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궁중 의녀 온연화는 황후의 죄를 뒤집어쓰고 옥에서 독주를 마셨다. 눈을 뜨니 열여섯 겨울, 살구골 약방 다락. 앞으로 올 역병도, 누가 누구를 독살할지도 안다. 시장에서 쓰러진 노인을 침으로 살리던 날, 손톱 밑이 푸른 남자를 만났다. 5년째 몸에 독이 쌓여 가는 월강왕 담해원. “1년 안에 나를 살려 내면 이혼장과 의원패를 주겠다.” 계약서 대신 진료 약속에 손도장을 찍었다.
Ver mais독주가 놓인 잔은 깨끗했다.
온연화는 잔 가장자리부터 보았다. 이가 나간 곳도, 오래 묵은 때도 없었다. 궁에서 의녀들에게 내주던 그릇보다 좋았다.
“마셔.”
옥졸은 잔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연화의 발목에 닿은 쇠사슬이 짧게 울렸다.
“유 소의께 드린 건 약이 아니었어요.”
대답은 없었다.
“저는 맥을 짚고, 열이 있다고 적었어요. 드신 것을 가져오라고 했고요.”
그날 적었던 종이는 어디로 갔을까. 내약원 책상에 두고 나온 진료 쪽지에는 유 소의의 손끝이 차다는 말도 있었다. 열이 있는데 손끝이 찼다. 이상해서 다시 살피려 했을 때, 사람들이 들어와 연화의 팔을 잡았다.
옥에는 그 종이 대신 죄를 적은 종이가 들어왔다.
유 소의를 독살한 의녀 온연화.
스물셋이 될 때까지 하루도 놓지 않았던 침통은 빼앗겼다. 지금 연화에게 남은 것은 머리를 고정한 긴 은비녀 하나였다.
복도 끝에서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났다. 옥졸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연화는 고개를 들었다.
황후 소씨가 옥문 앞에 서 있었다. 늘 보던 웃는 얼굴이었다. 내약원의 의녀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할 때도, 유 소의의 죽음을 듣고 입을 가렸을 때도 저런 얼굴이었다.
“아이야, 잔이 식겠구나.”
연화는 바닥에 놓인 잔을 보지 않았다.
“유 소의께서 무엇을 드셨는지 아시죠.”
황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옥문 사이로 연화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네 어미도 그렇게 조용했지.”
연화의 손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
어머니는 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말을 전하면서도 연화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궁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손은 차가웠고, 연화가 아무리 붙들어도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손의 차가움이 열일곱 해 뒤가 아니라,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해졌다.
“어머니도…….”
황후의 웃음이 조금 더 깊어졌다.
연화는 끝까지 묻지 않았다. 물어도 이곳에 적어 줄 사람은 없었다. 옥졸은 고개를 숙였고, 황후 곁의 사람은 복도 바닥만 보고 있었다.
연화는 잔을 들었다.
입 안에 쓴맛이 남았다. 빈 잔을 내려놓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손끝에 힘이 빠져 잔이 옆으로 기울었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황후는 그제야 돌아섰다.
옷자락 소리가 멀어졌다. 연화는 숨을 고르며 머리로 손을 올렸다. 긴 은비녀를 뽑자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어깨로 흘렀다.
어머니가 이 비녀를 꽂아 주던 날에도 머리가 이렇게 풀렸었다.
죽기 전, 어머니는 연화의 머리를 몇 번이나 다시 빗었다. 엉킨 곳 하나를 풀고도 손을 떼지 못했다.
“죽을 만큼 억울한 날이 오면 이걸 꽂아라. 한 번뿐이다.”
그때 연화는 어머니가 아파서 이상한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믿지 않았던 말을, 이제는 달리 붙들 것이 없어 믿었다.
연화는 은잠을 가슴 위 등불자리에 꽂았다.
옷감이 작게 찢어졌다. 아픔보다 먼저 숨이 끊겼다.
◑
감초 써는 소리가 들렸다.
탁, 탁.
연화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그 소리를 들었다. 칼이 도마에 닿는 간격이 고르다가, 가끔 조금 길어졌다. 아버지는 감초를 썰다 말고 손에 묻은 것을 앞치마에 닦곤 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연화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였다.
눈을 뜨자 낮은 천장이 보였다. 서까래 한쪽에 짧은 금이 있었다. 그 금을 따라 손톱으로 긁어 놓은 자국도 있었다. 어린 보름이 다락에 올라오다 연화에게 들켜 급히 숨긴 흔적이었다.
연화는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가벼웠다. 옥에서 걸쳤던 거친 옷 대신, 소매 끝을 여러 번 기운 잠옷이 팔을 덮고 있었다. 발목에는 쇠사슬도, 쓸린 자국도 없었다.
손부터 펼쳐 보았다.
손끝의 굳은살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손등에 있던 작은 흉터가 없었다. 궁에서 뜨거운 그릇을 받다 생긴 흉터였다.
연화는 손등을 문질렀다. 지워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살이었다.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살구나무 가지가 창 가까이 뻗어 있었다. 아직 잎은 없었다. 가지 끝마다 단단한 꽃눈이 맺혀 있었다. 바람이 불자 창틀을 긁던 가느다란 가지가 떨어졌다가 다시 닿았다.
연화는 무릎으로 이불을 밀어내고 창가로 갔다.
약방 앞길이었다. 맞은편 낮은 담도, 세 집 건너 떡집에서 피어오르는 김도 그대로였다. 황궁의 높은 담은 어디에도 없었다.
창 옆에 놓인 작은 거울을 들었다.
왼쪽 눈 아래의 점. 아직 둥근 뺨. 밤을 새워 진료한 흔적이 없는 눈가.
열여섯 살의 얼굴이었다.
연화는 거울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입술을 누르고, 턱을 만졌다. 손가락을 따라 거울 속 얼굴도 움직였다.
아래에서 서랍 닫는 소리가 났다.
“보름아, 언니 깨워라. 밥 식겠다.”
아버지 목소리였다.
연화는 거울을 놓쳤다. 거울이 이불 위로 떨어져 둔하게 울렸다.
사다리가 삐걱거렸다. 작은 손이 다락 바닥을 짚고, 보름의 얼굴이 올라왔다. 양쪽으로 묶은 머리가 한쪽은 높고 한쪽은 낮았다.
“언니, 오늘 늦게 일어났네.”
보름은 마지막 칸을 딛고 올라와 연화 앞에 앉았다. 무릎에 묻은 먼지를 손바닥으로 털었다.
연화는 그 얼굴을 오래 보았다.
궁에 들어간 뒤로 보름은 편지 속에서만 자랐다. 키가 컸다는 말, 혼자 심부름을 다녀왔다는 말, 이제 약재 서랍을 전부 외웠다는 말.
지금 눈앞의 보름은 아직 두 손으로 사다리를 붙들어야 했다.
“왜 그렇게 봐?”
보름이 제 뺨을 문질렀다.
“뭐 묻었어?”
“아니.”
연화는 보름의 기울어진 머리끈을 바로잡았다. 보름은 귀찮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오늘이 언제야?”
“오늘?”
“달하고 날짜.”
보름이 손가락을 폈다.
“겨울 셋째 달 20일. 아버지가 아까 장부 쓰면서 말했어.”
연화는 머리끈을 잡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봄 첫째 달 20일이면 열일곱이 된다. 그해 여름에는 의녀를 뽑는다. 연화가 약방을 떠나 궁으로 들어갔던 바로 그 여름이었다.
아직 선발되기 전이었다.
“언니, 어디 아파?”
보름이 가까이 기어 왔다.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려가자.”
몸을 돌리려는데 머리카락이 어깨에 걸렸다. 연화는 뒤통수로 손을 올렸다. 긴 은잠이 머리를 고정하고 있었다.
옥에서 뽑았던 바로 그 비녀였다.
은잠을 빼서 손바닥에 놓았다. 익숙한 길이와 무게였다. 몸통은 차갑고 매끈했는데, 끝만 검게 타 있었다.
연화는 엄지로 검은 부분을 문질렀다. 그을음이 손에 묻어나지 않았다.
“어머니 비녀 더러워졌어?”
보름이 들여다보았다.
“닦아 줄까?”
연화는 은잠을 손 안에 가볍게 쥐었다.
“괜찮아. 내가 할게.”
가슴 위를 옷 너머로 눌러 보았다. 상처도, 통증도 없었다.
아래에서 아버지가 다시 불렀다.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우리 딸, 밥 먹자.”
연화는 은잠을 머리에 꽂고 사다리 쪽으로 갔다. 내려가는 보름의 뒤통수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로 다음 칸에 발을 디뎠다.
◑
아버지는 밥상 앞에서 연화의 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감초 물이 배어 있었다. 짧은 수염에 붙은 가루를 털지도 않은 채, 연화가 앉자 그릇을 앞으로 밀어 주었다.
“많이 잤네. 밤에 추웠어?”
연화는 밥그릇 가장자리를 잡았다. 따뜻했다.
“잘 잤어요.”
말이 조금 늦게 나왔다. 아버지가 얼굴을 들여다보자 연화는 숟가락을 들었다.
“꿈을 꿔서요.”
“나쁜 꿈?”
연화는 밥을 삼킨 뒤 대답했다.
“끝났어요.”
아버지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연화 쪽으로 반찬 그릇을 옮겼다. 보름이 그 그릇을 제 쪽으로 조금 당겼다가 아버지에게 손등을 가볍게 잡혔다.
“언니도 먹어야지.”
“언니는 맨날 내가 많이 먹는대.”
“오늘은 안 그래.”
연화가 말하자 보름이 눈을 크게 떴다. 이내 숟가락으로 제 밥을 조금 떠 연화 그릇에 얹었다.
“그럼 언니도 많이 먹어.”
연화는 그 밥을 밀어내지 않았다.
밥상 너머로 약재 서랍이 보였다. 작고 낡은 서랍마다 번호가 붙어 있었다. 궁의 내약원처럼 반듯하지는 않았다. 자주 여는 서랍은 손잡이 빛깔부터 달랐다.
부엌에서는 물이 끓었다. 문밖으로는 장바구니 든 사람들이 지나갔다. 누군가 약방 앞에 잠깐 멈춰 간판을 올려다보다 길을 건넜다.
연화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빈 그릇을 확인했다.
먹었다. 삼켰다. 배 안에 따뜻한 것이 남았다.
“오늘 내가 그릇 치울게.”
보름이 먼저 일어나더니 빈 그릇을 겹쳤다. 아버지가 너무 높이 쌓지 말라고 하자, 보름은 맨 위의 그릇을 연화에게 내밀었다.
연화는 받아 들었다. 보름과 나란히 부엌까지 걸어가 그릇을 놓았다. 보름의 어깨가 팔꿈치에 자꾸 닿았다.
그 작은 부딪침이 있을 때마다 연화는 걸음을 늦췄다.
아버지는 식사를 마치고 다시 감초 앞에 앉았다. 연화는 진료 자리에 놓인 물건을 살폈다. 깨끗한 천을 넣어 둔 함, 손 씻는 대야, 오래 써서 뚜껑이 헐거워진 침통.
어머니가 쓰던 침통이었다.
연화가 손을 올리자 뚜껑이 조금 들렸다. 궁에서 빼앗겼을 때는 돌려 달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이번에는 손 안에 있었다.
“언니.”
보름이 서랍 앞에서 불렀다.
“나랑 놀이하자.”
“무슨 놀이?”
“번호 말하면 이름 맞히는 거. 내가 먼저 낼게.”
전에도 늘 하던 놀이였다. 연화는 약재를 정리해야 한다며 보름을 돌려보내곤 했다. 보름은 혼자 서랍 손잡이를 짚으며 답을 중얼거렸다.
오늘은 연화가 의자를 끌어 앉았다.
“내 봐.”
보름이 신이 나서 발뒤꿈치를 들었다.
“37번!”
“돌배잎.”
“너무 빨라. 생각하고 말해야지.”
“아는 걸 어떻게 생각해?”
보름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서랍 앞으로 돌아가 번호를 훑어보더니 이번에는 손으로 숫자를 가렸다.
“이거.”
“번호가 안 보이는데.”
“맞혀 봐.”
연화는 웃음을 삼키고 서랍을 보았다. 모서리가 닳은 곳, 손잡이 아래 약재 가루가 조금 붙은 곳이었다.
“감초.”
보름이 손을 뗐다. 맞힌 것이 못마땅한지 입술을 내밀었다.
“아버지가 방금 열었잖아.”
“그러니까 기억해야지.”
도마 앞의 아버지가 웃었다. 보름은 이번에는 연화의 등을 서랍 쪽으로 돌려 앉혔다. 열고 닫는 소리만 듣고 맞혀 보라는 뜻이었다.
연화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모르는 척도 해 보았다. 보름이 서랍에서 돌배잎을 꺼내 코앞에 가져왔을 때는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았다. 마른 잎 냄새에 서랍의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다.
“돌배잎.”
“이건 맞혀도 돼.”
“왜?”
“내가 잘 꺼냈으니까.”
보름은 답을 맞힌 연화보다 더 크게 웃었다.
도마 쪽에서 칼이 멈췄다.
“아.”
아버지가 손을 내려다보았다. 감초를 잡고 있던 손가락에 피가 맺혔다.
연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아버지는 벌써 앞치마에 손을 닦으려 하고 있었다. 연화가 손을 들어 보이자 동작을 멈췄다.
“별거 아니다. 조금 베었어.”
“먼저 볼게요.”
연화는 상처와 아버지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상처는 길지 않았다. 얼굴색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손을 피하려는 움직임에는 힘이 있었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닐 듯했다.
연화는 아버지 손을 받아 들었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 불편한지 묻고, 손목에서 맥을 확인했다. 손끝에 익숙한 박동이 닿았다. 놀라 조금 빨라졌지만 고르게 이어졌다.
그제야 깨끗한 천을 가져와 상처를 돌보았다.
보름이 옆에서 함 뚜껑을 붙들어 주었다. 평소라면 천을 꺼내며 장난부터 쳤을 텐데, 이번에는 연화의 손만 보고 있었다.
“아버지, 오늘은 제가 썰게요.”
“이 정도로 일을 못 할까.”
“계속 벌어지면 더 오래 쉬셔야 해요.”
연화가 손을 놓아 주지 않자 아버지는 칼에서 멀찍이 손을 뺐다.
“말하는 게 꼭 네 어머니 같다.”
연화는 천 끝을 정리했다.
“불편하면 말씀하세요.”
아버지는 감싼 손가락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보름은 빈 의자를 끌어와 아버지 옆에 붙였다.
“나는 안 다쳤으니까 서랍 정리해도 되지?”
“무거운 건 언니 불러.”
아버지가 말하자 보름은 바로 서랍 쪽으로 달려갔다.
연화는 진료 자리의 종이를 한 장 당겼다. 숯연필을 쥐자 손가락이 먼저 제자리를 잡았다.
『아버지 손가락 베임. 움직임 괜찮음. 맥 고름. 상처 돌봄.』
짧게 적고도 종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죄를 적은 종이가 아니었다. 누군가 아팠고, 살폈고, 돌본 기록이었다. 아버지는 바로 옆에서 보름에게 서랍을 세게 닫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연화는 종이를 접어 침통 아래에 두었다.
◑
저녁까지 연화는 약방 안에서 움직였다.
보름이 잘못 넣은 돌배잎을 제 서랍에 돌려놓고, 손 씻는 대야의 물을 갈았다. 아버지가 감싼 손을 불편해하면 대신 물건을 들어 주었다.
해가 기울자 보름은 서랍 놀이를 다시 하자고 졸랐다. 연화는 진료 자리의 의자를 끌어 주었다. 보름은 이번에는 자기가 답을 맞히겠다며 눈을 감았다.
틀려도 웃고, 맞혀도 웃었다.
연화는 마지막 서랍을 닫을 때까지 보름 곁에 앉아 있었다.
밤이 되어서야 다락으로 올라왔다.
아래에서 아버지가 문빗장을 걸었다. 보름은 졸린 목소리로 내일도 놀자고 말했다. 연화가 그러자고 답하자 사다리 아래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다락에는 작은 등잔만 켜져 있었다.
연화는 이불 위에 앉아 낮에 쓴 종이를 펼쳤다. 아버지의 맥을 적은 줄을 다시 읽었다. 손끝에는 아직 그 박동이 남아 있는 듯했다.
여름이 오면 궁에서 사람을 보낼 것이다.
전에는 아버지가 울면서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의녀로 뽑히는 것은 약방집 딸에게 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연화도 침통을 챙겨 궁으로 갔다.
이번에는 아직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연화는 종이를 뒤집었다. 빈 뒷면 위에 숯연필을 대었다가 내려놓았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오늘 아침의 얼굴. 멀쩡한 가슴. 검게 탄 비녀 끝.
꿈이라고 하기에는 아버지 손에 감아 둔 천이 남아 있었다. 보름이 내일 하자던 놀이도 남아 있었다.
연화는 버릇처럼 제 손목에 손가락을 올렸다.
샘골 가까이에 손끝을 얹고 기다렸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손을 떼었다가 다시 짚었다. 반대편 손목도 확인했다. 손끝은 따뜻했고, 손가락도 뜻대로 움직였다. 숨도 막히지 않았다.
그런데 박동만 없었다.
연화는 등을 곧게 펴고 한 번 더 기다렸다. 낮에 아버지의 맥을 짚을 때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손을 받아 든 순간부터 또렷하게 느껴졌다.
‘제 맥만 안 잡힌다.’
연화는 손목을 내려놓았다. 머리에서 은잠을 빼 등잔 가까이 가져갔다.
은잠의 탄 끝이 등잔 빛에 검게 빛났다.
(1화 끝)
붓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해원은 벼루에 묻힌 먹을 가볍게 덜어 내고 연화를 보았다.“언제 청하면 되나.”“아침에요. 밤새 쓰느라 진료 시간 놓치시면 안 돼요.”“길게 쓰지 않겠다.”연화는 책상 옆에 놓인 종이를 보았다. 죽은 뒤에 남길 일을 적었던 글 묶음은 이제 아래 칸에 들어가 있었다. 같은 붓 앞에 빈 종이가 놓여 있었다.“그 붓으로 쓰실 거예요?”해원이 붓대를 돌려 보였다. 손가락이 오래 닿은 부분은 색이 조금 옅었다.“다른 것을 가져올까.”“아니요. 그게 좋아요.”연화는 의원패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원이 문까지 따라와 열어 주었다.“아침에 기다려.”“저를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해원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연화가 돌아서기 전에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나무 패의 자국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엄지가 그 자리를 다시 쓸었다.“잘 자.”연화는 손을 놓고 문턱을 넘었다.복도 끝에 이르러 돌아보니 해원이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연화가 자기 방 문을 열자 그제야 밤글방 문이 닫혔다.◑봄 둘째 달 15일 아침, 창 아래에서 보름의 목소리가 들렸다.“언니, 나 준비됐어.”연화가 창을 열었다. 보름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들고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 머리 양쪽에 맨 끈이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머리는 누가 해 줬어?”“내가. 아저씨는 아침부터 글 쓰고 있어.”“아직도?”“먹 묻은 손으로 나한테 기다리라고 했어.”연화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서 보름의 머리끈을 바로 매 주고 밤글방으로 향했다.문은 열려 있었다.해원은 붓을 씻어 천 위에 놓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쓴 종이가 몇 장 쌓였고, 맨 위에 놓인 한 장만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연화는 문턱에 서서 눈 밑부터 살폈다.“밤새 쓰셨어요?”“조금 잤다.”“얼마나 조금인지 묻지는 않을게요. 손 주세요.”해원이 의자를 빼 주었다. 연화는 앉지 않고 그 손을 창 쪽으로 데려갔다. 손톱 끝에 남은 푸른빛은 어제와 같
연화는 맥안을 품에 안고 해원을 보았다.황제 앞에 내려놓았던 해원의 손은 그대로였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끝에 아직 푸른빛이 남아 있었다.“의원패는 내약원에 미리 일러 두겠다.”황제가 말했다.“여자가 받을 수 있는 법이 있는데도 쓰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그 법도 함께 알리겠다.”연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맥안을 감싼 천이 손목에 닿았다. 어머니 이름을 되찾은 날, 자신의 이름으로 의원을 열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작은 방을 나와 마차에 오르자 해원이 맥안을 받아 무릎 위에 놓았다.“천이 풀렸다.”연화가 내려다봤다. 바깥으로 나온 천 끝을 해원이 접어 넣었다.“제가 너무 세게 잡았나 봐요.”해원은 매듭을 다시 묶고 돌려주었다. 연화가 두 손으로 받자 손끝이 잠깐 닿았다.“손이 차다.”“집에 가서 따뜻한 물 마실게요.”해원이 마차 창을 닫았다. 연화는 천 위에 손을 펴고, 왕부에 닿을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겨울을 지나 봄 둘째 달 14일이 되었다.왕부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누워 있었다. 뿌리를 감싼 천에 흙이 젖어 있었고, 가는 가지 끝마다 꽃봉오리가 붙었다.연화는 가지가 바닥에 눌리지 않도록 받쳐 들었다.“여기까지 들어오면서 꺾인 데는 없죠?”“제가 팔을 이렇게 하고 왔습니다.”석영이 양팔을 벌려 보였다. 옆에서 노상이 삽을 내려놓았다.“나무보다 자네가 더 걸리적거렸네.”“담에 닿을까 봐 그런 겁니다.”“담은 그대로 있고 내 어깨만 부딪혔지.”앵두가 뿌리에 두를 천을 걷다가 웃음을 삼켰다. 보름은 두 사람의 말을 듣지도 않고 파 놓은 구덩이 안을 살피고 있었다.“언니, 조금 더 파야 돼.”“왜?”“뿌리가 저만큼 긴데 접히면 안 되잖아.”보름이 손으로 길이를 재 보였다. 연화는 나무 밑동을 내려놓고 구덩이 곁에 앉았다. 노상이 판 곳은 넓었지만 한쪽에 작은 돌이 남아 있었다.“저것만 꺼내면 되겠다.”보름은 기다렸다는 듯 흙을 걷어 냈다. 돌을 들어 옆으로 옮기고 손바닥을 털었다.
“황후의 궁인들은 자란궁 밖으로 물러나라. 기록과 물건을 옮기는 일도 금한다.”황제의 말이 대전 끝까지 닿았다.문 곁의 관리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 뒤에 서 있던 소 가문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지만, 누구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서 의녀의 죽음을 병사로 적은 기록부터 다시 살피겠다. 어의는 자신이 본 일과 숨긴 일을 빠짐없이 써서 내라.”공석주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제 이름을 빼지 않겠습니다.”황제는 유 소의에게 보낸 보약 그릇을 가리켰다. 채란이 가져온 물건과 그릇을 바꿔 둔 경위가 적힌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시녀장도 따로 두어라. 누구의 명을 받았든, 해로운 것을 들고 간 일부터 물을 것이다.”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곁에 선 궁인이 부축하려 했지만 긴 손톱이 그 손을 밀어냈다.“제 아들이 듣고 있습니다.”황제는 태자를 보았다. 예성은 옷자락을 쥔 손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알고 있다.”“그 아이 앞에서 어미를 죄인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까.”“아이의 죄가 아니다.”황제는 태자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라.”예성은 어머니를 돌아봤다. 황후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잠깐 뒤, 태자가 단 아래로 걸어갔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에서 손을 뗐다. 해원이 접힌 천을 펴 주었으나 기록을 다시 싸지는 않았다. 이제 그 종이는 황제 앞에 남아 있어야 했다.황후가 대전 문으로 향했다. 궁인들이 따라 움직였고, 소 가문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연화 곁을 지날 때도 황후의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다만 연화를 부르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연화는 열린 맥안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어머니가 눌러 쓴 이름과 날짜가 가려진 데 없이 드러나 있었다.해원이 옆에서 물었다.“더 놓고 갈 것이 있나.”“없어요.”“그럼 가자.”연화가 빈 천을 접자 해원이 받아 들었다. 대전 문을 나설 때까지 천을 연화에게 돌려주지 않았다.◑가을 둘째 달 20일 아침, 왕부 앞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가 났다.앵
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덮은 천 끝을 안으로 접었다. 황궁의 사자가 나간 뒤에도 마루에는 발소리가 잠깐 남았다.해원이 기록 묶음을 들어 책상 안쪽에 놓았다.“그날 네 말을 끝까지 듣게 하겠다.”“듣고 확인하게 해 주세요. 제 말만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해원은 맥안 곁에 놓인 돌뜰 확인 요청을 집었다. 다른 종이 사이에 넣지 않고 맨 위에 얹었다.◑가을 둘째 달 15일 아침, 연화는 마차에 오르기 전 해원의 소매를 붙들었다.“손부터 볼게요.”해원은 왕부 마루에 앉았다. 궁에 갈 겉옷을 입었지만 소매는 바로 걷었다. 연화는 손톱 밑의 색을 살피고 얼굴을 올려다봤다. 밤새 글을 읽느라 눈가에 피로가 남았지만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손끝은 어떠세요?”“저리지 않는다.”“잠은요?”“잤다.”오래 앉아 있으면 손이 다시 차가워질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흐름이 고르고, 손가락을 폈다 접을 때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손등을 가볍게 눌러 살핀 뒤 준비한 침을 꺼냈다.침통을 여는 소리가 조용한 마루에 울렸다. 해원은 바깥에서 기다리는 호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연화가 치료를 마치고 손끝이 따뜻한지 다시 확인할 때까지 팔을 편히 두었다.“대전에서 오래 서게 되면 말씀하세요.”“너도.”“저는 기록을 읽을 거예요.”“읽는 동안 옆에 있겠다.”연화는 침통을 닫고 쪽지를 적었다.『월강왕. 손끝 온기 유지. 맥 고름.긴 외출 예정. 피로와 저림 살필 것.』쪽지를 묶음 안에 넣자 해원이 천으로 감싼 맥안을 들었다. 연화가 손을 내밀었지만 바로 건네지 않았다.“마차까지 내가 들겠다.”연화는 빈손으로 마루를 내려갔다. 해원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황궁 마당에서 염소 우는 소리가 났다.연화는 마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멈췄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 석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고삐 대신 염소 줄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서 할매의 치맛자락을 따라 돌계단 쪽으로 가려 했다.“할머니.”서 할매가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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