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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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의녀 온연화는 황후의 죄를 뒤집어쓰고 옥에서 독주를 마셨다. 눈을 뜨니 열여섯 겨울, 살구골 약방 다락. 앞으로 올 역병도, 누가 누구를 독살할지도 안다. 시장에서 쓰러진 노인을 침으로 살리던 날, 손톱 밑이 푸른 남자를 만났다. 5년째 몸에 독이 쌓여 가는 월강왕 담해원. “1년 안에 나를 살려 내면 이혼장과 의원패를 주겠다.” 계약서 대신 진료 약속에 손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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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1화. 은잠을 꽂는 날

독주가 놓인 잔은 깨끗했다.

온연화는 잔 가장자리부터 보았다. 이가 나간 곳도, 오래 묵은 때도 없었다. 궁에서 의녀들에게 내주던 그릇보다 좋았다.

“마셔.”

옥졸은 잔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연화의 발목에 닿은 쇠사슬이 짧게 울렸다.

“유 소의께 드린 건 약이 아니었어요.”

대답은 없었다.

“저는 맥을 짚고, 열이 있다고 적었어요. 드신 것을 가져오라고 했고요.”

그날 적었던 종이는 어디로 갔을까. 내약원 책상에 두고 나온 진료 쪽지에는 유 소의의 손끝이 차다는 말도 있었다. 열이 있는데 손끝이 찼다. 이상해서 다시 살피려 했을 때, 사람들이 들어와 연화의 팔을 잡았다.

옥에는 그 종이 대신 죄를 적은 종이가 들어왔다.

유 소의를 독살한 의녀 온연화.

스물셋이 될 때까지 하루도 놓지 않았던 침통은 빼앗겼다. 지금 연화에게 남은 것은 머리를 고정한 긴 은비녀 하나였다.

복도 끝에서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났다. 옥졸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연화는 고개를 들었다.

황후 소씨가 옥문 앞에 서 있었다. 늘 보던 웃는 얼굴이었다. 내약원의 의녀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할 때도, 유 소의의 죽음을 듣고 입을 가렸을 때도 저런 얼굴이었다.

“아이야, 잔이 식겠구나.”

연화는 바닥에 놓인 잔을 보지 않았다.

“유 소의께서 무엇을 드셨는지 아시죠.”

황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옥문 사이로 연화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네 어미도 그렇게 조용했지.”

연화의 손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

어머니는 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말을 전하면서도 연화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궁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손은 차가웠고, 연화가 아무리 붙들어도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손의 차가움이 열일곱 해 뒤가 아니라,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해졌다.

“어머니도…….”

황후의 웃음이 조금 더 깊어졌다.

연화는 끝까지 묻지 않았다. 물어도 이곳에 적어 줄 사람은 없었다. 옥졸은 고개를 숙였고, 황후 곁의 사람은 복도 바닥만 보고 있었다.

연화는 잔을 들었다.

입 안에 쓴맛이 남았다. 빈 잔을 내려놓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손끝에 힘이 빠져 잔이 옆으로 기울었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황후는 그제야 돌아섰다.

옷자락 소리가 멀어졌다. 연화는 숨을 고르며 머리로 손을 올렸다. 긴 은비녀를 뽑자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어깨로 흘렀다.

어머니가 이 비녀를 꽂아 주던 날에도 머리가 이렇게 풀렸었다.

죽기 전, 어머니는 연화의 머리를 몇 번이나 다시 빗었다. 엉킨 곳 하나를 풀고도 손을 떼지 못했다.

“죽을 만큼 억울한 날이 오면 이걸 꽂아라. 한 번뿐이다.”

그때 연화는 어머니가 아파서 이상한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믿지 않았던 말을, 이제는 달리 붙들 것이 없어 믿었다.

연화는 은잠을 가슴 위 등불자리에 꽂았다.

옷감이 작게 찢어졌다. 아픔보다 먼저 숨이 끊겼다.

◑

감초 써는 소리가 들렸다.

탁, 탁.

연화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그 소리를 들었다. 칼이 도마에 닿는 간격이 고르다가, 가끔 조금 길어졌다. 아버지는 감초를 썰다 말고 손에 묻은 것을 앞치마에 닦곤 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연화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였다.

눈을 뜨자 낮은 천장이 보였다. 서까래 한쪽에 짧은 금이 있었다. 그 금을 따라 손톱으로 긁어 놓은 자국도 있었다. 어린 보름이 다락에 올라오다 연화에게 들켜 급히 숨긴 흔적이었다.

연화는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가벼웠다. 옥에서 걸쳤던 거친 옷 대신, 소매 끝을 여러 번 기운 잠옷이 팔을 덮고 있었다. 발목에는 쇠사슬도, 쓸린 자국도 없었다.

손부터 펼쳐 보았다.

손끝의 굳은살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손등에 있던 작은 흉터가 없었다. 궁에서 뜨거운 그릇을 받다 생긴 흉터였다.

연화는 손등을 문질렀다. 지워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살이었다.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살구나무 가지가 창 가까이 뻗어 있었다. 아직 잎은 없었다. 가지 끝마다 단단한 꽃눈이 맺혀 있었다. 바람이 불자 창틀을 긁던 가느다란 가지가 떨어졌다가 다시 닿았다.

연화는 무릎으로 이불을 밀어내고 창가로 갔다.

약방 앞길이었다. 맞은편 낮은 담도, 세 집 건너 떡집에서 피어오르는 김도 그대로였다. 황궁의 높은 담은 어디에도 없었다.

창 옆에 놓인 작은 거울을 들었다.

왼쪽 눈 아래의 점. 아직 둥근 뺨. 밤을 새워 진료한 흔적이 없는 눈가.

열여섯 살의 얼굴이었다.

연화는 거울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입술을 누르고, 턱을 만졌다. 손가락을 따라 거울 속 얼굴도 움직였다.

아래에서 서랍 닫는 소리가 났다.

“보름아, 언니 깨워라. 밥 식겠다.”

아버지 목소리였다.

연화는 거울을 놓쳤다. 거울이 이불 위로 떨어져 둔하게 울렸다.

사다리가 삐걱거렸다. 작은 손이 다락 바닥을 짚고, 보름의 얼굴이 올라왔다. 양쪽으로 묶은 머리가 한쪽은 높고 한쪽은 낮았다.

“언니, 오늘 늦게 일어났네.”

보름은 마지막 칸을 딛고 올라와 연화 앞에 앉았다. 무릎에 묻은 먼지를 손바닥으로 털었다.

연화는 그 얼굴을 오래 보았다.

궁에 들어간 뒤로 보름은 편지 속에서만 자랐다. 키가 컸다는 말, 혼자 심부름을 다녀왔다는 말, 이제 약재 서랍을 전부 외웠다는 말.

지금 눈앞의 보름은 아직 두 손으로 사다리를 붙들어야 했다.

“왜 그렇게 봐?”

보름이 제 뺨을 문질렀다.

“뭐 묻었어?”

“아니.”

연화는 보름의 기울어진 머리끈을 바로잡았다. 보름은 귀찮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오늘이 언제야?”

“오늘?”

“달하고 날짜.”

보름이 손가락을 폈다.

“겨울 셋째 달 20일. 아버지가 아까 장부 쓰면서 말했어.”

연화는 머리끈을 잡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봄 첫째 달 20일이면 열일곱이 된다. 그해 여름에는 의녀를 뽑는다. 연화가 약방을 떠나 궁으로 들어갔던 바로 그 여름이었다.

아직 선발되기 전이었다.

“언니, 어디 아파?”

보름이 가까이 기어 왔다.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려가자.”

몸을 돌리려는데 머리카락이 어깨에 걸렸다. 연화는 뒤통수로 손을 올렸다. 긴 은잠이 머리를 고정하고 있었다.

옥에서 뽑았던 바로 그 비녀였다.

은잠을 빼서 손바닥에 놓았다. 익숙한 길이와 무게였다. 몸통은 차갑고 매끈했는데, 끝만 검게 타 있었다.

연화는 엄지로 검은 부분을 문질렀다. 그을음이 손에 묻어나지 않았다.

“어머니 비녀 더러워졌어?”

보름이 들여다보았다.

“닦아 줄까?”

연화는 은잠을 손 안에 가볍게 쥐었다.

“괜찮아. 내가 할게.”

가슴 위를 옷 너머로 눌러 보았다. 상처도, 통증도 없었다.

아래에서 아버지가 다시 불렀다.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우리 딸, 밥 먹자.”

연화는 은잠을 머리에 꽂고 사다리 쪽으로 갔다. 내려가는 보름의 뒤통수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로 다음 칸에 발을 디뎠다.

◑

아버지는 밥상 앞에서 연화의 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감초 물이 배어 있었다. 짧은 수염에 붙은 가루를 털지도 않은 채, 연화가 앉자 그릇을 앞으로 밀어 주었다.

“많이 잤네. 밤에 추웠어?”

연화는 밥그릇 가장자리를 잡았다. 따뜻했다.

“잘 잤어요.”

말이 조금 늦게 나왔다. 아버지가 얼굴을 들여다보자 연화는 숟가락을 들었다.

“꿈을 꿔서요.”

“나쁜 꿈?”

연화는 밥을 삼킨 뒤 대답했다.

“끝났어요.”

아버지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연화 쪽으로 반찬 그릇을 옮겼다. 보름이 그 그릇을 제 쪽으로 조금 당겼다가 아버지에게 손등을 가볍게 잡혔다.

“언니도 먹어야지.”

“언니는 맨날 내가 많이 먹는대.”

“오늘은 안 그래.”

연화가 말하자 보름이 눈을 크게 떴다. 이내 숟가락으로 제 밥을 조금 떠 연화 그릇에 얹었다.

“그럼 언니도 많이 먹어.”

연화는 그 밥을 밀어내지 않았다.

밥상 너머로 약재 서랍이 보였다. 작고 낡은 서랍마다 번호가 붙어 있었다. 궁의 내약원처럼 반듯하지는 않았다. 자주 여는 서랍은 손잡이 빛깔부터 달랐다.

부엌에서는 물이 끓었다. 문밖으로는 장바구니 든 사람들이 지나갔다. 누군가 약방 앞에 잠깐 멈춰 간판을 올려다보다 길을 건넜다.

연화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빈 그릇을 확인했다.

먹었다. 삼켰다. 배 안에 따뜻한 것이 남았다.

“오늘 내가 그릇 치울게.”

보름이 먼저 일어나더니 빈 그릇을 겹쳤다. 아버지가 너무 높이 쌓지 말라고 하자, 보름은 맨 위의 그릇을 연화에게 내밀었다.

연화는 받아 들었다. 보름과 나란히 부엌까지 걸어가 그릇을 놓았다. 보름의 어깨가 팔꿈치에 자꾸 닿았다.

그 작은 부딪침이 있을 때마다 연화는 걸음을 늦췄다.

아버지는 식사를 마치고 다시 감초 앞에 앉았다. 연화는 진료 자리에 놓인 물건을 살폈다. 깨끗한 천을 넣어 둔 함, 손 씻는 대야, 오래 써서 뚜껑이 헐거워진 침통.

어머니가 쓰던 침통이었다.

연화가 손을 올리자 뚜껑이 조금 들렸다. 궁에서 빼앗겼을 때는 돌려 달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이번에는 손 안에 있었다.

“언니.”

보름이 서랍 앞에서 불렀다.

“나랑 놀이하자.”

“무슨 놀이?”

“번호 말하면 이름 맞히는 거. 내가 먼저 낼게.”

전에도 늘 하던 놀이였다. 연화는 약재를 정리해야 한다며 보름을 돌려보내곤 했다. 보름은 혼자 서랍 손잡이를 짚으며 답을 중얼거렸다.

오늘은 연화가 의자를 끌어 앉았다.

“내 봐.”

보름이 신이 나서 발뒤꿈치를 들었다.

“37번!”

“돌배잎.”

“너무 빨라. 생각하고 말해야지.”

“아는 걸 어떻게 생각해?”

보름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서랍 앞으로 돌아가 번호를 훑어보더니 이번에는 손으로 숫자를 가렸다.

“이거.”

“번호가 안 보이는데.”

“맞혀 봐.”

연화는 웃음을 삼키고 서랍을 보았다. 모서리가 닳은 곳, 손잡이 아래 약재 가루가 조금 붙은 곳이었다.

“감초.”

보름이 손을 뗐다. 맞힌 것이 못마땅한지 입술을 내밀었다.

“아버지가 방금 열었잖아.”

“그러니까 기억해야지.”

도마 앞의 아버지가 웃었다. 보름은 이번에는 연화의 등을 서랍 쪽으로 돌려 앉혔다. 열고 닫는 소리만 듣고 맞혀 보라는 뜻이었다.

연화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모르는 척도 해 보았다. 보름이 서랍에서 돌배잎을 꺼내 코앞에 가져왔을 때는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았다. 마른 잎 냄새에 서랍의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다.

“돌배잎.”

“이건 맞혀도 돼.”

“왜?”

“내가 잘 꺼냈으니까.”

보름은 답을 맞힌 연화보다 더 크게 웃었다.

도마 쪽에서 칼이 멈췄다.

“아.”

아버지가 손을 내려다보았다. 감초를 잡고 있던 손가락에 피가 맺혔다.

연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아버지는 벌써 앞치마에 손을 닦으려 하고 있었다. 연화가 손을 들어 보이자 동작을 멈췄다.

“별거 아니다. 조금 베었어.”

“먼저 볼게요.”

연화는 상처와 아버지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상처는 길지 않았다. 얼굴색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손을 피하려는 움직임에는 힘이 있었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닐 듯했다.

연화는 아버지 손을 받아 들었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 불편한지 묻고, 손목에서 맥을 확인했다. 손끝에 익숙한 박동이 닿았다. 놀라 조금 빨라졌지만 고르게 이어졌다.

그제야 깨끗한 천을 가져와 상처를 돌보았다.

보름이 옆에서 함 뚜껑을 붙들어 주었다. 평소라면 천을 꺼내며 장난부터 쳤을 텐데, 이번에는 연화의 손만 보고 있었다.

“아버지, 오늘은 제가 썰게요.”

“이 정도로 일을 못 할까.”

“계속 벌어지면 더 오래 쉬셔야 해요.”

연화가 손을 놓아 주지 않자 아버지는 칼에서 멀찍이 손을 뺐다.

“말하는 게 꼭 네 어머니 같다.”

연화는 천 끝을 정리했다.

“불편하면 말씀하세요.”

아버지는 감싼 손가락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보름은 빈 의자를 끌어와 아버지 옆에 붙였다.

“나는 안 다쳤으니까 서랍 정리해도 되지?”

“무거운 건 언니 불러.”

아버지가 말하자 보름은 바로 서랍 쪽으로 달려갔다.

연화는 진료 자리의 종이를 한 장 당겼다. 숯연필을 쥐자 손가락이 먼저 제자리를 잡았다.

『아버지 손가락 베임. 움직임 괜찮음. 맥 고름. 상처 돌봄.』

짧게 적고도 종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죄를 적은 종이가 아니었다. 누군가 아팠고, 살폈고, 돌본 기록이었다. 아버지는 바로 옆에서 보름에게 서랍을 세게 닫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연화는 종이를 접어 침통 아래에 두었다.

◑

저녁까지 연화는 약방 안에서 움직였다.

보름이 잘못 넣은 돌배잎을 제 서랍에 돌려놓고, 손 씻는 대야의 물을 갈았다. 아버지가 감싼 손을 불편해하면 대신 물건을 들어 주었다.

해가 기울자 보름은 서랍 놀이를 다시 하자고 졸랐다. 연화는 진료 자리의 의자를 끌어 주었다. 보름은 이번에는 자기가 답을 맞히겠다며 눈을 감았다.

틀려도 웃고, 맞혀도 웃었다.

연화는 마지막 서랍을 닫을 때까지 보름 곁에 앉아 있었다.

밤이 되어서야 다락으로 올라왔다.

아래에서 아버지가 문빗장을 걸었다. 보름은 졸린 목소리로 내일도 놀자고 말했다. 연화가 그러자고 답하자 사다리 아래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다락에는 작은 등잔만 켜져 있었다.

연화는 이불 위에 앉아 낮에 쓴 종이를 펼쳤다. 아버지의 맥을 적은 줄을 다시 읽었다. 손끝에는 아직 그 박동이 남아 있는 듯했다.

여름이 오면 궁에서 사람을 보낼 것이다.

전에는 아버지가 울면서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의녀로 뽑히는 것은 약방집 딸에게 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연화도 침통을 챙겨 궁으로 갔다.

이번에는 아직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연화는 종이를 뒤집었다. 빈 뒷면 위에 숯연필을 대었다가 내려놓았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오늘 아침의 얼굴. 멀쩡한 가슴. 검게 탄 비녀 끝.

꿈이라고 하기에는 아버지 손에 감아 둔 천이 남아 있었다. 보름이 내일 하자던 놀이도 남아 있었다.

연화는 버릇처럼 제 손목에 손가락을 올렸다.

샘골 가까이에 손끝을 얹고 기다렸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손을 떼었다가 다시 짚었다. 반대편 손목도 확인했다. 손끝은 따뜻했고, 손가락도 뜻대로 움직였다. 숨도 막히지 않았다.

그런데 박동만 없었다.

연화는 등을 곧게 펴고 한 번 더 기다렸다. 낮에 아버지의 맥을 짚을 때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손을 받아 든 순간부터 또렷하게 느껴졌다.

‘제 맥만 안 잡힌다.’

연화는 손목을 내려놓았다. 머리에서 은잠을 빼 등잔 가까이 가져갔다.

은잠의 탄 끝이 등잔 빛에 검게 빛났다.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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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은잠을 꽂는 날
독주가 놓인 잔은 깨끗했다.온연화는 잔 가장자리부터 보았다. 이가 나간 곳도, 오래 묵은 때도 없었다. 궁에서 의녀들에게 내주던 그릇보다 좋았다.“마셔.”옥졸은 잔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연화의 발목에 닿은 쇠사슬이 짧게 울렸다.“유 소의께 드린 건 약이 아니었어요.”대답은 없었다.“저는 맥을 짚고, 열이 있다고 적었어요. 드신 것을 가져오라고 했고요.”그날 적었던 종이는 어디로 갔을까. 내약원 책상에 두고 나온 진료 쪽지에는 유 소의의 손끝이 차다는 말도 있었다. 열이 있는데 손끝이 찼다. 이상해서 다시 살피려 했을 때, 사람들이 들어와 연화의 팔을 잡았다.옥에는 그 종이 대신 죄를 적은 종이가 들어왔다.유 소의를 독살한 의녀 온연화.스물셋이 될 때까지 하루도 놓지 않았던 침통은 빼앗겼다. 지금 연화에게 남은 것은 머리를 고정한 긴 은비녀 하나였다.복도 끝에서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났다. 옥졸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연화는 고개를 들었다.황후 소씨가 옥문 앞에 서 있었다. 늘 보던 웃는 얼굴이었다. 내약원의 의녀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할 때도, 유 소의의 죽음을 듣고 입을 가렸을 때도 저런 얼굴이었다.“아이야, 잔이 식겠구나.”연화는 바닥에 놓인 잔을 보지 않았다.“유 소의께서 무엇을 드셨는지 아시죠.”황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옥문 사이로 연화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네 어미도 그렇게 조용했지.”연화의 손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어머니는 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말을 전하면서도 연화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궁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손은 차가웠고, 연화가 아무리 붙들어도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그 손의 차가움이 열일곱 해 뒤가 아니라,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해졌다.“어머니도…….”황후의 웃음이 조금 더 깊어졌다.연화는 끝까지 묻지 않았다. 물어도 이곳에 적어 줄 사람은 없었다. 옥졸은 고개를 숙였고, 황후 곁의 사람은 복도 바닥만 보고 있었다.연화는 잔을 들었다.입 안에 쓴맛이 남았다. 빈 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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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서랍을 세는 날
연화는 은잠을 등잔에서 조금 멀리 떼었다.빛이 닿지 않아도 검게 탄 끝은 그대로였다. 손톱으로 살짝 문질러 보았지만 벗겨지는 것은 없었다.아래층에서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났다. 이어 보름이 물을 달라고 웅얼거렸다. 연화는 은잠을 내려놓고 사다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아버지, 손은 괜찮으세요?”“괜찮다. 너도 얼른 자.”대답 뒤에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는 다친 손으로도 보름의 물을 챙기고 있었다.연화는 다시 제 손목을 보았다. 더 짚어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대신 침통 아래 두었던 종이를 펴고 빈 뒷면에 날짜를 적었다.겨울 셋째 달 20일.숯연필 끝이 종이에 작은 가루를 남겼다. 연화는 그 아래에 의녀 선발 날짜를 쓰려다 멈췄다. 손바닥으로 종이를 가리고 잠시 앉아 있었다.궁에 들어가지 않으면 달라질 일이 있었다.그러나 궁에 가지 않는 것만으로 어머니의 죽음까지 달라지지는 않았다.연화는 종이를 접었다. 은잠을 다시 머리에 꽂고, 침통을 이불 가까이 당겨 두었다.◑다음 날 아침, 보름은 약재 서랍 앞에서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언니, 봐 봐.”연화가 다가가자 보름은 혀로 앞니를 밀었다. 이가 조금 움직였다.“어제보다 더 흔들려.”“손으로 자꾸 만지지는 마.”“손으로 안 했어. 혀로 했지.”보름은 대답하고도 다시 혀를 가져갔다. 연화가 가만히 보고 있자 입을 다물었다.도마 앞에 앉은 아버지가 웃었다. 다친 손가락에는 어제 감아 준 천이 남아 있었다. 칼은 옆에 내려놓았고, 오늘은 약재를 골라내는 중이었다.연화는 아버지 손부터 확인했다. 천이 젖지 않았고, 손가락을 굽힐 때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오늘도 칼은 제가 쓸게요.”“네가 어제부터 내 일을 다 가져가는구나.”“손이 나을 때까지만요.”연화는 도마를 제 쪽으로 옮겼다. 감초를 썰자 마른 조각이 칼 옆으로 모였다. 보름은 흔들리는 이를 잊었는지 옆에 앉아 조각을 바구니에 담았다.문밖에서 수레가 지나갔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멀어지자 아버지가 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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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손톱을 보는 날
연화는 바구니를 내려놓지 않은 채 약재 가게 앞에 섰다.행렬이 지나간 길에는 수레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가게 주인이 돌배잎을 꺼내 놓고도 연화가 돌아보지 않자 한 번 더 불렀다.“온가 약방에서 왔지? 이만큼 가져가면 되나?”“네. 아버지가 적어 주셨어요.”연화는 바구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접힌 곳을 펴는 동안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가마 창 안으로 보였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아직 침상에 누워 있지 않았다. 누가 손목을 내주지 못하게 막고 있지도 않았다.연화는 약재를 받아 바구니에 담았다.“장날에도 나오니?”“필요한 게 있으면요.”“봄 첫 장이라 사람 많을 거다. 동생 데리고 오면 손 잘 잡고.”연화는 돈을 세어 건넸다. 가게를 나온 뒤에는 행렬이 간 쪽을 더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살구골로 돌아가는 길을 서둘렀다.집에 닿자 보름이 문턱에서 일어났다.“언니, 내 이 떨어졌어.”보름의 손바닥에 작은 이가 놓여 있었다. 나무 아래 두었던 바구니에서 찾았다며, 먼지가 묻은 손을 연화에게 내밀었다.연화는 바구니를 아버지에게 건네고 보름의 손부터 씻겼다.◑봄 첫째 달 2일, 장터로 가는 길에는 빈 바구니를 든 사람들이 이어졌다.보름은 앞니가 빠진 자리를 혀로 만지다가 연화의 손을 잡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옷자락이 다리에 감겼다.“언니, 오늘도 돌배잎 사?”“오늘은 아버지 침통 고칠 가죽을 볼 거야.”“언니 것도 고쳐?”“내 건 아직 괜찮아.”연화는 허리에 매단 침통을 손으로 눌렀다. 어머니가 쓰던 가죽은 접히는 자리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뚜껑을 묶는 끈만 새것으로 바꾸어 둔 참이었다.장터 입구에는 떡집 함씨가 먼저 와 있었다. 넓은 판 위에 접시를 놓고, 그 옆에 물건을 싸 줄 천을 쌓아 두었다.“둘이 왔니? 아버지는?”“약방 보세요.”“잘했다. 보름아, 이 빠진 데 좀 보자.”보름이 입을 다물었다.“아주머니도 웃을 거잖아요.”“안 웃는다.”함씨는 그렇게 말하고도 입꼬리를 내리지 못했다. 보름은 연화 뒤로 반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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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약방에 손님이 오는 날
연화는 돈주머니의 끈을 묶다가 손을 멈췄다.“내일 약방으로 오신다는 말씀이세요?”“그렇게 말했다.”왕야는 소매에 덮인 손을 내린 채 연화를 보았다. 석영이 옆에서 열린 돈주머니를 여미고 있었다.“저녁에 와도 되나.”“네. 문을 닫았어도 두드려 주세요.”왕야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노인이 앉은 쪽을 돌아보고는 가마로 걸음을 옮겼다. 석영은 연화에게 길을 비켜 주고 뒤따랐다.보름이 지팡이를 붙든 채 물었다.“언니, 저 아저씨도 아파?”연화는 가마 문이 닫히는 것을 보았다.“내일 살펴봐야 알지.”“그럼 의자 하나 더 꺼내 놔야겠다.”보름은 제가 앉아 있던 작은 의자를 내려다보았다.“저건 너무 작을 것 같아.”연화가 보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행렬이 움직이자 바닥의 먼지가 조금 일었다. 이번에는 가마 창을 올려다보지 않았다.약방으로 돌아가면 진료 자리를 정리해야 했다.◑봄 첫째 달 3일 저녁, 연화는 진료 자리 옆의 바구니를 옮겼다.아버지는 약재 서랍에 붙은 종이가 들떴다며 풀을 바르고 있었다. 보름은 그 옆에서 번호를 읽었다. 낮에 다녀간 손님의 발자국이 문턱 안쪽에 남아 있었다.연화는 바닥을 쓸고 창을 조금 열었다. 부엌에서 끓는 물 소리가 들려왔다. 감초 냄새와 젖은 행주 냄새가 낮게 섞였다.“누가 온다고 했니?”아버지가 서랍 앞에서 물었다.“어제 장터에서 만난 손님이요.”“떡집 아주머니가 말한 그 어르신?”“아니요. 다른 분이에요. 손끝이 불편하신 것 같아서요.”아버지는 들뜬 종이를 손바닥으로 눌렀다.“추울 때는 그런 손님이 많지. 네가 먼저 보고, 어려우면 나를 불러.”“네.”연화는 의자에 방석을 놓았다. 등받이가 흔들리지 않는지 눌러 보고, 옆에 손목을 받칠 접은 천을 두었다.전생에는 침상 곁에 설 수 있었던 시간이 짧았다. 어의가 물러나라고 하자 연화는 손끝으로 느낀 것을 다 말하지도 못했다.이번에는 손님이 제 발로 약방에 오기로 했다.연화는 숯연필 끝을 다듬었다. 가루가 묻은 손가락을 천에 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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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혼인을 청하는 날
“어머니를 아세요?”연화는 멈춘 숯연필을 내려놓았다. 문밖에 선 석영도 왕야를 돌아보았다.“궁에 계실 때 뵈신 건가요?”“그렇다.”왕야의 시선이 연화의 얼굴로 내려왔다.“닮았군.”아버지가 문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문짝이 조금 삐걱거렸다. 연화는 더 묻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선 자리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날을 꺼낼 수는 없었다.“어떤 일로 뵈셨는지도 여쭤봐도 돼요?”왕야는 잠시 연화를 보았다.“그 이야기는 지금 하지 않겠다.”연화는 책상 끝을 짚었다. 어머니를 기억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 알아낼 수 있는 일과 오늘 묻지 못하는 일을 나누어 두어야 했다.“알겠어요. 대신 몸이 불편해진 일은 숨기시면 안 돼요.”“그렇게 하지.”왕야는 문턱을 넘었다. 석영이 뒤따르고, 아버지가 문을 닫았다. 빗장을 거는 소리가 평소보다 컸다.연화는 책상으로 돌아와 진료 쪽지를 펼쳤다. 아직 온기가 남은 물그릇 옆에 종이를 놓았다.아버지가 뒤에서 물었다.“내일도 오신다니?”“아직 말씀은 없으셨어요.”“그런 분이 우리 약방에 매일 오셔도 되는 건가.”연화는 왕야가 앉았던 의자를 보았다. 접은 천에 손목이 눌렀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치료하려면 매일 봐야 해요.”아버지는 의자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더 묻지는 않았다.◑봄 첫째 달 4일, 왕야는 해가 기울기 전에 왔다.아버지는 손님이 나간 진료 자리를 닦고 있었다. 문밖에서 석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천을 접었다. 보름은 서랍 앞에 앉아 종이에 번호를 쓰다가 고개를 들었다.“아저씨, 오늘도 왔네.”왕야가 문턱 안으로 들어섰다.“그렇다.”보름은 자리를 내주려고 바닥에 펼쳐 둔 종이를 모았다. 석영이 문을 닫고, 연화는 부엌에서 가져온 물그릇을 내려놓았다.왕야의 겉옷은 어제와 비슷하게 짙었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끝이 굳어 있었다. 의자를 당기려던 손이 잠깐 멈췄다.연화가 먼저 의자를 빼 주었다.“어젯밤에는 어떠셨어요?”“손이 저려서 깼다.”“글은 오래 쓰셨어요?”“오래 쓰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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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왕부 문을 넘는 날
연화는 덧쓴 날짜가 번지지 않도록 종이를 펼쳐 두었다. 아버지가 책상 한쪽에 놓인 물그릇을 치웠다. 보름은 종이 끝을 누르던 숯연필을 집어 서랍 위에 올렸다.“그건 어디에 둘 거야?”“침통이랑 같이.”연화는 손도장이 마른 것을 확인하고 종이를 접었다. 가죽 침통을 넣어 둔 함 안에 함께 내려놓자 아버지가 뚜껑을 닫아 주었다.◑봄 둘째 달 15일 아침, 그 함은 다락 문 앞에 놓여 있었다.연화는 새로 지은 옷의 소매를 펴고 함을 들었다. 평소보다 천이 두꺼워 팔을 굽힐 때마다 바스락거렸다. 사다리 아래에서는 보름이 아버지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아버지, 여기 또 접혔어.”“펴 놓으면 다시 접히는구나.”연화가 내려가 옷깃을 바로잡았다. 아버지는 딸의 옷을 한참 보다가 머리로 눈을 옮겼다. 검은 머리는 늘 하던 대로 하나로 묶었고, 어머니의 은잠으로 고정했다.“새 옷은 잘 맞네.”아버지는 그 말만 하고 함을 받아 들었다.문밖에서 마차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보름이 먼저 나가려다 문턱 앞에서 발을 모았다. 오늘은 뛰지 말라는 말을 아침부터 들은 탓이었다.연화가 문을 열자 왕야가 마차 곁에 서 있었다. 짙은 혼례 옷을 입었는데도 소매는 여전히 손을 덮었다. 석영은 마차 문을 열어 둔 채 보름을 보고 웃었다.“오늘은 서랍 말고 챙길 게 많겠네.”“언니 함은 아버지가 챙겼어요. 저는 이거.”보름이 작은 보자기를 들어 보였다. 안에서 진료 쪽지를 묶어 둔 끈 끝이 삐져나와 있었다.왕야는 연화를 보았다.“준비됐나.”“네. 아버지랑 보름도 같이 타도 되죠?”“그러려고 큰 걸 가져왔다.”연화는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앉을 자리가 넉넉했다. 아버지가 함을 안에 넣는 동안 왕야는 마차 앞에 선 채 기다렸다. 손을 재촉해서 뻗거나 먼저 올라타지 않았다.연화는 혼례 옷의 자락을 모아 올라갔다. 보름이 곁에 앉고, 아버지가 함을 무릎 위에 놓았다. 왕야는 맞은편에 앉았다.마차가 움직이자 아버지의 손이 함 모서리를 눌렀다.연화는 창을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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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침을 놓는 날
왕야는 열린 침통 안을 내려다보았다. 오래된 가죽 안쪽에 침들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알겠다.”손목을 거두는 대신, 왕야는 연화가 침통을 닫을 때까지 소매를 올린 채 기다렸다. 연화는 손등의 온기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천을 돌려주었다.“밤에 손이 더 저리면 참지 말고 말씀하세요.”“누구에게.”“앵두에게요. 저를 깨워 달라고 하시면 돼요.”왕야는 마루 건너 동쪽 방을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연화가 침통을 들고 일어나자 왕야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발을 딛는 순간 움직임이 잠깐 멎었다. 연화는 문 쪽으로 가려던 걸음을 멈췄다.왕야는 마루에 손을 짚고 다시 섰다.“저리세요?”“조금.”“그것도 내일 말씀해 주세요. 손만 치료할 건 아니니까요.”연화가 서쪽 방문을 열어 주었다. 왕야는 문턱을 넘기 전에 연화의 손에 들린 침통을 보았다.“내일 필요한 것은 다 있나.”“아침에 약곳간부터 살펴볼게요.”“없으면 기다리지 말고 말해라.”왕야가 들어간 뒤 연화는 문을 닫았다. 마루에 남은 천을 챙겨 들자 아직 손이 닿았던 자리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아침의 약곳간에는 노을뿌리 끓이는 냄새가 찼다.붉은 뿌리를 담은 그릇 곁에서 앵두가 소매를 걷고 있었다. 물 끓는 소리가 낮은 작업대 아래에서 이어졌다. 전날까지 비어 있던 선반에는 연화가 가져온 약재와 마른 천이 놓여 있었다.연화는 창을 열고 작업대 앞에 섰다. 찬 공기가 들어오자 앵두가 고개를 들었다.“왕비님, 창을 닫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왕야가 추워하시면요.”“여기서는 준비만 할 거예요. 치료는 왕야 방에서 하고요.”“그럼 이걸 다 옮길까요?”“필요한 것부터요. 뜨거운 그릇은 혼자 들지 마세요.”앵두는 이미 그릇 밑에 받침을 넣어 두었다. 양손으로 들어 보려던 것을 내려놓고 마른 천부터 바구니에 담았다.연화는 가죽 침통을 열었다. 물건이 빠지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 천으로 겉을 닦았다. 오래된 뚜껑 모서리가 자꾸 들떠 손바닥으로 눌러야 했다.“이건 제가 들게요.”앵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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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어의가 오는 날
연화는 내려놓은 숯연필을 다시 집었다. 쪽지 아래 빈 곳에 저녁 상태를 마저 적고, 젖은 천이 닿지 않는 선반 위로 옮겼다.“왕야께도 말씀드렸어요?”“노상 집사님이 가셨어요. 황후께서 몸이 걱정돼 보내신다고 했대요.”앵두는 문틀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연화의 얼굴을 살피느라 약곳간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쓰던 천부터 정리해 주세요. 내일 필요한 건 그대로 준비하고요.”“침도요?”“네.”연화는 침통의 끈을 묶었다. 가죽 뚜껑이 들뜬 곳을 눌러 넣자 앵두가 조금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마루로 나왔을 때 서쪽 방문이 열려 있었다. 노상이 물러나고, 왕야가 문 안쪽에 앉은 채 연화를 보았다.“들었나.”“네. 어의가 오신다고요.”“하던 대로 해.”연화는 침통을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어의가 오면 치료를 못 하게 할 수도 있어요.”“내 몸이다.”왕야는 문 옆에 놓인 마른 천을 집어 연화 쪽으로 내밀었다. 아직 덜 마른 침통 바닥을 받칠 만큼 넓은 천이었다.“네가 살피면 된다.”연화는 천을 받아 침통 밑에 둘렀다. 왕야의 손은 곧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그럼 오늘처럼 쉬세요. 어의가 온다고 몸을 더 쓰지는 마시고요.”“알겠다.”방문을 닫기 전, 왕야가 약곳간 쪽을 한 번 보았다.“남은 일은 앵두에게 맡겨라.”연화는 침통을 품에 붙여 들었다. 마루를 건너는 동안 가죽 바닥에서 물이 더 떨어지지는 않았다.◑봄 둘째 달 20일 아침, 노상은 안채 마루의 의자를 다시 닦았다.이미 먼지 하나 없는 등받이에 천이 한 번 더 지나갔다. 허리의 열쇠 꾸러미는 천으로 감싸 두어 움직여도 소리가 작았다.“여기서 보신답니까?”연화가 묻자 노상이 의자를 내려놓았다.“왕야께서 방으로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루면 충분하다고요.”“바람이 들면 문을 닫아 주세요. 손을 오래 내놓으셔야 하니까요.”노상은 마루 끝 창을 살피러 갔다. 연화는 낮은 상 위에 깨끗한 천을 펼쳤다. 한쪽에는 물그릇을 두고, 침통은 손이 닿는 곳에 놓았다.앵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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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남문 밖에 가는 날
연화는 마차 문을 닫으려던 노상 곁에서 걸음을 멈췄다.공석주는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손잡이를 놓지 않은 손이 조금 떨렸다. 연화가 마차 안을 보자 어의는 시선을 내려 가방의 고리를 만졌다.“어머니를 아세요?”공석주의 손가락이 멎었다.“궁에서 함께 일했습니다.”“제 손이 어머니와 닮았나요?”어의는 대답하기 전에 연화의 손을 다시 보았다. 연화는 소매를 당기지 않고 기다렸다.“환자 손을 받치는 모양이 닮았습니다.”공석주는 가방을 몸 가까이 끌어당겼다.“왕야께서 쉬셔야 합니다. 들어가 보세요.”연화는 더 묻지 않았다. 노상이 문을 닫자 마차 안의 얼굴이 가려졌다. 바퀴가 움직이고도 연화는 빈손을 내려다보았다.어머니의 손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왕야의 몸에 대해서는 병이라는 말만 남겼다.연화는 돌아서서 안채로 향했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쪽 방에 있었다.◑봄 둘째 달 25일, 약곳간 선반의 돌배잎 주머니가 가벼워져 있었다.연화는 주머니 입구를 벌려 남은 잎을 살폈다. 바닥에 부서진 잎이 조금 모여 있었다. 옆에 둔 노을뿌리는 아직 남았지만, 다음 치료를 준비하려면 약재를 더 들여야 했다.앵두가 비어 있는 바구니를 가져왔다.“노상 집사님께 말씀드릴까요? 필요한 건 사다 주실 거예요.”“제가 보고 고를게요. 잎이 오래 묵으면 냄새부터 달라져요.”연화는 바구니 안에 천을 깔았다. 약재가 섞이지 않도록 작은 주머니도 넣었다.“다녀오는 동안 쓰던 천만 말려 주세요. 손은 이제 괜찮아요?”앵두가 손등을 펴 보였다.“물 닿아도 안 따가워요. 어의 옷이 더 걱정이었는데요.”붉은 기가 거의 가신 손등을 보고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앵두는 바구니 손잡이를 바로 세워 놓고 창가의 천을 걷으러 갔다.연화는 침통을 챙겨 마루로 나왔다. 왕야는 서쪽 방문 앞에 앉아 신발을 신고 있었다. 소매가 내려온 손으로 신발 뒤축을 눌렀다가 손을 거두었다.“어디 가나.”“약재를 사려고요. 아침 진료를 마치고 나갈 거예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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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독 이름을 적는 날
“내일도 함께 걸으실래요?”연화는 왕부로 갈라지는 길을 보며 물었다. 왕야가 걸음을 늦췄다.“네가 나가면.”“약재를 사러 가는 건 아니에요. 마당부터 걸으시면 돼요.”“그럼 마당을 걷겠다.”석영이 뒤에서 바구니를 고쳐 들었다. 마른 잎이 천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연화는 다시 왕야와 걸음을 맞췄다. 이름을 불렀던 목소리는 더 이어지지 않았지만, 왕부 문에 닿을 때까지 둘 사이의 거리는 그대로였다.◑봄 둘째 달 28일 아침, 연화는 왕야가 내민 손을 바로 받지 않았다.손등은 전보다 덜 말라 있었다. 소매를 걷는 움직임도 편해졌다. 그러나 손톱 밑의 푸른빛은 햇볕 아래에서 더 선명했다.“어젯밤에는 저림이 어땠어요?”“줄었다.”“잠에서 깨지는 않으셨고요?”“깨지는 않았다.”연화는 손목 아래에 접은 천을 놓았다. 치료를 받으면 손끝이 따뜻해졌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다시 식어 있었다. 몸에 남은 독이 많은 것인지, 아직 들어오는 길이 있는 것인지 가려야 했다.맥을 짚는 동안 왕야는 다른 손도 상 위에 놓았다. 연화는 맥의 힘을 확인한 뒤 손끝을 가볍게 눌러 보았다. 전처럼 손가락을 급히 거두지는 않았다.“오늘은 발도 볼게요.”왕야가 옷자락을 걷었다. 발목에서 맥을 확인하고 차가운 발끝을 살핀 뒤, 연화는 침통을 열었다.침이 든 천을 펴는 소리가 났다. 왕야는 등을 기대고 앉아 연화가 치료를 마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이마에 땀이 맺히자 연화가 마른 천을 건넸다.“제가 다래골에 다녀와야겠어요.”왕야는 천을 받은 손을 멈췄다.“무엇 때문에.”“외할머니께 여쭤볼 게 있어요. 독의 이름을 알아야 해요.”“지금 치료로는 안 되나.”“도움은 되고 있어요. 하지만 왜 아침마다 다시 손이 차가워지는지 확인해야 해요.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도요.”왕야가 천으로 이마를 닦았다.“얼마나 걸리나.”“마차로 하루예요. 내일 아침에 떠나면 봄 셋째 달 1일에는 돌아올 수 있어요.”왕야는 창밖을 보았다. 마당을 쓸던 노상의 빗자루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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