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제8화. 오라버니의 낯선 얼굴문을 열려던 찰나, 아주 미세하게 열린 문틈 사이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네 실수가 불러올 파장이 어느 정도인지 너는 정녕 모르는 모양이군.”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내가 아는 목소리가 아니었다.언제나 능글맞게 실실거리던 카시안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살벌한 억양이었다.숨을 죽이고 문틈으로 시선을 밀어 넣었다.거대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서 있는 카시안의 입매는 칼날처럼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그 앞에는 검은 로브를 쓴 길드원 하나가 덜덜 떨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길, 길드장님…! 상점가 쪽에서 누군가와 부딪히는 바람에… 그만 그 정보가 든 물건을 흘렸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일대를 뒤지고 있지만…!” "닥쳐라."카시안의 목소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그 안에 든 것이 만약 황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우리 길드는 물론이고 루체른도 끝장이야."쾅—!카시안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에 내 심장도 바닥으로 떨어졌다."어떻게든 오늘 밤 안으로 회수해. 그걸 주워 간 놈이 누구든, 모가지를 비틀어서라도 반드시 내 눈앞에 가져와야 한다. 알겠나?"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끼쳤다.상점가에서 부딪힌 사람, 흘린 물건, 그리고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가문 자체가 끝이라는 무언가의 정보…바지 주머니 속의 은 원통이 무겁게 느껴졌다.'말도 안 돼… 카시안, 오빠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거야? 설마, 황제를 돕는 게 아니라… 뒤에서 치려고 했던 거야?'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렸다.바로 그때, 카시안의 시선이 화살처럼 문틈을 꿰뚫으며 고개를 확 돌렸다.“… 누구냐. 거기 쥐새끼처럼 숨어있는 놈.”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슈슉—! 퍽!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단검 한 자루가 문설주에 깊숙이 박혔다.동시에 나를 향해 노려보는 그의 안광은 내가 알던 팔불출 둘째 오빠의 것이 아니었다.그것은 어둠 속에서 먹잇감의 숨통을 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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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7화. 평화로운 외출은 오래가지 않는다.“아가씨, 그 물건은 뭔가요? 모양이 참 독특하네요. 혹시 타국에서 온 귀한 향수병일까요?"푸딩 생각에 잔뜩 신이 난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어… 글쎄. 그런가 봐. 주인을 찾아주기엔 너무 멀리 가버렸으니 일단 내가 가지고 있을게."나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하며 은 원통을 만지작거렸다.기분 탓일까?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 표면에서 기분 나쁜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무의식 중에 내 안의 이능력이 원통 표면에 살짝 스친 순간이었다.찰칵—!아주 작은 파열음과 함께 매끄럽던 은 원통의 표면이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그리고 원통 한가운데, 숨겨져 있던 문양 하나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어?'그 문양을 확인한 순간, 내 혈관 속의 피가 단숨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검은 가시덩굴이 반으로 쪼개진 왕관을 옥죄고 있는 섬뜩한 문장은 바로 한 달 전,망나니 둘째 오빠 카시안이 내게 그 미친 심부름을 시키며 은밀히 보여주었던 그 문양이었다.— 잘 들어, 막내야. 이 문양 있는 놈들은 다 진짜 미친놈들이야. 절대, 엮여서는 안 되는 새끼들이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보면 바로 도망쳐야 한다.오빠의 경고가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미친. 미친! 미친!!!방금 나랑 부딪힌 그 앳된 소년은 분명 정황상 반란군의 전령이거나 최소한 그에 준하는 위험한 물건을 운반하던 놈이다.‘내 평화로운 일상이! 간신히 그 지옥에서 탈출했는데! 왜 내 손에 이 시한폭탄이 들려 있는 거냐고!’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물건을 길바닥에 냅다 던져버리려던 찰나였다."저쪽이다! 방금 이 골목으로 들어갔다!""검은 후드를 쓴 자다! 황실 근위대의 이름으로 명한다, 당장 상점가의 출입구를 봉쇄해라!"골목 입구 쪽에서 철갑이 부딪히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황실 근위대라니? 맙소사.어젯밤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따돌렸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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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6화. 푸딩 먹으러 왔을 뿐인데푸른 바다를 그대로 떠다 옮겨 놓은 듯한 짙은 사파이어 색은 내 눈동자 색과 완벽하게 공명했다.부드러운 실크가 물결처럼 찰랑거렸고, 소매 끝단에 섬세하게 수놓아진 은색 자수는 마치 파도 위에 부서지는 햇살 같았다.허리 라인을 살짝 뒤로 뺀 덕분에 코르셋의 압박은 사라졌지만, 오히려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실루엣이 평소보다 나를 더 여유롭고 고고해 보이도록 만들었다.무엇보다 차갑고 투명하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어두운 블루 드레스 위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자 마치 한여름 밤의 서늘한 달빛을 몸에 감은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세상에, 아가씨…. 역시 오늘도 제 눈은 틀리지 않았어요!"릴리는 이미 자신의 수고는 다 잊은 듯,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황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이 드레스 색이 아가씨의 그 푸른 눈동자를 집어삼킬 듯 강조해주고 있잖아요! 거기다 눈부신 백금발까지…. 이건 반칙이에요. 이따가 길 가던 사람들이 다 넋을 잃고 쳐다봐서 상점가 전체가 마비되면 어떡하죠?""에이, 설마 그 정도겠어? 이제 됐지? 얼른 가자, 너 ‘올 어바웃 푸딩'가고 싶다며!"나는 릴리의 과장 섞인 찬사를 가볍게 넘기며 거울 속의 나를 한 번 더 훑어보았다.확실히, 릴리의 안목은 실로 대단하다.우리는 상점가행 마차에 몸을 실었다."와, 정말 오랜만에 나온 상점가네요!"마차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릴리가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나 역시 숨 막히는 궁전에 한 달이나 처박혀 있다가 탁 트인 거리를 마주하니 막혔던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제국에서 가장 번화한 에뜨와르 상점가는 나와 릴리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다.반듯하게 깔린 대리석 보도 위로 다양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고, 길 양옆 늘어선 고급 부티크들의 쇼윈도에는 햇살을 받은 유리와 보석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수줍게 맞잡은 연인들의 손과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까지. 거리에서 생동감이 넘쳐흘렀다.무엇보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고소한 브리오
Terakhir Diperbarui: 2026-05-14
Chapter: 제5화. 황제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황궁 북쪽에 있는 정원 쪽문 앞에는 기묘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아니, 정적이라기보다는 지독하고 무거운 침묵이었다."……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최정예 황실 근위대원들이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대리석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몇몇은 아예 정신을 잃었고, 몇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삐걱거리고 있었다.그들의 기억은 방금 전 무언가에 의해 통째로 도려내진 듯 흐릿했다.그 수많은 인파 사이로 단 한 사람만이 형형한 기운을 뿜으며 서 있었다.나른하게 흐트러진 흑발 그리고 어둠 속에서 포식자의 안광처럼 번뜩이는 적안을 가진 제국의 지배자 카엘루스였다.그는 검을 떨어뜨린 채 넋을 잃은 근위대장 엘릭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폐하… 어찌… 제가 왜 여기…. 분명 갈색 머리 소년을…."엘릭은 '갈색 머리 시종'을 쫓았다는 단편적인 정보 외에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 듯했다.추격의 끝에서 마주한 그 경이로운 광경이 마치 거대한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소년? 아니, 엘릭."카엘루스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그의 목소리는 나른하면서도 짙은 광기를 품고 있었다."그는 평범한 소년 시종 따위가 아니었다. 나조차 예상치 못한… 아주 눈부시고 아름답던 불순물이었지."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말을 남긴 카엘루스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남은 깨진 아티팩트 조각 하나를 만지작거렸다."여신의 재림이라…."그는 똑똑히 기억했다.찰나의 순간, 밤의 어둠을 찢고 터져 나오던 그 눈부신 백금발과 공기를 압도하던 신성한 권능의 파동을 말이다.‘나를 향한 기억의 끝을 도려내소서.’조용하면서도 청량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했다.빛의 파동이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며 뇌리에 박힌 그녀의 존재를 아주 잠깐 지우려 했던 그 이질적인 감각까지도.그것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다.신의 축복을 받은 아주 특별한 혈족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권능이었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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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4화. 도망친 쥐새끼는 루체른의 꽃이었다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황제에게 잡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하아… 오라버니, 정말 말도 마세요. 그 지긋지긋한 데뷔탕트 준비!!"나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오빠도 알겠지만 루체른가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예법 선생들이, 마땅히 루체른의 공녀라면 완벽해야 한다며 숨도 못 쉬게 잔소리를 해대니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잠시 남부 별장으로 피해 간 거예요.큰 오라버니가 워낙 바쁘시니 몰랐겠지만 그나마 한가한 카시안 오빠가 뒤처리를 잘 해준 덕분에 겨우 숨통 좀 트고 온 거라고요!"카시안에게 약간의 죄책감 플러스 공범의 굴레를 씌우는 완벽한 프레임이었다.스스로에게 뿌듯함을 느끼며, 이것도 이자쳐서 받아 내리라 다짐했다.칼라일의 눈썹이 움찔거리는 틈을 타 나는 쐐기를 박았다."그런데 오라버니, 남부 성벽 외곽 쪽이 마물 때문에 아주 시끄럽더라고요. 남부가 그 모양이면 북부는 어쩌나 걱정돼서 밤잠을 설쳤다니까요. 오라버니도 요즘 그것 때문에 집무실에서 사시는 거 아니에요?"'사고 친 동생'에서 가문을 걱정하는 속 깊은 동생으로 살짝 틀어 포지셔닝을 변경하는 순간, 칼라일의 살벌한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의 승리다."… 북부는 안정적이다. 하지만 네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줄은 몰랐군."막내에게서 나온 의외의 걱정 어린 한마디에 칼라일은 오묘한 눈길로 막내를 쳐다보더니 결국 눈길을 거두고, 엘리노아가 조금이라도 더 편히 쉴 수 있도록 카시안 오빠의 뒷덜미를 짐짝처럼 낚아채 방을 나섰다.문이 닫히기 직전의 0.5초!나는 사라져 가는 카시안 오빠를 향해 엄지와 검지를 사삭-! 비비며 아주 명확하게 '빠른 입금 요망’ 신호를 보냈다.그는 피눈물을 흘릴 듯한 기세로 '웃기는 소리! 너야말로 진짜 제삿날인 줄 알아라'라는 살벌한 눈신호를 보냈지만,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우아한 미소로 화답하며 가느다란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어 주었다.‘살펴 가셔요~ 조
Terakhir Diperbarui: 2026-05-13
Chapter: 제3화. 황궁보다 무서운 건 우리 오빠들이다우여곡절 끝에 내 방 창문이 보이는 곳까지 다다르자 긴장이 탁 풀렸다.빠르게 내 침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녹이고자 조용히 창문을 넘어 들어가자마자…"아가씨! 대체 어디서 무얼 하다 오셨길래 몰골이 이 모양입니까!"나를 반긴 것은 호환마마보다 무시무시하다는 유모, 마르타의 외침이었다.나는 황급히 커튼을 닫으며 멋쩍게 씨익 웃었다.아무래도 마르타를 속이기에는 무리였나 보다.아아. 한 달 만에 돌아온 푹신한 내 방이다!빠르게 침대 쪽으로 날아가듯 가서 페르시안 카펫 위로 흙 묻은 부츠를 탈탈 털어대니 마르타의 얼굴이 울그락붉그락 변했다."쉿, 마르타! 목소리 좀 낮춰줘. 나 큰 오빠한테 걸리면 진짜 끝장이라고.""끝장이 나도 벌써 났어야죠! 머리카락 꼴 좀 보세요. 뺨에 이 생채기는 또 뭐고요? 한 달 동안 남부 별장에서 요양하신다더니, 대체 어디서 구르다 오신 겁니까!"마르타는 경악하며 내 망토를 거칠게 벗겨냈다.갓난아기 때부터 나를 키워온 그녀의 눈을 속이는 건 역시 불가능에 가까웠다.사실 나는 침대에 누워 숨 쉬는 운동을 제일 좋아하고,고기 요리를 산더미처럼 해치우면서,하지 말라는 것만 꼭 골라하는 청개구리이자 사고뭉치,엘리노아 루체른 공녀이다.그리고 공작저 식구들은 밖에서 사람들이 보는 그 우아하고 도도한 백금발 공녀와 내 진짜 모습이,그 괴리가 한 백만 광년쯤 동떨어져 있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아우, 몰라. 나중에 다 설명할 테니까 일단 먹을 것 좀! 한 달 동안 빵가루랑 풀때기만 씹었더니 위장이 등에 달라붙었어. 고기 듬뿍 얹은 파이로 부탁해, 유모!""정말이지…! 씻기 전엔 절대 안 됩니다!"마르타가 혀를 차며 욕실로 향하는 사이,침대에 드리워진 두꺼운 벨벳 캐노피 뒤에서 불쑥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살아 돌아왔네, 우리 막내?"능글맞은 그 목소리가 고막에 닿는 순간,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나를 저 지옥 불길로 밀어 넣은 원흉이자
Terakhir Diperbarui: 2026-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