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내가 먹기 전에 이 샐러드 잎사귀 수부터 세어 와라. 난 짝수 아니면 안 먹는다.” 미친 황제의 시종으로 구르던 한 달, 원래 모습인 루체른 공녀로 돌아오면 다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황제는 내 백금발 한 올까지 기억하고 있었고, 나를 ‘특별 보좌관’이라는 인질로 삼아 다시 옆에 두었다. “내 것에 대한 소유욕이 강하거든. 엘리노아, 네가 다른 놈 이름을 외우는 건 불쾌해.” 질투에 눈먼 황제와, 조카 바보가 된 마탑주 숙부님, 그리고 엘리노아만 바라보는 사고뭉치 오빠들 사이에서 나의 평화로운 백수 라이프는 영원히 멀어져만 간다!
View More“으으으…”머리 아파…복잡하게 얽힐수록 한 가지 확실해지는 건, 지금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황제가 있고, 내가 그에게 진득하게 얽히고 있다는 사실이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그런 음모 따위가 아니었다.아침의 다정한 눈길은 온데간데없이 서늘한 채 돌아서던 그의 뒷모습이, 그 찰나의 냉담함이 가시처럼 박혀 자꾸 내 마음을 찔러댔다.“누가 폭군 아니랄까 봐, 기분이 이랬다 저랬다, 왜 저래?”“…속상하게.”입술을 삐죽이며 터벅터벅 걷던 나는 문득 멈춰 섰다.‘음? 내가 왜…?’내가 굳이 저 미친 황제의 태도에 일일이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편이 콕콕 쑤셔오는 건 분명 서운한 감정이었다.‘외로워서 그럴 거야, 엘리노아. 괜찮아.’아마도 다정다감한 오라버니들 곁을 떠나 홀로 황궁에 덩그러니 남겨진 탓이리라.그저 집이 그리워진 걸 거라며,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외면한 채 서둘러 방으로 발을 옮겼다.**회의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대신들이 내뱉는 국정 현안들은 평소보다 더 느리고 지겹게 들렸다.머릿속에는 오직 아침에 보았던 단추를 채워주며 쩔쩔매던 엘리노아의 복숭아처럼 불그스름한 얼굴만이 맴돌 뿐이었다.펠릭스 덕에 볼 수 있었던 맑은 두 눈에 그렁거리는 그녀의 눈물을 문득,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지루한 회의 시간 동안 갑자기 그녀를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결국 참지 못하고 회의를 대충 끝내버렸다.평소와 다른 황제의 행동에 대신들이 당황스러워했으나 알 바 아니었다.그저 그녀가 보고 싶었다.카엘루스의 마음을 이미 읽은 그림자들이 그의 그림자 속에서 속삭였다. 그녀가 도서관으로 향했다고.그럴 줄 알았다.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그녀가 있을 법한 곳을 이미 알고 있기에 빠르게 그녀를 향해 갔다.토끼처럼 깜짝 놀라 책을 뒤로 숨기려나?그녀를
아니? 회의에 간다던 남자가 왜 벌써 여기 있는 걸까?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힌 충격보다 정수리에 따갑게 꽂히는 그의 서늘한 시선이 왠지 모르게 더 아프게 느껴졌다.나는 본능적으로 급하게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리려 했건만, 카엘루스는 이미 내 마음을 읽었다는 듯 한 발짝 더 다가와 내 도주를 차단하며 나를 내려다보았다.“폐, 폐하? 회의 중 아니셨나요?”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방금 엿들은 가시왕관 사건에 대해 저 남자는 알고 있을까?그들이 어쩌면 은 원통이 소멸된 게 아니라 알이 되어 내게 있다는 사실까지도?황제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엘리노아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어지럽게 뒤엉켰다.카엘루스는 대답 대신 창백해진 내 얼굴을 훑어 내렸다.마치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려는 것처럼…“회의가 지루해서 일찍 끝냈지. 그보다 엘리노아 보좌관은 내 당부를 잊은 모양이야. 분명 빨빨거리며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 말이 우습나? ”그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거대한 그의 그림자가 나를 집어삼킬 듯 덮쳐왔다.“그게 아니라, 저는 그저… 도서관에 책들이 궁금해서….”숨이 막혔다.“책을 보러 온 것치고 표정이 지나치게 비장하군. 제국의 멸망이라도 목격한 건가?”카엘루스의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뺨 근처로 가져갔다.나는 움찔하며 눈을 감았으나, 그의 손가락은 내 귀를 지나쳐 그 바로 옆 서가 기둥을 짚었을 뿐이었다.순식간에 그의 품 안에 갇힌 꼴이 되었다.그의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기분 좋은 그의 체향이 지금은 설렘보다는 무언가의 압박감으로 다가왔다.“그대의 심장 박동이 여기까지 들려. 무얼 숨기는 거지?”“없습니다. 없어요. 전혀요! 그저 갑자기 폐하께서 나타나셔서 놀랐을 뿐이에요.”“… 거짓말.”카엘루스가 낮게 읊조리며 얼굴을 가까이 밀착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실례지만, 성함이……? 도서관에서 일하시는 사서분은 아니신 것 같은데….”“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마탑 소속 마법사인 벨리안이라고 합니다. 폐하의 요청을 받고 잠시 황궁에 머물며 연구를 돕고 있지요.”마탑의 마법사, 벨리안이라니!로판의 공식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능력 있는 마법사 + 다정한 성격 + 안경 = 무조건 치명적인 서브 남주’.게다가 황제의 요청으로 왔다면 분명 이 정체 모를 검은 알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벨리안은 내 안주머니 쪽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다 안다는 듯한 신비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마 영애가 보살피고 있는 그 ‘특별한 존재’를 알아보는 데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보좌관님.”나를 부르는 ‘보좌관님’이라는 호칭이 카엘루스의 입에서 나올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내 귓가에 감겼다.잔잔한 호숫가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 같았다.나는 하마터면 이 눈 호강 시켜주는 마법사의 미소에 홀려 “어서 분석해 주세요!”라고 외칠 뻔했다.하지만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았다.‘정신 차려, 엘리노아. 여긴 로판 속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현실!’하지만 내 결심이 무색하게도 벨리안은 어느새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나긋하게 속삭였다.“앞으로 자주 뵙게 될 것 같군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 도서관 3층 끝방으로 찾아오세요. 보좌관님만을 위한 ‘특별한 참고서’를 준비해 두겠습니다.”그의 눈동자가 안경 너머로 반짝였다.카엘루스가 말한 ‘빨빨거리지 마라’는 당부가 무색하게, 내 황궁 생활에 아주 강력하고도 달콤한 유혹이 등장해 버렸다.**벨리안이란 마법사와 인사를 마치고, 좀 더 도서관 깊숙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그동안 오라버니의 눈을 피해 변장 아티팩트를 뒤집어쓰고, 들킬까 봐 숨 죽이며 로판을 읽던 그 서러운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오늘은 다르다.서브 남주 같은 잘생긴 마법사도 만나고, ‘특별 보좌관
“솜뭉치, 너 이리 와!”내가 근엄한 표정으로 손가닥을 까딱하니 황제와 신나게 싸우다 언제 그랬냐는 듯 가만히 멈췄다.그러고는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알에 묻은 소스를 털어내더니, 이내 때구르르 굴러서는 내 손에 쏙 들어가 안겼다.이렇게 순한 양(아니, 순한 알?)이 되다니,“… 하!”어이없다는 듯 카엘루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알 녀석(?)의 180도 바뀐 태도에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나는 이 승부의 진정한 승리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보여주겠다는 듯 알을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봤죠?’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본 카엘루스는 황당해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었다.“보좌관에게만 저렇게 순종적이라니. 체면이 말이 아니군.”식사를 마친 그가 우아하게 입가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햇살을 받은 그의 실루엣은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완벽했다.“난 회의가 있어 가봐야 한다. 저녁은 같이 먹을 테니 늦지 말고.”그는 떠나기 전 내 옆을 지나가며 낮게 읊조렸다.“궁 내 가고 싶은 곳은 다 가도 좋다. 단, 너무 빨빨거리며 돌아다니지는 마라. 보는 눈이 많으니.”마치 어린애를 물가에 내놓은 부모 같은 말투였다.음, 본인만의 영역 안에 가둬두고 싶은 맹수의 소유욕 같기도…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사실 머릿속은 이미 딴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빨빨거리며 다니지 말라고? 무슨 소리! 이제부터가 진짜 내 업무 시작인데.’카엘루스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후 나는 곧장 황실 도서관으로 향했다.어제의 마차 납치 사건과 오늘 아침 단추 소동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는 역시 1일 1 로판이 시급했다.이미 뻔질나게 드나든 황실 도서관이긴 했지만, 아직 100분의 1도 읽지 못했는 걸.“어디 보자, 로맨스 서가는 분명 이쪽이었던 것 같은데…….”방대한 서고 사이를 누비며 나는 빠르
태양궁이라는 이름처럼 황제의 침실은 부서지는 아침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당연히 침대 위에 카엘루스가 있을 거란 예상이 빗나가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시선을 돌려보았다.그는 창가 쪽 집무 책상에 앉아 있었다.평소처럼 완벽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풍기던 사내는 온데간데없었다.얇다 못해 살짝 속살이 비치는 하얀 실크 셔츠가 마치 단추 따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앞부분이 훤히 풀어헤쳐져 있었다.덕분에 처음 마주하는 그의 단단히 잡혀있는 가슴 근육의 굴곡과 툭 불거진 쇄골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카엘루스의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턱을 부드럽게 고정하며 들어 올렸다.“글쎄, 영애라면 이걸 어떻게 하고 싶을까?”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입가에 걸린 묘한 미소가 소름 끼치도록 매혹적이었다.‘헉! 위험하다…… 이건 마치 로판 30화쯤 나오는 남주의 전형적인 유혹 포즈잖아?!’머릿속 덕후 본능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애석하게도 내 몸은 정직했다. 서 있는 황제를 앉은 채로 올려다보느라 목 근육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저…… 폐
바닥에 놓인 조그마한 검은 알이 혹시라도 깨질세라 푹신한 바구니에 옮겨 담은 후, 우리들은 자리를 옮겨 응접실로 이동했다.조금 전까지 불꽃이 튀고 얼음 조각이 날리며 어둠의 파편에서 빛의 기둥까지 세상에 있는 힘없는 힘 모두 뒤엉키는 아수라장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것 같은데, 응접실에서는 이질적으로 창가를 통해 나른한 햇갈이 쏟아져 내렸다.이 비현실적인 고요를 깬 것은 황제의 낮은 목소리였다.“그래, 그대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지?”공작저의 최고급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카엘루스는, 엘리노아의 부서진 아티팩
“내가 인내심이 없다고 말했을 텐데. 기억하지 못하나?”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영애가 강조했던 그 ‘최상급 기념품’을 친히 받으러 왔지. 말했지 않은가, 내가 인내심이 좀 없다고… 그런데, 기념품치고는 꽤 살벌한 걸 준비했군. 영애의 취향이 이렇게 과격한 줄은 몰랐어. 앞으로 참고하도록 하지.”칼라일 오라버니가 내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카엘루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황권의 마력이 오라버니의 한기를 단숨에 눌러버렸다.“비켜라, 공작. 저건 루체른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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