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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화. 새벽 끝에 남은 재킷

한참 뒤, 햇살은 갈아입을 옷을 챙겨 작은 탈의실로 들어갔다. 진성이 던져준 재킷은 끝까지 어깨에서 벗지 않았다. 거울 앞에 서자 입술 옆에 번진 붉은 자국이 먼저 보였다. 햇살은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가 찌릿한 통증에 미간을 좁혔다. “아, 씨.” 짧게 욕을 삼키고 물로 얼굴을 씻었다. 화장을 지우자 눈 밑이 더 퀭해 보였다. 햇살은 한동안 거울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떨리던 눈이었다. 그런데 몇 번 숨을 고르고 나니 다시 익숙한 얼굴이 만들어졌다.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살짝 접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햇살은 검은 티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마지막으로 진성의 재킷을 벗어 팔에 가지런히 걸쳤다. 복도로 나오자 카운터 앞에 진성이 서 있었다. 장미는 담배를 피우며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었고, 직원 몇 명은 멀찍이 떨어져 햇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햇살은 곧장 진성 앞으로 갔다. “진성 아저씨.” 진성이 내려다봤다. “왜.” 햇살이 재킷을 내밀었다. “땡큐~” 능글맞은 목소리였다. 진성은 재킷보다 햇살 얼굴을 먼저 봤다. 터진 입술. 화장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은 붉은 자국. 햇살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안 받아요?” “입술.” “멀쩡한데요.” “피 나.” 햇살이 혀끝으로 입술을 한번 훑었다. “이 정도야 뭐.” 진성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병원 가.” “싫어요.” “가.” “아저씨도 우식이처럼 말 짧네.” 처음 듣는 이름에 진성의 시선이 멈췄다. “누구.” 햇살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내가 아는 곰 한 마리요.” 진성은 더 묻지 않았다. 재킷을 받아 들려다 햇살 손목이 조금 떨리는 걸 봤다. 그는 재킷 대신 카운터 위에 놓인 얼음주머니를 집어 햇살에게 내밀었다. “대.” “저 진짜 괜찮다니까.” “안 괜찮아 보여.” 햇살의 웃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때 전화를 끊은 장미가 돌아섰다. “누가 괜찮대?” “저요.” “네가 제일 못 믿을 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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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새벽하늘에 머문 노래

앨리의 마지막 불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복도 끝 비상문을 밀고 나오자 새벽 공기가 얼굴에 차갑게 닿았다. 건물 뒤편 계단에는 밤새 식지 못한 콘크리트 냄새와 담배 냄새가 옅게 남아 있었다. 햇살은 계단 중간쯤에 앉았다. 검은 티셔츠 위로 긴 흰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내려왔다. 터졌던 입술은 아직 붉었고, 화장을 지운 얼굴에는 피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찰칵. 불꽃이 잠깐 얼굴을 밝혔다. 햇살은 깊게 빨아들인 연기를 천천히 하늘로 내보냈다. 서울의 새벽하늘에는 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높은 건물 사이로 검푸른 빛만 옅게 번지고 있었다. “시골은 별 진짜 많았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답은 없었다. 햇살은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주머니 안에서 손끝에 익숙한 나무 결이 닿았다. 햇살은 작은 들꽃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갈색 매듭은 아직 단단했고, 오래 만져 반질해진 꽃잎 가장자리에는 몇 해의 시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엄마를 보내던 날에도 쥐고 있었고, 서울집에서 밤을 새울 때도 놓지 못했던 꽃이었다. 앨리까지 흘러온 뒤에도 이것만은 가방 깊숙이 숨겨두지 않았다. 햇살은 엄지로 꽃잎을 천천히 문질렀다. 시골에서라면 지금쯤 우식이 축사 문을 닫고 있을 시간이었다. 한참 하늘만 바라보다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그곳은 괜찮나요….” 처음에는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노래라기보다 혼잣말에 가까웠다. “당신이 두고 간 이곳엔 오늘도 같은 바람이 불고 나는 아직 여기 있어요….” 맑은 목소리가 계단 사이로 낮게 번졌다. 술과 담배에 젖은 밤을 오래 보냈는데도 노래하는 목소리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깨끗했다. 햇살은 눈을 감았다. “당신의 얼굴도 함께했던 작은 추억도 스쳐 지나던 당신의 향기도 아직 여기에 남아 있는데….” 엄마가 떠올랐다. 앞치마에 밀가루를 묻힌 채 피자를 굽던 모습. 손등에 파란 물감을 묻히고 웃던 얼굴. 취해 소리를 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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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두 해를 건너온 마음

그날 이후 장미는 햇살을 대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다. 원래도 밥을 챙기고 위험한 손님은 알아서 걸러냈지만, 이제는 퇴근 시간이 늦어지면 먼저 차비를 쥐여줬고 열이 조금만 올라도 방에 들여보내지 않았다. “우리 보물, 얼굴 왜 이래.” “원래 예뻐요.” “개소리 말고 이마 내놔.” 햇살은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장미 앞에 머리를 내밀었다. 미정과 수지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입을 삐죽였다. “마담 언니는 진짜 햇살이만 좋아해.” “맞아. 우리는 죽어도 일 시키면서.” 장미가 담배를 물고 소리쳤다. “시끄러워, 이년들아! 니들도 저만큼 벌어와!” 분장실에 웃음이 터졌다. 햇살은 누구보다 크게 웃었다. 상처가 없어진 건 아니었다. 낯선 남자가 뒤에서 갑자기 손을 뻗으면 어깨가 굳었고, 잠을 자다 문손잡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벌떡 일어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햇살은 더 시끄럽게 웃었다. “나 멀쩡해.”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먼저 말했다. 진성은 그런 햇살을 오래 봤다. 처음에는 그저 지켜야 하는 직원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들어가고, 취한 손님을 떼어놓고, 새벽에 혼자 있으면 택시를 잡아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햇살이 출근하지 않으면 이유가 궁금했다. 방에서 평소보다 오래 나오지 않으면 복도 끝을 몇 번씩 봤다. 새벽 포장마차에서 다른 남자와 웃고 있으면 담배 맛이 이상하게 썼다. 햇살은 전혀 몰랐다. “진성 아저씨.” “왜.” “라이터.” 진성이 내밀자 햇살이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고마워요.” “하나 줄여.” “잔소리하지 마요.” “기침하잖아.” 햇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 기침 횟수도 세요?” 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햇살은 피식 웃고 지나갔다.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열아홉이 된 햇살은 앨리에서 누구보다 이름이 알려졌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는 손님이 먼저 날짜를 맞춰 예약할 정도가 됐다. 돈도 많이 모았다. 그런데도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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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비어 있는 언덕을 바라보는 사람

스무 살의 봄은 예전보다 조금 빨리 찾아왔다. 논둑마다 연둣빛 풀이 올라왔고, 마을 어귀 당산나무 아래에는 낮부터 어르신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춘식이 저놈은 또 노향이 쫓아댕기네.” 한 할머니가 혀를 차며 웃었다. 옆에 앉은 노인이 장기알을 놓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쟈는 옛날부터 그랬잖여. 우식이는 아직도 저러고 있고.” 시선 끝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춘식은 마트에서 가져온 음료수 두 병을 들고 노향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노향아, 이거 묵어.” “싫어.” “니가 좋아하는 복숭아 맛인디?” “나 지금 안 목말라.” “그라믄 이따 묵어.” 춘식이 기어코 노향 손에 병을 쥐여줬다. 노향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너 요즘 왜 자꾸 이래.” “내가 뭘.” “자꾸 먹을 거 주잖아.” 춘식이 괜히 목덜미를 긁었다. “남아서 주는 거여.” 노향이 뒤쪽 마트를 한번 봤다. “마트에 복숭아 음료수 딱 두 병 남았더라.” 춘식의 입이 다물렸다. 노향은 피식 웃었다. “거짓말도 못하면서.” “아따, 그냥 묵으라믄 묵어.” 귀가 붉어진 춘식이 먼저 돌아섰다. 노향은 손에 든 병을 내려다보다 작게 웃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우식이 서 있었다. 예전보다 키도, 체격도 더 커졌다. 짧은 머리와 짙은 눈썹,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그대로였다. 손에는 농장 장갑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시선은 농장이 아니었다. 언덕 위. 빛나와 햇살이 살던 전원주택. 사람이 떠난 지 이 년이 지났는데도 집은 그대로였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마당에는 잡초가 허리 가까이 자라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낡은 커튼 한쪽이 창 안에서 희미하게 흔들렸다. 우식은 그걸 오래 바라봤다. 노향이 가까이 와 옆에 섰다. “또 보네.” 우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아무도 안 살아.” “알아.” “햇살이 연락도 없잖아.” 이번에는 침묵이 조금 길었다. 노향은 우식의 옆얼굴을 봤다. 예전 같으면 마음이 아팠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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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빈집 담장 아래 핀 꽃

며칠 뒤, 아침부터 봄비가 한차례 지나갔다. 논두렁의 흙은 짙게 젖어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어린 벼 냄새와 축축한 풀냄새가 마을 길을 따라 번졌다. 우식은 축사 일을 마치고 장화를 벗었다. 춘덕이 여물통을 살피다 말했다. “오늘 오후에는 비 더 온다드라.” 우식이 고개를 들었다. “응.” “사료 창고 문짝도 한번 봐라. 지난번 바람에 덜컹거리더만.” “응.” 춘덕은 아들을 한번 바라보다 더 말하지 않았다. 마당 쪽에서는 예주가 빨래를 걷고 있었다. “우식아! 시내 나갈 거면 두부 좀 사 와.” “응.” “그리고 또 그 언덕이나 쳐다보다 늦지 말고!” 우식의 손이 잠깐 멈췄다. 예주는 혀를 찼다. “내가 말을 말아야제.” 우식은 대꾸하지 않고 트럭 열쇠를 집었다. 시내로 가는 길목, 춘식이네 마트 앞에는 노향이 서 있었다. 손에는 작은 우편 봉투 몇 개가 들려 있었다. 춘식은 가게 밖까지 따라나와 우산 하나를 들이밀고 있었다. “노향아, 이거 가져가.” “나 우산 있어.” “니 거 살 부러졌잖여.” “쓸 만해.” “비 더 온다니께.” 노향이 한숨을 쉬었다. “너 요즘 왜 이렇게 참견이 많아.” 춘식이 목덜미를 긁었다. “좋아서 그러지.” 말이 떨어진 뒤 둘 다 멈췄다. 노향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춘식 역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알아챈 얼굴이었다. “뭐?” “아니, 그게.” 춘식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니가 좋다는 게 아니라, 챙기는 게 좋다고.” 노향이 피식 웃었다. “그게 더 이상해.” 그때 트럭이 앞에 멈췄다. 우식이 창문을 내렸다. “탈 거야?” 노향이 고개를 저었다. “우체국 금방이야.” 춘식은 괜히 우식에게 눈을 흘겼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우식은 무슨 말인지 관심도 없다는 듯 다시 앞을 봤다. 마트를 지나 언덕길로 접어드는 순간,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천천히 앞유리를 쓸었다. 그리고 우식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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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새벽 연기 사이로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좁은 방 안을 요란하게 울렸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늦은 오후 볕이 흐트러진 이불 위에 길게 번졌다.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다시 침대로 끌려온 햇살의 흰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오빠, 하… 우리 출근….” 숨에 섞인 목소리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진성은 햇살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이마를 맞댔다. “알아.” “알면 좀….” “지금은 말고.” 짧게 떨어진 말에 햇살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려다 다시 숨을 삼켰다. 두 팔이 진성의 목을 더 깊게 감쌌다. 양다리도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진성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출근하자는 애가.” “누가 먼저 그랬는데.” “너.” “미쳤어?” 햇살이 그의 어깨를 툭 쳤지만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진성은 대답 대신 햇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어진 입맞춤은 길었고, 서로의 숨이 가까이 섞였다. 방 안에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이불이 움직이는 소리만 한동안 이어졌다. 얼마 뒤. 흐트러졌던 숨이 겨우 잦아들었다. 햇살은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진성의 품 안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얇은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린 채 그의 팔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진성이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찰칵. 라이터 불꽃이 잠깐 켜졌다. 햇살은 진성이 한 모금 빨기도 전에 담배를 뺏어 자기 입에 물었다. “야.” “한 모금만.” “네 거 있잖아.” “오빠 거가 맛있어.” 진성이 기가 막힌 듯 바라봤다. 햇살은 태연하게 연기를 내뿜었다. “왜.” “내놔.” “싫어.” 진성이 손을 뻗자 햇살은 담배를 든 손을 반대쪽으로 쭉 뻗으며 몸을 피했다. “못 뺏지?” “오햇살.” 낮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햇살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알았어.” 담배를 돌려주려다 다시 한 모금 빨았다. 진성이 한숨을 쉬었다. “너 진짜.” “좋아하잖아.” 이번에는 진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햇살은 그 침묵이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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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늦은 출근길 끝에서

앨리의 네온사인이 막 켜질 무렵이었다. 검은 승용차가 건물 앞에 멈추고 햇살이 먼저 문을 열고 내렸다. 평소보다 급하게 묶은 흰 머리가 어깨 아래로 흐트러져 있었고, 입술에는 대충 덧바른 붉은 립이 남아 있었다. 뒤이어 진성이 차에서 내렸다. 둘이 나란히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카운터에 서 있던 장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니들 빨리빨리 안 다녀?” 햇살이 걸음을 멈췄다. 장미의 시선이 햇살을 한번 훑고 곧바로 진성에게 꽂혔다. “햇살은 그렇다 치고, 계진성!” 진성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장미가 팔짱을 꼈다. “가드가 손님보다 늦게 출근해서 어쩌자는 거야?” 햇살이 슬쩍 손을 들었다. “언니, 그게—” “넌 입 다물어.” “왜 나만.” “너는 원래 제멋대로고.” “너무하시네.” 장미가 다시 진성을 노려봤다. “얘가 늦으면 니가 끌고라도 왔어야지.” 진성의 시선이 아주 잠깐 햇살에게 갔다. “못 끌고 왔습니다.” 분장실 앞에 모여 있던 미정과 수지가 동시에 입을 가렸다. 햇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성을 쳐다봤다. “야.” 장미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 못 끌고 왔는데.” 진성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수상했다. 미정이 작게 중얼거렸다. “둘이 같이 사는 사람들 맞네.” 수지가 옆구리를 찔렀지만 이미 늦었다. 장미가 천천히 햇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햇살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왜 그렇게 봐요.” “너 목.” 햇살의 손이 반사적으로 목덜미에 올라갔다. 진성이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미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아이고, 내가 미쳐.” 햇살이 얼른 머리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일단 출근은 했잖아요.” “한 시간 늦게!” “정확히는 오십이 분.” “오햇살.” “네.” 장미가 손가락으로 분장실을 가리켰다. “십 분 안에 준비해.” “네, 마담님.” 햇살은 냉큼 안으로 도망갔다. 문이 닫히자 직원들 웃음소리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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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닫힌 문 너머의 온도

방 안에는 독한 양주 냄새와 짙은 향수가 뒤섞여 있었다. 햇살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잔에 얼음을 넣고 술을 따랐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처음부터 술보다 햇살을 더 오래 보고 있었다. “오늘도 예쁘네.” “오늘만요?” 햇살이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잔을 받았다. “말도 잘해.” “그래야 돈 벌죠.” 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햇살이 고개를 조금 돌리는 순간 길게 늘어진 흰 머리카락이 어깨 뒤로 넘어갔다. 남자의 시선이 목덜미에 멈췄다. 옅게 남은 붉은 자국.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뭐야.” 햇살의 손이 잠깐 멈췄다. “뭐가요.” 남자가 손가락으로 자기 목을 가리켰다. “남자친구?” 햇살은 대답 대신 술잔을 들었다. “아님 다른 손님?” 입가에 걸렸던 웃음이 아주 조금 굳었다. 남자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 듯 몸을 기대왔다. “오늘 내가 덮어줘야겠네.” 햇살은 잔을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경쟁심 있어요?” “남자가 원래 그렇지.” “피곤하게 사시네.” 말은 능글맞았지만 햇살은 머리카락을 앞으로 끌어당겨 목을 가렸다. 남자는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문밖 복도. 진성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자리였다. 햇살이 들어간 방문. 장미가 전화를 끊으며 진성을 흘겨봤다. “또.” 진성이 고개를 돌렸다. “뭘요.” “눈.” “일하는 중입니다.” “문 뚫리겠다.” 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지. 가게에서는 선 지키라고.” “알아요.” “아는 놈 표정이 왜 저래.” 진성이 턱을 한번 문질렀다. 그때 닫힌 문 안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곧 남자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잠시 뒤, 침대가 움직이는 둔탁한 소리가 벽 너머로 희미하게 이어졌다. 진성의 턱이 굳었다. 장미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방 안에서는 햇살의 짧게 끊긴 숨소리와 남자의 거친 호흡이 간간이 새어나왔다. 진성의 손이 주머니 안에서 천천히 주먹으로 말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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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식은 도시락 사이의 입맞춤

분장실 안은 잠시 조용했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방에 들어갔다. 햇살은 흐트러진 머리를 빗어 내리다 손목을 한번 내려다봤다. 아까 진성이 잡았던 자리였다. 자국이 남을 만큼 세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진성이 들어왔다. 한 손에는 검은 보온 가방이 들려 있었다. “뭐야.” “밥.” 진성이 테이블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자 도시락통 두 개가 나왔다. 계란말이와 볶은 김치, 장조림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햇살이 눈을 깜빡였다. “이거 오빠가 했어?” “아니.” “그럴 줄 알았어.” “아침에 샀어.” 햇살은 피식 웃었다. “근데 왜 이제 줘.” “먹을 시간 없었잖아.” 진성은 도시락을 햇살 쪽으로 밀었다. “먹어.” 햇살은 젓가락을 들었다가 멈췄다. 진성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오빠는?” “됐어.” “같이 먹자. 오빠도 안 먹었잖아.” “안 배고파.” 햇살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화났어?” 대답이 없었다. 햇살은 몸을 돌려 진성을 올려다봤다. “나한테?” “아니.” “거짓말.”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그럼 아까 왜 그렇게 잡았는데.” 진성의 눈이 햇살 손목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벽에서 등을 뗐다. “미안해.” “보기 싫었어.” “뭐가.” “다.” 햇살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빠.” “알아. 네 일인 거.” “그것만?” “내가 선 넘은 것도.” 햇살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알면 됐어.” 그녀는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진성 입 앞으로 내밀었다. “먹어.” “너 먹어.” “입 벌려.” 진성이 가만히 쳐다봤다. “빨리.” 결국 입을 벌렸다. 햇살은 계란말이를 넣어주고 웃었다. “잘하네.” “애 취급하지 마.” “오빠가 맨날 나한테 하잖아.” 진성이 옆 의자를 끌어 앉았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복도에서는 음악이 웅웅 울렸고, 멀리서 장미가 누군가를 혼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햇살은 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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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두 줄 사이에 머문 아침

몇 달이 흘렀다. 늦은 아침, 창문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거실 바닥을 길게 덮고 있었다. 진성은 소파에 앉아 셔츠 소매를 걷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일한 탓에 눈가에는 아직 피곤이 남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반쯤 마신 커피와 담배갑이 놓여 있었다.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오빠.” 진성이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맨발로 서 있었다. 평소라면 나오자마자 뭐라도 한마디 붙였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한 손은 등 뒤에 숨겨져 있었다. “왜.” “이거 봐.” 햇살이 손을 내밀었다. 작은 임신 테스트기였다. 진성의 시선이 그 위에 멈췄다. 두 줄.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햇살은 오히려 눈을 반짝였다. “우리 아이 생겼대.” 진성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있었다. 햇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 “싫어?” 그제야 진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햇살 앞까지 다가온 진성이 테스트기를 다시 한번 내려다봤다. “확실해?” “두 번 했어.” 햇살이 등 뒤에서 하나를 더 꺼냈다. “이것도 두 줄.” 진성의 입술 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햇살은 그 표정을 보자마자 웃었다. “좋지?” “응.” “그럼 좀 웃어봐.” 진성은 말없이 햇살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햇살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 답답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 두 팔은 허리를 감쌌다. 진성의 손이 햇살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병원 가자.” “오늘?” “응.” “출근은?” “안 가.” 햇살이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오빠는 가야지.” “너랑 병원 가.” “과보호 시작했네.” 진성은 대답 대신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햇살은 기분 좋은 듯 웃다가 테이블 위 담배갑을 발견했다. 곧장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거.” 진성이 눈을 내렸다. “뭐.” “이제 밖에서 펴.” “알아.” “집에서는 절대 안 돼.” “응.” 햇살은 자기 담배갑도 화장대 위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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