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재벌가 막내며느리는 김밥집 딸: Chapter 21 - Chapter 30

40 Chapters

고추 안 넣은 된장찌개

거실은 어두웠다. 창밖 가로등 불빛이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숙희는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손수건만 봤다. 몽이가 소파 위로 올라와 두 사람 사이에 엎드렸다."……너는 언제부터 알았니.""확실하게 안 건 오늘 아침이에요. 그 전엔 조각만 있었어요. 김밥 재료처럼요. 들기름, 꽃송편, 폐백 대추 매듭, 몽이 입가 떡가루, 누름틀. 하나씩 모였는데 말 수가 없었어요. 확실하지 않은 건 김밥에 안 넣는 게 저희 엄마 규칙이라서요.""김밥."숙희가 짧게 웃었다. 소리 없이."너는 뭐든 김밥이구나."숙희가 손수건을 집었다. 손가락으로 «숙» 자를 쓸었다."이거, 열 살 때 내가 수놓은 거다. 엄마 생일 선물로. 떠날 때 도로 달라고 했어. 엄마 거 하나쯤 가져가고 싶어서. 사십 년 넘게 서랍에 넣어 뒀다. 오늘 아침 송편 싸 가지고 나갔는데 담벼락 앞에 두고 와 버렸다."숙희가 그 말을 했다. 조용히. 오래 들고 있던 짐을 바닥에 내려놓듯이."맞다. 떡집 할머니가 우리 엄마다."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리지 말라고 했다. 보리는 숙희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어깨와 어깨가 닿을 만큼."열두 살 봄에 서울 이모 집에 갔다. 이모부가 대학교수였어. 자식이 없었지. 엄마가 공부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이모가 조건을 걸었어. 양녀로 들이겠다고. 떡집 딸이라는 건 잊으라고. 엄마가 그러라고 했다. 나는 엄마 말을 들었어. 너무 잘 들었어.""…….""처음 몇 년은 편지를 썼다. 부치지는 못 했어. 이모가 싫어했거든. 그다음엔 쓰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마치던 해에 태오 아버지 만나고, 스무 살도 안 돼서 해강 며느리가 됐다. 그때는 더 말할 수 없었어. 교수 집 딸로 시집온 사람이 사실은 시장 떡집 딸이라고. 결혼식에 오지 말라고 엄마한테 편지를 보냈다. 딱 한 줄. 그게 마지막 편지였다.""그래서 저 처음 봤을 때 그렇게 엄하게 하셨어요? 가게 정리하라고, 친정이랑 거리 두라고. 그거 이모님이 어머님한테 하셨던 말이죠?"숙희의 눈이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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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옆구리엔 김 한 장 더

통보문 사건 이후 솔내시장은 두 패로 나뉘었다.한쪽은 순옥 여사 패. "안 나간다!" 파. 곽 사장, 정육점 사장, 순대 골목 며느님 남편이 여기 들었다.다른 한쪽은 민 여사 패. "보상이나 잘 받자" 파. 목소리는 작았지만 숫자는 비슷했다.그리고 어느 패에도 안 든 사람이 둘 있었다. 떡집 할머니는 아무 말도 안 했다. 태식이는 양쪽에 다 소식을 날랐다. 솔내 속보는 중립이다.보리는 그 사이에서 매일 새벽 백 줄을 쌌다. 백이십 줄이던 게 백 줄로 줄었다. 손님이 준 게 아니었다. 보리가 기운이 줄었다.―시월 첫 일요일 밤. 신혼집 부엌."보리야. 나 김밥 싸는 거 가르쳐 줘."태오가 앞치마를 두르고 나타났다. 노란 앞치마였다. 가슴에 «순옥이네». 보리 여벌이었다. 어깨가 꽉 끼었다."갑자기 왜요?""네가 요즘 기운이 없어. 김밥 싸는 사람 기운 없으면 김밥 먹는 사람이 싸 줘야지."보리가 웃었다. 오랜만이었다.조리대에 재료를 펼쳤다. 김 한 장, 밥 한 주걱, 시금치, 당근, 지단, 어묵, 햄, 우엉 두 줄."밥은 얇게 펴요. 김 위쪽 삼분의 일은 비우고요. 그래야 말았을 때 붙어요."태오가 밥을 폈다. 두꺼웠다. 김 끝까지 꽉 채웠다."재료는 가지런히. 가운데에서 조금 아래로."태오가 재료를 올렸다. 가지런하지 않았다. 우엉이 세 줄 들어갔다. 욕심이었다."이제 말아요. 김발로 잡고, 앞으로 밀면서 꾹."태오가 말았다. 꾹 눌렀다. 너무 꾹.옆구리가 터졌다. 시금치가 탈출했다. 우엉 한 줄이 조리대 위로 굴러떨어졌다."…….""……."해강유통 신사업본부장의 첫 김밥은 그렇게 옆구리가 터졌다. 태오가 왼쪽 귀를 만졌다. 귀가 새빨갰다."망했다.""안 망했어요."보리가 김 한 장을 더 꺼냈다. 반으로 잘랐다. 터진 옆구리 위에 덧대고 김발로 살살 다시 말았다. 물 묻힌 손끝으로 이음새를 눌렀다. 옆구리가 붙었다. 모양은 좀 통통했지만 멀쩡한 김밥이 됐다."김밥은 옆구리 터지면 김 한 장 더 대면 돼요. 버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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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백 포기

김장 전날 밤 열 시. 송림동 본가 뒷마당.오 여사와 혜란이 배추를 절이고 있었다. 반으로 가른 배추 백 포기에 굵은 소금을 켜켜이 뿌리는 일. 삼십 년 동안 둘이서 해 온 일이다. 말은 거의 없었다. 소금 뿌리는 소리만."오 여사.""네, 큰어머님.""새아기는 김장 할 줄 알까요."오 여사가 소금 뿌리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김밥집 딸이잖아요. 김장은 시장 골목 전체가 같이 해요. 순옥이네 사장님이 해마다 이백 포기 하신대요. 곽씨네 반찬 가게 뒷마당에서.""……이백."혜란이 배추 한 포기를 뒤집었다. 소금이 사락 떨어졌다."우리 집은 칠십 포기였죠, 작년에.""네.""올해 백 포기라고 한 건……."혜란이 말을 멈췄다. 오 여사는 뒷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삼십 년이면 뒷말 없이도 안다. 새아기가 오니까 늘린 거였다. 해 보라고. 아니면, 같이 해 보자고. 혜란 본인도 어느 쪽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큰어머님. 소금 그쪽 너무 많이 뿌리셨어요.""……아, 그래요?"배추 한 포기가 다른 배추보다 짜게 절여졌다. 다음 날 그 배추는 보리 손에 들어간다. 그리고 보리는 젓갈을 더 넣자고 말하게 된다. 소금 한 줌이 하는 일이 이렇게 크다.―십일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두 시 반. 송림동 본가 뒷마당.배추 백 포기가 누워 있었다. 전날 밤 오 여사와 혜란이 소금에 절여 둔 배추였다. 절인 배추가 커다란 고무 대야 여섯 개에 나눠 담겨 있었다. 대야 옆으로 파란 비닐 방수포가 깔렸다. 재벌가 뒷마당이 오늘만큼은 시장 김장 골목이었다.보리가 가게를 닫고 달려왔을 때 예나가 대야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매고."동서, 왔어? 자."예나가 고무장갑 한 켤레를 내밀었다. 분홍색이었다. 손목에 작은 꽃무늬."형님 거예요?""내 여벌. 동서 손 크기 몰라서 큰 걸로 샀어."보리가 끼워 봤다. 딱 맞았다. 김밥 마는 손은 마디가 굵다. 예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공룡 김밥 싸는 걸 옆에서 봤으니까."형님, 제 손 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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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말이 두 줄

"……응. 요리사 옷이야."태민이 겨우 대답했다. 목소리가 설명회 단상에서보다 작았다.뒷마당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배추 백 포기를 끝낸 사람들이 조리복 한 벌 앞에서 굳어 있었다. 정훈이 수육 접시를 평상에 내려놓았다. 소리가 컸다."태민아. 그게 뭐냐.""아버지, 그게……."태민이 말을 잇지 못했다. 혜란은 고무장갑을 낀 채 아들 얼굴만 봤다. 예나가 하율을 끌어당겼다. 하율은 조리복을 놓지 않았다.그때 보리가 분홍 고무장갑을 벗었다. 빨간 머리끈을 조였다. 그리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큰아버님, 그거 제 탓이에요."모두가 보리를 봤다. 태민도."새벽상에 반찬을 더 넣고 싶어서요. 계란말이 같은 거요. 근데 제가 김밥 말고는 잘 몰라서, 아주버님께 좀 도와달라고 했어요. 아주버님이 제대로 도우시려고 조리 수업까지 들으신 거예요. 해강건설 상무님이 김밥집 반찬 때문에 조리복까지 입으신 거니까, 그건 제가 혼나야 돼요."태오가 김치통을 든 채 보리를 봤다. 입이 살짝 벌어졌다. 반은 거짓말이었다. 반은 앞으로 진짜가 될 말이었다. 김밥집 딸은 말을 먼저 싸고 속을 나중에 채우는 재주도 있다.정훈이 태민을 봤다."……그런 거냐."태민이 보리를 봤다. 보리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곽 사장 지론과 달리 이번 깜빡임은 거짓말이 아니라 신호였다."……네, 아버지."정훈이 한참 아들을 봤다. 그리고 수육 접시를 다시 들었다."회사 일에 지장 주지 마라."그걸로 끝이었다. 혜란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들 조리복을 하율 손에서 받아 곱게 개었다. 개면서 이름표를 오래 봤다. «권태민». 그 아래 «한식조리 야간반». 혜란 손가락이 그 글자를 한 번 쓸었다. 엄마들은 원래 이름표를 오래 본다.―사흘 뒤 새벽 네 시 이십 분. 순옥이네 셔터 앞.태민이 서 있었다. 검은 패딩, 백팩. 백팩에서 칼집 손잡이가 삐죽 나와 있었다."아주버님?""제수씨. 새벽상 계란말이, 진짜 해 보려고. 말이 나왔으니까 진짜로 해야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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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케이크 한 판

아빠는 전화기 너머에서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헛기침을 했다."……있제. 어디 가겄냐.""얼마예요?""세어 봤냐고? 세어 봤제. 백오십육 장. 삼 년에 목요일이 백오십육 번이더라. 한 번도 안 빠졌어, 그 청년. 비 와도, 눈 와도, 명절 끼어도. 명절 목요일엔 가게 문 닫았는디, 셔터에 천 원을 테이프로 붙여 놓고 갔더라."보리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아빠, 그걸 왜 저한테 말 안 했어요?""니가 알면 부담스러울까 봐. 사내가 천 원 붙이고 간 걸 여자가 알면 쓰겄냐."아빠 기준으론 그렇다. 보리 기준으론 아니었다. 보리는 전화를 끊고 한참 앉아 있었다. 셔터에 테이프로 붙인 천 원. 그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태오 생일 당일, 월요일 새벽 세 시. 순옥이네 김밥.보리가 가게 불을 켰다. 평소보다 한 시간 반 일렀다. 조리대 위에 둥근 케이크 틀 하나. 찬이가 어제 제과 재료 가게에서 사 온 거였다."누나, 진짜 김밥으로 케이크를 해?"찬이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오토바이 배달 기사로 새벽 소집됐다."응. 봐 봐."보리가 김밥을 말았다. 기본, 참치, 치즈, 우엉 두 줄. 네 가지를 한 줄씩. 그걸 도톰하게 썰었다. 케이크 틀 바닥에 밥을 얇게 깔고, 김밥 조각을 단면이 위로 오게 빙 둘러 세웠다. 바깥 원은 참치, 안쪽 원은 치즈, 그 안쪽은 기본, 한가운데는 우엉 두 줄.위에 달걀지단을 얇게 부쳐 덮었다. 노란 크림 대신. 지단 위에 김 가루로 글씨를 썼다. 손가락 끝으로 한 자씩.«목요일»"누나, 생일인데 왜 목요일이야?""오늘 월요일이잖아. 그래서."찬이는 이해 못 했다. 괜찮다. 이해할 사람은 따로 있다.마지막으로 꼬다리. 보리가 꼬다리를 하나씩 케이크 가장자리에 꽂았다. 초 대신. 하나, 둘, 셋……. 서른한 개."누나. 초를 꼬다리로 꽂아?""응. 오빠는 삼 년 동안 꼬다리만 먹었어. 오늘은 꼬다리가 오빠 나이를 세는 거야."찬이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말했다."누나. 이거 새벽상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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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지는 냉장고 3번 칸

"위생 점검?"엄마 양순옥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순옥 여사 목소리가 올라가는 건 두 경우뿐이다. 떨이를 외칠 때, 그리고 억울할 때."누가? 누가 신고를 혀? 우리 가게를? 삼십 년 동안 배탈 난 손님 하나 없는 가게를?""익명이래요, 엄마.""익명이면 더 괘씸하제!"엄마가 앞치마를 둘렀다. 걸레를 들었다.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방금 닦은 바닥이었다. 봄에 회장님이 온다고 했을 때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순옥 여사는 긴장하면 바닥을 닦는다.아빠는 계산대 서랍에서 넥타이를 꺼냈다."아빠, 넥타이는 왜요.""구청에서 오신다는디.""위생 점검에 넥타이는 상관없어요.""상관있을 수도 있제. 성의 문제여."넥타이의 네 번째 출전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았다.보리는 조리대 밑 서랍을 열었다. 거기서 두꺼운 공책 여섯 권을 꺼냈다. 표지에 매직으로 연도가 적혀 있었다. 오 년 치."보리야, 그게 뭐여?""온도 기록장이요."―오 년 전. 보리가 스물셋일 때 구청 위생 교육을 받았다. 가게 사장이 아니라 종업원으로. 강사가 말했다. 냉장고 온도는 하루 세 번 적으세요. 재료는 들어온 날짜를 붙이세요. 안 적으면 아무도 믿어 주지 않습니다.교육 받은 사람 서른 명 중에 진짜로 적은 사람은 보리 하나였다. 아마도.그날부터 보리는 적었다. 새벽 네 시 반, 오후 한 시, 문 닫을 때. 냉장고 두 대, 김치냉장고 한 대. 칸마다. 1번 칸 시금치, 2번 칸 달걀, 3번 칸 단무지. 기사님 따로 드리는 단무지는 늘 3번 칸이다. 온도, 시각, 이름 한 글자. «보».엄마는 보리가 매일 뭘 적는지 몰랐다. 알았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엄마 기준에서 냉장고는 차가우면 된다."……이걸 오 년을 적었다고?""네. 하루 세 번이요."엄마가 공책 한 권을 펼쳤다. 칸마다 빽빽한 숫자. 삼 년 전 팔월 십사일 오후 한 시. 2번 칸 4도. «보». 그 아래 작은 글씨. «정전 사십 분. 달걀 한 판 폐기.»"그날 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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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묵 꼬치 두 개

다음 날 아침 아홉 시. 해강그룹 본사 이십팔 층 부회장실.태오가 책상 위에 휴대폰을 올려놨다. 화면엔 찬이 블랙박스 영상이 멈춰 있었다. 검은 패딩, 모자, 목에 걸린 사원증.정훈이 안경을 벗었다.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다시 안경을 썼다. 또 봤다."……우리 개발팀 박 과장이군.""순옥이네만이 아닙니다. 그 주에 솔내시장 가게 네 곳이 익명 신고를 받았습니다. 정육점, 반찬 가게, 떡집. 전부 두 번째 설명회 때 발언한 가게들입니다."정훈 얼굴이 굳었다. 태오는 그 얼굴을 처음 봤다. 큰아버지가 놀라는 얼굴."큰아버지가 시키신 겁니까."태오가 물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정훈이 태오를 봤다. 안경 너머로. 오래."태오야. 나는 숫자를 본다. 사람 약점은 안 본다. 약점 잡아서 이기는 건 장사가 아니다. 네 할아버지가 나한테 제일 먼저 가르친 거다."정훈이 인터폰을 눌렀다."개발팀장, 지금 올라오라고 해."―오 분 뒤. 개발팀장이 부회장실에 들어왔다. 두 차례 설명회 때 태민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다. 영상을 보자마자 얼굴이 하얘졌다."부회장님, 그게…….""설명해.""……사업 일정이 사월입니다. 상인 반발이 계속되면 이주가 늦어집니다. 반발을 주도하는 가게들이 위생에 문제가 있으면, 그게 알려지면 여론이……. 부회장님 사업이 잘되도록…….""내 사업."정훈이 그 말을 따라 했다. 개발팀장이 입을 다물었다."네 말은 내 사업이 잘되도록 시장 김밥집 창고를 새벽에 몰래 찍었다는 거냐. 내 이름으로.""부회장님께 누가 되지 않게 조용히…….""이미 됐다."정훈이 서류 하나를 집어 던지듯 책상 끝으로 밀었다."오늘부로 솔내 사업에서 빠져. 인사팀에 징계 올린다. 박 과장도. 그리고 신고한 가게 네 곳에 회사 이름으로 사과문 보내. 네 이름 말고 회사 이름으로."개발팀장이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정훈이 한참 창밖을 봤다. 태오는 기다렸다. 큰아버지가 뭔가를 말할 것 같았다."……태오야. 떡집도 신고당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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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국은 두 그릇

"너희 집 먼저?"보리가 되물었다.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작년 추석엔 네가 사십 인분 했잖아. 올해 설은 너희 부모님이 먼저야.""오빠. 그러면 큰어머님이…….""큰어머니는 내가 말씀드릴게.""아니에요. 그러면 큰어머님은 오빠한테 지시고 저한테…….""보리야. 이번엔 알바생이 이기는 문제가 아니야. 사장이 정할 문제야."사장이 누군지는 둘 다 알았다. 손목에 노란 고무줄 감은 사람.―설 전 마지막 일요일. 본가 저녁 식탁.태오가 수저를 내려놓고 말했다."할아버지. 올해 설날에 저희는 보리 친정 먼저 다녀오겠습니다. 차례 지내고 바로요. 저녁 전에 다시 오겠습니다."식탁이 조용해졌다. 정훈이 안경 너머로 조카를 봤다. 태희가 포크를 쥔 채 멈췄다. 예나가 숨을 참았다. 하율이 떡갈비를 씹다가 어른들 눈치를 보고 씹기를 멈췄다.혜란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비취 반지. 물빛 스카프."태오야. 우리 집은 설날엔 종일 본가에 있는 게……."혜란이 말을 멈췄다. 관례라는 말이 목에 걸렸다. 요즘 혜란 목엔 걸리는 게 많다. 혜란이 보리를 봤다. 그리고 순옥 여사와 어묵을 먹던 분식집 앞을 떠올렸다."……나는 상관없어요. 근데 아버님이 정하셔야죠."모두가 회장을 봤다. 회장은 떡갈비를 한 점 먹고 있었다. 천천히 씹었다. 삼켰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고무줄을 튕겼다. 탁."사돈댁도 식구다."태오 얼굴이 밝아졌다."그럼 저희 먼저 다녀…….""다 같이 간다."식탁이 얼어붙었다."……네?""차례 끝나면 점심은 사돈댁 가서 먹는다. 다 같이. 떡국은 사돈댁 떡국으로."해강그룹 회장 권영철의 설날 결정. 식구 열두 명 전원 솔내시장 뒤 이층집 방문. 정훈이 안경을 벗었다. 혜란이 물을 쏟을 뻔했다. 태희가 박수를 치려다 참았다. 하율만 신이 나서 소리쳤다."김밥 숙모네 가요? 삼촌 오토바이 있는 데?""그래. 오토바이 있는 데."회장이 대답했다. 하율한테만은 말이 조금 길다.―그날 밤. 친정에 전화가 갔다."엄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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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은 꼬리부터

설날 오후의 솔내시장은 텅 비어 있었다. 셔터가 줄줄이 내려진 골목. 바람에 비닐 차양이 펄럭였다. 대장이 앞장섰다. 회장이 뒤따랐다. 보리가 반 걸음 뒤에서 걸었다.회장은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셔터마다 멈췄다. 곽씨네 반찬, 태식이네 생선, 민그릇, 순대 골목 입구. 셔터에 붙은 «설 연휴 휴무» 종이를 하나하나 읽었다. 글씨가 다 달랐다. 곽 사장 글씨는 크고, 민 여사 글씨는 반듯하고, 태식이 글씨는 삐뚤었다."글씨가 다 다르구나.""네. 가게마다 사장님이 직접 쓰세요.""몰은 글씨가 다 같지."회장은 그 말만 하고 다시 걸었다.시장 입구를 나서자 솔내역 앞이었다. 역 앞 모퉁이에 붕어빵 노점 하나가 문을 열고 있었다. 설날에도. 비닐 천막 안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붕어빵 틀을 돌리고 있었다."붕어빵 먹나.""네. 좋아해요."회장이 노점 앞에 섰다. 지갑을 꺼냈다. 지갑이 낡았다. 가죽이 닳아 반들반들했다."세 마리.""천 원에 세 마리요."회장이 천 원을 냈다. 노란 고무줄로 묶인 지폐 뭉치에서 한 장을 뽑았다. 지갑 안에서도 돈을 고무줄로 묶는 사람. 붕어빵 할아버지가 그걸 보고 웃었다."어르신, 옛날 분이시네. 요즘 돈 고무줄로 묶는 사람 없는데.""옛날 사람이오."붕어빵 세 마리가 종이봉투에 담겼다. 회장이 하나를 보리에게, 하나를 대장에게, 하나를 자기가 들었다. 대장은 붕어빵을 한입에 삼켰다. 회장은 꼬리부터 먹었다."할아버님, 꼬리부터 드세요?""머리부터 먹으면 팥이 먼저 나오지. 꼬리부터 먹으면 팥이 마지막에 나온다. 좋은 건 나중에.""저는 머리부터 먹어요. 좋은 거 먼저요.""그래서 네가 김밥 꼬다리를 파는 거다. 좋은 걸 먼저 주려고."보리는 붕어빵을 들고 멈췄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다.―역 앞 벤치. 회장과 보리가 앉았다. 대장이 발밑에 엎드렸다. 붕어빵 봉투에서 김이 났다.회장이 손목의 노란 고무줄을 뺐다. 손바닥에 올려놨다."이거. 작년 봄에 육십사 년 됐다고 했지. 이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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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매점 바나나 우유

보리는 앞치마도 못 두르고 뛰었다. 빙판길. 두 번 미끄러질 뻔했다. 떡집 뒷마당까지 이십 걸음이 이백 걸음 같았다.뒷마당 시멘트 바닥에 할머니가 누워 있었다. 옆에 떡 상자가 엎어져 있었다. 새벽상에 보낼 꽃송편 상자였다. 송편 몇 개가 얼음 위를 굴러 흩어져 있었다. 찬이가 할머니 옆에 쪼그려 앉아 자기 패딩을 벗어 덮어 주고 있었다. 태식이가 떡집 뒷문을 붙잡고 서 있었다. 얼음 받으러 나왔다가 제일 먼저 발견한 게 태식이였다."할머니!""……보리 왔냐."할머니 눈이 떠 있었다. 목소리도 멀쩡했다. 보리가 숨을 내쉬었다."어디 아프세요? 머리는요?""머리는 멀쩡혀. 허리가 좀……. 아이고."할머니가 몸을 움직이려다 얼굴을 찡그렸다."움직이지 마세요. 구급차 와요.""보리야. 솥.""네?""솥에 불 올려놨어. 꺼. 떡 다 탄다. 그리고 새벽상 송편 서른 개. 오늘 못 보내면 손님들이……."할머니는 허리뼈가 부러져도 떡 걱정이 먼저였다. 칠십 년 떡집 주인의 우선순위다. 보리는 웃음이 날 뻔했다. 울음도 날 뻔했다. 둘 다 참았다."찬아, 솥 불 꺼. 태식아, 새벽상 떡 못 간다고 우진 씨한테 연락해 줘.""우진 씨가 누꼬?""태오 오빠 비서요. 번호 줄게."솔내 속보가 처음으로 재벌가 비서에게 속보를 날렸다.사이렌 소리가 골목으로 들어왔다. 구급대원 두 명이 들것을 들고 뛰어왔다. 할머니가 들것에 실리면서 한 번 더 말했다."떡 상자. 얼음 위에 송편 주워. 버리지 말고. 개들이라도 주게."―솔내병원 응급실. 새벽 여섯 시.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보며 말했다."허리뼈에 금이 갔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대신 삼 주는 입원하셔야 합니다. 누워서 절대 안정.""삼 주요?"할머니가 병상에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아파서 도로 눕혔다."삼 주면 떡을 못 찌잖여.""할머님, 삼 주 동안 떡은 잊으세요.""칠십 년 동안 떡을 잊은 적이 없는디 어떻게 잊어요."의사가 곤란한 얼굴로 보리를 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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