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 14화 - 더 선배님답게지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논리는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재하답기도 했다. 사람 얼굴보다 행동을 한 컷으로 남기는 방식. 걸리는 건 그게 지안 머릿속에서 아예 없는 방향은 아니라는 거였다."카피가 세면 비주얼이 받아 줘야죠." 지안이 다시 말했다. "화면까지 비어 있으면 런칭 광고가 아니라 티저처럼 보여요.""비어 있는 거랑 숨 쉬는 거랑은 다르죠."이번엔 지안이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였다."윤재하 씨.""네.""지금 시적인 척하는 거예요?"서연이 바로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삼켰다. 팀장도 입가를 한번 눌렀다. 재하는 당황하지 않고 아주 멀쩡하게 답했다."아니요. 선배님이 답답한 거 싫어하시니까 쉽게 말한 건데."그 말이 나오자마자 지안은 입을 다물었다. 또 그거다. 꼭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매번 한 발 먼저 들어오는 말.서연이 그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두 분은 벌써 번역이 되네." 서연이 태연한 척 끼어들었다. "난 아직도 재하 씨 말이 뭔지 반쯤밖에 모르겠는데.""간단해요." 지안이 곧장 받았다. "시안 두 버전으로 가면 됩니다. 하나는 제 방향, 하나는 윤재하 씨 방향."말은 실무적이었는데, 거의 선언처럼 떨어졌다. 재하가 그걸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점심 전까지 1차만요.""됩니다."그 대답이 너무 빨라서, 지안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못했다. 회의는 거기서 일단 정리됐다. 클라이언트는 오히려 만족한 표정으로 자료를 챙겼다. 방향이 둘이면 선택지가 생기고, 선택지가 생기면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업계 사람들은 그런 착시를 좋아했다.회의실 문이 닫히자 서연이 제일 먼저 숨을 내뱉었다."와. 브리프 회의에서 이렇게까지 재밌을 일인가.""재밌으면 네가 맡아." 지안이 바로 쏘아붙였다."싫지. 난 구경이 체질이거든."팀장이 그 사이에서 눈치를 봤다."둘 다 말 되는 방향이긴 해요. 일단 시안 보고 판단합시다.""네.""네."대답까지 겹쳤다. 그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오후 내내 지안은 일부러 더
Last Updated: 2026-04-02
Chapter: # 13화 - 집는 순간이 남자는 질문도 끝까지 안 해서 사람을 미치게 했다.그 문장은 하룻밤 자고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안은 목요일 아침 회사 로비를 지나면서 저도 모르게 휴대폰 화면부터 확인했다. 밤새 온 메일은 네 통, 클라이언트 수정 요청은 두 건, 재하한테 온 개인 메시지는 당연히 없었다. 없는데도 확인한 자기 쪽이 더 짜증났다.그래도 일정은 사람을 살렸다. 오전 열 시 브리프 회의, 점심 전 내부 정리, 오후 방향 확정. 할 일이 분명하면 감정은 뒤로 밀린다. 적어도 지안은 늘 그렇게 처리해 왔다."야."서연이 커피를 들고 지안 책상 옆에 섰다."왜.""너 어제 몇 시에 들어갔냐.""열한 시 넘어서.""재하 씨는?"지안은 키보드를 치던 손을 멈췄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같이 퇴근했잖아.""엘리베이터만 탔거든."서연은 커피컵 뚜껑을 닫으며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오케이. 더 안 물어.""묻지 마.""안 물을게. 대신 관찰은 하지."그 말이 꼭 경고처럼 남았다. 지안은 대꾸하지 않고 브리프 자료를 다시 열었다. 클라이언트는 신규 음료 브랜드를 더 젊게 보이게 해 달라고 했고, 그 말은 보통 두 가지로 번역된다. 하나는 싼 티 나게 화려하게. 다른 하나는 말만 많고 실체는 없는 무드로. 둘 다 지안은 싫었다.회의실에 들어가자 팀장이 먼저 자료를 펼치고 있었고, 서연은 벽 쪽 자리에 앉아 펜을 돌렸다. 재하는 노트북을 켜 둔 채 화면보다 화이트보드를 먼저 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늘 먼저 전체를 본다. 그걸 알아차리는 쪽도 이제는 너무 자연스러워져서 더 문제였다."오대리, 시작하죠."클라이언트 담당자가 브리프를 넘기자 지안이 바로 흐름을 잡았다."네. 우선 핵심은 리브랜딩 이유부터 명확해야 합니다. 지금 브랜드가 안 먹히는 건 예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구 선택처럼 안 보이기 때문이에요."클라이언트 쪽 과장이 물었다."선택처럼 안 보인다는 게 무슨 의미죠?""무난하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마실 수 있다는 말은, 사실 아무도
Last Updated: 2026-04-02
Chapter: # 12화 - 설탕 반 스푼신경이 쓰인다. 화장실을 갔는지, 전화가 왔는지, 먼저 간 건지. 그런 걸 왜 자기가 체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더 짜증났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기 전까지는."선배님."재하가 컵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편의점 비닐봉지까지 손목에 걸려 있었다."뭐예요.""커피요.""보면 알아요.""그럼 맞는지 확인만 해 주세요."재하가 컵 하나를 지안 책상 위에 내려놨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뚜껑 옆에 설탕 스틱이 반쯤 뜯겨 있었다."왜 뜯어 놨어요?""반만 넣으시잖아요."지안 손이 컵에 닿기 전에 멈췄다."내가요?""어제 편의점에서요." 재하가 너무 쉽게 대답했다. "하나 다 안 넣고 버리셨잖아요."기억은 났다. 밤샘 PT 전, 너무 쓴 건 싫어서 습관처럼 반만 털어 넣었던 것. 그걸 봤다는 사실보다 그걸 기억하고 지금 가져왔다는 사실이 더 별로였다."관찰이 취미라더니.""이번엔 변명거리가 있죠." 재하가 자기 컵을 들고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야근하는 팀원 챙긴 거니까.""후배가 선배 챙기는 그림이 너무 익숙한데요.""선배님이 챙김을 받지 않는 타입이라서 그런가."지안은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쓰지도, 너무 달지도 않았다. 딱 적당했다."이 정도면 업무 방해예요.""맛없어요?""그 반대라서."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지안은 아차 싶었다. 재하는 웃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아주 조금만 들었다. 장난을 더 얹을 수 있는데도 그렇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게 더 위험했다."다행이네요." 그가 낮게 말했다.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지안은 괜히 메신저 창을 켰다 닫았다. 커피는 책상 위에 두고도 자꾸 손이 갔다. 손에 잡히는 게 있어야 했다."윤재하 씨.""네.""원래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요?"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너무 직접적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무를 수는 없었다. 재하는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이 이상하게 길었다."아니요."한 단어였다. 가볍게 넘기지도 않
Last Updated: 2026-04-02
Chapter: # 11화 - 새까맣게각오가 필요한 건 윤재하 씨보다 자기 쪽이었다.수요일 오전부터 지안은 그 사실을 아주 성실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메일 세 통을 동시에 열어 놓고, 킥오프 자료를 뜯고, 클라이언트가 전날 밤에 추가로 얹어 놓은 요구사항을 항목별로 잘라 팀원들한테 뿌렸다. 일이 많으면 생각이 줄어든다. 적어도 평소에는 그랬다."오지안, 이건 사람이 할 일정이 아니야."서연이 회의실 문에 기대선 채 자료철을 흔들었지만, 지안은 노트북에서 시선도 떼지 않았다."나한테 뭐라 하지말고 클라이언트한테 말해.""네가 좀 해 줘.""내가 하면 싸워.""그게 내가 원하는 그림인데?"지안은 그제야 서연을 봤다. "난 지금 웃길 기분 아니거든.""알아. 그래서 더 웃겨."정말 얄미운 동기였다. 지안은 대꾸 대신 팀 메신저 창을 올렸다."서연, 소비자 반응 정리본 세 시 전까지요. 감성어만 빼지 말고 실제 표현도 같이 묶어 줘.""네에, 대리님.""비꼬지 말고.""비꼰 거 아닌데."서연이 돌아서면서 작게 툭 던졌다."오늘 또 둘이 남겠네."지안은 못 들은 척했다. 못 들은 척하는 데도 체력이 든다는 걸, 이번 주 들어 새삼 배우는 중이었다.***오후는 생각보다 더 빨리 어두워졌다.기획팀에서 붙은 대리는 외근이 길어져 자료만 넘기고 빠졌고, 팀장은 저녁 회의가 잡혔다며 일곱 시쯤 사라졌다. 서연은 여덟 시를 넘기자 의자 등받이에 몸을 던지며 말했다."나 먼저 간다. 더 하면 내일 못 일어나.""가.""너는?""레퍼런스 정리만 끝내고."서연이 가방을 메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재하는 아직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소매를 걷어올린 채, 마우스보다 펜을 더 많이 쓰는 사람답게 스케치패드 한쪽을 이미 새까맣게 채워 놓고 있었다."재하 씨도 가요?""이것만 정리하고요.""이 회사 나쁜 데예요. 신입한테 첫 주부터 야근 시키고.""선배님도 있잖아요."그 한마디가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서, 지안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재하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서연은
Last Updated: 2026-04-01
Chapter: # 10화 - 그림 좋다회의실 문을 나서자 뒤에서 누군가 지나가며 말했다."영업1팀 이번 TF 또 그림 좋네.""오대리랑 신입 조합? 보기엔 좋지.""일도 잘 나올 것 같고."지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다. 사내연애를 의심하는 톤은 아니었다. 아직은. 그래도 저런 말은 씨앗이 된다. 보기 좋다, 그림 좋다, 둘이 합이 괜찮다. 회사는 일 얘기하다가도 금방 사람 얘기로 넘어간다.서연이 그걸 같이 들었는지 바로 낮게 말했다."벌써 시작하네.""뭐가.""사내 가십 기초 공사.""그만 좀 해.""내가 한 말 아니거든?""네가 제일 즐기고 있잖아.""그건 맞아."서연은 맞은편으로 휙 돌아서면서도 마지막 말을 남겼다."그래도 조심은 해. 회사 사람들은 일 잘 맞는 것도 금방 연애로 엮어."지안은 그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오후부터 TF 공기가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킥오프 일정 잡고, 기존 캠페인 레퍼런스 추리고, 클라이언트 자료를 뜯고, 경쟁사 사례를 빼고, 소비자 반응 메모를 정리하고. 지안은 늘 하던 식으로 일감을 잘라 사람들한테 뿌렸다."서연, 이 브랜드 이전 실패 캠페인 반응만 따로 묶어 줘.""오케이.""윤재하 씨는 비주얼 레퍼런스 오늘 안에 세 갈래로만 정리해 주세요. 예쁜 거 말고 방향 보이는 걸로.""네.""그리고 이번 브랜드, 톤이 너무 귀엽게 가면 바로 죽어요. 타깃이 애매해서 더.""네. 무난하게 착한 쪽 말고, 조금 더 날렵한 버전으로 볼게요."지안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날렵한 버전. 방금 자기가 메신저 창에 적었다가 지운 표현이었다."...맞아요. 그렇게.""네."재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게 또 이상했다. 대체 어디까지 맞춰 들어올 생각인지, 왜 그렇게까지 잘 읽히는지. 지안은 스스로가 예민해진 거라고 몇 번이고 결론 내리려 했다. 그런데 예민함만으로 설명 안 되는 순간이 자꾸 생겼다.오후 네 시쯤, 서연이 파일을 들고 지안 자리 옆에 와 섰다."나 궁금한 거 하나.""뭔데.
Last Updated: 2026-04-01
Chapter: # 9화 - TF 배정"분위기가 이상한데?"서연은 그런 말을 던져 놓고 바로 기다리는 인간이었다. 대꾸가 나오든 안 나오든 상대 얼굴을 끝까지 보면서, 어디서 금이 가는지 확인하는 쪽.지안은 컵 뚜껑을 닫았다. 너무 천천히 닫으면 티 나고, 너무 빨리 닫아도 티 난다. 그래서 평소처럼 닫으려고 했는데, 그 평소가 정확히 뭔지 갑자기 모르겠어서 더 짜증이 났다."네가 이상하게 보는 거지.""그럴 수도 있지." 서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도 이상하게 반응했어.""신입이 선 좀 넘었고, 내가 선 그었고. 끝.""그 신입이 무슨 선을 어떻게 넘었는데?"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 자체가 함정이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순간 끝이다. 무슨 말을 했고, 어디서 했고, 왜 그 타이밍이 거슬렸는지 풀어놓는 순간 박서연 같은 인간은 그걸 엮어서 결론까지 스스로 내린다."오지안.""왜.""너 지금 되게 말을 잘 골라.""원래 잘 골라.""아니. 평소엔 안 골라."지안은 한숨 대신 커피를 마셨다. 이미 식기 시작한 커피는 맛이 없었다. 오늘따라 모든 게 타이밍이 별로였다."일하자. 진짜 바빠.""그래, 뭐." 서연이 컵을 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나중에 안 끝났다고 하지 마.""안 해.""그 말이 제일 수상해."서연은 결국 더 캐묻지 않고 먼저 나갔다. 그게 오히려 무서웠다. 박서연은 정말 감이 왔을 때는 입을 닫고 지켜보는 쪽이었다. 지안은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한 박자 늦게 탕비실을 나왔다. 복도 건너편으로 재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걸음이 느긋했다. 전혀 들킨 사람 같지 않았다.그게 또 열받았다.***오전은 정신없이 흘렀다. 전날 PT 후속 수정이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됐고, 클라이언트는 드물게 군말 없이 컨펌을 줬다. 그쯤 되면 숨 좀 돌릴 만한데, 회사라는 곳은 꼭 그 타이밍에 다른 걸 얹는다."열한 시 반에 소회의실 비워 주세요."팀장이 메신저에 공지를 올렸다."신규 프로젝트 TF 배정할 겁니다."서연이
Last Updated: 2026-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