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Chapter 31 - Chapter 40

40 Chapters

31화. 가을이 오는 날

연화는 종이를 누른 손에서 손목 쪽으로 눈을 옮겼다.“소매를 조금 더 걷어 주세요.”왕야가 기록을 놓고 팔을 내밀었다. 연화는 손톱 끝에 남은 색을 다시 살폈다. 새로 자란 부분은 맑았고, 손가락을 펴고 접는 움직임에도 망설임이 없었다.“솥 앞에 계실 때 손끝이 저리지는 않았어요?”“없었다.”“밤에는요?”“잠들기 전에 조금.”일을 하며 잊고 있었을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전보다 힘은 붙었지만 오래 일한 뒤의 피로가 남아 있었다.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 놓자 왕야가 손가락을 폈다.“아프지는 않다.”“아픈 것만 보는 게 아니에요.”연화는 침통을 가까이 당겼다. 가는 침을 꺼내는 손을 보고 왕야가 의자를 조금 옮겼다. 침이 놓인 뒤에는 물잔을 새로 채워 곁에 두었다.“오늘은 더 나가지 마세요. 남은 일은 의원들과 하인들이 할 수 있어요.”“너도.”“저는 안 나간다고 했잖아요.”“기록도 잠시 놓아.”연화는 상 위의 종이를 내려다봤다. 날짜 옆에 적은 숫자가 마르기도 전이었다. 그래도 새 환자의 집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숯연필을 내려놓자 왕야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가을 첫째 달 10일 아침, 약곳간 문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연화는 종이 모서리 위에 빈 침통을 올렸다. 가죽골에서 가져온 기록과 수도 안 의원들이 보낸 기록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집 이름을 따라 읽고, 같은 사람이 두 번 적힌 곳은 옆에 표시했다.맞은편 의원이 마지막 묶음을 펼쳤다.“이쪽도 새로 열이 난 사람은 없습니다. 누워 계시던 분들은 물과 음식을 넘기고 있고요.”“기침이 남은 분들은 계속 봐 주세요. 창고에서 나오더라도 일을 바로 시작하지 않게 말씀해 주시고요.”“공방에도 전했습니다.”연화는 기록 끝에 손을 대었다. 수도 안과 남문 밖의 보고가 모두 도착해 있었다. 빠진 집을 확인하느라 남겨 둔 빈칸도 채워졌다.“다 합친 수가 맞나요?”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서른넷입니다.”연화는 새 종이를 꺼냈다. 손에 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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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어의가 무릎 꿇는 날

연화는 마루 끝으로 내려가려던 발을 멈췄다.공석주는 마당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궁에서 보던 옷을 입었지만 허리에는 약상자가 없었다. 손가락 사이에 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들어오세요.”연화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왕야는 열린 문 곁에 그대로 서 있었다.공석주가 계단을 올랐다. 신을 벗는 동안에도 손이 떨렸다. 마루에 발을 올린 공석주는 연화 앞에서 멈췄다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옷자락이 발등을 덮었다.연화는 내려다보던 눈을 들었다. 마당에서 노상이 움직이려다 멎었다. 왕야는 공석주를 일으키지 않았다.“그렇게 앉으시면 말을 듣기 어려워요.”“서 의녀께 못 한 말을 하러 왔다.”공석주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일어나세요. 제가 물어볼 것도 있을 거예요.”공석주는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몸을 일으키는 대신 등을 조금 폈다. 연화는 노상에게 방석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무릎 아래에 받칠 것을 밀어 놓고 맞은편에 앉았다.왕야가 연화 옆에 앉았다. 상 위에 있던 기록 묶음을 안쪽으로 옮겨 공석주가 손을 놓을 자리를 만들었다.잠깐 열린 문으로 밤바람이 들어왔다. 연화는 겉옷의 소매를 당겨 손등을 덮었다.공석주가 그 움직임을 보았다.“네 어머니도 손이 길었다.”연화의 손이 멎었다.“침을 들기 전에 꼭 손부터 씻었지. 급하게 불려 온 날에도 그랬다.”“어머니를 아셨죠.”공석주가 고개를 끄덕였다.“처음 왕부에서 저를 보셨을 때부터요.”“알아봤다. 눈 아래 점도 같고, 사람 손목을 받치는 모양도 같아서.”연화는 왕부 마루에서 처음 마주쳤던 공석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머니 이름을 듣고 피하던 눈, 침통을 오래 보던 시선이 이제는 맞은편에 있었다.“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공석주의 손가락이 방석 끝을 눌렀다.“말하면 그 뒤까지 말해야 했으니까.”◑앵두가 찻잔을 받쳐 들고 마루로 올라왔다.늘 먼저 나오던 인사가 없었다. 앵두는 빈 상을 살피고, 공석주 쪽에 잔을 내려놓았다. 잔 밑이 나무에 닿는 소리만 작게 났다.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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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살구나무를 파는 날

왕야가 상 옆에 놓인 기록을 거두었다.“같이 간다.”연화는 공석주가 한 말을 적은 종이를 따로 접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들은 사람이 또 있었다. 그 사람이 찾지 않은 것을 이제는 찾아야 했다.문밖에서 노상이 마차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연화는 겉옷을 여미며 약방에 보낼 말부터 골랐다. 서랍을 더 만들어 달라는 것도, 오래된 약재를 찾아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어머니가 그 말을 언제 했는지, 그 전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이번에는 그것부터 물을 생각이었다.◑가을 첫째 달 12일, 약방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온주학은 문턱에 서서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손을 내밀었다. 연화가 그 손을 잡고 내려서자 아버지는 팔부터 살폈다.“열은 다 내렸고?”“네. 밥도 잘 먹어요.”“잘 먹는 사람이 얼굴이 이러냐.”온주학이 연화의 뺨에 손을 댔다가 왕야를 보고 급히 거두었다. 허리를 숙이려는 아버지에게 왕야가 먼저 말했다.“안에서 이야기하지.”“예. 안으로 들어오세요. 보름아, 자리를 좀…….”말이 끝나기 전에 보름이 작은 의자를 끌고 나왔다. 의자 다리가 문턱에 걸리자 왕야가 한 손으로 들어 안쪽에 놓았다.“아저씨, 그거 아버지 자리야.”왕야는 의자를 보고 온주학을 보았다. 보름이 다른 의자를 가져올 때까지 서 있었다.연화는 문 안에 들어서며 서랍을 훑었다. 손잡이에 붙은 숫자가 위에서 아래로 이어졌다. 마지막 서랍은 여전히 백이었다.온주학이 연화의 시선을 따라갔다.“네가 보낸 말 받고 나도 다시 세어 봤다.”아버지는 맨 아래 손잡이를 한 번 잡았다 놓았다.“뒤에 숨은 서랍이 있나 싶어서 장도 밀어 보고.”벽 가까이 바닥에 먼지가 길게 끌린 자국이 있었다. 혼자 무거운 장을 옮겼는지 아버지의 오른손목에 천이 감겨 있었다.연화가 그 손을 보자 온주학은 등 뒤로 감췄다.“별것 아니다.”“장을 혼자 미셨어요?”“조금만 움직였어.”아버지는 말하면서도 의자에 앉을 때 오른손을 쓰지 않았다. 왼손으로 자리를 짚고 천천히 몸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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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은잠을 읽는 날

연화는 떨리는 종이 아래에 다른 손을 받쳤다. 글씨가 흔들리지 않게 상 위에 내려놓고, 접혀 있던 아랫부분을 폈다.왕야의 소매가 어깨 가까이 닿았다. 마당에서 보름의 손을 닦아 주었던 자리에 흙이 말라 있었다.“더 있나.”“네.”연화는 첫 줄을 다시 읽지 않았다. 어머니가 딸에게 남긴 말은 그 아래로 이어졌다.『다래골 집안에 한 자루 내려오는 긴 침이다. 머리에 꽂고 다녀도 되지만, 본래 비녀는 아니다.죽을 만큼 억울한 날에 쓰라는 말을 잊지 마라.』종이 끝에 묻은 흙을 털려던 연화의 손이 멈췄다.여섯 살 때 어머니가 머리를 묶어 주던 손이 떠올랐다. 머리를 너무 당겼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묶은 것을 풀고 처음부터 다시 빗었다. 그날 어머니는 긴 은비녀를 연화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무겁다며 빼려고 했을 때만 손을 붙들었다.죽을 만큼 억울한 날이 오면 쓰라고 했다. 한 번뿐이라고도 했다.그때는 오래 간직하라는 말인 줄 알았다.연화는 머리 뒤로 손을 올렸다. 비녀를 빼자 느슨해진 머리카락이 어깨로 흘렀다. 검게 탄 끝이 손바닥 위에 놓였다.온주학이 마루 끝에서 몸을 일으켰다.“그게 왜 그렇게 됐니?”연화는 대답 대신 종이와 비녀를 나란히 놓았다.검은 자국은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겨울 끝에 눈을 뜬 뒤 여러 번 확인했다. 은에 묻은 때가 아니라 끝 자체가 변해 있었다.왕야는 비녀에 손대지 않았다.“마저 읽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억울하게 죽는 사람을 한 번 돌려보내는 침이다. 가슴 위 등불자리에서 마지막 억울함을 받는다.한 사람에 한 번. 쓰고 나면 끝이 검게 타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연화의 손가락이 종이 가장자리를 눌렀다.옥에서 마지막으로 붙잡았던 것은 차가운 은이었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다락의 낮은 천장이 보였고, 아래층에서는 아버지가 보름을 부르고 있었다.연화는 다음 줄로 눈을 옮겼다.『돌아온 사람은 제 맥을 잃는다. 남의 맥은 잃지 않는다.남을 살리라고 남는 몫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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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유 소의를 지키는 날

왕야는 연화가 내민 쪽지를 받아 상 위에 펼쳤다. 겨울 둘째 달이라는 글씨 아래에 유 소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아니요. 이번에는 먼저 살펴볼 거예요.”연화는 쪽지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태자님이 나으셨으니까 황후가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어요. 보약을 보낸 날보다, 보내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부터 생각해 볼게요.”“궁에 사람을 넣겠다.”“유 소의께도 말씀드려야 해요. 모르는 사이에 지키기만 하면 평소와 다른 걸 놓칠 수 있어요.”왕야가 빈 종이 끝을 눌렀다. 연화는 전생에 들었던 말과 직접 보았던 일을 나눠 적었다. 보약 그릇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번에는 그릇이 놓이기 전에 만나야 했다.“이번에도 어의가 막으면요?”왕야가 연화를 보았다.“네가 보게 한다.”연화는 숯연필을 잠시 내려놓았다. 왕야의 손 아래에서 종이가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그럼 저는 살아 있는 맥부터 볼게요.”◑가을 둘째 달 1일, 약곳간에서 돌배잎을 정리하던 연화는 노상의 부름에 손을 털었다.유 소의가 안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겉옷을 입었는데도 두 손으로 소매 끝을 모아 쥐고 있었다. 곁에 선 시녀가 방석을 바로 놓아 주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와서 미안해요.”“오셔도 돼요. 어디 불편하세요?”연화는 맞은편에 앉으며 얼굴부터 살폈다. 입술이 마르지는 않았고 숨도 고르게 이어졌다. 다만 눈 아래가 어두웠다.“속이 불편한 건 줄었어요. 그런데 밤에 자꾸 깨요.”“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유 소의는 곁의 시녀를 보았다. 시녀가 마루 끝으로 물러난 뒤에야 소매를 놓았다.“황후께서 보약을 보내겠다 하셨어요. 아이를 위해 먹으라고요.”연화는 무릎에 놓았던 손을 상 위로 옮겼다.아직 가을이었다.“언제 보내신대요?”“가을 둘째 달 5일에요. 내약원에서 살핀 것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생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는 겨울 바람이 궁의 문틈으로 들어왔고, 유 소의는 식은 손을 연화에게 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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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이름을 부르는 날

채란은 문이 닫힌 뒤에도 같은 말만 했다.석영이 보약을 어디서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도, 왕야가 봉한 그릇을 가리켰을 때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황후는 시킨 적이 없고, 자신이 했다는 말이었다.연화는 그릇을 감싼 천의 매듭을 살폈다. 채란이 입을 닫았다고 해서 유 소의가 받았던 보약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받은 곳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건 남아요.”채란의 눈이 천 위에 잠깐 머물렀다.“왕비가 바꾸어 놓은 그릇입니다.”“그래서 바꾸기 전에 본 사람들도 함께 말씀드릴 거예요.”연화는 유 소의의 시녀가 확인한 쟁반을 옆에 놓았다. 왕야가 종이를 내밀었다. 누가 가져왔고, 누가 받았으며, 어디서 보관했는지 적을 종이였다.“네가 본 것만 적어.”“네.”연화는 숯연필을 들었다. 채란의 말보다 먼저, 그릇이 문턱을 넘어온 순간부터 적었다.◑가을 둘째 달 10일 아침, 약곳간 상에는 약재 대신 종이가 놓여 있었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펼치기 전에 손을 닦았다. 오래된 종이의 가장자리가 손끝에 걸렸다. 황자 해원의 맥을 적은 장과 어머니 자신의 몸을 살핀 장 사이에 얇은 천을 끼워 두었다.노상이 작은 상을 더 들여놓았다. 상 위에는 밤글방에서 거두어 둔 기름통이 놓였다. 뚜껑을 묶은 끈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범씨가 가져온 것 중 따로 남겨 둔 통입니다.”“누가 거두셨나요?”“제가 거두고 석영이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 뒤로는 왕야 허락 없이 열지 않았습니다.”연화는 새 종이에 그 말을 옮겼다. 노상이 잠깐 망설이다 기름통 아래에 받침을 밀어 넣었다.“밑바닥에 기름이 묻어 있습니다. 맥안에 닿으면 안 됩니다.”“고맙습니다.”노상은 기름통을 한쪽으로 옮기고 손을 닦았다. 열쇠 꾸러미가 허리에서 낮게 부딪쳤다.공석주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연화가 적은 종이를 내밀자 두 손으로 받았다. 손가락이 조금 떨려 종이 끝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이건 제가 들은 말이에요. 어의께서 직접 보신 것과 다르면 고쳐 주세요.”공석주는 서임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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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황제 앞에 서는 날

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덮은 천 끝을 안으로 접었다. 황궁의 사자가 나간 뒤에도 마루에는 발소리가 잠깐 남았다.해원이 기록 묶음을 들어 책상 안쪽에 놓았다.“그날 네 말을 끝까지 듣게 하겠다.”“듣고 확인하게 해 주세요. 제 말만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해원은 맥안 곁에 놓인 돌뜰 확인 요청을 집었다. 다른 종이 사이에 넣지 않고 맨 위에 얹었다.◑가을 둘째 달 15일 아침, 연화는 마차에 오르기 전 해원의 소매를 붙들었다.“손부터 볼게요.”해원은 왕부 마루에 앉았다. 궁에 갈 겉옷을 입었지만 소매는 바로 걷었다. 연화는 손톱 밑의 색을 살피고 얼굴을 올려다봤다. 밤새 글을 읽느라 눈가에 피로가 남았지만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손끝은 어떠세요?”“저리지 않는다.”“잠은요?”“잤다.”오래 앉아 있으면 손이 다시 차가워질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흐름이 고르고, 손가락을 폈다 접을 때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손등을 가볍게 눌러 살핀 뒤 준비한 침을 꺼냈다.침통을 여는 소리가 조용한 마루에 울렸다. 해원은 바깥에서 기다리는 호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연화가 치료를 마치고 손끝이 따뜻한지 다시 확인할 때까지 팔을 편히 두었다.“대전에서 오래 서게 되면 말씀하세요.”“너도.”“저는 기록을 읽을 거예요.”“읽는 동안 옆에 있겠다.”연화는 침통을 닫고 쪽지를 적었다.『월강왕. 손끝 온기 유지. 맥 고름.긴 외출 예정. 피로와 저림 살필 것.』쪽지를 묶음 안에 넣자 해원이 천으로 감싼 맥안을 들었다. 연화가 손을 내밀었지만 바로 건네지 않았다.“마차까지 내가 들겠다.”연화는 빈손으로 마루를 내려갔다. 해원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황궁 마당에서 염소 우는 소리가 났다.연화는 마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멈췄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 석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고삐 대신 염소 줄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서 할매의 치맛자락을 따라 돌계단 쪽으로 가려 했다.“할머니.”서 할매가 고개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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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자란궁 문이 닫히는 날

“황후의 궁인들은 자란궁 밖으로 물러나라. 기록과 물건을 옮기는 일도 금한다.”황제의 말이 대전 끝까지 닿았다.문 곁의 관리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 뒤에 서 있던 소 가문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지만, 누구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서 의녀의 죽음을 병사로 적은 기록부터 다시 살피겠다. 어의는 자신이 본 일과 숨긴 일을 빠짐없이 써서 내라.”공석주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제 이름을 빼지 않겠습니다.”황제는 유 소의에게 보낸 보약 그릇을 가리켰다. 채란이 가져온 물건과 그릇을 바꿔 둔 경위가 적힌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시녀장도 따로 두어라. 누구의 명을 받았든, 해로운 것을 들고 간 일부터 물을 것이다.”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곁에 선 궁인이 부축하려 했지만 긴 손톱이 그 손을 밀어냈다.“제 아들이 듣고 있습니다.”황제는 태자를 보았다. 예성은 옷자락을 쥔 손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알고 있다.”“그 아이 앞에서 어미를 죄인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까.”“아이의 죄가 아니다.”황제는 태자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라.”예성은 어머니를 돌아봤다. 황후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잠깐 뒤, 태자가 단 아래로 걸어갔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에서 손을 뗐다. 해원이 접힌 천을 펴 주었으나 기록을 다시 싸지는 않았다. 이제 그 종이는 황제 앞에 남아 있어야 했다.황후가 대전 문으로 향했다. 궁인들이 따라 움직였고, 소 가문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연화 곁을 지날 때도 황후의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다만 연화를 부르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연화는 열린 맥안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어머니가 눌러 쓴 이름과 날짜가 가려진 데 없이 드러나 있었다.해원이 옆에서 물었다.“더 놓고 갈 것이 있나.”“없어요.”“그럼 가자.”연화가 빈 천을 접자 해원이 받아 들었다. 대전 문을 나설 때까지 천을 연화에게 돌려주지 않았다.◑가을 둘째 달 20일 아침, 왕부 앞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가 났다.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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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의원패를 받는 날

연화는 맥안을 품에 안고 해원을 보았다.황제 앞에 내려놓았던 해원의 손은 그대로였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끝에 아직 푸른빛이 남아 있었다.“의원패는 내약원에 미리 일러 두겠다.”황제가 말했다.“여자가 받을 수 있는 법이 있는데도 쓰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그 법도 함께 알리겠다.”연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맥안을 감싼 천이 손목에 닿았다. 어머니 이름을 되찾은 날, 자신의 이름으로 의원을 열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작은 방을 나와 마차에 오르자 해원이 맥안을 받아 무릎 위에 놓았다.“천이 풀렸다.”연화가 내려다봤다. 바깥으로 나온 천 끝을 해원이 접어 넣었다.“제가 너무 세게 잡았나 봐요.”해원은 매듭을 다시 묶고 돌려주었다. 연화가 두 손으로 받자 손끝이 잠깐 닿았다.“손이 차다.”“집에 가서 따뜻한 물 마실게요.”해원이 마차 창을 닫았다. 연화는 천 위에 손을 펴고, 왕부에 닿을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겨울을 지나 봄 둘째 달 14일이 되었다.왕부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누워 있었다. 뿌리를 감싼 천에 흙이 젖어 있었고, 가는 가지 끝마다 꽃봉오리가 붙었다.연화는 가지가 바닥에 눌리지 않도록 받쳐 들었다.“여기까지 들어오면서 꺾인 데는 없죠?”“제가 팔을 이렇게 하고 왔습니다.”석영이 양팔을 벌려 보였다. 옆에서 노상이 삽을 내려놓았다.“나무보다 자네가 더 걸리적거렸네.”“담에 닿을까 봐 그런 겁니다.”“담은 그대로 있고 내 어깨만 부딪혔지.”앵두가 뿌리에 두를 천을 걷다가 웃음을 삼켰다. 보름은 두 사람의 말을 듣지도 않고 파 놓은 구덩이 안을 살피고 있었다.“언니, 조금 더 파야 돼.”“왜?”“뿌리가 저만큼 긴데 접히면 안 되잖아.”보름이 손으로 길이를 재 보였다. 연화는 나무 밑동을 내려놓고 구덩이 곁에 앉았다. 노상이 판 곳은 넓었지만 한쪽에 작은 돌이 남아 있었다.“저것만 꺼내면 되겠다.”보름은 기다렸다는 듯 흙을 걷어 냈다. 돌을 들어 옆으로 옮기고 손바닥을 털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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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약속을 다시 쓰는 날

붓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해원은 벼루에 묻힌 먹을 가볍게 덜어 내고 연화를 보았다.“언제 청하면 되나.”“아침에요. 밤새 쓰느라 진료 시간 놓치시면 안 돼요.”“길게 쓰지 않겠다.”연화는 책상 옆에 놓인 종이를 보았다. 죽은 뒤에 남길 일을 적었던 글 묶음은 이제 아래 칸에 들어가 있었다. 같은 붓 앞에 빈 종이가 놓여 있었다.“그 붓으로 쓰실 거예요?”해원이 붓대를 돌려 보였다. 손가락이 오래 닿은 부분은 색이 조금 옅었다.“다른 것을 가져올까.”“아니요. 그게 좋아요.”연화는 의원패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원이 문까지 따라와 열어 주었다.“아침에 기다려.”“저를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해원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연화가 돌아서기 전에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나무 패의 자국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엄지가 그 자리를 다시 쓸었다.“잘 자.”연화는 손을 놓고 문턱을 넘었다.복도 끝에 이르러 돌아보니 해원이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연화가 자기 방 문을 열자 그제야 밤글방 문이 닫혔다.◑봄 둘째 달 15일 아침, 창 아래에서 보름의 목소리가 들렸다.“언니, 나 준비됐어.”연화가 창을 열었다. 보름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들고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 머리 양쪽에 맨 끈이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머리는 누가 해 줬어?”“내가. 아저씨는 아침부터 글 쓰고 있어.”“아직도?”“먹 묻은 손으로 나한테 기다리라고 했어.”연화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서 보름의 머리끈을 바로 매 주고 밤글방으로 향했다.문은 열려 있었다.해원은 붓을 씻어 천 위에 놓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쓴 종이가 몇 장 쌓였고, 맨 위에 놓인 한 장만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연화는 문턱에 서서 눈 밑부터 살폈다.“밤새 쓰셨어요?”“조금 잤다.”“얼마나 조금인지 묻지는 않을게요. 손 주세요.”해원이 의자를 빼 주었다. 연화는 앉지 않고 그 손을 창 쪽으로 데려갔다. 손톱 끝에 남은 푸른빛은 어제와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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