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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적매화
소한이 손에 든 약재 함을 내려다보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임학은 불안한 듯 재촉했다.

“금일 전하께서 궐에 들라는 전교를 내린 적 없는 줄로 아네만, 혹 김단을 마중간 것이오?”

임학은 소한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였고 눈빛만 봐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임학이 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제정신이오? 전에 김단이 좋다고 매달릴 땐 미동도 하지 않던 인간이, 원이의 정혼자가 된 지금 다시 김단에게 흔들리는 게 정상이오? 내 누이들을 불장난에 끌어들일 생각 마시게! 그땐 우리의 우정도 끝날 테니.”

소한은 조롱 어린 시선으로 임학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내가 보기엔 자네야말로 첫째 누이를 신경을 쓰는 것 같군.”

사실 소한의 말처럼 누구보다 김단을 신경 쓰는 것은 임학이었다.

자기 마음을 정확히 꿰뚫는 소한의 말에 임학은 목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고고한 척하지 마시오. 3년 전 그날, 그 자리에 자네도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저 아이는 날 원망하기도 하지만, 자네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소한이 서늘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마차 안에 있던 수정과는 건드리지도 않더군.”

수정과는 고사하고 난로조차 건드리지 않았다.

만약 큰 마님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소한의 마차에도 올라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소한을 보자마자 예를 갖춰 인사하며 거리를 뒀다.

전처럼 만나서 좋다며 인사하지도 않았고 그를 연모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던 소한은 마음이 어지러웠다.

누구보다 소한에게 다정했던 누이가, 소한을 연모하던 누이가 더는 그에게 미련 없이 돌아섰다는 말에 임학도 큰 충격을 받았다.

누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딴사람이 되자, 임학도 상당히 놀랐다. 그녀의 발에 가득 자리 잡은 흉터들이 떠오른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세답방 궁인에게 화가 났다.

공주자가의 명이라 할지언정, 김단은 진산군의 여식이었다.

임학은 불편한 기색을 띠며 소한을 흘겨보았다.

“전쟁터에서 사용하던 치료 약을 가지고 왔소?”

소한이 사용하는 치료약은 약왕곡이 조제한 것으로 효과가 매우 탁월했다.

“없소.”

소한은 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다친 다리에는 이 약주가 유용할 것이오.”

“고맙소.”

약병을 덥석 쥔 임학은 곧장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돌아온 그는 대뜸 소한의 멱살을 잡았다.

“선 넘지 말게!”

입꼬리를 살짝 올린 소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임학을 마주 보았다.

‘알아서 하겠소.’

소한의 눈빛을 알아차린 임학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네 말 대로 내 자네를 통제할 순 없을지언정, 내 누이를 통제할 순 있네.’

차갑게 그의 손을 쳐낸 소한은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몸종에게 약재 함을 전달했다.

“큰 마님께 드리거라.”

말을 마친 소한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종사관이었던 정암이 진산군 관저 밖에서 소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이리 빨리 나오신 겁니까?”

소한은 말없이 품에서 약병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임원 낭자에게 전하거라.”

“네.”

정암은 궁금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아씨께서 다치셨습니까? 장군님께서 직접 전해주시지 않으시고요?”

소한이 정암을 싸늘하게 쳐다보자, 정암은 알겠다는 듯 더는 묻지 않았다.

임원에게 주는 약이 아님을 눈치챈 것이다.

정암은 곧장 진산군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숙희는 의원에게 받아온 치료 약을 조심스레 김단에게 발라주었다.

연신 눈물을 훔치며 약을 바르는 숙희 때문에 김단은 살짝 당황했다.

“그만 울 거라. 누가 보면 내가 널 괴롭히는 줄 알겠구나.”

그녀의 말에 눈물을 닦은 숙희가 목이 멘 듯 말했다.

“아씨, 고생 많으셨습니다.”

임학의 몸종이 자신의 상처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던 김단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숙희가 이내 억울한 듯 다시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서도 너무하십니다. 아씨께서 이리도 고생하셨는데, 온몸에 성한 곳 하나 없으신데, 어찌하여 둘째 아씨의 편만 드시는 겁니까? 쇤네가 억울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또다시 눈물을 쏟아내는 숙희 때문에 김단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 들으시고 널 잡아다가 문초라도 하면 어쩌려고?”

“쇤네가 아씨의 별당에 온 이상, 이젠 아씨의 사람입니다. 도련님께서 쇤네 같은 것에 신경 쓰실 리 없습니다.”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닦은 숙희가 말을 이었다.

“도련님을 좋은 분이라 여긴 쇤네가 멍청이입니다!”

김단은 자기 일인 양 흥분하여 말하는 숙희가 마냥 신뢰가 가지 않았다.

진정으로 자기를 걱정하여 하는 소리 인지, 아니면 등 뒤에 칼을 꽂기 위해 신뢰를 얻으려 하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가장 친밀하고 가장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배반당한 그녀는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이 자신을 위해 말을 해주는 것이 믿음직스러울 리 없었다.

사람의 진심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먼일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한, 이 세상에서 조모님을 제외한 모두가 그녀를 배반했기 때문이다.

눈물범벅이 된 숙희를 말없이 쳐다보던 그녀는 결국 시선을 돌려버렸다.

반쯤 열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연못의 돌다리 위로 두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한 명은 임학의 몸종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우람진 체격의 사내였다.

걸음걸이를 보아 낯익었지만 뚜렷하게 떠오르진 않았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숙희도 슬며시 밖을 바라보았고 이내 놀란 듯 말했다.

“저분, 정암 종사관 나리 아니세요?”

“정암 종사관?”

그제야 5년 전부터 소한이 데리고 다니던 가장 믿음직스러운 수하가 떠올랐다.

‘저 사내가 어찌 여기에?’

김단은 자기도 모르고 싸늘하고 고고하던 소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슴에 미세한 전율이 돌았다.

“여기까지 온 연유가 무엇인지 알아보거라.”

“네.”

숙희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몇 마디 대화를 한 뒤, 정암은 숙희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을 김단이 지켜보았다.

창을 통해 이 장면을 지켜보던 그녀와 정암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고 정암은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숙희는 손에 두 병의 약병을 들고 다시 들어왔다.

“아씨, 장군님께서 치료 약을 주셨답니다. 이것은 도련님께서 주신 약주입니다. 둘 다 군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이 막역한 사이이니, 오라버니의 손에 이 약이 있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지. 하나 내게 이것을 주는 연유가 무엇이냔 말인가? 내가 걱정되어서 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속죄를 덜기 위함인가?’

‘특히 오라버니는… 당근과 채찍을 주는 것도 아니고…’

“네가 가지거라.”

김단은 두 사람의 약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차가운 얼굴로 단호하게 말하는 김단 때문에 숙희는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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