가 손바닥 위에 나란히 올라왔다. 소, 강아지, 노란 우체통. 교실 문이 열리자 춘식의 목소리가 먼저 들어왔다. “아따, 오늘은 웬일로 니가 일찍 왔냐?” “잘 왔어. 이리 와봐.” “왜. 먹을 거 있어?” 뒤따라온 노향이 한숨을 쉬었다. “넌 머릿속에 먹는 것밖에 없냐?” 햇살은 대답 대신 강아지 모양 열쇠고리를 춘식의 손바닥에 툭 올려놓았다. 춘식이 눈을 깜빡였다. “뭐여, 이게?” “너 거.” “내 거?” “응. 우리 아빠가 출장 갔다가 사왔대.” 춘식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가 열쇠고리를 자세히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근디 왜 하필 개여?” 노향이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딱이네. 시끄럽고 여기저기 싸돌아댕기고.” “진노향, 너는 뭐 받았는지 보자.” 햇살이 노란 우체통 열쇠고리를 노향에게 건넸다. 노향은 손바닥 위의 조그만 우체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쁘다.” “네가 편지 쓰는 거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아빠가 골랐대.” 노향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아저씨가 그런 것도 기억하셨어?” “그러게.” 햇살이 웃었다. 그때 맨 뒤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우식이었다. 햇살은 기다렸다는 듯 마지막 열쇠고리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식이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우식아.” “응.” 햇살이 주먹을 내밀었다. “손.” 우식의 시선이 햇살의 얼굴에서 꼭 쥔 손으로 내려갔다. “왜.” “일단 줘봐.” 우식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손바닥을 폈다. 햇살이 그 위에 작은 소 모양 열쇠고리를 내려놓았다. “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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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상처에 닿은 손

며칠 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운동장 한쪽에는 체육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모여 있었고, 교실 뒤편 화단에서는 봄볕을 먹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햇살은 매점에서 사 온 우유 하나를 들고 교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 누군가 앞을 막아섰다. 노진태였다. “야, 오햇살.” 햇살은 걸음을 멈췄다. “왜.” 진태의 시선이 햇살 가방 끝에 달린 들꽃 열쇠고리로 내려갔다. “요즘 아주 소우식이랑 붙어 다니더라?” “그래서?” “걔가 니 남친이라도 되냐?” 햇살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진태가 비웃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전학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걔 뒤나 졸졸 따라다니냐?” 햇살은 대꾸하지 않고 비켜가려 했다. 그 순간 진태가 가방끈을 잡아당겼다. 햇살의 몸이 뒤로 휘청했다. “놔.” “왜. 소우식 불러주랴?” 햇살이 진태 손목을 세게 쳐냈다. “손대지 말라고 했지.” 그 말에 진태 얼굴이 굳었다. 손이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햇살이 먼저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누군가 진태의 팔을 잡았다. 우식이었다. “놔.” 낮고 짧은 목소리. 진태가 팔을 빼내며 욕을 내뱉었다. “넌 맨날 왜 끼어드냐? 얘가 뭐라도 돼?” 우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햇살 앞을 가로막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비켜.” “싫어.” 진태의 눈썹이 꿈틀했다. “진짜 한 번 해보자는 거냐?” 주변 아이들이 걸음을 멈췄다. 춘식과 노향도 소리를 듣고 복도로 뛰어왔다. “야, 노진태! 또 뭐 하냐!” 춘식이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진태가 먼저 우식의 어깨를 밀쳤다. 우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 밀치려는 손목을 잡아 옆으로 밀어냈다. 진태가 중심을 잃고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 “아, 씨!” 화가 난 진태가 주먹을 휘둘렀다. 우식이 고개를 틀었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주먹 끝이 입가를 스쳤다. 툭. 입술 옆이 터졌다. 햇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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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봄볕 아래 선 그림자

오후 볕이 거실 바닥까지 길게 들어와 있었다. 빛나는 식탁에 앉아 마른 꽃잎을 작은 유리병 안에 하나씩 담고 있었다. 며칠 전 햇살이 들고 온 들꽃 가운데 모양이 예쁜 것만 골라 눌러두었던 것이었다. 창밖에서는 참새들이 마당을 오갔고, 멀리 학교가 있는 방향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햇살이 돌아올 시간까지는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빛나는 꽃잎 하나를 손끝으로 정리하다 대문 밖에서 멈추는 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검은 승용차였다. 태만이 타고 다니는 차와는 달랐다. 운전기사가 먼저 내려 뒷문을 열었다. 굽 높은 구두가 흙길 위를 밟았다. 빛나는 손을 멈췄다. 말끔하게 정돈한 머리, 흠잡을 데 없이 반듯한 옷차림. 손에는 작은 가방 하나만 들려 있었다. 여자는 대문 앞에 서서 집을 천천히 올려다봤다. 마치 물건의 값을 매기듯. 빛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여자를 알아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진주였다. 진주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오빛나 씨?” 빛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차 한잔은 주겠죠?” 허락을 기다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빛나는 잠시 바라보다 거실 문을 열었다. 진주는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벽에 걸린 그림. 햇살의 스케치북. 식탁 위에 놓인 세 개의 찻잔.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까지. “생각보다 잘해놨네요.” 빛나는 물을 올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러 오셨어요.” 진주가 소파에 앉았다. “성격 급한 건 여전하네.” 찻잔이 식탁 위에 놓였다. 빛나는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 식탁 끝에 선 채 진주를 바라봤다. 진주는 그런 빛나를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진태만이 자주 온다면서요.” “그 사람 일은 그 사람한테 물으세요.” “내 남편 일을 왜 당신한테 묻겠어요.” 공기가 조용히 식었다. 열린 창문으로 봄바람이 들어왔지만 집 안은 조금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빛나의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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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식지 않은 찻잔

햇살은 대문을 열자마자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거실로 뛰어들었다. “엄마, 나 왔어.” 뒤이어 춘식과 노향이 시끄럽게 인사를 했고, 우식은 맨 마지막에 조용히 문을 닫았다. 빛나는 식탁 앞에 서 있었다. “그래. 잘 놀다 왔어?” “응. 송아지 진짜 귀여워. 다리도 엄청 가늘고, 걷다가 휘청거리고.” 햇살은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다. “내가 꽃다발도 만들어줬어. 근데 우식이가 먹이면 안 된다고 계속—” 말하다가 햇살이 멈췄다. 식탁 위에 찻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하나는 빛나 앞에, 다른 하나는 맞은편에. 빛나는 햇살의 시선을 따라가다 곧장 찻잔을 집었다. “손님 왔었어?” “응. 잠깐.” “누구?” “그냥 아는 사람.” 짧은 대답이었다. 평소 같으면 누구였는지, 무슨 일로 왔는지 자연스럽게 말했을 빛나였다. 햇살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빛나는 두 잔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싱크대에 물을 틀자 찻물이 금세 흘러내렸다. 그런데 손끝이 자꾸 미끄러졌다. 달그락. 찻잔 하나가 싱크대 벽에 부딪쳤다. “엄마?” 햇살이 부엌 쪽을 돌아봤다. “괜찮아.” 빛나는 얼른 잔을 세웠다. 목소리는 멀쩡했지만 손등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우식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봤다. 잠시 뒤 춘식이 배를 움켜쥐었다. “아줌마, 혹시 뭐 먹을 거 없어요? 송아지 보느라 힘 다 썼는디.” 노향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니가 뭘 했다고 힘을 써.” 빛나는 그제야 웃었다. “있지. 감자 쪄놨어.” 따뜻한 감자가 접시에 담겨 나왔다. 네 아이가 식탁에 둘러앉자 집 안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춘식은 소금이니 설탕이니 떠들었고, 노향은 감자 껍질을 벗기다 춘식 손등을 쳤다. 햇살도 웃었다. 하지만 자꾸 엄마 쪽을 봤다. 빛나는 평소처럼 접시를 챙기고 물을 따라줬다. 그런데 대문 밖에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손이 아주 잠깐씩 멈췄다. 햇살은 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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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기다림에 금이 간 밤

해가 진 뒤, 대문 앞에 차가 멈췄다. 빛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 손을 멈췄다. 요 며칠 자동차 소리만 들리면 먼저 몸이 굳었다. 잠시 뒤 현관문이 열렸다. 태만이었다. 평소보다 넥타이가 느슨했고, 단정하던 검은 머리도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신발을 벗기도 전에 빛나를 찾았다. “진주 왔다 갔다며.” 빛나의 손끝이 젖은 행주 위에서 멈췄다. “어떻게 알았어?” “직접 들었어.” 짧은 대답이었다. 빛나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친절하네. 나한테는 말하지 말라더니.” 태만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말 했어.” “별말 안 했어.” “빛나.” 낮아진 목소리에 빛나는 등을 돌려 싱크대에 남은 그릇을 닦았다. “햇살 어디 있어?” “방에서 그림 그려.” 태만은 닫힌 방문을 한번 보고 다시 빛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나한테 바로 말 안 했어.” 그 말에 빛나의 손이 멈췄다. 물방울 하나가 손목을 타고 내려와 며칠 전 태만이 사준 팔찌에 걸렸다. 빛나는 그 푸른 돌을 한참 내려다봤다.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태만이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 화내고, 진주 씨 찾아가고, 또 싸우겠지. 그리고 며칠 지나면 당신은 다시 서울로 가고.” “내가 해결할게.” 빛나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 말이 너무 익숙했다. “언제?” 태만의 눈빛이 흔들렸다. 빛나는 처음으로 그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다. “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집 안이 조용해졌다. 방 안에서는 햇살이 연필로 종이를 긁는 사각거림만 희미하게 들렸다. 빛나가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 “햇살 가졌을 때도 그랬잖아. 금방 해결할 수 있다고.” “빛나.”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어. 집에서 반대해도 결국 당신이 정리할 수 있다고.”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햇살이 벌써 열다섯이야.” 태만의 턱이 굳었다. 빛나는 팔짱을 끼듯 제 팔을 감쌌다. “나는 여기서 당신 기다리고, 햇살은 아빠 온다고 하면 좋아서 뛰어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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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오지 않는 주말

금요일 오후, 교실 창밖으로 햇빛이 길게 기울었다. 햇살은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있었다. 연둣빛 논과 낮은 산, 그 아래로 우식의 집 축사를 그린 그림이었다. 춘식이 옆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야, 근디 이 소는 왜 나보다 잘생겼냐?” 햇살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소랑 경쟁하지 마.” 노향이 웃음을 터뜨렸다. “넌 소한테도 지냐?” “아따, 진노향. 너는 꼭 말을 해도.” 춘식이 투덜거리자 햇살이 소리 내 웃었다. 우식은 맨 뒷자리에서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햇살은 그림을 접어 가방에 넣다가 문득 말했다. “아빠 내일 온대.” 춘식이 돌아봤다. “저번에 온 그 아저씨?” “응. 이번엔 일찍 온다 그랬어.” 햇살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엄마가 장날에 사 온 고기로 불고기도 해준대.” 노향이 부러운 얼굴로 말했다. “좋겠다.” 햇살은 고개를 끄덕이다 우식을 봤다. “너도 올래?” 우식이 잠시 햇살을 바라봤다. “가족끼리 있어.” “그래도 되는데.” “다음에.” 햇살은 조금 아쉬운 듯 입술을 내밀었지만 곧 웃었다. “그럼 월요일에 사탕 가져올게.” 토요일 아침. 빛나는 평소보다 일찍 부엌에 들어갔다. 불고기 양념을 만들고, 태만이 좋아하는 나물도 무쳤다. 햇살은 거실을 쓸었다가 다시 닦고, 소파 쿠션까지 반듯하게 세워놓았다. “엄마, 아빠 몇 시에 온대?” “점심 전에는 온다고 했어.” 햇살은 시계를 봤다. 열한 시가 지나고 열두 시가 되었다. 대문 밖으로 차 한 대가 지나갈 때마다 햇살의 고개가 돌아갔다. 하지만 태만의 차는 아니었다. “배고프지?” 빛나가 물었다. “아니. 기다렸다 같이 먹지 뭐.” 불고기는 프라이팬 위에서 한 번 식었다. 한 시가 지나자 빛나는 다시 불을 켰다. 햇살은 소파에 엎드려 그림책을 넘겼다. 한 장. 두 장. 넘기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두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전화가 울렸다. 빛나가 거의 뛰다시피 받았다.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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