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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햇살이 머문 소나무: Chapter 61 - Chapter 70

84 Chapters

제61화. 들꽃을 쥔 채, 보내는 길

장례를 마친 아침은 이상할 만큼 맑았다. 밤새 내리던 비도 없었다. 하늘은 투명했고, 바람은 가볍게 불었다. 햇살은 검은 옷차림 그대로 작은 유골함 앞에 서 있었다. 어제까지 영정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엄마가 이제는 두 손으로 안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햇살은 오른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 안에는 나무 들꽃이 있었다. 몇 해 전 우식이 직접 깎아준 꽃. 갈라진 줄기를 떠나기 전날 다시 묶어준 갈색 매듭이 손바닥에 깊게 눌렸다. 태만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 있었다. 밤새 제대로 잠들지 못한 얼굴이었다. “햇살아.” 대답은 없었다. “가자.” 햇살은 유골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디로.” “엄마 모실 곳으로.”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에서도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건물들이 지나갔다. 햇살은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시골로 내려가던 길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엄마와 처음 그 마을로 갔던 날이 떠올랐다. 빛나는 운전석 옆에서 자꾸 햇살에게 물었다. 멀미 안 나니. 배 안 고파. 조금만 가면 도착해. 그때 햇살은 창밖 풍경이 신기해서 대답도 대충 했다. 이제는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었다. 햇살은 손안의 나무 꽃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모시는 절차가 끝날 때까지도 울지 않았다. 태만은 그런 햇살을 몇 번이나 바라봤지만 가까이 가지 못했다. 작은 함이 자리를 잡고 문이 닫히는 순간. 햇살의 입술이 처음으로 떨렸다. “엄마.”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이미 닫힌 문에 손바닥을 대는 대신 주먹만 쥐었다. “나 왔어.” 대답은 없었다. “이번에는 안 갔어.” 숨이 한번 꺾였다. “나 여기 있어.”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러니까 엄마도 있었으면 됐잖아.” 태만이 눈을 감았다. 햇살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 때문에 간 거 아니지?” 말끝이 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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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식어버린 밥상 앞에서

빛나를 보낸 지 한 달이 지났다. 서울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햇살은 여전히 그 소리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 교실, 새 담임, 낯선 얼굴들. 하얀 머리와 서로 다른 눈동자는 어디서든 시선을 끌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고, 며칠 지나자 수군거림이 됐다. “진짜 렌즈 아니래.” “머리도 원래 저렇다던데.” 햇살은 들리지 않는 척했다. 누가 말을 걸어도 짧게 대답했고, 점심시간이면 혼자 미술실 뒤 계단에 앉았다. 스케치북은 늘 들고 다녔지만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연필을 잡으면 엄마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그다음은 우식이었다. 소나무 아래 앉아 있던 얼굴. 가지 마. 그 두 글자가 자꾸 생각났다. 수업이 끝나도 곧장 집으로 가지 않았다. 버스를 몇 정거장 더 타고 내려 낯선 골목을 걷거나, 강변 벤치에 앉아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태만에게는 학교 자율학습이라고 둘러댔다. 그날도 밤 아홉 시가 가까워서야 집에 들어왔다. 현관 불이 켜져 있었다. 태만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햇살 몫의 밥과 국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학교.” “학교에 확인했어.” 햇살의 손이 신발끈 위에서 멈췄다. “그럼 알겠네.” “햇살아.” “피곤해. 올라갈래.” 태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부터 먹어.” 햇살이 웃었다. 짧고 메마른 웃음이었다. “아빠는 밥이 넘어가?” 태만의 얼굴이 굳었다. 햇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엄마 죽은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집 안이 조용해졌다. 주방 쪽에 있던 사람도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했다. 태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도 먹어야 하니까.” “난 안 배고파.” “며칠째 제대로 안 먹잖아.” “내가 굶든 말든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인데.” 태만의 턱이 굳었다. “상관있어.” “왜?” 햇살이 한 걸음 다가섰다. “엄마 살아 있을 때도 그렇게 상관 좀 쓰지 그랬어.” “그만해.” “왜. 듣기 싫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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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닫힌 문 너머의 오후

며칠 뒤, 태만이 회사로 나간 오후였다. 햇살은 학교도 가지 않았다. 침대에 기대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있었지만 종이는 하얀 채였다. 몇 번이나 연필을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하다 결국 창밖만 바라봤다. 그때 아래층에서 낯선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진주의 오빠였다. 오랜만에 동생을 보러 왔다며 웃는 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이어졌다. 햇살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문을 잠그려고 몸을 일으킨 순간 노크 소리가 났다. 똑똑. “누구세요.” 대답 대신 문손잡이가 내려갔다. 잠그기 전이었다. 문이 열렸다. 중년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햇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하세요.” 남자의 시선이 햇살의 흰 머리에서 얼굴까지 천천히 내려왔다. 불쾌한 눈빛이었다. “네가 그 애구나.” 햇살은 뒷걸음질 쳤다. “나가세요.” 남자는 문을 닫았다. 찰칵. 햇살의 얼굴이 굳었다. “문 열어요.” “잠깐 얘기 좀 하지.” “할 얘기 없어요.” 햇살이 문 쪽으로 움직이려 했지만 남자가 앞을 막았다. “비켜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남자는 비키지 않았다. 문밖 복도는 조용했다. 햇살의 손이 문고리를 향했다. 그 뒤로 방 안에서 둔탁한 소리가 한 번 났다.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아주 짧은 숨 막힌 신음.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작은 울음이 새어 나왔다. “싫어요.” 목소리는 너무 작았다. 문밖까지 닿았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햇살은 알지 못했다. 창밖의 햇빛이 조금씩 기울었다. 한참 뒤에야 방문이 열렸다. 진주의 오빠가 먼저 나왔다. 셔츠 소매를 천천히 정리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복도를 걸었다. 계단 아래에는 진주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진주의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문 안쪽. 햇살은 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흰 머리카락은 엉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두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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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밤

그날 이후 햇살은 방문을 잠그고 자는 버릇이 더 심해졌다. 의자를 문 아래에 받쳐놓고, 손잡이가 제대로 잠겼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래도 소용없는 날이 있었다. 진주의 오빠는 진주가 집에 있든 없든 아무렇지 않게 찾아왔다. 현관에서 들리는 낯선 구두 소리. 계단을 오르는 느린 발걸음. 그리고 방문 앞에서 멈추는 기척. 햇살은 그 소리만 들어도 손끝부터 차가워졌다. 연필을 쥐고 있다가도 손에서 힘이 빠졌고, 책상 아래로 발을 끌어당겼다. 똑똑. 노크가 들리면 숨부터 멎었다. “열어.” 햇살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문고리가 돌아갔고, 어떤 날은 한참 문밖에 서 있다가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 차이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끔찍했다. 학교에 가는 날도 줄었다. 집에 있으면 무서웠고, 학교에 가도 사람들 시선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가지 않았다. 버스를 아무 데나 타고 종점까지 가거나, 강변 벤치에 앉아 밤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태만은 그런 햇살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 결석했어?” 햇살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에 서 있었다. “응.” “왜.” “가기 싫어서.” “이유가 그게 다야?” 햇살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만의 한숨이 길어졌다. “햇살아. 아빠도 지친다.” 그 말이 가슴 한가운데 박혔다. 햇살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야 했다. 지금 말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빠.” 태만이 고개를 들었다. “응.” “나 사실—” “햇살이.” 진주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햇살의 얼굴이 굳었다. 진주는 계단 난간에 기대 선 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태만 씨 피곤해 보여요. 얘기는 나중에 하지 그래요?” 태만은 미간을 누르며 소파에 앉았다. “무슨 말 하려고 했어.” 햇살은 진주를 봤다. 진주의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아니야.” “확실해?” “응.” 햇살은 그대로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닫으려는데 진주의 손이 문 사이로 들어왔다.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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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불빛 아래 닫힌 문

햇살은 새벽이 오기 전에 집을 나왔다. 가져온 건 많지 않았다. 옷 몇 벌과 스케치북, 얼마 되지 않는 현금. 그리고 우식이 만들어준 나무 들꽃. 여행가방 하나를 끌고 대문을 나설 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엄마도 잃었다. 아빠와는 같은 집에 있으면서도 점점 멀어졌다. 이제 누구에게도 기대고 싶지 않았다. 햇살은 며칠 동안 값싼 숙소를 옮겨 다녔다. 돈은 빠르게 줄었다.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그림 도구 몇 개를 팔았고, 마지막까지 남겨둔 비싼 붓마저 중고 가게에 넘겼다. 나무 들꽃만은 팔지 않았다. 주머니 안쪽에 넣고 다녔다. 일을 구해야 했다. 무슨 일이든 상관없었다. 딱 하나.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래야 누구 손도 잡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번화가 골목에서 구인 전단 하나를 봤다. 고수익. 당일 지급. 초보 가능. 술자리에서 손님들 말상대만 하면 된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햇살은 그 문구를 오래 바라봤다. 그리고 네온사인이 켜진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안에서는 향수와 술 냄새가 뒤섞여 올라왔다. 붉은 소파에 앉아 있던 여자가 햇살을 보는 순간 천천히 일어났다. 장미라고 불리는 마담이었다. 장미의 시선이 햇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새하얀 긴 머리. 하얀 눈썹. 한쪽은 황금빛, 다른 한쪽은 에메랄드빛인 눈. 장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세상에.” 햇살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굳혔다. 장미가 한 바퀴 돌아보듯 햇살을 살폈다. “상품 좋네.”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햇살은 가방끈을 움켜쥐었다. “얼마 벌 수 있어요?” 장미의 웃음이 깊어졌다. “열심히 하면 많이 벌지.” “술만 따르면 된다면서요.” “그럼.” 장미는 아무렇지도 않게 햇살의 어깨를 두드렸다. 햇살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장미는 그 반응을 보고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손님 비위 좀 맞추고, 웃어주고. 처음에는 다 그래.” “오늘부터 할 수 있어요?” “급하네.” “돈이 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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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불 꺼진 방의 들꽃

문이 닫힌 뒤에도 한동안 웃음소리가 복도에 남아 있었다. 멀어지는 발소리. 누군가 장미를 부르는 목소리. 잔과 병이 부딪치는 소리까지 하나씩 사라지고 나서야 방 안은 조용해졌다. 햇살은 침대 끝에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천장의 희미한 조명이 눈을 아프게 했다. 팔과 어깨, 드러난 다리 곳곳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옷은 흐트러져 있었고, 손끝에는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방금 전의 공기가 다시 달라붙는 것 같았다. 햇살은 떨리는 손으로 옷깃부터 끌어당겼다. 단추를 하나 채우려다 놓쳤다. 다시. 또다시. 몇 번을 실패한 끝에 겨우 손을 내렸다.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귀 뒤로 스며들었다. 소리 내 울고 싶지 않았다. 밖에서 누군가 듣고 다시 문을 열까 봐 무서웠다. 햇살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가방으로 향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을 뻗는 거리조차 너무 멀었다. 겨우 가방을 끌어당겨 안을 뒤졌다. 손끝에 단단한 것이 닿았다. 나무 들꽃. 햇살은 그것을 꺼내자마자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갈색 매듭이 손바닥 깊숙이 눌렸다. 우식이 떠나기 전날 다시 묶어준 자리였다. 그걸 보는 순간 참았던 숨이 무너졌다. “우식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햇살은 꽃을 가슴 가까이 끌어안았다. “나 여기 진짜 싫어.” 울음이 목에 걸렸다. “진짜 싫어…….” 눈을 감자 농장의 풍경이 떠올랐다. 여름 볕에 달궈진 평상. 볏짚 냄새. 축사에서 들리던 소 울음소리. 밥 먹으라고 부르던 예주의 목소리. 시끄럽게 떠들던 춘식과 노향. 그리고 늘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우식. 무섭다고 말하지 않아도 문밖에 앉아주던 애. 묻지 않고 기다려주던 애. 햇살은 나무 꽃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나 그냥 거기 있을걸.” 눈물이 끝없이 흘렀다. “서울 안 올걸.” 그때 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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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웃음 뒤에 감춘 밤

처음 며칠 동안 햇살은 문이 열릴 때마다 몸부터 굳었다. 복도를 지나는 남자 발소리가 가까워지면 손끝이 차가워졌고,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리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 울어봐야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았다. 사흘째 되는 밤, 햇살은 거울 앞에 앉아 한참 자기 얼굴을 바라봤다. 하얀 머리. 하얀 눈썹. 서로 다른 빛의 두 눈. 눈 밑에는 잠을 못 잔 흔적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장미가 화장대를 지나가다 뒤에서 말했다. “오늘도 겁먹은 얼굴 하고 들어갈 거야?” 햇살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미가 붉은 립스틱 하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손님들은 우는 얼굴보다 웃는 얼굴에 돈 써.” 문이 닫혔다. 햇살은 립스틱을 한참 내려다봤다. 그러다 뚜껑을 열었다. 거울 속 입술이 천천히 붉어졌다. 그날부터 햇살은 웃었다. 누가 이름을 물으면 먼저 잔을 부딪쳤고, 짓궂은 농담에도 눈꼬리를 접었다. “왜 그렇게 봐요?” 능글맞게 웃으며 먼저 말을 던지기도 했다. 술도 전보다 잘 마셨다. 목구멍이 타는 독한 술이 넘어가면 오히려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손님이 가까이 붙어도 먼저 몸을 굳히지 않았다. 무서운 마음은 안쪽 깊은 곳에 밀어넣었다. 몸도, 웃음도, 술도 돈이 되는 곳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쉬웠다. 아무 감정도 갖지 않으면 됐다. 앨리 룸싸롱에는 햇살을 찾는 손님이 빠르게 늘었다. 처음에는 소문이었다. 머리카락이 새하얀 여자. 눈 색깔이 양쪽이 다르다는 여자. 사진보다 직접 봐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예약 전화가 몰렸다. “오늘 그 하얀 애 돼요?” “오햇살 찾는데.” “걔 있는 방으로 잡아줘.” 장미는 카운터에 앉아 예약 장부를 넘길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햇살이 복도를 지나가자 장미가 팔을 벌려 불렀다. “우리 보물~” 햇살이 걸음을 멈췄다. “왜요.” “오늘도 방 세 개가 너 찾는다.” “몸은 하나인데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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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쓴 술잔 끝에 닮은 사정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앨리의 마지막 방이 정리됐다. 네온사인이 하나둘 꺼지고, 밤새 시끄럽던 골목도 조금씩 조용해졌다. 햇살은 건물 뒤편 계단에 앉아 구두를 벗었다. 하루 종일 높은 굽에 눌린 발이 욱신거렸다. “야, 나와.” 장미가 코트를 걸친 채 턱짓했다. “어디요.” “술.” “또요?” “오늘은 내가 산다.” 두 사람은 골목 끝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비닐 천막 안에는 어묵 국물 냄새와 소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장미는 익숙하게 소주 한 병과 닭똥집을 주문했다. 햇살은 뜨거운 어묵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여기가 더 맛있네.” “맨날 비싼 양주만 먹으니까 그렇지.” 장미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햇살은 테이블 위 라이터를 집어 불을 붙여줬다. 찰칵. 작은 불꽃이 장미 얼굴을 잠깐 밝혔다. 장미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제 제법 다 컸네.” “원래 컸어요.” “입만.” 햇살이 피식 웃으며 자기 담배도 꺼내 물었다. 장미가 이번에는 라이터를 밀어줬다. 햇살은 불을 붙이고 연기를 천천히 내보냈다. 처음 담배를 배웠을 때는 기침부터 났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장미가 소주잔을 채우며 햇살을 빤히 봤다. “야.” “왜요.” “남들은 솔직히 빚 때문에 팔려오거나,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오는데.” 장미가 잔을 들었다. “넌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냐?” 햇살의 손이 담배를 든 채 잠깐 멈췄다. 평소 같으면 웃어넘겼을 질문이었다. 그런데 새벽의 포장마차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햇살은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엄마 죽었어요.” 장미의 손이 멈췄다. “아빠랑은 사이 안 좋고.” “…….” “같이 살던 집에는 있기 싫은 사람도 있었고.” 햇살은 더 말하지 않았다. 진주의 오빠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혀끝이 굳었다. 장미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햇살은 담배 끝의 재를 털었다. “그냥 돈 많이 벌고 싶었어요.” “왜.” “돈 있으면 누구한테 기대지 않아도 되잖아요.” 말해놓고 햇살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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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네온빛 곁에 남은 온기

그날 이후 장미와 햇살 사이에는 묘하게 말이 많아졌다. 앨리의 밤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복도마다 웃음소리와 음악이 뒤섞였고, 문이 열릴 때마다 향수와 술 냄새가 한꺼번에 흘러나왔다. 햇살은 전처럼 웃었다. 손님 앞에서는 능글맞게 농담을 던졌고, 술잔도 능숙하게 채웠다. 누가 머리색을 묻거나 눈동자를 신기해해도 이제는 먼저 웃어넘겼다. “궁금하면 술 한 병 더 시켜요.” 그 말에 방 안에서는 늘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문이 닫히고 복도로 나오면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 그걸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장미였다. “야, 보물.” 카운터에 앉아 장부를 넘기던 장미가 햇살을 불렀다. “왜요.” “밥 먹었어?” “술 먹었죠.” “그걸 밥이라고 처먹고 사냐?” 장미는 혀를 차며 김밥 한 줄을 햇살 앞으로 밀었다. “먹어.” 햇살은 포장을 뜯으며 피식 웃었다. “마담님도 우식이랑 비슷하네.” 장미의 눈썹이 올라갔다. “우식이가 누군데.” 햇살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냥요.” “그냥 누구.” “시골 친구.” 장미는 햇살 얼굴을 몇 초 바라보다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컵라면 하나에 물을 부었다. “친구 이름 말할 때 표정이 왜 그 모양이냐.” “무슨 표정인데요.” “몰라. 짜증 나.” 햇살이 웃었다. 이제는 장미 앞에서만큼은 웃음을 억지로 만들지 않아도 됐다. 어떤 날은 손님에게 진이 빠져 카운터 안쪽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어떤 날은 아무 말 없이 장미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도 했다. 장미는 처음에는 질색했다. “야, 화장 묻어.” “좀 닦아요.” “비싼 옷이야.” “돈 많잖아요.” “내가 니 때문에 늙는다.” 그러면서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직원들도 금세 눈치챘다. 분장실에서 머리를 말리던 미정이 거울을 보며 말했다. “마담 언니는 햇살이만 좋아해.” 옆에서 화장을 고치던 수지가 바로 맞장구쳤다. “맞아. 나는 지난번에 배고프다니까 물 마시라더니 얘는 김밥도 사주잖아.” 햇살이 소파에 누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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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네온빛이 식지 않은 밤

앨리의 밤은 평소처럼 시끄러웠다. 복도마다 술 냄새와 향수 냄새가 뒤엉켰고, 닫힌 방문 너머에서는 음악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장미는 카운터에서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리 와, 쌍년아!” 복도 안쪽에서 남자의 고함이 터졌다. 장미의 손이 멈췄다. 뒤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내가 이렇게 해달라고 하는데 그게 왜 싫어!” 쿵. 무언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햇살의 목소리. “씨발, 미친 새끼야! 몸 팔지만 나도 사람이거든!!” 장미가 의자를 밀치며 일어났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계진성!” 복도 끝에 서 있던 남자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앨리의 가드, 진성이었다. “햇살이 방 들어가봐. 지금.” 진성은 묻지 않았다. 긴 복도를 단숨에 가로질렀다. 문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는 다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진성이 손잡이를 잡았다. 잠겨 있었다. “문 엽니다.” 대답은 없었다. 안쪽에서 남자가 욕을 내뱉었다. 진성은 그대로 문을 밀어젖혔다. 쾅. 방 안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남자 손님은 몸을 가리지도 않은 채 햇살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었다. 햇살 역시 제대로 몸을 가릴 것 하나 없이 침대 가장자리에 몰려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엉켜 얼굴을 덮었고, 입술 한쪽은 터져 붉은 피가 번져 있었다. 진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손 놓으세요.” 남자가 비웃었다. “넌 또 뭐야?” “놓으라고 했습니다.” “내가 돈 내고 들어왔는데 뭔 상관이야.” 진성은 더 말하지 않았다. 남자의 손목을 잡아 햇살의 머리에서 떼어냈다. 힘을 주는 순간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씨발! 놔!” “옷부터 입으시죠.” 낮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남자가 주먹을 휘두르려 했지만 진성이 몸을 틀어 그대로 막아냈다.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진 순간 햇살은 침대 끝으로 몸을 웅크렸다. 진성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햇살 쪽으로 던졌다. “입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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