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Chapter 21 - Chapter 30

40 Chapters

21화. 기름을 바꾸는 날

숯연필 끝이 종이에 작은 점을 남겼다.연화는 더 적지 않고 쪽지를 접었다. 접힌 모서리가 어긋나 다시 눌렀다. 왕야는 기다리다가 책상 가장자리에 놓인 침통을 연화 쪽으로 밀어 주었다.“내일 아침에도 안채에 계세요.”“그래.”“밤글방은 더 비워 둘 거예요. 책에도 냄새가 남았는지 살펴야 하고요.”“그렇게 해.”연화는 침통을 들었다. 문까지 걸어가는 동안 등 뒤에서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자 왕야가 등잔 곁에 서 있었다.“불은 제가 끌게요.”“새 기름이다.”“알아요.”아는 것을 자꾸 확인했다. 연화는 침통을 품에 붙이고 문턱을 넘었다. 마루를 내려설 때까지 왕야는 불을 끄지 않았다.◑여름 둘째 달 2일 아침, 연화는 안채 서쪽 방 앞에서 침통의 끈을 풀었다.문은 열려 있었다. 왕야는 침상에 앉아 물잔을 들고 있었다. 연화를 보고 잔을 내려놓았는데, 상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작았다.“잘 주무셨어요?”“그래.”연화는 의자를 당겼다. 평소에는 먼저 얼굴빛을 보고 밤에 깬 적이 있는지 물었다. 오늘은 펴 놓은 천의 주름부터 눌렀다.왕야가 손을 내밀었다.소매 아래 드러난 손목에 시선이 멎었다. 연화는 침통을 내려놓고 그제야 고개를 조금 들었다. 눈 아래 그늘은 옅어졌고, 앉은 자세도 곧았다.“물 드실 때 손끝은 어떠셨어요?”“저렸다.”“잔을 놓칠 것 같지는 않으셨고요?”“아니다.”독을 다시 들이마시지 않았어도 몸에 남은 것은 따로 살펴야 했다. 연화는 손을 받치고 맥을 짚었다. 어제 저녁과 비슷한 힘이 닿았다. 숨을 들이쉴 때 맥이 흐트러지는지도 기다려 보았다.왕야는 움직이지 않았다.연화는 손등을 돌려 손톱을 보고, 손가락을 쥐었다 펴게 했다. 손끝의 냉기는 남아 있었지만 손을 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줄었다.“오늘도 독을 몰아내는 치료를 할게요. 어제 마당에 오래 계셨으니 끝나면 쉬셔야 해요.”“알았다.”침통을 열자 새 가죽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연화는 필요한 것을 챙기며 왕야의 손목만 보았다. 소매를 걷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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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가죽골에 솥을 거는 날

연화는 지도에 놓인 왕야의 손끝을 피해 창고 자리를 표시했다.“돈만 있으면 되는 일은 아니에요. 공방 사람들한테 먼저 물어봐야 해요. 물 길으러 다니는 길을 막으면 솥이 있어도 쓰지 않을 거예요.”“네가 정해.”“빈 창고도 주인이 있을 테고요.”왕야가 벼루 옆의 종이를 당겼다. 짧게 글을 적고 문밖의 석영을 불렀다.“은 300냥을 준비해. 창고는 빼앗지 말고 값을 치러 빌린다.”연화는 숯연필을 내려놓았다.“남는 돈은 따로 적어 둘게요.”“모자라는 것도 적어.”왕야는 지도를 접으려다 멈추고 연화 쪽으로 돌려놓았다. 우물에서 공방으로 이어지는 길에 숯가루가 묻어 있었다.“이건 네가 가져가.”연화는 종이를 접어 쪽지 묶음 앞에 넣었다. 접힌 자리를 손톱으로 눌렀다. 솥을 걸 자리가 생겼다. 이제 그 앞에 사람들을 데려와야 했다.◑여름 둘째 달 10일, 가죽골 우물가에 첫 솥이 도착했다.수레바퀴가 움푹 팬 길에 걸려 기울었다. 석영이 뒤에서 밀고, 공방에서 나온 일꾼들이 양옆을 받쳤다. 솥 안에 들어 있던 빈 바가지가 덜컹거렸다.연화는 지도와 눈앞의 길을 번갈아 보았다. 종이에서는 넉넉해 보였던 우물 옆이 생각보다 좁았다. 물동이를 이고 나온 여자가 수레를 피해 벽에 붙었다.“여기에 두면 안 되겠어요.”석영이 수레 손잡이를 잡은 채 물었다.“조금 더 안쪽으로 옮길까요?”“저 담 아래는 누가 쓰세요?”“공방에서 짐을 잠깐 내려놓습니다.”솥을 받치던 일꾼이 답했다. 손바닥에 눌린 자국이 짙었다.“짐수레는 아침에만 들어옵니다. 솥이 너무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지나갈 수 있어요.”연화는 우물에서 그 자리까지 걸어 보았다. 물동이를 내려놓을 곳도 살폈다. 솥 세 개를 한곳에 붙이지 않고 길을 따라 나누면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지 않을 것 같았다.“짐을 내리는 날에는 미리 알려 주세요. 이쪽 솥은 비워 둘게요.”일꾼은 담 아래의 깨진 나무판을 발로 밀어 치웠다.“우물물이 멀쩡한데 왜 끓입니까?”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연화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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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열꽃이 피는 날

연화는 일꾼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 솥과 떨어진 그늘로 의자를 옮겼다.“여기에 앉아 보세요. 더운 곳에서 일하신 것 때문인지 살펴볼게요.”일꾼은 일어나려다 무릎을 짚었다. 연화는 물잔을 내려놓고 팔을 받쳤다. 가까이에서 들으니 숨 끝에 마른기침이 섞였다.“목도 불편하세요?”“가죽 먼지를 먹어서 그런가 봅니다.”“언제부터요?”“오늘 아침부터 조금요.”연화는 일꾼의 손목을 받쳤다. 맥이 평소보다 빨랐다. 목을 살피고 불편한 곳을 물은 뒤, 깨끗한 물을 가져오게 했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에는 붉은 자국이 없었다.아직은 열의 원인을 가를 수 없었다.“오늘은 일을 쉬세요. 열이 내리는지 제가 다시 볼게요.”일꾼이 공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석영은 묻기도 전에 문 앞으로 걸어갔다.“안에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연화는 빈 창고 문을 열었다. 닦아 둔 바닥에서 마른 나무 냄새가 났다. 일꾼은 문턱 앞에서 멈췄다.“여기서 쉬라는 겁니까?”“집에 아이가 있나요?”“있습니다.”“열이 나는 동안은 이쪽에서 쉬시는 게 좋아요. 식구들한테도 제가 말씀드릴게요.”일꾼은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내려다봤다. 연화는 쓰고 난 천을 담을 바구니를 가져와 곁에 놓았다.◑그 열은 한 차례 가라앉았다.일꾼은 집으로 돌아갔고, 연화가 공방을 돌 때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물도 솥에서 식힌 것만 받아 갔다. 그러다 사흘 전부터 다시 몸이 덥다고 했다.연화는 창고의 자리를 다시 폈다. 이번에는 기침이 더 잦았다.여름 셋째 달 1일 아침, 앵두가 창고 문을 열다 뒤를 돌아봤다.“왕비님, 팔에 뭔가 났어요.”연화는 들고 있던 물통을 내려놓았다.일꾼이 이불 밖으로 팔을 내밀고 있었다. 팔 안쪽에 붉은 반점이 퍼졌다. 처음에는 작은 점으로 보였지만 가까이 가자 가장자리가 갈라진 모양이 드러났다. 목 아래에도 그 자국이 있었다.연화는 창을 더 열었다. 빛이 들어오자 반점이 또렷해졌다.전생에 내약원으로 실려 온 첫 환자에게도 저 자국이 있었다. 가죽골 공방에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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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붓을 놓는 날

연화는 하인이 내민 패를 의자 옆에 놓았다.“지금은 심부름보다 몸을 먼저 볼게요. 옷깃을 조금 내려 주시겠어요?”하인은 손을 들다 기침했다. 땀에 젖은 옷이 목에 붙어 있었다. 연화는 깨끗한 천을 가져와 손에 쥐여 주고, 숨이 고르게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옷깃 아래에도 붉은 반점이 있었다. 첫 환자에게 나타난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열은 언제부터 났어요?”“그제 저녁부터요. 어제는 좀 괜찮아서…….”“오늘도 일하셨나요?”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연화는 얼굴빛과 입술을 살폈다. 가죽골까지 걸어온 탓만으로 보기에는 숨이 거칠었다. 열꽃병이 궁 안까지 들어갔을 수 있었다.손목을 받치자 빠르고 약한 맥이 닿았다. 목의 불편한 곳을 확인하고 물을 삼킬 수 있는지도 보았다. 하인은 물잔을 받아 조금 마신 뒤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돌아가서 말씀만 드리고 오면 안 될까요?”“누구에게 전하면 되는지 알려 주세요. 사람을 보낼게요.”“제가 맡은 심부름이라서요.”연화는 의자 옆의 패를 집어 들었다.“이것도 함께 보내 드릴게요. 빠뜨린 일 없이 전할 테니, 지금은 쉬세요.”하인은 그제야 벽에 기댔던 등을 떼었다.연화는 빈 창고 안에 자리를 펴게 했다. 젖은 옷을 갈아입힐 천을 준비하고, 열을 내리는 처치를 했다. 침통을 여닫는 작은 소리 사이로 하인의 기침이 이어졌다. 연화는 숨이 가빠질 때마다 손을 멈추고 상태를 확인했다.처치를 마친 뒤에는 돌배잎 달인 물을 곁에 두었다.“혼자 일어나지 마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문 쪽으로 불러 주세요.”하인은 이불 끝을 당기며 물었다.“궁에서 왔다고 다른 분들이 싫어하진 않겠죠?”“여기서는 어디서 오셨는지보다 어디가 아픈지가 먼저예요.”연화는 문 앞에 앉아 쪽지를 펼쳤다.『둘째 환자. 내약원 심부름 하인. 열, 붉은 반점, 기침.맥 빠르고 힘 약함. 따로 돌봄. 함께 지낸 사람 확인 필요.』석영이 심부름 패를 받아 들었다.“내약원에 다녀오겠습니다.”“열이 시작된 때와 함께 지낸 사람을 확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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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남문을 지키는 날

연화의 손에 쥐어진 종이 끝이 접혔다.남문 밖을 닫으면 창고에 누운 사람들보다 먼저 물을 나르던 사람들이 멈출 터였다. 연화는 종이를 책상에 펴고 손바닥으로 접힌 곳을 눌렀다.“환자를 따로 두는 것과 사람을 모두 가두는 건 달라요.”왕야가 책상 옆에 놓인 가죽골 지도를 가져왔다.“필요한 것을 말해.”“물과 식사, 깨끗한 천이 계속 들어가야 해요. 열이 나는 사람도 찾아서 돌봐야 하고요. 문을 닫고 알아서 하라고 하면, 아픈 걸 숨길 수밖에 없어요.”연화는 창고가 있는 자리를 짚었다. 숯가루가 손가락에 묻었다.“여기서 돌보는 분들은 이미 병을 얻었어요. 그렇지만 함께 사는 식구들은 아직 아닐 수 있어요. 한집에 묶어 두면 나눠 놓은 보람이 없어져요.”왕야는 지도를 황후의 글 옆에 놓았다.“형님께 가겠다.”“제가 지금까지 적은 것도 가져가세요. 어디서 환자가 왔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있어요.”연화가 쪽지 묶음을 내밀자 왕야는 받기 전에 연화의 손을 보았다. 종이를 쥐었던 자리가 붉었다.“이건 내려놓고.”왕야가 황후의 글을 연화 쪽에서 치웠다. 그 자리에 빈 물잔이 놓였다. 노상은 주전자를 들러 나갔고, 연화는 환자들의 쪽지를 날짜순으로 골랐다.맨 위에는 내약원 하인의 기록을 놓았다.“병은 이미 남문 안으로 들어왔어요. 문을 닫는다고 궁 안의 열이 없어지진 않아요.”왕야가 쪽지의 첫 줄을 읽었다.“그대로 전하겠다.”◑여름 셋째 달 8일 아침, 남문 앞에는 물통을 실은 수레가 멈춰 있었다.연화는 수레 옆에서 창고에 보낼 천을 확인했다. 문을 지키는 병사는 길을 내주지 못한 채 연화의 패만 거듭 보았다.“왕비님인 건 압니다. 다만 명을 어기면 저희도…….”“여기서 기다릴게요. 안에서 나오는 분 중에 열이 나거나 기침이 심한 분이 있으면 제게 알려 주세요.”병사는 패를 돌려주며 고개를 숙였다.수레 뒤에 서 있던 일꾼이 빈 물통을 내려놓았다. 가죽골에 있는 식구에게 물을 가져가려다가 막힌 사람이었다. 뚜껑 아래로 마른 물자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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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태자를 살피는 날

“누가 왕비를 막으라고 했지?”왕야의 물음에 전갈을 가져온 사람이 황궁의 패를 두 손으로 잡았다.“황후께서 내약원 의원들을 모두 부르셨습니다. 왕야만 오시라고…….”“형님은?”“태자궁에 계십니다.”연화는 상에 놓인 침통을 집었다. 왕야가 침통 위에 손을 얹지는 않았다. 대신 전갈을 가져온 사람에게 길을 비키게 했다.“먼저 가서 전해. 내가 간다.”사람이 돌아서자 연화는 침통의 끈을 손목에 걸었다.“열이 언제부터 났는지 알아야 해요. 기침이 달라졌는지도요.”“내가 보고 오겠다.”“반점이 없어도 열꽃병일 수 있어요.”왕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가 창고 쪽을 돌아보는 동안 석영이 마차를 불러 왔다. 안에서는 새 환자가 물을 찾는 소리가 났다.왕야가 연화의 손에 남은 물잔을 보았다.“여기는 네가 있어야 한다.”연화는 침통을 내려놓지 않은 채 왕야를 보았다.“태자 상태를 알려 주세요. 드신 물과 잠든 시간도요. 내약원에서 적은 게 있으면 가져와 주시고요.”“그렇게 하겠다.”왕야가 마차에 오르기 전, 노상에게 연화가 적어 둔 쪽지를 가져오게 했다. 가죽골에서 보인 첫 증상과 돌보는 동안 달라진 것들이었다.“형님께 이것도 보이겠다.”연화는 묶음에서 빈 종이를 빼냈다. 왕야가 가져갈 쪽지의 가장자리를 맞추고 끈을 둘렀다.“제가 필요한 때는 기다리지 마세요.”왕야는 묶음을 받아 품에 넣었다.“너도.”◑여름 셋째 달 12일, 연화는 왕부 마차 안에서 침통을 무릎에 올려놓았다.그동안 왕야는 날마다 궁에 다녀왔고, 연화는 가죽골에서 전해 오는 기록만 읽었다. 오늘 아침 반점이 번졌다는 말에 왕야가 마차를 돌려 연화를 태웠다.왕야가 가져온 태자의 기록에는 열이 내렸다가 다시 오른 흔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붉은 반점이 이제 팔과 목까지 번졌고, 기침 때문에 물을 마시다 멈춘다는 말이 마지막에 적혀 있었다.연화는 그 줄 아래 손가락을 놓았다.“내약원 의원들은 곁에 있나요?”“있다. 공석주도.”“태자께서 원래 기침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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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태자가 웃는 날

연화는 침통을 쥔 왕야의 손을 보았다가 황후에게 시선을 돌렸다.“태자께서 물을 드시고 편히 주무시면 돼요.”“나는 네게 물었어.”“진료를 빚으로 남기지는 않아요.”황후의 손톱이 손등에서 떨어졌다. 문 안쪽에서 태자가 짧게 기침했다. 연화는 그 소리가 멎는 것을 기다린 뒤 다시 말했다.“아직 고비를 넘긴 건 아니에요. 지금은 태자께서 쉬시는 게 먼저예요.”황후가 열린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석주가 침상 곁에서 젖은 천을 거두고 있었다. 태자는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조금 벌리고 숨을 쉬었다.“잘못되면 바로 알려라.”황후는 연화가 아니라 공석주에게 말했다. 공석주가 허리를 숙였다. 황후가 돌아서자 채란이 옷자락을 살피며 뒤를 따랐다.연화는 두 사람이 복도 모퉁이를 지난 뒤에야 손가락을 폈다. 왕야가 들고 있던 침통의 끈을 건넸다. 연화가 받으려 하자 끈만 손바닥에 얹었다.“무거운 건 내가 든다.”“침통은 안 무거워요.”“손은 뻣뻣하잖아.”연화는 끈을 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을 굽힐 때 마디가 조금 당겼다. 왕야가 그 손에 물잔을 다시 쥐여 주었다.“마시고 가.”태자궁 밖에서는 물을 갈아 놓는 소리가 났다. 연화는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왕야는 침통을 든 채 문 옆에서 기다렸다.◑여름 셋째 달 15일 아침, 태자는 연화가 방문을 열기 전에 먼저 말을 걸었다.“오늘은 창문을 조금 열어도 돼요?”침상 곁의 시녀가 창틀에 손을 얹고 연화를 보았다. 연화는 방 안에 들어서며 태자의 얼굴부터 살폈다.입술의 마른 틈이 옅어졌고, 목덜미의 붉은 반점도 전보다 흐렸다. 태자는 베개에 기대 앉아 있었다. 말끝에 기침이 끼어들지 않았다.“밤에는 어떠셨어요?”“기침 때문에 깼는데 다시 잤어요.”시녀가 상 위의 기록을 가져왔다. 연화는 태자의 대답과 기록을 함께 봤다. 물을 마신 뒤 오래 기침한 흔적이 없었다. 열이 다시 크게 오른 때도 적혀 있지 않았다.고비가 지나가는 듯했다. 연화는 종이를 내려놓고 태자 곁에 앉았다.“손을 잠깐 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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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약수를 나누는 날

채란은 연화가 안고 있는 기록 묶음에 시선을 내렸다가 길을 더 비켰다.“태자께서 웃으셨다고 들었습니다.”“지금은 쉬고 계세요.”“황후께도 전해 드리겠습니다.”연화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채란의 옆을 지날 때 침통이 팔 안쪽에 가볍게 닿았다. 왕야가 침통을 받아 들고 연화와 나란히 걸었다.복도 모퉁이를 돌아서자 바깥의 더운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석영이 마차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가죽골에서 물동이를 더 보내 달랍니다. 솥은 있는데 물을 옮길 사람이 모자란답니다.”연화는 품에 안은 기록을 펼쳤다. 물을 마신 뒤 토하지 않았다는 줄 아래로 새 환자의 상태가 적혀 있었다.“빈 물동이가 왕부에 있나요?”“노상에게 물어보겠습니다.”“사람도 함께 보내 주세요. 환자 돌보는 분들이 물까지 나르면 쉬지 못해요.”왕야가 석영에게 말했다.“네가 먼저 가. 나도 간다.”석영이 고개를 숙이고 말고삐를 당겼다. 연화는 기록을 다시 묶었다. 손가락에 감긴 끈을 풀려는데 왕야가 종이 묶음 밑을 받쳤다.“그건 마차 안에서 해.”연화는 손을 빼고 마차에 올랐다. 왕야가 침통과 기록을 무릎 옆에 놓았다. 창밖에서 석영의 말이 먼저 움직였다.◑여름 셋째 달 20일 아침, 가죽골 창고 문 앞에는 빈 그릇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앵두가 그릇을 하나씩 살피며 깨진 것을 옆으로 골라냈다. 안에서는 기침이 이어졌다. 연화는 손을 씻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문 가까이 앉은 여자가 무릎에 천을 덮고 있었다. 천 밖으로 나온 손등에 붉은 반점이 보였다. 어제보다 눈을 뜨는 힘이 부족했고, 입술도 말라 있었다.연화는 곁에 놓인 물그릇부터 봤다. 물이 거의 줄지 않았다.“밤에 물을 드시기 힘드셨어요?”“마시면 속이 올라올 것 같아서요.”“실제로 토하셨어요?”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침이 났다. 연화는 여자가 숨을 고르는 동안 기다렸다가 등을 받친 천이 젖었는지 살폈다.열이 오르는 데다 물을 잘 넘기지 못해 기운이 더 빠진 듯했다. 연화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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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왕비가 쓰러지는 날

왕야는 연화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솥에서 올라온 김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원래 못 짚었나.”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매를 붙잡은 손을 풀려는데 손가락이 잘 펴지지 않았다. 왕야는 잡힌 소매를 당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석영. 마차를 가져와.”“안에 계신 분부터…….”“그분은 내가 물어보겠다.”왕야가 창고 문을 보았다. 석영이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함씨는 연화 앞에 놓인 물그릇을 치우고, 앵두는 바닥에 굴러간 침통을 주워 먼지를 닦았다.연화는 무릎에 힘을 주었다. 발바닥은 땅에 닿아 있는데 몸이 따라 올라오지 않았다. 왕야의 손이 팔을 받쳤다.“걷겠다고 하지 마.”“마차까지만요.”“거기까지만 도와준다.”왕야는 연화가 몸을 기댈 수 있게 팔을 내주었다. 연화는 소매 대신 팔을 붙잡았다. 젖은 옷감 아래로 단단한 팔이 닿았다.앵두가 침통과 기록을 들고 먼저 마차에 올랐다. 연화가 발판에 발을 놓을 때 왕야의 손은 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앉고 나니 창고 문이 창밖으로 보였다. 석영이 나와 고개를 끄덕였다.“물을 드시고 다시 누우셨습니다. 토하지 않으셨고, 숨도 아까와 같답니다.”연화는 그제야 등을 좌석에 붙였다.“달라지면 왕부로 사람을 보내 주세요.”“그러겠습니다.”왕야가 마차 안으로 올라와 연화 곁에 앉았다. 앵두에게 받은 침통은 손이 닿지 않는 반대편에 놓았다.연화가 그쪽을 보자 짧게 말했다.“오늘은 끝났다.”◑여름 셋째 달 24일 아침, 연화는 덮은 천을 걷다가 손을 멈췄다.창문은 열려 있었다. 바람에 종이 모서리가 들리고, 마루에서는 노상의 열쇠 꾸러미가 작게 부딪쳤다. 더운 날인데도 팔에 닿는 바람이 서늘했다.연화는 팔과 손등을 살폈다. 붉은 반점은 없었다. 옷깃 안쪽의 피부도 그대로였다. 다만 목이 마르고 몸을 일으킬 때 어깨와 등이 함께 아팠다.가죽골에서 돌아온 뒤에는 왕부에 머물렀다. 석영이 가져온 기록을 보고 필요한 말을 적어 보냈고, 밤에는 왕야의 손목만 짚었다. 침통을 들고 나가지는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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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봉인을 떼는 날

연화의 어깨에 얹힌 손이 천천히 힘을 뺐다.“누워.”“새 환자가 왔대요.”“들었다.”왕야는 연화의 발을 다시 침상 위에 올려 주고 천을 덮었다. 상에 놓인 기록 묶음을 집어 들었다. 연화가 끈을 잡자 손을 멈췄다.“처음부터 다 읽으시면 늦어요. 제가 적어 드린 걸 위에 두었어요.”왕야가 맨 위의 종이를 확인했다. 물을 못 마시는 사람, 숨이 힘든 사람을 먼저 살피라고 받아 적은 글이었다.“의원부터 부른다.”“네. 왕야가 치료를 대신하시면 안 돼요.”“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겠다.”연화는 끈을 놓았다. 왕야는 기록을 소매 안에 넣지 않고 석영에게 건넸다.“젖지 않게 가져가.”“예, 왕야.”앵두가 문가로 들어왔다. 왕야는 연화의 물잔을 앵두 쪽으로 옮겼다.“물이 줄면 다시 채워. 열이 달라지면 사람을 보내고.”연화는 왕야의 소매를 보았다. 손을 덮었던 옷감이 올라가 있었다.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손톱 색이 드러났다.“밤까지 무리하시면 안 돼요.”“앉아서 쉴 자리도 찾겠다.”왕야는 그렇게 답하고 방을 나섰다.연화는 열린 문 너머를 보았다. 노상이 앞문까지 먼저 달려갔다. 열쇠가 부딪치는 소리에 바깥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문을 열 수 없습니다.”문 곁을 지키던 사람이 말했다.왕야가 걸음을 멈췄다.“왕부의 문이다.”“황후께서 봉인을…….”“누가 떼었는지 그대로 전해.”왕야의 손이 문짝 사이로 올라갔다. 붉은 종이 한쪽이 떨어지고, 나머지 쪽도 손에 잡혀 뜯겼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안채까지 들렸다.“내 아내가 시작한 일은 내가 끝낸다.”노상이 문을 열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석영과 하인들이 그 뒤를 따라 나갔다.연화는 문이 열린 것을 확인한 뒤 베개에 머리를 놓았다. 앵두가 천을 다시 여몄다.“보셨죠. 가셨어요.”“기록을 가져가셨으니 괜찮을 거예요.”말을 마친 뒤 기침이 났다. 앵두가 물을 건넸다. 연화는 잔을 받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앵두가 받쳐 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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