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진 씨...”이천호는 마음속의 씁쓸함을 억누르며 애써 웃었다.“오늘은 어쩐 일이세요?”“감사의 인사를 전하려고 왔어요. 제가 다쳤던 그때, 이천호 씨가 매일 자전거를 타고 시장까지 약 사러 다녀주시지 않았으면 제 손은 지금쯤 쓰지 못했을 거예요.”민여진이 옆에 있는 임재윤을 바라보자 임재윤은 바로 눈치채고 트렁크에서 선물 몇 개를 꺼냈다.이장이 손을 뻗어 받으려다가 멋쩍게 웃었다.“제가 뭐 한 것도 없는데 이런 선물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요.”임재윤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도움은 못 주셨을지 몰라도 이장님 아드님은 꽤 큰 도움을 주셨거든요.]그 말에 뭔가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아 이천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민여진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이천호 씨, 잠깐 저기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이천호가 먼저 걸어갔고 민여진이 따라나서려는 순간, 임재윤이 그녀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민여진은 그런 임재윤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금방 올게.”그제야 손을 놓은 임재윤은 갑자기 몸을 숙여 민여진의 입꼬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이건 누가 봐도 민여진이 자기 사람이라는 걸 선언하는 행동으로 보였다.이천호의 가슴은 더욱 먹먹해졌고 애써 못 본 척하며 민여진을 향해 억지웃음을 지었다.“민여진 씨, 축하해요. 임재윤 씨처럼 훌륭한 분과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민여진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고마워요.”그제야 이천호는 요 며칠 동안 민여진과 함께하면서 지금 민여진이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고 있었고 예전 그 웃음들이 어딘가 무거워 보였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이천호는 모든 걸 내려놓은 듯 담담하게 물었다.“민여진 씨, 이 도시를 떠나시는 건가요?”“네.”민여진은 이천호의 촉을 새삼 놀라워하며 말했다.“이제 독엔에 가요. 당분간은 못 뵐 것 같아서 직접 인사드리러 왔어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이천호는 아쉬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별말씀을요.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장 아주머니가 이천호를 일부러 비하하는 건 아니었지만 임재윤과 이천호의 차이는 솔직히 말해 하늘과 땅 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장 아주머니가 평생 본 사람 중에서도 임재윤만큼 훌륭한 사람은 없었다.민여진은 그 말에 빙그레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사실 이천호 씨는 애초에 저한테 그런 감정이 없었어요. 그냥 좋은 친구일 뿐이에요.”“꼭 그렇지만도 않더라.”장 아주머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어제 너 혼자 돌아왔을 때 이천호가 나한테 왔었거든. 내게 상황을 설명할 때 너무 기운이 빠져 있어서 놀랐지. 그 애가 원래 아무리 속상해도 겉으로 내비치질 않거든. 근데 어제는 딱 봐도 마음이 크게 다친 얼굴이었어.”민여진은 순간 멍해졌고 뒤에서 들려오는 임재윤의 발소리에 정신이 들었다.장 아주머니는 눈치껏 화제를 끊었고 다른 얘기를 꺼냈다.“오늘은 여기서 밥 먹고 가. 내가 닭 잡아서 푹 고아줄게.”“좋아요. 근데 그 전에 저랑 임재윤이 잠깐 나갔다가 올게요.”“어디 가는데?”“이천호 씨 댁이요.”장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야지. 그 친구가 도와준 게 참으로 많았지. 인사 꼭 잘해. 얼른 다녀와.”“네.”두 사람은 차에 다시 올라탔고 임재윤은 시동을 걸어 운전하기 시작했고 마을 이장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민여진이 내리려다 차 문이 잠긴 걸 보고 임재윤을 바라보았다.임재윤은 휴대폰으로 천천히 타자했다.[혹시 이천호 씨 위로하러 가는 거야? 마음이 크게 다쳤다며?]임재윤이 아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게 분명했다.민여진은 차 안에서 임재윤이 왜 그렇게 조용했는지 이상하게 여겼는데 지금 질투의 화신이 된 임재윤을 보니 저도 몰래 웃음이 났다.“그건 그냥 장 아주머니 추측일 뿐이야. 이천호 씨가 마음 아팠던 건 어제 가게에서 우연히 마주친 전 여친 때문일 거야. 나 때문에 그럴 리 없잖아.”[근데 정말 너 때문이라면 어쩔 건데?]민여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더더욱 내가 주
민여진은 임재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을 걸 눈치챘는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이천호 씨는 그냥 나한테 정말 잘해주는 친구야. 착한 사람이야.”[그건 나도 알아.]임재윤은 괜히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기 싫어 억지로 이천호에 대한 경각심을 누르며 타자했다.[그래서 더더욱 너와 함께 가고 싶어.]“함께 간다고?”[응. 그렇게 오래 돌봐주셨는데 당연히 선물이라도 사서 찾아뵙고 감사를 드리는 게 예의지.]말은 그럴싸했지만 민여진은 임재윤의 몸 상태가 걱정돼 미간을 찌푸렸다.“어제까지만 해도 링거 맞았잖아...”[어제 맞았으니까 오늘은 좀 나아졌어. 그냥 열이 좀 있었던 거니까 별문제 아니야. 오히려 가볍게 움직이는 게 몸에 좋아.]민여진은 더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아채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어디 불편하면 꼭 말해.”[응.]임재윤은 옷을 갈아입고 퇴원했다.그러고는 마을에 가기 전에 일부러 마켓에 들러 선물을 고르기 시작했는데 고르고 또 고르다 보니 결국 차 트렁크가 가득 찰 때까지 샀다.첫 목적지는 장 아주머니 댁이었다.차가 도착했을 때, 아주머니는 마당에서 약초를 손질하다 말고 차 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차에서 내리는 민여진을 바로 알아봤다.시력이 좋지 않아 조심조심 내리던 민여진 옆에는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남자는 민여진이 혹여라도 넘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부축하며 그녀의 몸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장 아주머니는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려놓고 반가워하며 바로 다가갔다.“여진아.”민여진은 환하게 웃으며 바로 인사했다.“장 아주머니.”장 아주머니는 무척이나 기뻐하면서도 옆에서 강렬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임재윤을 보더니 속으로 감탄했다.처음 봤을 때부터 민여진이 자기와 뭔가 급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를 보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이분이 네 남자친구지?”민여진은 조금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고 임재윤은 휴대폰으로 입력해 음성으로 말했다.[안녕하세요. 임재윤입니다
임재윤은 잠시 멍하니 민여진을 바라보다가 무의식중에 손을 거뒀다.그러자 손등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이 임재윤을 진정시켰다.임재윤은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타자했다.“지금은 어때?”민여진은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네가 박진성이 아니라는 건 이제 확신해. 그리고 나도 깨달았어. 아무 근거도 없는 의심으로 널 의심하는 건 큰 실수였어. 우린 연인이잖아. 서로를 믿어야 하는 게 연인이 아니야?”“맞아.”임재윤은 쓴웃음을 지었다.“여진아, 난 절대 네가 말한 그 사람이 아니야. 난 그냥 임재윤일 뿐, 너만의 임재윤일 뿐이야.”“나만의 임재윤이라고?”민여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이런 직진 멘트에 여전히 약한 민여진은 얼굴까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임재윤은 민여진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며 물었다.“여진아, 그 사람을 정말 죽도록 미워해?”민여진은 그 질문에 순간 굳어졌고 흔들리는 눈빛에 고통이 비쳤다.잠시 후, 민여진은 깊은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끔찍하게 미워해. 그 사람의 존재는 내겐 악몽이고 절망의 늪이야. 그 사람은 내 모든 걸 망가뜨린 재앙이야. 내 인생을 송두리째 부순 장본인이기도 해. 그래서 난 평생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죽을 때까지도 말이야.”임재윤은 그 대답에 가슴을 도려낸 듯한 고통을 느꼈다.피 한 방울 안 나지만 그 어떤 통증보다 깊게 파고드는 말이었다.임재윤은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며 다짐했다.“걱정하지 마. 네 인생에 그 사람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밖의 선언에 민여진은 의아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왜 그렇게 확신해?”“잊었어? 우린 독엔에 함께 가기로 했잖아. 여길 떠나는 거야. 그 사람은 양성에 있어. 대영그룹을 포함한 모든 걸 포기하고 독엔까지 올 리가 없잖아.”“그 말도 맞네.”그제야 민여진의 마음도 조금 진정되었다.임재윤의 말대로 박진성은 지금 양성에 있었다.민여진이 독엔으로 떠나면 더는 엮일 일도 없을 것이다.민여진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
간호사의 목소리는 워낙 낮았기에 민여진이 들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민여진이 못 들었다는 걸 확신한 남자는 그제야 간호사의 목을 풀어주고 차가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다시 한번만 더 잘못 부르면 살아남지 못할 거야.”간호사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해졌고 급히 변명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그냥 뭐?”고열 때문인지 임재윤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지만 기세는 여전히 위압적이었고 눈동자에는 차가운 살기가 일렁였다.“지금 이 세상엔 임재윤만 존재해. 박진성은 더 이상 없어. 이번엔 여진이 못 들었으니 다행이지, 다음에도 이런 실수를 하면 그땐 널 절대 살려두지 않아.”“네, 죄송합니다.”...병실 밖, 민여진이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자 휴대폰 너머에서 조현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여진아, 너 맞지?”“현준 오빠, 나 맞아.”민여진의 목소리에 조현준은 잠시 안도했지만 곧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전화를 왜 계속 받지 않았어? 회사 일만 아니었으면 당장이라도 널 찾으러 갔을 거야.”연이은 납치, 도망과 오해가 떠오르자 민여진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몸이 좀 안 좋아서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휴대폰 배터리가 다 나간 줄도 몰랐고요. 진시우 씨가 충전해 줘서야 오빠를 비롯한 사람들이 전화를 많이 했다는 걸 발견했어요. 미안해요.”“몸이 안 좋았다고? 많이 아팠어?”민여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지금 이렇게 서서 전화받고 있으니까 당연히 괜찮아졌다는 뜻이죠.”“그럼 다행이야. 다음부턴 어떤 상황에서도 휴대폰을 꼭 들고 다녀. 널 걱정하는 사람이 많단 사실을 잊지 마.”민여진은 따뜻해진 마음에 고개를 힘껏 끄덕였고 조현준이 전화 너머에 있다는 사실에 살짝 웃으며 말했다.“그럴게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좋아, 그리고 이따가 우리 엄마한테도 전화 좀 해줘. 네 휴대폰이 고장 났다고 내가 둘러댔거든.”“
진시우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눈앞의 광경에 눈빛이 어두워졌다.아무리 여유로운 사람도 지금 이 분위기엔 농담이 나올 수 없었다.진시우는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민여진 씨 휴대폰이에요.”민여진은 멍하니 바라보며 자신의 핸드폰이 아직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걸 어떻게 찾은...”“마당 풀숲에서 발견했어요. 배터리가 다 나가 있었길래 충전해 봤더니 전화가 엄청 많이 와 있더군요.”민여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조인화나 조현준의 전화가 아마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평소처럼 며칠이나 연락도 없이 잠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민여진은 휴대폰을 받아들이며 입술을 지그시 오므렸다.“진시우 씨,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여기 일은 민여진 씨가 좀 봐주세요. 저는 호텔에 가서 잠깐 쉬었다가 깨어나면 바로 올게요.”“네.”진시우가 나간 뒤, 민여진은 먼저 조인화에게 안부 전화를 하려고 조심스레 일어났다.병실에서 전화하면 시끄러울까 봐 민여진은 임재윤의 기력이 없는 손을 조심스럽게 떼고 나가려고 했다.순간, 임재윤의 손이 다시 쫓아오듯 민여진의 손목을 꽉 붙잡았고 그 힘은 아까보다도 더 강했다.“임재윤?”민여진이 돌아보자 시야 속 검은 형체가 몸을 일으키려 버둥대고 있었다.아무래도 임재윤이 깨어난 것 같았다.반가움도 잠시의 일일 뿐, 민여진은 얼른 임재윤을 제지했다.“임재윤, 이 손을 놔. 너 손에 힘주면 피가 날 거야.”하지만 남자는 힘을 전혀 풀지 않았고 한편으론 기침을 격렬하게 하며 다른 손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그러고는 휴대폰을 찾아 쥐고 눈이 충혈된 채 타이핑했다.“너 가려고 그래?”임재윤의 온몸엔 깊은 절망이 드리워져 있었다.이 지경이 돼도 민여진은 끝내 마음 한 조각도 남겨주지 않는 건지 의심하고 있었다.“내가 그렇게도 너한테 부담스러운 존재야?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지 않을 정도야?”“임재윤...”민여진의 가슴이 쿡 찔린 듯 아팠다.민여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애써 임재윤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