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Chapter 11 - Chapter 20

40 Chapters

11화. 밤글방을 뒤지는 날

마차가 흔들리자 쪽지 끝이 무릎에서 미끄러졌다. 연화는 종이를 붙잡고 밤글방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책상 가까이 놓인 등잔, 벽 앞을 밝히던 등잔. 왕야가 글을 쓰는 동안에는 모두 불이 켜져 있었다.“석영, 왕부에 향로가 있나요?”맞은편에서 노을뿌리 자루를 받치고 있던 석영이 고개를 들었다.“없습니다. 왕야께서 향 냄새를 싫어하셔서요.”“왕야 방에도요?”“예. 손님이 가져온 것도 집사님이 따로 치워 두십니다.”연화는 쪽지를 접어 옷 안에 넣었다. 향로가 없다면 다른 것을 살펴야 했다. 불이 붙는 것, 불 가까이 놓이는 것. 왕야가 오래 머무는 곳부터 확인할 생각이었다.“돌아가면 밤글방을 좀 봐야겠어요.”“왕야께 말씀드리겠습니다.”“제가 직접 말씀드릴게요. 석영은 부엌에서 쓰는 장작을 어디에 두는지 알려 주세요.”석영은 마차 창밖을 살피다가 연화 쪽으로 몸을 돌렸다.“장작까지요?”“음식에 든 게 아니라면, 음식 밖에 있는 것도 봐야죠.”석영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발치의 자루를 옆으로 당겨 연화가 다리를 펼 자리를 만들었다.◑봄 셋째 달 3일 아침, 연화는 밤글방 창을 열었다.밤새 머문 기름 냄새가 바깥 공기와 섞였다. 등잔은 꺼져 있었지만 심지 끝에는 검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왕야는 책상 위의 종이를 거두어 서랍에 넣었다. 연화는 서랍보다 책상 양쪽에 놓인 등잔을 먼저 보았다.“이것도 옮겨도 돼요?”“옮겨.”“책도 조금 비켜 놓을게요.”왕야가 책을 직접 들었다. 연화는 책이 놓여 있던 자리와 벽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먼지가 조금 앉았을 뿐, 타다 남은 물건은 없었다.석영이 문 옆에서 빈 상자를 들고 기다렸다.“향로는 정말 없네요.”“내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혹시 선반 안쪽에 오래된 게 남아 있을 수도 있어서요.”왕야는 선반 아래 문을 열었다. 종이 묶음과 여분의 붓이 들어 있었다. 연화는 가까이 가 냄새를 맡은 뒤 문을 닫았다.창가에는 아직 쓰지 않은 초가 놓여 있었다. 석영이 집어 올리려 하자 연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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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황궁에 드는 날

연화는 숯 자국이 남은 쪽지를 따로 빼지 않았다. 종이 모서리만 맞추고, 오늘 기록을 그 아래에 그대로 넣었다.상자 덮개를 닫기 전에 손을 한 번 더 멈췄다. 누군가 읽었다는 것과 베꼈다는 것은 달랐다. 어디로 보내려고 베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문밖에서 물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왕비님, 불 끄실까요?”앵두의 목소리였다. 연화는 천에 묻은 검은 자국을 상자 밑으로 밀어 두었다.“내가 끌게. 먼저 자.”“내일 아침에 쪽지 정리해 드릴까요?”“당분간은 내가 할게. 앞뒤 기록을 같이 봐야 해서.”문밖이 잠깐 조용해졌다.“네. 물은 문 옆에 뒀어요.”발소리가 멀어진 뒤 연화는 상자를 선반 안쪽으로 옮겼다. 잠금쇠를 달지는 않았다. 대신 덮개가 닫히는 방향과 종이가 놓인 자리를 눈에 담았다.숯연필은 침통 옆에 두었다.◑봄 셋째 달 15일 아침, 왕야는 진료 자리에서 평소보다 늦게 소매를 걷었다.연화는 손목을 받기 전에 얼굴부터 살폈다. 눈 아래가 어둡고, 입술에는 마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앉아 있는 동안에도 손가락을 가볍게 굽혔다 폈다 했다.“어젯밤에 늦게 주무셨어요?”“조금.”“손이 저려서요, 글 때문에요?”“둘 다.”연화는 상 위에 마른 천을 펴고 손을 올리게 했다. 손톱 밑의 푸른빛은 여전했지만 손가락을 펴는 움직임은 전보다 덜 굳었다.잠을 줄인 탓에 치료 뒤 남았던 온기가 오래 가지 못한 듯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가늘게 이어지던 맥이 간간이 약해졌다. 손끝을 눌렀다 놓자 왕야의 엄지가 천 위에서 움직였다.“저린 데가 달라졌어요?”“손끝은 덜하다. 손바닥이 당긴다.”“오늘은 글 쓰는 시간을 줄이세요.”“해야 할 것이 있다.”“그럼 낮에 쓰세요. 밤까지 앉아 계시면 내일도 이 말을 또 하게 돼요.”왕야는 연화가 펼친 천을 내려다보았다.“낮에 쓰겠다.”약곳간 쪽에서 노을뿌리 냄새가 들어왔다. 연화는 왕야가 편히 눕도록 덮개를 정리하고 침통을 열었다. 침끼리 닿는 작은 소리가 났다.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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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황제를 뵙는 날

연화는 손목을 돌리지 않고 마차 발판에 먼저 발을 올렸다. 왕야의 손은 연화가 안으로 들어가 앉은 뒤에야 떨어졌다.문이 닫히자 바깥의 웃음소리도 끊겼다.왕야는 맞은편에 앉았다. 긴 소매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연화는 허리에 달린 침통을 옆으로 돌렸다. 가죽 덮개가 좌석에 닿으며 작게 울렸다.“손 주세요.”왕야가 연화를 보았다.“여기서도?”“마차가 왕부에 닿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보려고요.”왕야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연화는 흔들리는 손목 아래에 접은 천을 받쳤다. 바퀴가 움직이는 동안에는 손끝을 얹지 않고 기다렸다.돌뜰에서부터 빨랐던 숨이 조금씩 길어졌다. 입술의 마른 흔적은 아침보다 짙었다. 연화는 마차가 고른 길에 들어선 뒤 맥을 확인했다.급히 걸은 탓에 몸이 지쳤지만 맥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돌아가시면 바로 쉬세요.”“너도 쉬어.”“저는 숨이 차지 않아요.”왕야가 연화의 빈손을 보았다. 침통 덮개를 오래 쥐었던 자국이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손은 펴고.”연화는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왕야의 손목을 놓은 뒤에도 손바닥이 조금 뻣뻣했다.창밖으로 궁 담장이 지나갔다. 연화는 흰 이끼가 붙어 있던 마른 바위와 채란이 들어 올리던 옷자락을 떠올렸다. 지금 확인한 것은 뜰에 이끼가 있다는 사실 하나였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아직 보지 못했다.왕야가 창을 조금 닫았다. 틈으로 들어오던 바람이 줄었다.“추우세요?”“네 손이 차다.”연화는 무릎 위에 손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침통을 쥐지 않았다.◑봄 셋째 달 16일 아침, 연화가 마른 천을 펼치고 있을 때 노상이 안채로 들어왔다.“황제께서 두 분을 부르십니다.”왕야는 막 소매를 걷으려던 손을 멈췄다.“언제.”“오늘 오전입니다. 대전 옆 방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셨습니다.”연화는 펼친 천의 모서리를 맞췄다. 하루 만에 다시 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제 입었던 옷은 앵두가 먼지를 털어 걸어 둔 상태였다.“답을 보내세요. 진료를 마치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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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선발 명단을 보는 날

연화는 침통을 붙잡았던 손을 풀었다. 마차가 고른 길에 들어서자 가죽 덮개에서 나던 소리도 멎었다.왕야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연화는 왜 무서운지 더 묻지 않았다. 궁에서 나온 사람에게 다시 궁 이야기를 하게 하는 대신, 무릎 위에 내려온 소매를 살폈다.“돌아가시면 약곳간 말고 안채로 가세요.”왕야가 고개를 돌렸다.“살필 것이 남았나.”“쉬실 곳을 말씀드린 거예요.”잠깐 뒤 왕야가 창을 닫았다.“알겠다.”연화는 접은 천을 침통 옆에 놓았다. 마차가 왕부에 닿을 때까지 왕야는 소매 밖으로 손을 꺼내지 않았다.◑여름 첫째 달 5일 아침, 연화는 약곳간 문턱에서 침통의 끈을 고쳐 묶었다.밤사이 벌어진 가죽 틈으로 끈 끝이 빠져나왔다. 다시 끼워 넣어 당기자 덮개 한쪽이 비뚤어졌다. 연화는 손바닥으로 덮개를 눌러 모양을 잡고 안채로 향했다.마루에는 앵두가 가져다 놓은 물이 있었다. 부엌 쪽에서 끓는 소리가 들렸고, 왕야는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늘이 무슨 날인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연화는 천을 펼쳤다. 전생에는 이날 아침 약방 앞에 궁에서 보낸 수레가 섰다. 아버지가 급히 싸 준 옷가지 사이에 어머니의 침통을 넣었다. 돌아와 쓰겠다며 다락에 남겨 둔 쪽지들은 끝내 찾으러 가지 못했다.“온연화.”이름을 부르던 내약원 사람의 목소리가 잠깐 떠올랐다.지금 연화 앞에 놓인 것은 선발 명부가 아니라 왕야의 손이었다.“밤에 깨셨어요?”“한 번.”“손이 저려서요?”“발이 찼다.”연화는 왕야가 앉은 자세부터 보았다. 어깨가 전보다 덜 굽었고, 숨을 들이쉴 때 옷깃이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발이 차서 깼다면 밤에는 아직 몸이 편하지 못했다.소매를 걷자 손톱 밑의 푸른빛이 드러났다. 연화는 손가락을 펴 보게 하고 손끝을 살폈다. 아침 햇빛을 받아도 색은 옅어지지 않았다.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가늘지만 고르게 이어졌다. 손끝을 가볍게 눌렀다가 놓자 왕야가 엄지를 움직였다.“저리세요?”“어제보다 덜하다.”“발도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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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누명을 쓰는 날

연화는 빈 기름통을 들어 바닥에 남은 것을 살폈다. 입구를 기울이자 얇게 고여 있던 기름이 한쪽으로 흘렀다.“옮기지 말고 두시라고 했어요.”노상이 손에 든 심지를 내려놓았다.“밤에 말씀을 전하기 전에 아랫사람이 바깥채에서 가져가 등잔에 부었습니다. 제가 먼저 확인했어야 했는데.”연화는 통을 바로 세웠다. 손잡이에 묻은 기름을 천으로 닦고 그 천은 따로 접었다.“통은 씻지 마세요. 남은 것부터 볼게요.”“등잔에 든 것도 가져올까요?”“왕야가 계신 곳부터요.”노상은 곧 열쇠를 풀어 들었다. 연화는 등을 돌리는 노상을 불렀다.“집사님 손을 의심하는 게 아니에요.”노상이 멈췄다.“왕야가 오래 들이마신 것을 찾는 거예요. 누가 옮겼는지, 어디에 두었는지 알아야 해요.”“예, 왕비님. 들어온 날부터 적어 놓겠습니다.”연화는 빈 통을 바깥채 그늘에 두었다. 통 안쪽에 남은 냄새는 낮의 더운 공기에 섞여 금세 흐려졌다.◑여름 첫째 달 12일 새벽, 안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연화가 눈을 떴다.“왕비님.”앵두의 목소리가 낮았다.“왕야가 물을 드시다가 그릇을 놓치셨어요.”연화는 침통을 집어 들고 나갔다. 잠결에 묶은 끈이 손가락에 걸렸다. 마루를 건너는 동안 왕야의 방에서 물을 닦는 소리가 들렸다.왕야는 침상 끝에 앉아 있었다. 무릎에 천이 놓였고, 바닥에는 깨지지 않은 그릇이 옆으로 누워 있었다.연화는 먼저 왕야의 얼굴을 보았다.입술에 빛이 적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어깨가 조금씩 올라갔다. 어제 저녁에는 없던 움직임이었다.“언제부터 그러셨어요?”“밤부터.”“손이 저려서 놓치셨어요?”왕야가 무릎 위의 손을 폈다.“잡고 있다고 생각했다.”연화는 침통을 내려놓았다. 밤사이 찬 기운이 심해진 듯했지만, 그릇을 놓친 것만으로 짐작을 굳힐 수는 없었다. 왕야의 소매를 걷어 손톱과 손가락 움직임을 살폈다.푸른빛이 전보다 짙었다.손목을 받치자 피부가 차게 닿았다. 연화는 맥이 이어지는 것을 기다렸다. 가늘어진 흐름 사이에 짧은 끊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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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옥문을 여는 날

웃음소리는 옥문 앞에서 멎었다.연화는 무릎 위에 놓은 손을 펴지 않았다. 복도에 비친 등불이 문살 사이로 들어왔다. 소매 끝의 숯 가루가 그 빛에 드러났다.“아이야.”황후는 문을 열게 하지 않았다. 얼굴을 볼 수 없는 자리에서 목소리만 들렸다.“왕야가 많이 아프다지. 네가 들어간 뒤로 더 나빠졌다는데.”연화는 벽에서 등을 떼고 앉았다.“몸에 들어오는 것을 찾고 있었어요. 진료 기록에도 적었고요.”“침으로 살린다더니.”“침을 놓은 뒤에는 숨이 길어졌어요. 그 뒤 다시 나빠졌고요. 두 상태를 따로 보셔야 해요.”문밖에서 옷자락이 움직였다. 황후가 조금 가까이 다가온 듯했다.“왕부 의원들이 그렇게 애를 썼는데, 네 손만 다를까.”연화는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왕야의 손목을 받치던 자리에 손가락을 접었다.“제가 한 처치는 기록에 남아 있어요. 확인하시면 돼요.”“네가 적은 것을 네가 믿으라 하는구나.”“침을 놓기 전과 뒤를 본 사람도 있어요.”황후는 잠시 말이 없었다.연화는 문살 아래로 들어온 빛을 보았다. 밖에서 등불을 든 사람이 팔을 움직이자 바닥의 밝은 자리가 옆으로 밀렸다.“오늘 밤에는 푹 쉬렴. 여기서는 누구 맥도 짚을 필요가 없겠네.”등불이 멀어졌다. 발소리도 차츰 작아졌다.연화는 문 쪽을 보던 눈을 거두었다. 높은 창 아래로 들어온 바람이 목덜미에 닿았다. 안채에서는 지금도 물을 끓이고 있을 터였다. 앵두가 마른 천을 갈고, 석영이 왕야의 등을 받쳐 줄 것이다.연화는 손가락으로 무릎 위에 짧은 선을 그었다.새벽의 숨. 오후의 손끝. 처치 뒤 이어지던 맥.기억해 둘 것은 따로 있었다. 황후가 한 말보다 왕야의 몸에서 확인한 것이 먼저였다.문밖에서 쇠붙이가 부딪쳤다.연화가 고개를 들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옥졸이 복도를 지나며 작은 창을 닫는 소리였다. 연화는 옷깃을 여미고 벽에 다시 등을 댔다.◑여름 첫째 달 13일 아침, 물그릇이 먼저 들어왔다.옥졸은 그릇을 내려놓고 연화의 손을 잠깐 보았다. 밤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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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밤을 새우는 날

석영이 마차 안으로 먼저 올라가 왕야의 등을 받쳤다.연화는 문턱에 발을 올리고도 손목을 놓지 않았다. 왕야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손끝에 닿던 맥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침통을 안쪽에 놓은 옥졸이 쪽지 상자까지 밀어 주었다.“천천히 가 주세요.”마부에게 말을 건넨 뒤 연화는 왕야 곁에 앉았다. 마차 문이 닫히자 대전 마당의 밝은 빛이 가늘게 줄었다.왕야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입가를 닦아 준 천이 벌써 축축했다.“왕야. 왕부로 가고 있어요.”눈꺼풀이 조금 움직였다. 대답은 없었다.연화는 턱 아래로 접힌 옷깃을 펴고 숨을 살폈다. 마차가 돌길을 지날 때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석영이 팔을 바꾸어 더 단단히 받쳤다.“더 빨리 가면 안 됩니까?”“지금은 흔들리지 않는 게 먼저예요.”석영은 창밖으로 내밀려던 손을 거두었다. 연화가 젖은 천을 접는 동안 침통을 무릎 가까이 당겨 주었다.왕야의 손가락이 연화의 소매 끝에 걸려 있었다. 힘을 주어 잡은 것도 아닌데, 마차가 기울어도 떨어지지 않았다.연화는 소매를 빼지 않고 그 손 아래에 마른 천을 받쳤다.◑왕부 문 앞에는 노상과 앵두가 나와 있었다.노상이 마차 안을 보고 입을 벌렸다가 바로 돌아섰다. 열쇠 꾸러미가 허리께에서 부딪쳤다.“안채 문부터 열어라. 이불은 마른 것으로 가져오고.”앵두가 뛰어가자 연화도 마차에서 내렸다. 땅에 발이 닿는 순간 무릎이 잠깐 흔들렸다. 밤새 옥에서 굽히고 있었던 다리였다.석영이 왕야를 받쳐 내리는 동안 연화는 침통과 쪽지 상자를 챙겼다.“침상 곁에 자리를 비워 주세요. 물과 천이 필요해요.”노상은 되묻지 않고 안채로 앞서 갔다.왕야를 방으로 옮긴 뒤 연화는 소매부터 걷었다. 마차 안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던 손등이 드러났다. 손톱 아래 푸른빛은 그대로였고, 손가락 사이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대전에서 쓰러진 뒤에도 몸이 쉬지 못했다. 이제는 밖으로 움직일 힘까지 다 써 버린 듯했다.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짚었다.한참 기다려야 겨우 닿았다.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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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유 소의를 만나는 날

머리에 닿았던 손이 물러난 뒤에도 연화는 눈을 뜨지 않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창가가 밝았다. 엎드린 팔 아래로 옷자락이 눌려 있었고, 어깨에는 누가 걸쳐 준 천이 있었다. 왕야는 눈을 감고 있었다. 숨은 길게 이어졌다.그날부터 왕야는 누워서 진료를 받았다. 연화는 아침과 저녁에 침상 곁에서 맥을 짚고, 밤이 깊으면 석영과 번갈아 자리를 지켰다. 제 방 이불에서 자는 밤이 다시 생긴 것은 사흘이 지난 뒤였다.여름 첫째 달 20일 아침, 방문 밖에서 물그릇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연화는 머리를 짚어 흐트러진 곳을 정리했다. 이불을 걷자 문밖에서 앵두가 물었다.“왕비님, 일어나셨어요?”“응. 왕야는?”“석영 님이 곁에 계세요. 오늘은 앉아 계시겠다고 하셔서요.”연화는 걸쳐 둔 옷을 가져왔다. 창을 열자 밤새 식은 마루 냄새가 들어왔다.물을 마실 때 잠깐 몸을 세우는 것과 스스로 앉아 아침을 맞는 것은 달랐다. 연화는 소매를 여미고 침통을 챙겼다.서쪽 방으로 가니 문이 열려 있었다.왕야는 침상 머리에 기대 앉아 있었다. 석영이 등 뒤의 베개를 고치고, 노상은 작은 상을 들일 자리를 살폈다.“앉으셨네요.”왕야가 고개를 들었다.“그렇다.”“언제부터요?”“방금.”석영이 베개에서 손을 뗐다.“정말 방금입니다. 왕비님 오시기 전에 일어서지는 못하게 했습니다.”연화는 침상 가까이 앉았다. 왕야의 옷깃은 반듯했고 이마에도 땀이 없었다. 말을 하고 난 뒤 어깨가 크게 오르내리지 않았다. 다만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은 소매 밖으로 조금도 내밀지 않고 있었다.몸을 세울 힘은 돌아왔어도 손끝의 냉기는 남아 있을 듯했다.“손을 주세요.”왕야가 소매를 걷었다.손톱 아래 푸른빛은 여전했다. 연화는 먼저 손등을 만지고 손목을 받쳤다. 차가운 손끝과 달리 맥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눕혀 두었을 때보다 조금 빨랐지만, 오래 기다려야 겨우 닿던 밤의 맥과는 달랐다.“어지럽지는 않으세요?”“조금.”석영이 왕야를 보았다. 왕야는 연화에게 시선을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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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앵두가 우는 날

숯연필이 상다리에 부딪히고 바닥으로 굴렀다.앵두는 줍지 않았다. 종이 위에 올려놓은 손을 거두지도 못한 채 연화를 올려다보았다. 입술이 벌어졌지만 뒤따르는 말은 없었다.연화는 문을 닫았다.상 위에는 왕야가 앉아서 진료받은 아침의 기록이 펼쳐져 있었다. 그 옆 종이에는 그 말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손끝의 냉기, 남은 푸른빛. 글씨가 작고 촘촘했다.“누구에게 보내는 거야?”앵두의 손가락이 종이 끝을 구겼다.“왕비님.”“그 종이는 두고 말해.”연화는 침통을 내려놓았다. 유 소의의 기록이 든 쪽지는 소매 안에 그대로 있었다. 상자 뚜껑과 주변 종이를 살펴도 그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앵두가 자리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으려 했다. 연화는 앞에 있던 낮은 의자를 당겼다.“앉아. 문 닫았으니까 밖에서는 안 보여.”“제가 잘못했어요.”“그건 종이를 보고 알았어. 누구한테 보내는지부터 말해.”앵두가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손을 모으려다 손등에 묻은 숯가루를 보고 치마에 문질렀다. 검은 자국이 번졌다.“황후궁에요.”연화는 구겨진 종이를 폈다.“채란에게?”앵두가 고개를 끄덕였다.종이에는 연화가 적지 않은 말도 붙어 있었다. 왕비가 하루에 몇 번 안채에 들어가는지, 왕야가 무엇을 묻는지. 약곳간에 혼자 있는 시간까지 적으려다 만 흔적이 있었다.“언제부터?”“처음 쪽지를 보고 오라고 했을 때는 안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사는 집을 안다고 해서…….”앵두는 손등을 다시 문질렀다.“고향에 혼자 계세요. 제가 보내는 돈으로 지내시는데, 제가 말을 안 들으면 그 돈도 못 받을 거라고 했어요. 어머니를 여기로 데려올 수도 있다고요.”“어머니한테서 온 편지는 있어?”“있어요.”“나중에 가져와. 마지막으로 잘 지내신다고 하신 게 언제인지 보자.”앵두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채란이 정확히 뭐라고 했어?”“왕비님이 무엇을 아는지 알려 달라고 했어요. 침을 어떻게 놓는지보다, 쪽지에 무슨 말을 쓰시는지가 중요하다고요.”연화는 상자 안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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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등잔을 끄는 날

노상은 떨리는 열쇠 꾸러미를 두 손으로 감쌌다.“범씨에게 따로 말을 전할까요?”“늘 오던 대로 오게 해 주세요. 제가 기다린다는 말도 하지 마시고요.”연화는 바닥에 놓인 등잔을 보았다. 기름을 채우지 않은 그릇 안에 검은 심지가 말라 있었다.“남은 기름은 버리지 마세요. 어디에 보관했는지만 알려 주세요.”“예, 왕비님.”노상이 열쇠를 골라 들었다. 익숙한 열쇠를 찾는 데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연화는 기름을 둔 곳과 가져오는 길을 확인했다. 범씨가 왕부에 오면 바깥채에서 짐을 내리고, 노상이 통을 받아 밤글방 뒤편에 보관한다고 했다. 다른 물건을 함께 가져오는 일은 없었다.“이번에는 짐을 마당에 내려놓게 해 주세요.”“제가 받지 않고요?”“함께 받을 거예요.”노상이 고개를 숙였다. 열쇠가 손바닥 안에서 다시 부딪혔다.◑여름 둘째 달 1일 아침, 왕야는 연화가 방에 들어서기 전에 창을 열어 두었다.책은 무릎에 없었다. 상 위에 물잔만 놓여 있었다.연화는 문턱에서 걸음을 늦췄다. 왕야의 얼굴빛은 지난번보다 밝았고, 앉아 있는 어깨도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다만 물잔을 당기는 손가락에는 아직 힘이 부족했다.“밤에 숨은 어떠셨어요?”“깨지 않았다.”“손끝이 저려서 잠드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고요?”“그건 남아 있다.”밤글방을 쓰지 않은 뒤로 숨이 짧아지는 일은 줄었다. 몸에 쌓인 독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연화는 왕야의 손을 받쳤다. 손목 안쪽의 맥은 전보다 힘 있게 닿았다. 차가운 손끝을 살피고, 손을 쥐었다 펴 보게 했다. 손톱 밑에 남은 푸른빛은 그대로였다.“오늘도 치료는 받으셔야 해요.”“기름 상인이 온다며.”“오셔도 제가 하던 일을 끝낸 뒤에 만날 거예요.”왕야가 소매를 걷었다.연화는 침통을 펼쳤다. 가죽 덮개 안에서 침이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났다. 왕야는 연화가 살피기 좋도록 몸을 돌리고 말없이 기다렸다.처치를 마친 뒤에는 앵두가 가져온 천으로 땀을 닦았다. 연화는 물잔을 가까이 놓고 다시 맥을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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