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이 진산군 댁으로 돌아온 이유는 물론 스승인 의원을 만나기 위함이었다.그렇기에 그녀는 오늘의 방문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진산군 댁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막지는 않았지만, 다급히 진산군에게 보고를 올리러 갔다.김단은 이에 개의치 않아 하며 곧장 의원을 찾아갔다.안채에 들어서자, 짙은 약초 향기가 풍겨왔다. 김단은 약방을 향해 소리쳤다. “스승님, 무엇을 달이시길래 이렇게 향이 좋은 것입니까!”김단의 목소리를 들은 의원은 한걸음애 달려 나왔다. 김단을 보자 그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어제 큰 도련님이 돌아온 걸 보고, 분명 너도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땠느냐? 변방은 재미있었느냐?”“재미없었습니다! 거기서 죽을 뻔했습니다!” 김단은 일부러 의원을 약올렸다.그럼에도 의원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평양원군이 널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겠지.”김단은 깜짝 놀랐다. 의원마저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터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스승님도 알고 계셨습니까?”“어찌 모를 수 있겠느냐? 그날 대군의 서신이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진산군께서 격노하시어 평양원군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주제 넘게 어린 낭자를 탐한다고 욕하셨다!”그 말을 들은 김단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의원의 말이 이어서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난 나이가 있는 사람일 수록 사람을 아낄 줄 안다고 생각한다!”이 말을 들은 김단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스승님께서 좋게 생각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참, 스승님, 약왕곡의 주인을 만났습니다.”그 말을 듣자 의원의 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되려 긴장감이 돌았다. “언제 말이냐? 네, 네가 약왕곡에 간 것이냐?”“아닙니다!” 김단은 고개를 저었다. “길상진에서 그 자를 만났습니다. 약 파는 노인으로 변장하고는 상흔 약과 독약을 팔고 있었습니다. 제가 호기심에 몇 마디 질문해보니, 과연 약왕곡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분명 변
소한은 한양을 떠나기 전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그래서 소하가 그토록 걱정하는 것이고, 김단이 한양으로 돌아자마자 이곳으로 찾아와 그녀에게 서신을 써 주기를 부탁한 것이다.하지만 김단에게 이 서신은 훗날 소한과 얽히게 되는 도화선이 될 것이기에, 그녀가 쓰지 않으려는 것을 그 역시 이해할 수 있었다.부디 소한이 김단의 말처럼 전장에서 이성을 되찾고, 모든 상황에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김단이 평양관저에 돌아온 것은 한 시진쯤 뒤였다.최지습도 이미 돌아와 있었다.물론 고지운도 함께였다.김단을 보자 고지운은 단숨에 뛰어와 그녀를 맞이했다. “낭자, 낭자네 주상께서는 참으로 상냥하시오! 이곳에서 낭자와 함께 지내도 된다고 허락하셨소!”“그게 정말입니까?”김단의 얼굴에도 기쁨이 번졌다. 김단은 내심 고지운이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궁에 머무르게 되면 오히려 불안했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때 최지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께서 조선에 동무가 낭자 한 명뿐이라며, 혼례를 치르기 전까지 낭자와 함께 지내고 싶다고 하셨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주상 전하께서 많이 신경을 써주신 듯합니다.”적어도 이 일에 대해서 만큼은 신경을 써준 게 확실했다.고지운은 한참을 웃었고, 시선은 자연스레 김단과 최지습의 얼굴을 오갔다.이내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황급히 김단에게서 떨어져 멋쩍게 웃었다. “대군께서 내게 거처를 마련해 주셨다고 하였소. 내 가서 거처를 확인하고 와야겠소. 나중에 다시 놀러 오겠소!”말을 마친 고지운은 다시 숙희의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렸다. “우리 예쁜 숙희, 나랑 같이 가서 확인해 보자구나!”숙희가 어찌 이런 미인의 애교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숙희는 이내 마음이 약해져 애처롭게 김단을 바라보았다.김단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고, 그렇게 고지운과 숙희는 손을 잡고 떠났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김단은 어딘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최지습은 당연히 이를 눈치채고 그녀에게 물었다.
사실 이것이 소하가 김단을 찾아온 목적이기도 했다.물론 그녀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형으로서 어떻게 그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나?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떠나기 전 소한의 상태를 고려하였을 때, 그는 정말 소한이 전장에서 실수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갈 때는 멀쩡히 걸어 나갔지만, 돌아올 때는 시신뿐일까 봐 걱정하였다.김단은 소하의 심정을 이해했고, 공감했다.이에 그녀가 물었다. “오라버니는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소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가능하다면, 낭자가 한이에게 서신을 한 통 써 주었으면 하오. 그 아이가 마음을 다잡고, 이 전쟁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말이오.”사실 이 요구는 그다지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서신 속 내용은 아무렇게나 써도 좋았다. 그저 소한을 잠시라도 안정시킬 수만 있다면 말이다.사탕 발린 말을 할 필요도, 그를 속일 필요도 없었다.하지만 김단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오라버니도 아시겠지만, 소한 오라버니의 성격 상 서신 한 통이면 충분히 오해를 하시고도 남습니다.”아무리 평범한 내용의 서신이라도, 심지어는 글자 하나 없더라도, 그녀가 보낸 것이라면 소한은 엉뚱한 생각을 가질지도 모른다.심지어 그것이 그녀가 보낸 일종의 암호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그가 전쟁에서 이길지 몰라도, 돌아오게 되면 한없이 그녀를 붙잡아두려 할 것이었다.소하의 눈빛에 걱정이 스쳤다.그 역시 소한이 무척 집착하는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러니 김단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그때 김단의 말이 들려왔다. “게다가, 소한 오라버니께서는 쌓아 둔 공이 하늘 찌르는 젊은 장군이시지 않습니까? 그 해 오라버니께서 변을 당하셨을 때도, 소한 오라버니께서 소씨 가문을 지키시지 않았습니까? 수차례의 고된 전투로 돌궐족을 물리치고, 수년간 우리 조선 백성들의 평화를 지키신 분입니다. 그러니 오라버니께서도 소한 오라버니를 믿으셔야 합니다.”아무리 망나니 같아도, 조선과 백성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
소하가 가리키는 사람은 소한이었다.김단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소하를 바라보았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한번 마음먹은 이상, 쉽게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마치 과거 정암에게 마음을 굳혔을 때처럼, 갖은 핍박과 멸시에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그러니 지금의 소한은 물론이고, 심지어 주상까지도 그녀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한이는 지금 한양에 없소.”소하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김단은 또 한번 당황했다.하지만 그녀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소한이 왜 한양에 없는지, 어디로 갔는지, 전부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그러나 소하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병력을 이끌고 화성으로 갔소.”“화성이라니요? 당국의 변뱡아닙니까?”김단은 속으로 크게 당황했다. “언제부터 당국과 전쟁을 한 것입니까? 제 기억에 과거 소한 오라버니께서 당국이 조선과 화친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다시 싸우게 된 것입니까?”듣기로는 공주를 통해 화친을 가지려 하였고, 이에 서원 공주는 서둘러 시집을 가고 싶어 안달이 나 그녀에게 약을 만들게 하여 소한에게 손을 쓰도록 한 것이었다.그런데 어쩌다 갑자기 싸움이 벌어진 것일까?소하는 김단의 구겨진 표정을 보았다. 그저 두 나라의 전쟁에 대한 걱정뿐이었고, 소한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았다.저도 모르게 옅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김단에게 있어 과거는 너무나 끔찍했기에, 일찍이 그곳에서 벗어났다.하지만 소한에게 있어 과거는 어쩌면 일평생 중 가장 아름다운 기억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 안에 갇혀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공주 교환을 통한 화친에 대한 일이 어떻게 서원 공주의 귀에 들어간 것인지는 모르겠소. 어쩌면 처음부터 거짓된 소문일 수도 있고, 실제로 오갔던 얘기지만 변수가 생겼을 수도 있소.”소하는 천천히 말한 뒤 한숨을 쉬었다. “절묘하게도, 대군의 서신이 한양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화성에서 전쟁이 터졌소. 그래서 한이가 곧장 병력을 이끌고
“오라버니!”김단이 경쾌한 목소리로 소하를 부르며 그에게 걸어갔다.소하는 그 자리에 서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오늘 대군을 따라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들었소. 마침 나도 당직이 아니라 보러 온 것이오.”소하가 천천히 말했다. 그의 맑고도 처연한 시선은 자연스레 붉은 매화나무로 향했다. “정말 예쁘게도 피었소.”김단은 어느덧 소하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소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붉은 매화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온화함과 평온함이 가득했다. “네, 정말 예쁘게 피었습니다.”“평양원군과의 일에 대해서 들었소.”소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김단은 순간 멈칫하고는 고개를 돌려 소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보였다.소하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어려 있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퍽 잘 된 일이오. 적어도 대군이라면, 안심할 수 있소.”적어도 그는 최지습의 인성과 능력을 알고 있었다.김단을 최지습의 손에 맡기니, 그는 비로써 안심할 수 있었다.단지...이에 기뻐하는 동시에, 가슴속에는 여전히 시큰하고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이었고, 후회였다.그는 과거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김단이 이런 소하의 마음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그녀의 마음속에 소하는 평생의 은인이며, 한때 자신을 곤경에서 구해주어 소한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사람이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억지로 꾸며낼 수 없는 법이다.더군다나 그와 소한은 친형제이니, 그 관계만으로도 그들이 함께할 수 없도록 정해진 것일지도 모른다.이에 김단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아, 그 금강보리 염주 말입니다. 아직도 차고 계십니까?”소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차고 있소.”“한번 보겠습니다.”김단은 이 기회에 소하의 맥을 만져, 한빙산의 독이 어느 정도까지 퍼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김단의 손이 그의 손목에 닿기도 전에 소하가 손을 거두었다.입가에는 미
숙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어붙으며 돌연 조용해졌다.경씨는 고객을 끄덕이더니 이내 마차를 몰아 저택으로 향했다.어쩐지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것 같았다.저택 앞에 서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나무 대문을 바라보자, 김단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얼마 지나지 않아 왕철이 문을 열었다.김단을 본 왕철은 곧장 기뻐하며 말했다. “아씨?! 드디어 돌아오셨군요!”왕철은 그렇게 말하며 김단을 맞이하고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김단은 자연스럽게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그때 왕철이 말했다. “소인이 매일같이 마당을 깨끗이 쓸고, 아씨와 숙희 누이 방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부자리도 며칠에 한 번씩 햇볕에 말려두었습니다. 혹시라도 아씨께서 돌아오실까 해서 말이죠!”그는 과거 김단으로부터 저택을 지키라는 부탁을 받은 뒤, 모든 집안 일을 꼼꼼하고 깔끔하게 처리하고 있었다.김단은 그것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을 너에게 맡기니 안심이 되는구나.”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왕철이 그녀를 따라가려 했으나, 숙희가 제지했다.숙희는 천천히 고개를 저은 뒤 김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김단은 정원 쪽으로 향하였다. 그 곳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찬 바람을 타고 희미한 꽃향기가 날아왔다.정원에 들어서자 붉은 매화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가지 가득 피어난 붉은 매화는 피처럼 붉은 색을 띄었다.꽃은 하얀 눈을 배경으로 더욱 요염한 자태를 뽐냈다.김단도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정암이 정성껏 심은 나무이니, 분명 꽃이 만개할 것이라고 말이다.하지만 이렇게까지 아름답게 피어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마치 그가 수많은 꽃봉오리를 숨겨두고, 그녀가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다 놀래는 듯했다.왠지 모르게 가슴속 한구석이 시큰하게 쓰려왔다. 김단의 눈시울도 붉게 물들었다.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눈밭에는 수많은 붉은 매화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