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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남겨지는 사람

며칠 동안 집은 잠잠했다. 빛나는 술병을 치웠고, 햇살 앞에서는 평소처럼 밥을 차렸다. 아침이면 머리를 묶어주고, 학교 갈 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가방에 넣어줬다. 햇살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웃었다. 다만 예전처럼 엄마에게 먼저 매달리지는 않았다. “다녀올게.” “응. 조심해서 가.” 짧은 인사가 끝나면 햇살은 곧장 대문을 나섰다. 언덕 아래에는 늘 우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응.” 춘식과 노향이 앞에서 떠들고, 두 사람은 조금 뒤를 따라 걸었다. 빛나는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그날 오후, 태만이 다시 찾아왔다. 햇살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이었다. 빛나는 현관 앞에 선 그를 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왔어.” 태만은 대답 대신 집 안을 한번 둘러봤다. “햇살은?” 빛나의 입가가 굳었다. “학교.” “몇 시에 와?” 그 질문 하나가 이상하게 가슴을 찔렀다. 빛나는 피식 웃었다. “역시.” 태만이 눈썹을 좁혔다. “뭐가.” “나 보러 온 게 아니네.” “빛나.” “햇살 보러 온 거잖아.” 태만은 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그 짧은 침묵이 빛나에게는 대답처럼 들렸다. “그 애가 무서워하니까 오는 거지?” “둘 다 보러 온 거야.” “거짓말.” 빛나는 등을 돌렸다. 그날 저녁, 햇살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술 냄새를 맡았다. 식탁 위에는 다시 병이 나와 있었다. “엄마.” 빛나는 잔을 비웠다. “아빠 왔다 갔어.” 햇살의 눈이 커졌다. “아빠?” “응. 너 찾더라.” 목소리가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햇살은 가방끈을 움켜쥐었다. “왜 그냥 갔어?” 그 말에 빛나의 얼굴이 굳었다. “왜? 보고 싶었어?” “아니, 그냥…” “맨날 아빠, 아빠.” 빛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었다. 햇살의 어깨가 먼저 움츠러들었다. 빛나는 그 반응을 보고도 멈추지 못했다. “그 사람이 오는 이유도 너잖아.” “엄마.”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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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시들지 않는 들꽃

며칠 동안 햇살은 우식의 집에서 지냈다. 예주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침이면 햇살 몫의 밥을 한 공기 더 퍼놓았고, 밤이면 작은 방에 깨끗한 이불을 깔아줬다. 춘덕 역시 평소처럼 축사 일을 하다가 마주치면 “밥 묵었냐” 한마디만 던질 뿐이었다. 그게 햇살은 고마웠다. 불쌍하다는 얼굴도,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도 없었다. 첫날 밤에는 방문을 닫고도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햇살이 걸쇠를 두 번 확인하는 걸 본 예주는 아무 말 없이 문이 제대로 잠기는지만 살펴주고 돌아갔다. 잠시 뒤 문 앞에는 물 한 컵이 놓였다. 누가 둔 건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더더욱 평소처럼 굴었다. 춘식이 떠들면 웃었고, 노향이 매점에 가자고 하면 따라갔다. 다만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우식과 같은 길로 걸었다. 그날도 네 사람은 논길을 따라 내려왔다. 한여름 햇볕에 논은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 있었고, 둑 아래에는 노란 들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햇살이 걸음을 멈췄다. “우식아.” “응.” “저 꽃 아직도 피어 있네.” 우식이 시선을 내렸다. 봄에 햇살이 예쁘다고 했던 꽃과 닮은 작은 들꽃이었다. 햇살은 쪼그려 앉아 한 송이를 꺾었다. “근데 얘는 금방 시들어.” 손가락 사이에서 꽃대를 빙글 돌리며 중얼거렸다. “예쁜 건 왜 다 오래 못 가냐.” 춘식과 노향은 앞서가느라 듣지 못했다. 우식만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농장에 도착한 뒤 햇살은 예주가 내준 수박을 먹으며 평상에 앉아 있었다. 우식은 보이지 않았다. “우식이는?” “아까 헛간으로 들어가던디.” 예주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햇살은 수박씨를 접시 가장자리에 모아놓다가 슬쩍 헛간 쪽을 봤다. 안에서는 사각사각 무언가 긁는 소리가 났다. 한참 뒤 우식이 나왔다. 손에는 작은 나뭇조각 하나가 들려 있었다. “뭐야?” 우식은 대답하지 않고 햇살 앞에 섰다. 그리고 손바닥을 폈다. 햇살의 눈이 커졌다.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작은 나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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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여름 끝, 다시 그 집으로

우식네 작은 방 창가에는 나무 들꽃이 세워져 있었다. 햇살은 눈을 뜨자마자 꽃부터 확인했다. 밤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투박한 꽃잎이 아침볕을 받고 있었다. 방문 밖에서는 예주가 국 끓이는 소리가 났고, 마당에서는 춘덕과 우식이 축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햇살은 이불을 개다가 대문 앞에 멈추는 차 소리를 들었다. 몸이 먼저 굳었다. 잠시 뒤 태만이 마당으로 들어왔다. “햇살아.” 햇살은 방문 앞에 선 채 아빠를 바라봤다. 태만의 얼굴은 밤새 잠을 못 잔 사람처럼 지쳐 있었다. “짐 챙기자.” 햇살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어디 가?” “서울.” 예주가 부엌에서 나오다 걸음을 멈췄다. 햇살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 “당분간만 아빠랑 있자.” “엄마는?” 태만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 하나로 충분했다. “나 안 가.” “햇살아.” “엄마 혼자 두면 또 술 먹어.” 목소리가 떨렸지만 햇살은 물러서지 않았다. 태만은 딸의 마른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진주에게 말했을 때, 너무 쉽게 돌아온 대답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세요. 그 웃음이 자꾸 떠올랐다. 진주와 같은 집으로 데려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따로 지낼 곳을 마련해도 자신이 매일 곁에 있을 수는 없었다. 햇살을 또 혼자 두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아빠.” 햇살이 낮게 말했다. “나 여기 있을래.” 그때 대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빛나였다. 며칠 술을 끊은 얼굴은 핼쑥했고 눈 밑이 깊게 꺼져 있었다. 햇살이 저도 모르게 예주 쪽으로 한 걸음 붙었다. 빛나는 그 움직임을 봤다.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햇살아.” “……응.” “엄마가 미안해.” 빛나는 가까이 오지 않았다. “집에 오라는 말도 못 하겠다.” 햇살의 손이 옷자락을 쥐었다. “술 안 먹을 거야?” “안 먹을게.” “또 화나면?” 빛나의 눈이 금세 젖었다. “예주 언니한테 갈게. 너한테 안 그럴게.” 예주가 팔짱을 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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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다시 데워진 저녁

햇살이 집으로 돌아온 뒤 며칠은 조용히 흘렀다. 아침이면 빛나는 먼저 일어나 밥을 지었다. 예전처럼 방문을 벌컥 열지 않고 문밖에서 두드렸다. “햇살아. 학교 갈 시간이야.” “응.” 대답이 들리면 그제야 부엌으로 돌아갔다. 햇살도 조금씩 달라진 집의 공기를 살폈다. 찬장은 닫혀 있었고, 술병은 보이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따뜻한 국과 반찬이 놓였다. 빛나는 잘 먹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햇살이 얼마나 먹는지만 조용히 봤다. 어느 아침, 햇살이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다가 엉킨 부분에 손을 멈췄다. 빛나는 뒤에서 한참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가 해줄까?” 햇살의 손이 잠깐 멈췄다. “안 아프게?” 빛나의 얼굴이 굳었다. “응.” 한참 뒤 햇살이 빗을 내밀었다. 빛나는 두 손으로 받았다. 긴 흰 머리카락을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풀었다. 손이 머리 가까이 갈 때마다 햇살의 어깨가 아주 조금 굳는 게 느껴졌다. 빛나는 그때마다 손을 멈췄다. “괜찮아?” “응.” 머리를 다 묶고 나서도 빛나는 먼저 안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 햇살이 묶인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봤다. “예쁘다.” 빛나가 작게 웃었다. “다행이네.” 학교에 도착하자 춘식이 가장 먼저 알아봤다. “야, 오늘 머리 묶었네.” “응. 엄마가 해줬어.” 노향이 손끝으로 흰 머리 끝을 만져봤다. “예쁘다.” 햇살이 웃으며 맨 뒷자리를 봤다. “우식아. 너는?” 우식이 고개를 들었다. “뭐.” “머리.” 잠깐의 침묵. “예뻐.” 춘식이 입을 벌렸다. “오메. 소우식 입에서 저런 말도 나와?” 우식이 무표정하게 쳐다보자 춘식은 얼른 앞을 봤다. 햇살은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방과 후에는 우식과 나란히 논길을 걸었다. 햇살이 묶은 머리를 손으로 만지며 물었다. “진짜 괜찮았어?” “응.” “아까 춘식이 있어서 그냥 그런 말 한 거 아니고?” “아니.” “그럼 왜 먼저 말 안 해줬어?” 우식은 한참 걷다가 대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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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복숭아 향이 번지는 오후

늦여름 볕이 평상 끝까지 길게 들어왔다. 예주는 이웃집에서 받아온 복숭아를 큰 광주리에 담아 마당으로 내왔다. 붉게 익은 과일에서는 달큰한 향이 진하게 퍼졌다. “너희들 다 먹어. 너무 익어서 오래 못 둔다.” 춘식이 가장 먼저 손을 뻗었다. “제가 책임질게요.” 노향이 손등을 탁 쳤다. “씻지도 않고 먹게?” “껍질 벗기면 되지.” “손이 더럽잖아.” 둘이 티격거리는 사이 햇살은 광주리 안을 한참 뒤적였다. 가장 붉고 말랑해 보이는 하나를 골라 우식에게 내밀었다. “이거 네 거.” 우식이 복숭아를 봤다. “왜.” “제일 맛있어 보여서.” “네가 먹어.” “싫어. 너 줬잖아.” 우식은 잠깐 햇살을 보다 복숭아를 받았다. 춘식이 입을 삐죽였다. “나는 저 쪼그만 거 주더니.” 햇살이 작은 복숭아 하나를 집어 던졌다. “너는 이거.” “차별 아니냐?” “맞아.” 노향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식은 복숭아를 반으로 갈랐다. 잘 익은 과즙이 굵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한쪽을 햇살 앞으로 내밀었다. “먹어.” “너 먹으라고 준 건데.” “많아.” 햇살은 못 이기는 척 받아 들었다. 한입 베어 물자 달큰한 과즙이 입술 끝에 묻었다. “진짜 맛있다.” 우식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햇살 앞으로 내밀었다. “묻었어.” “어디?” 우식이 자기 입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햇살이 대충 닦았다. “됐어?” “응.” 춘식이 그 광경을 보다가 혀를 찼다. “아따, 둘이 아주 알아서 잘들 한다.” “뭘.” 햇살은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 노향은 잠깐 우식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때 춘덕이 축사에서 나왔다. “우식아, 뒤쪽 물통 또 샌다.” 우식은 먹던 복숭아를 내려놓고 바로 일어났다. 햇살도 따라 내려왔다. “나도 갈래.” “더워.” “괜찮아.” 우식은 막지 않았다. 축사 뒤 수도관 옆에는 물이 조금씩 흘러 진흙이 생겨 있었다. 우식이 쪼그려 앉아 연결 부위를 조이는 동안 햇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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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고구마 연기 사이로

가을이 깊어지자 농장 뒤 밭의 고구마 줄기가 누렇게 말라갔다. 주말 오후, 춘덕은 아이들에게 낡은 장갑을 하나씩 나눠줬다. “놀러 왔으면 밥값은 혀야제.” 춘식이 장갑을 받아 들고 억울한 얼굴을 했다. “아저씨, 저 손님인데요?” “그라믄 밥 먹지 말고 가든가.” “어디부터 캐면 돼요?” 대답이 너무 빨라 노향이 웃음을 터뜨렸다. 햇살은 장갑을 끼고 밭고랑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거 그냥 당기면 돼?” 우식이 옆에서 호미를 들었다. “안 돼.” “왜?” “끊어져.” 우식은 흙을 조금씩 걷어내며 고구마가 있는 자리를 보여줬다. 햇살도 따라 호미를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먹보다 큰 고구마 하나가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햇살이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우식아, 이거 봐. 엄청 커.” “응.” “내가 캤어.” “응.” “좀 감탄해봐.” 우식이 고구마를 한번 봤다. “크네.” 햇살은 만족한 듯 웃었다. 춘식은 욕심을 부리다 고구마 줄기를 통째로 끊어먹었고, 노향에게 한참 잔소리를 들었다. 해가 기울 무렵 춘덕은 밭 한쪽에 마른 장작을 모았다. 작은 불이 붙자 아이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예주가 은박지에 싼 고구마를 불 속에 넣었다. “조금 기다려야 혀.” “얼마나요?” 춘식이 묻자 예주가 혀를 찼다. “넌 먹을 때만 참을성이 없냐.” 연기가 바람을 타고 논 쪽으로 흘렀다. 햇살은 평상에 앉아 손바닥의 흙을 털었다. 우식이 젖은 수건을 하나 내밀었다. “닦아.” “너는?” “씻었어.” 햇살은 손가락 사이까지 닦다가 문득 집 쪽을 바라봤다. 오늘 아침 빛나는 그림을 그리러 마을 뒷산에 올라갔다. 술은 한동안 입에도 대지 않았다. 태만은 지난주에 전화했고, 다음 달쯤 내려오겠다고 했다. 햇살은 날짜를 묻지 않았다. 기다리다 실망하는 법보다, 오면 반가워하는 법을 먼저 배우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우식의 목소리에 햇살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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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첫눈이 내린 운동장

겨울이 시작되던 아침, 운동장 위로 첫눈이 내렸다. 수업 종이 울리기 전부터 아이들은 창가에 붙어 있었다. 춘식이 가장 먼저 창문을 열었다. “야! 진짜 온다!” 노향이 바로 창문을 닫았다. “추워. 닫아.” 햇살은 창밖을 보며 손바닥을 유리창에 댔다. 하얀 눈이 흙빛 운동장 위에 하나씩 내려앉았다가 금세 녹았다. “우식아.” 맨 뒷자리에서 책을 펴던 우식이 고개를 들었다. “응.” “눈 쌓이면 눈사람 만들자.” “응.” “진짜?” “응.” 춘식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나는 눈싸움.” 노향이 코웃음을 쳤다. “너는 맨날 싸울 생각뿐이냐.” 점심 무렵부터 눈발이 굵어졌다. 수업이 끝났을 때 운동장 한쪽에는 얇게 흰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네 사람은 가방을 교실에 던져두고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춘식은 시작부터 눈을 뭉쳐 노향에게 던졌다. “야!” 노향이 곧장 더 큰 눈덩이를 만들어 쫓아갔다. 햇살은 웃으며 눈을 모았다. “우식아, 이거 굴려.” 작은 눈덩이를 건네자 우식은 말없이 운동장 바닥을 굴렸다. 몇 번 지나지 않아 햇살 허리만 한 눈덩이가 됐다. “너무 큰데?” “네가 하랬잖아.” 햇살이 배를 잡고 웃었다. 둘은 한참을 낑낑대 눈사람을 세웠다. 햇살은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팔을 만들고, 작은 돌멩이로 눈과 입을 붙였다. 마지막에는 자기 목도리를 풀어 눈사람 목에 둘렀다. 우식이 봤다. “추워.” “얘가 더 추워 보여.” “눈인데.” “그래도.” 우식은 잠시 햇살을 바라보다 자기 목도리를 풀어 햇살 목에 둘렀다. 햇살의 입이 멈췄다. “너는?” “안 추워.” “거짓말.” “괜찮아.” 검은 목도리에서는 볏짚과 비누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햇살은 괜히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내일 돌려줄게.” “응.” 그날 집에 돌아왔을 때 전화가 울렸다. 태만이었다. 이번 주에 내려오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햇살은 수화기를 빛나에게 건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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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다시 봄, 같은 길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열여섯이 된 햇살은 교문 앞 벚나무 아래에서 우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보다 조금 길어진 교복 치맛자락 아래로 운동화 끝이 까딱거렸다. 멀리서 우식이 걸어오자 햇살이 손을 흔들었다. “소우식!” 우식은 뛰지 않았다. 평소처럼 천천히 다가왔다. “왜 먼저 왔어.” “오늘 미술실 일찍 가려고.” 햇살은 가방 지퍼를 열어 안쪽을 보여줬다. 필통 옆에는 나무 들꽃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우식의 시선이 멈췄다. “아직 가지고 다녀?” “응.” “왜.” 햇살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네가 줬잖아.” 그게 이유의 전부라는 얼굴이었다. 우식은 더 묻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가자 춘식과 노향이 창문 쪽에서 또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춘식은 새로 자른 머리를 자랑했고, 노향은 군밤장수 같다고 놀렸다. 햇살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너희는 한 살 더 먹어도 똑같다.” 노향이 코웃음을 쳤다. “너희 둘도 그렇거든.” “우린 왜?” 햇살이 묻자 노향은 대답 대신 우식 쪽을 한번 봤다. 우식은 아무것도 모른 채 책을 꺼내고 있었다. 방과 후 네 사람은 지난해와 같은 논길을 걸었다. 돌담 아래에는 노란 들꽃이 다시 피어 있었다. 햇살이 걸음을 멈췄다. “얘네 또 왔다.” 쪼그려 앉아 한참 들여다보던 손이 꽃대로 향했다가 멈췄다. 우식이 물었다. “안 꺾어?” “응.” “왜.” “두고 볼래.” 햇살은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꺾으면 금방 시들잖아.” 우식의 시선이 가방으로 내려갔다. 안에는 시들지 않는 꽃이 있었다. 햇살도 그걸 알아챘는지 웃었다. “나는 이미 하나 있잖아.” 춘식이 앞에서 소리쳤다. “빨리 와! 배고파 죽겄어!” 노향이 바로 받아쳤다. “넌 하루 종일 배고프냐?” 네 사람은 우식네 농장으로 향했다. 예주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딸기를 씻어 내왔다. “올해 첫 딸기여. 먹어봐.” 햇살은 제일 작은 것을 집었다. 우식이 큰 딸기 하나를 햇살 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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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한쪽으로 기운 우산

봄비는 예고 없이 내렸다. 마지막 수업이 끝날 무렵 운동장 흙이 검게 젖었고, 처마 끝에서는 빗물이 줄처럼 떨어졌다. 춘식이 창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산 없는데.” 노향이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마트 앞까지만 같이 써.” 춘식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역시 진노향밖에—” “붙지 마. 좁아.” 둘이 먼저 복도로 나갔다. 햇살도 가방에서 노란 꽃무늬 우산을 꺼냈다. 몇 년 전 우식이 건네줬던 우산이었다. 맨 뒷자리 우식은 빈손이었다. 햇살이 물었다. “우산은?” “안 가져왔어.” “같이 가.” 우식은 작은 우산을 한번 봤다. “좁아.” “내가 작은데 뭐.” “내가 커.” 햇살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비 맞고 가든가.” 우식은 잠깐 생각하더니 우산 손잡이를 받아 들었다. 둘이 현관 밖으로 나가자 바로 문제가 생겼다. 우식이 우산을 들면 햇살 쪽은 넉넉했지만 그의 오른쪽 어깨가 그대로 비에 젖었다. 햇살이 손잡이를 밀었다. “너 젖어.” 우식은 다시 햇살 쪽으로 기울였다. “괜찮아.” “안 괜찮아.” “난 괜찮아.” “나는 안 괜찮다고.” 햇살이 우식 쪽으로 바짝 붙었다. 어깨가 살짝 맞닿았다. 우식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빗소리가 우산 위로 촘촘히 떨어졌다. 햇살도 뒤늦게 가까워진 거리를 알아챘다. 고개를 들자 우식의 턱선이 바로 옆에 보였다. 괜히 앞만 봤다. “우식아.” “응.” “너 여자애랑 우산 같이 써본 적 있어?” “없어.” “내가 처음이네?” “응.” 햇살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나도.” “뭐가.” “남자애랑 같이 쓰는 거.” 우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우산 손잡이를 쥔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논길에는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생겨 있었다. 햇살이 큰 웅덩이를 피해 우식 쪽으로 붙을 때마다 팔이 스쳤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거리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마을 갈림길에 다다르자 햇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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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강 건너 불빛

초여름 저녁, 시내 강변에서 작은 축제가 열렸다. 학교가 끝나자 네 사람은 곧장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정류장에 내리기도 전부터 음악 소리가 들렸고, 강변 길에는 어묵과 호떡, 솜사탕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춘식은 가장 먼저 포장마차로 달려갔다. “야, 저거 먹자!” 노향이 한숨을 쉬었다. “버스 타기 전에 핫도그 먹었잖아.” “그건 간식이고.” “저것도 간식이야.” 햇살은 웃으며 둘 사이를 지나갔다. 우식은 늘 그렇듯 조금 뒤에서 따라왔다. 강변 난간에는 색색의 전구가 길게 매달려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자 불빛이 하나씩 켜졌다. 햇살은 난간에 팔을 올리고 강 건너를 바라봤다. “예쁘다.” 우식이 옆에 섰다. “응.” “서울에도 이런 건 많은데.” “응.” “근데 여기가 더 좋아.” 우식이 햇살을 봤다. “왜.” “조용하잖아.” 햇살이 웃었다. “너처럼.” 그때 강 건너에서 폭죽 하나가 올라갔다. 펑. 햇살이 놀라 우식 쪽으로 한 걸음 붙었다. 팔이 닿았다. 우식은 움직이지 않았다. “안 놀랐어?” “응.” “나는 조금 놀랐는데.” “알아.” “어떻게 알아?” “봤어.” 햇살이 피식 웃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노향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우식이 햇살을 보는 눈은 늘 조금 달랐다. 말은 똑같이 짧았고 표정도 거의 없었지만, 햇살이 움직이면 시선이 따라갔다. 햇살이 웃으면 아주 잠깐 입술 끝이 풀렸다. 예전부터 보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가슴이 조금 아팠다. “야.” 춘식이 옆에서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어묵 국물.” “네가 웬일로 남 걸 챙겨.” “두 개 받았어.” 노향은 컵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김이 얼굴 가까이 올라왔다. “고마워.” 춘식이 괜히 앞만 봤다. “별걸 가지고.” 한참 뒤 네 사람은 다리 위로 올라갔다. 난간에는 자물쇠가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햇살이 하나를 들어봤다. “이건 왜 달아놨어?” 춘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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