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뽁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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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s by 뽁뽁이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출장 마지막 밤, 이름도 묻지 않은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다. 후회는 없었다. 다시 볼 일도 없으니까. 월요일. 그 남자가 우리 팀 신입으로 나타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님." 윤재하, 26세. 능글거리고, 눈치 빠르고, 일도 잘하고, 하필이면 내 스타일을 너무 정확히 안다. 마치 처음이 아닌 것처럼. 숨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숨길수록 더 가까이 왔고, 나는 밀어낼수록 더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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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 102화 - 그 밤 이후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며칠 뒤 운영사무국 메일이 다시 도착했을 때도, 지안은 예전처럼 혼자 먼저 화면부터 가리지 않았다.메일 제목은 짧았다.`[한국대학생광고페스티벌 운영사무국] 검토 결과 안내`지안은 자기 자리에서 그 제목을 한 번 읽고, 맞은편을 봤다. 재하도 같은 메일을 받은 얼굴이었다.둘 다 바로 말을 걸진 않았다.팀장 자리엔 아직 사람이 있었고, 소율은 출력물 들고 회의실을 오가고 있었고, 서연은 이미 눈치챈 표정으로 자기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사무실은 평소처럼 돌아가는데, 이번엔 지안도 더 숨길 생각이 없었다."봐요."지안이 먼저 말했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네."메일 본문은 건조했다.조사 경과 — 제출 자료 대조, 원 발표자 확인 회신, 이정환 측 소명 기한 만료 — 가 항목별로 정리돼 있었고, 그 끝에 결과가 붙어 있었다.2018년 수상작은 공식 게재 목록에서 철회 처리 예정이고, 크레딧은 원 발표팀 기준으로 정정 등재된다는 확인. 이정환 측에도 동일한 결과가 통보되었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접수 후 한 달 남짓 걸린 셈이었다.표현은 끝까지 딱딱했는데, 그래서 더 분명했다. 누가 뭘 가져갔고, 그게 이제는 넘어갈 수 없다는 뜻만 남기는 문장.지안은 끝까지 읽고 나서 마우스를 놓았다.크레딧 정정. 7년 만에 자기 이름이 제자리로 돌아온 거였다. 속이 후련하게 뚫리진 않았다.통쾌함보다 먼저 든 건 묘하게 빈 감각이었다.이제서야, 라는 자조 비슷한 것이 올라왔다가 금방 가라앉았다.너무 오래 지나온 일이라서, 이제 와서야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오히려 늦게 도착한 우편물 같았다."왔네."서연이 옆에서 작게 말했다."응."지안은 짧게만 답했다."기분 이상하지?""응."그것밖에 안 됐다.좋다, 나쁘다, 시원하다, 허무하다. 어느 한 단어로도 설명하긴 어려웠다.다만 이제 더는 이 일을 상상으로만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했다.맞은편에서 재하가 메일 창을 닫았다.그 손이
Last Updated: 2026-05-15
Chapter: # 101화 - 그거 좋았어
셔츠 단추가 풀렸다.재하가 먼저, 지안이 뒤이어. 블라우스가 벗겨지는 순간 재하 시선이 쇄골에서 멈췄다.그 눈이 너무 또렷해서 지안은 괜히 손으로 가리려다 말았다."왜 봐?""보고 싶었으니까요."그 말이 너무 담담해서 반박이 안 됐다.재하 입술이 목 옆을 따라 내려왔다. 쇄골 위에서 한 번 멈추고, 가슴 사이를 느리게 훑었다.입김이 닿을 때마다 피부가 오그라들었고, 지안은 시트를 움켜쥔 손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천천히.."지안이 말했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에 가까웠다."네."재하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입술이 아래로 더 내려갔다. 배 위를 지나 허벅지 안쪽에 닿았을 때 지안은 숨을 참다가 결국 놓쳤다.짧은 소리가 새어나왔고, 그 소리에 재하 손가락이 허벅지 위에서 한 번 세게 눌렸다."그 소리."재하가 낮게 말했다."어?""좋아요."그 한마디가 목소리째로 피부 위에 닿는 것 같아 재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평소의 판단력 같은 건 이미 어디 갔는지 모르겠고,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재하 손이 허벅지를 벌리고 입술이 더 깊이 닿았을 때 지안 허리가 시트에서 떠올랐다."재하, 잠깐—"멈추라는 게 아니었다.그걸 재하도 알았다. 속도를 조금 늦추되 멈추지 않았다.손가락이 먼저 천천히 들어왔고, 지안은 고개를 젖힌 채 천장을 봤다. 형광등 빛이 흐릿했다. 감각이 한 곳에 모이면서 나머지가 전부 먼 곳으로 밀려났다."괜찮아?"재하가 올려다보며 물었다. 존댓말이 완전히 빠진 목소리. 그 변화가 지안 몸을 한 번 더 떨리게 했다."괜찮아."지안이 눈을 감고 대답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떨렸다.재하가 다시 올라왔다. 얼굴이 가까워졌고, 이마가 닿았다. 둘 다 숨이 거칠었다.그 상태에서 재하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지안아, 봐."눈을 뜨자 재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땀이 이마에 맺혀 있었고, 눈이 진지했다.장난기는 완전히 없었다. 이 사람의 진짜 얼굴.그 밤에는 어둠 속에서 봤고,
Last Updated: 2026-05-14
Chapter: # 100화 - 선배님이 막잖아요
퇴근길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서연이 먼저 가방을 챙기면서 "둘이 알아서 가" 한마디를 놓고 나가자 지안은 노트북을 덮고 자리를 정리했다.소율은 이미 내려갔고, 사무실엔 재하와 둘만 남았다. 재하가 태블릿을 가방에 넣는 동작이 유난히 느렸다. 지안은 그걸 보다가 먼저 말했다."뭐 해?""가방 싸고 있잖아요.""세상에서 제일 느린 짐 싸기네."재하가 고개를 들어 웃었다. 능글거리는 쪽이 아니라 그냥 좋은 쪽의 웃음이었다. 지안은 괜히 이미 꺼진 모니터를 한 번 더 확인했다."우리 집 갈래?"말이 나가고 나서 조금 아차 싶었다. 아, 이거 예전에도 이렇게 말했지.그때는 횡단보도 앞이었다. 지금은 빈 사무실이었고, 숨길 이유도 없었다.재하가 가방 지퍼를 올리며 대답했다."안 간다고 하면 믿을 거예요?""아니.""그럼 가죠."밖은 저녁이었다.택시 안에서 재하는 지안 손을 먼저 잡지 않았다. 대신 무릎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고, 그 손등이 지안 허벅지에서 손가락 두어 개 거리에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지안이 먼저 거리를 벌렸을 것이다.오늘은 그 거리를 그대로 뒀다.가로등 불빛이 유리창을 길게 지나갈 때마다 재하 손등 위로 빛이 한 번씩 미끄러졌다.지안이 먼저 손을 올렸다. 잡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손등 위에 손가락을 얹는 정도. 재하가 그쪽을 보지 않고 아주 작게 웃었다.현관문이 닫혔을 때 둘 다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신발을 벗는 동작, 가방을 내리는 동작, 불을 켜는 동작.그 사이에 들어간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처음 이 집에 왔을 때는 현관에서 긴장이 먼저 올라왔다.비밀이었으니까.그다음에는 피로와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지금은 달랐다 숨길 게 없는 사람들이 집에 같이 온 것. 그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공기가 더 가벼웠다."물?"지안이 물었다."아뇨."재하가 웃지 않고 말했다."물 마시러 온 거 아니라서요."지안은 재킷을 소파 위에 놓다가 멈췄다."그럼 뭐하러 왔는데?"재하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좁은 거
Last Updated: 2026-05-14
Chapter: # 99화 - 공개
"재하."이름이 입 밖으로 나간 뒤에도 회의실 공기는 바로 바뀌지 않았다.화가 다 풀린 것도 아니고, 바깥 문제가 끝난 것도 아니고, 몇 주를 건너온 마음이 한 번에 정리될 리도 없었다.그런데도 그 한 단어 이후로는 숨길 게 줄었다. 지안은 그걸 먼저 알았다. 더는 다시 모른 척할 수 없는 거리라는 걸.재하는 지안이 손을 놓을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섣불리 끌어안지도 않았고, 급하게 붙잡지도 않았다. 그게 지금은 맞았다.지안이 먼저 열었고, 그래서 재하도 그 속도를 그대로 받는 쪽을 고르는 게."가요."지안이 먼저 말했다."네."둘은 회의실 문을 나섰다. 복도는 퇴근 직전보다 더 조용해져 있었다.멀리서 팀장 목소리가 아직 회의실 안쪽에 걸려 있었고, 프린터 불빛만 하나 남아 있었다.예전 같으면 이 시간에 둘이 같은 복도를 나오는 것부터 신경 썼을 거다. 누가 보는지, 몇 걸음 차이 둘지, 엘리베이터는 따로 탈지. 그런데 오늘은 그런 계산이 올라오지 않았다.그냥 재하랑 나란히 걸었다.그 사실만으로도 웃길 정도였다.***다음 날 아침, TF는 사실상 끝난 분위기였다.최종본 전달은 마무리됐고, 남은 건 자잘한 수정 대응이랑 종료 정리 정도.팀장은 아침부터 유난히 얼굴이 펴져 있었고, 소율은 "이제 좀 살겠다"는 말을 세 번쯤 했고, 서연은 외부 공유 폴더 정리하면서 삭제해도 되는 버전들을 하나씩 골라냈다.지안은 자리에 앉자마자 커피 뚜껑을 열었다.맞은편에선 재하가 메일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잠깐, 시선이 마주치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려다 멈췄다.예전 같았으면 바로 돌렸을 거리인데, 오늘은 안 돌려도 됐다. 그 차이가 아직 몸에 안 붙어서 좀 어색했다.그리고 재하는 평소처럼 묻는 대신,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커피 식기 전에 드세요."지안은 컵을 들다가 멈췄다.별거 아닌 말인데, 그걸 별거 아닌 얼굴로 듣는 게 낯설었다.예전 같으면 누가 들을까 먼저 봤을 텐데, 오늘은 그 반사 동작이 나오지 않았다."
Last Updated: 2026-05-12
Chapter: # 98화 - 다시
이번엔 자기가 먼저였다.손잡이를 누르자 회의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안엔 재하 혼자 있었다. 통화는 끝난 뒤였는지 휴대폰은 화면만 꺼진 채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재하는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지안을 보자 그대로 멈췄다. 놀란 표정이 길게 가지는 않았다. 대신 아주 짧게 숨을 고르는 얼굴. 예상은 못 했는데, 도망치지도 않는 얼굴."잠깐 얘기해요."지안이 먼저 말했다.재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는 몇 걸음이 생각보다 길었다.지안은 테이블 맞은편에 서 있다가 결국 의자를 당기지 않았다. 앉으면 괜히 더 오래 돌릴 것 같아서. 지금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돌릴 만큼 돌렸고, 피해 갈 만큼 피해 갔다."나 확인했어요."재하 시선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발표본이랑 메일이랑, 사진이랑. 다.""...네.""운영사무국 메일도 봤고."재하는 변명하지 않았다. 죄송하다는 말도 바로 안 했다. 그 침묵이 재하답다고 생각하면서, 지안은 괜히 더 짜증이 났다."그게 제일 열받았어."지안이 낮게 말했다."네가 맞았다는 거."재하는 눈을 들었다. 뭔가 말하려는 얼굴이 잠깐 스쳤다가 다시 가라앉았다."내가 나중에야 확인한 것도 열받았고, 네가 그걸 다 해 놓고도 말 안 한 것도 열받았고."지안은 잠깐 쉬었다."아직도 화나요. 늦은 거, 숨긴 거, 멋대로 시작한 거. 다.""알고 있습니다."짧고 조용한 대답이었다."아니, 모를 수도 있지."지안은 피식 웃었다."윤재하 씨는 맨날 절반만 말했으니까."그 말에 재하가 입을 열었다."선배님.""근데."지안이 바로 끊었다. 지금은 저 사람 설명으로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화가 나는데도, 끝이라고 말하는 건 또 안 되더라."회의실 안이 아주 조용해졌다. 에어컨 바람 소리만 얇게 돌았다.재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섣불리 다가오지 않는 쪽을 고르는 사람처럼.지안은 테이블 위에 손끝을 짚었다. 손바닥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한동안
Last Updated: 2026-05-12
Chapter: # 97화 - 찾아갈 이유
내가 먼저 가서 물을 수도 있겠구나.그 생각은 집에 도착하고도 사라지지 않았디.지안은 현관에 서서 한참 신발도 못 벗었다. 가방 끈이 어깨에 걸린 채로, 휴대폰만 쥐고 있었다.누구한테 연락할 것도 아니고, 당장 어디로 갈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멈췄다.갈 수 있겠구나, 가야 하나, 는 완전히 다른 문장이라서.지안은 결국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거실은 조용했고, 시계 초침 소리만 얇게 들렸다. 생각은 계속 같은 데를 맴돌았다.왜 그랬냐고 묻는 건 이미 늦었다. 그 질문 뒤엔 결국 또 재하 설명만 남을 것 같았다. 지안이 알고 싶은 건 이제 조금 달랐다.그 사람이 뭘 했는지보다, 그걸 다 보고 난 뒤 자기가 뭘 할 건지.그게 어려웠다.지안은 눈을 감았다 뜨고, 머릿속으로만 몇 번 정리했다.용서해 주려고 가는 거 아님.불쌍해서 가는 것도 아님.내가 선택할지 말지, 그걸 더 미루기 싫어서.그 정도까지 오자 좀 숨이 붙었다. 이유가 없어서 못 가는 건 아니었다.이유를 자꾸 상대 쪽에서 찾느라 늦었던 거지.지안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 와서야 겨우 방향이 잡히는 게 웃겼다. 그래도 적어도 끌려가는 쪽은 아니라서 전보다 낫긴 했다.다음 날 아침, 사무실은 평소보다 더 분주했다.프로젝트 마감 주간 특유의 조급한 공기."오늘 끝나면 TF도 사실상 정리네."소율이 지나가듯 말했고, 지안은 그 말에 손을 잠깐 멈췄다.사실상 정리.그 단어가 유독 오래 남았다.프로젝트가 끝나면 숨길 이유도, 핑계도 같이 줄어든다. 회사 안에서 둘 사이를 가리는 명분도 점점 얇아진다. 그 사실이 갑자기 너무 분명해졌다.계속 미루다 보면 그냥 타이밍이 지나가는 쪽이 먼저 올 수도 있다는 뜻.맞은편에선 재하가 내부 수정본을 정리하고 있었다.대외 공유에서 빠지고 난 뒤로 더 조용해진 자리. 움직임은 평소 같았는데, 일의 결이 달라진 건 이제 누가 봐도 알았다.팀장도 재하한테 말 거는 횟수가 줄었고, 외부 통화는 거의 서연이나 지안 쪽으로
Last Updated: 2026-05-11
악역인데, 남주가 이상하다

악역인데, 남주가 이상하다

로판 속 악녀 공작에 빙의했다. 빙의 첫날부터 독차를 마시고, 마지막에는 남주한테 공개 처형당하는 자리다. 답은 정해져 있다. 도망친다. 영지를 굴리고, 사교계에서 줄 타고, 사망 플래그 하나씩 분지른다. 야근으로 단련해 둔 게 이런 데 쓰일 줄 몰랐다. 문제는 남주가 자꾸 따라온다는 거다. 원작에서 나는 거들떠도 안 보던 남자가 영지까지 와서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같은 말을 한다. 처형할 사람이 안부는 왜 묻는데? 눈빛도 이상하다. 원작에서 본 그 차가운 눈이 아니다. 피하면 따라오고, 따라오면 심장이 뛴다. 무서워야 하는데 자꾸 무섭지 않다. 이거, 내가 읽은 그 소설이랑 뭐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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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 43화 - 몸이 기억한 것
밤이 깊어도 손바닥의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침대 위에 누워 손을 펴 보았다.방 안에는 촛불 하나만 남아 있었고, 천장에는 흔들리는 그림자가 얇게 걸렸다.명단도 화살촉도 다미안에게 넘겼다.독 분석은 기사단이 맡았다.알렉세이의 질문에 대해서는 이졸데 쪽으로 돌릴 문장을 준비하면 된다.정리할 것은 정리했다.그런데 눈을 감으면 갑옷에 남은 흠이 먼저 떠올랐다.그다음에는 장갑의 결이 손바닥 안쪽에 다시 닿았다. 살아남았다는 증거라고 하면 편했다.문제는 증거치고 너무 따뜻하게 남는다는 점이었다.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올렸다.자자. 오늘은 더 생각하면 안 된다. 사람은 잠을 자야 내일 덜 망한다.그렇게 생각한 것까지는 기억났다.***꿈속의 방은 내 방이 아니었다.벽지가 어두웠고, 창가에는 무거운 휘장이 내려와 있었다.촛불은 멀리 있었는데도 열은 피부 가까이 닿는 듯했다.누군가 바로 앞에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남자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넓은 어깨와 낮은 숨소리, 가까이 올 때마다 먼저 닿는 체온.움직이려 했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아니, 몸은 움직였다. 다만 그녀가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손이 먼저 올라갔다.손끝이 낯선 옷깃을 스쳤고, 몸은 그 감촉을 이미 아는 것처럼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손목을 잡힌 것도 아니었다. 끌려간 것도 아니었다.몸은 그 거리감을 먼저 받아들였다.조수석에 앉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다 보이는데 방향을 틀 수 없었다.브레이크를 밟고 싶은데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얼굴 없는 남자의 손이 뺨 가까이를 지나갔다.손등인지 손가락인지 모를 감각이 짧게 남았다. 그다음에는 목덜미 쪽으로 숨이 닿았다.말은 없었다. 이름도 없었다. 그런데 몸은 그 침묵을 무서워하지 않았다.속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왜 무서워하지 않아.질문은 꿈속에서 소리가 되지 않았다. 대신 몸이 대답했다. 오래 알고 있었다는 듯, 다시 만난 것처럼, 잃어버렸던 것을 확인하듯.감각이 먼저 가고 생각은 뒤에 끌려왔다
Last Updated: 2026-06-30
Chapter: # 42화 - 말하지 않은 자리
정원 쪽 회랑은 집무실보다 조용했다.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레온이 따라 나오려 했고, 다미안은 서류를 든 채 내 곁에 섰다.둘 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뜻이었다.오늘 독화살을 맞을 뻔한 사람이 혼자 정원으로 나가는 건, 상식적으로는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레온은 문 안쪽에 있어. 내가 부르면 바로 와.""공작님.""명령이야."레온은 입을 다물었다. 다미안이 대신 짧게 물었다."기록은 제가 이어서 보겠습니다.""응. 동선부터. 누가 기다리고 있었는지.""알겠습니다."테오도어는 회랑 쪽 문을 열어 두었다. 바깥에서 젖은 흙 냄새가 들어왔다.해가 기운 뒤라 정원 돌길은 낮의 열을 거의 잃고 있었다.걸음을 옮겼다. 이건 업무였다. 독화살 조사 경과를 듣고, 사교계에 나갈 문장을 정하고, 세르주 기사단장과 공식 대응 방향을 맞추는 일. 딱 거기까지.그렇게 정리하면 쉬워야 했다.그런데 손바닥에는 아직 장갑의 결이 남아 있었다.***세르주는 정원 회랑 끝에 서 있었다.검은 갑옷은 닦여 있었지만 왼쪽 흉갑에는 얕은 흠이 남아 있었다. 화살촉이 비틀렸던 자리였다.가까이서 보니 검푸른 독 자국은 사라졌고, 금속 표면만 거칠게 긁혀 있었다.그래도 나는 그 흠을 보는 순간 숨이 잠깐 막혔다.세르주가 먼저 예를 갖췄다."공작.""기사단장님."알현실 복도 때와 비슷했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사교계가 보면 또 문장 하나쯤 만들기 좋은 간격이었다. 아, 이제 거리까지 문장 단위로 계산하게 생겼네. 정말 싫다.세르주는 그 계산을 모르는 사람처럼 곧바로 보고했다."휘장 뒤에서 단궁의 받침 조각을 찾았습니다.의전청 임시 인력 명단에 있던 한 사람이 사라졌고, 기사단이 성문 쪽을 막았습니다.""독은요?""분석 중입니다. 피부에 닿아도 위험한 종류로 보입니다. 화살촉은 봉인했습니다."짧고 정확했다. 지금 듣기 좋은 방식이었다. 사건, 증거, 다음 조치. 감정을 끼워 넣을 틈이 없었다.그래서 오히려 사적인 질문이 끼어들 틈이
Last Updated: 2026-06-30
Chapter: # 41화 - 질문의 방향
알렉세이가 몸을 일으키자, 토너먼트장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독이 묻은 화살은 아직 바닥에 있었고, 세르주의 갑옷 위에는 검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황제의 기사들이 출입구를 막고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범인이 도망간 곳보다 알렉세이의 입을 먼저 보았다.그는 그런 시선을 어떻게 받는지 아는 사람이었다.알렉세이는 느리게 예를 갖췄다."폐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방금 일은 제국 귀빈석을 향한 중대한 공격입니다."말은 맞았다. 그래서 더 나빴다. 맞는 말로 시작하는 사람은 보통 틀린 결론을 준비한다.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허락처럼 내려앉자, 알렉세이의 시선이 내게 왔다."벨포르 공작.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염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손바닥을 살짝 접었다. 장갑의 결이 아직 남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세르주의 손을 잡았던 감각이었다.하지만 지금 그 감각을 곱씹을 시간은 없었다.알렉세이가 그 순간을 사람들 앞에 올려놓으려는 참이었다.그가 부드럽게 웃었다."다만 모두가 보았습니다. 세르주 경께서 공작을 위해 몸을 던지셨고, 공작께서도 그 손을 잡으셨지요.제국의 의전상 확인이 필요할 듯합니다."관람석이 술렁였다.알렉세이는 잠깐 뜸을 들인 뒤,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낮췄기 때문에 더 멀리 갔다."세르주 경과 공작의 관계가 공식화되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아, 저걸 지금 묻는다고.숨을 삼켰다. 독화살 다음에 관계 확인이라니, 이건 위기관리 순서가 아니라 일부러 순서를 망가뜨리는 쪽이었다.사람이 죽을 뻔한 자리에서 사람들은 놀랄 만큼 빨리 가십으로 돌아왔다.정확히는, 누군가가 돌아가게 만들었다.레온의 손이 검집 위에서 굳었다. 다미안은 입을 다문 채 알렉세이 쪽을 보고 있었다.세르주는 내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일어섰다."전하."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나갔다."방금 이 자리에서 확인할 것은 제 관계가 아니라, 제국 귀빈석을 향한 공격입니다.기사단장님은 기사단장으로서 움직이셨고, 저는
Last Updated: 2026-06-30
Chapter: # 40화 - 무대 위의 화살
토너먼트 관람석 배치표는 아침까지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붉은 선으로 표시된 귀빈석을 보았다.황제의 단상과 너무 가깝고, 경기장에서도 너무 잘 보이는 자리였다.숨을 곳이 없었다. 의전청이 보낸 배치표답게 예의는 완벽했고, 완벽한 예의는 가끔 덫처럼 보였다.다미안이 맞은편에서 말했다."벨포르 공작가 자리는 황제 폐하의 왼쪽 아래입니다.사교계가 보기에는 영광이고, 경호 입장에서는 좋지 않습니다.""그래. 영광이라는 말은 늘 도망갈 문이 없다는 뜻으로도 쓰이지."레온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제가 뒤에 서겠습니다. 관람석 난간과 계단 쪽을 동시에 보겠습니다.""너 혼자 다 보려고 하지 마. 눈은 두 개고, 관람석은 훨씬 넓어."배치표 가장자리를 눌렀다.어젯밤까지 감사원 인장이 찍혀 있던 자리에 의전청 인장이 찍혔고, 오늘은 그 인장이 나를 사람들 앞에 세웠다."다미안, 관람석 출입 명단을 받아 와. 레온은 의전청 경비 배치와 겹치지 않는 위치를 잡고. 테오도어 집사님은 비상용 마차를 북쪽 문 가까이에 준비해 주세요."테오도어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리하겠습니다, 공작님."마지막으로 붉은 선이 그어진 배치표를 접었다. 종이가 접히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무대라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내려올 길은 미리 봐 두어야 했다.***토너먼트장은 정오가 가까워질수록 소리로 가득 찼다.말발굽이 흙바닥을 두드렸고, 관람석의 비단 소매가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귀족들은 서로의 자리를 확인하며 웃었고, 그들의 시선은 경기보다 자리의 높이에 더 오래 머물렀다.정해진 귀빈석에 앉아 손잡이 위에 손을 얹었다.황제의 단상 아래쪽에는 기사단이 줄지어 섰다.그중 세르주는 귀빈석으로 오르는 낮은 계단 옆에 있었고,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무도회의 예복이나 알현실의 정복 외투와 달랐다. 저 옷은 사람을 가리기보다 무엇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그가 잠깐 시선을 들었다.나와 눈이 마주친 시간은 스치듯 짧았다. 그는 곧 다시 경기
Last Updated: 2026-06-30
Chapter: # 39화 - 공문이 된 말
공문은 다음 날 오전에 도착했다.테오도어가 은쟁반 위에 봉투를 올려놓았을 때, 집무실 안의 말소리가 먼저 멈췄다.봉투에는 감사원 인장이 찍혀 있었다.어제 다미안이 말한 그대로였다. 말은 오래 떠돌지 않았다. 곧바로 종이가 되어 봉인까지 갖춘 채 내 책상 위에 놓였다.다미안이 봉투를 열었다.레온은 창가 쪽에 서 있다가 한 걸음 다가왔고, 테오도어는 문가에 남아 조용히 대기했다.방 안의 누구도 먼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문서가 드러낼 것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감사원 조사 요청서입니다."다미안이 첫 줄을 읽고, 바로 다음 장으로 넘겼다."남부 교역 확장 건에 제이황자파 사적 자금이 섞였다는 의혹.벨포르 공작가가 황실의 중립을 훼손했다는 주장. 조사 개시 전 황제 폐하께 예비 보고를 청한다는 형식입니다."레온의 턱이 굳었다."루머를 그대로 문서에 옮겼군요.""그보다 조금 더 나쁩니다." 다미안이 마지막 장을 짚었다. "교역권 심사 보류와 황궁 출입 제한까지 함께 건의했습니다.기각되지 않으면, 조사 자체가 처분처럼 보이게 됩니다."봉투의 접힌 자국을 보았다. 목덜미가 먼저 차가워졌다.소문은 사람을 귀찮게 만들지만, 공문은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그럼 답도 문서로 해야지."책상 위의 서류 묶음을 앞으로 밀었다."승인서 원본, 관세 납부 기록, 남부 상단 선급금 증서, 공작가 장부 사본.그리고 어젯밤 소문이 돌았던 자리 목록까지. 원본은 내가 들고 가고, 사본은 다미안이 순서대로 묶어.""폐하 앞에서 직접 설명하실 겁니까?""나를 부른 문서잖아. 대신 읽어 주는 사람 뒤에 숨을 이유가 없지."레온이 낮게 말했다."알현실까지 동행하겠습니다."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황궁으로 가는 길은 혼자 걸어도 같았지만, 같은 편이 뒤에 있다는 표시는 필요했다.***황제의 알현실은 낮인데도 어두웠다.높은 창으로 빛이 들어왔지만, 빛은 바닥의 문양 위에서 끊겼다.황제는 옥좌에 앉아 있었고, 좌우에는 감사
Last Updated: 2026-06-30
Chapter: # 38화 - 소문은 길을 탄다
다음 날 아침, 소문은 나보다 먼저 관저에 도착했다.테오도어가 은쟁반 위에 편지 세 장을 올려놓았다.봉인은 모두 달랐고, 문장은 정중했다. 그런데 편지의 첫머리는 거의 같았다.남부 교역 확장이 제이황자파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 있습니다.첫 줄을 읽고 잠깐 눈을 감았다.아, 빠르다. 정말 빠르다.어젯밤 이름표가 오늘 아침 광고 문구가 됐다.유통 경로를 봐야겠다고 말한 지 반나절도 안 지났는데, 소문은 이미 시제품 출시까지 끝낸 상태였다."세 장 모두 같은 내용이야?""표현은 다릅니다."다미안이 종이를 넘겼다. 눈 밑에 피로가 살짝 내려앉았지만 목소리는 평소처럼 건조했다."첫 번째는 '제이황자 전하의 후의',두 번째는 '남부 교역권의 새로운 후원자',세 번째는 더 노골적입니다. '벨포르가 황자파로 돌아섰다'고 했습니다."레온의 얼굴이 굳었다."모함입니다.""맞아."편지를 내려놓았다."그런데 모함이라고 외치면 모함한 사람이 제일 좋아하겠지."분노는 나중이다. 지금 화를 내면 감정전이 되고, 감정전에서는 소리를 먼저 지른 쪽이 진다. 이건 배포전이다.누가 먼저 문장을 뿌렸고, 누가 더 믿기 쉬운 증거를 붙이느냐의 싸움."다미안, 어젯밤 목록."다미안은 기다렸다는 듯 얇은 묶음을 책상 위에 올렸다."말씀하신 대로 정리했습니다. 이름표, 발화 위치, 들은 사람, 다음으로 옮긴 사람까지 가능한 범위에서 적었습니다.""좋아. 그리고 남부 교역 서류."테오도어가 이번에는 묵직한 서류 상자를 가져왔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공작님께서 수도로 오시기 전 준비하라 하신 계약 사본입니다.""고마워요, 테오도어 집사님."테오도어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물러났다.서류 첫 장을 펼쳤다.남부 교역로 확장 승인서, 상단 납품 계약, 관세 납부 기록, 벨포르 인장과 남부 남작가들의 서명. 종이는 무겁고, 마른 잉크 냄새가 났다."이 소문이 틀렸다는 증거는 여기 있어.""시점이 맞지 않습니다."다미안이 바로
Last Updated: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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