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6
By:  내사랑나무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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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먹기 전에 이 샐러드 잎사귀 수부터 세어 와라. 난 짝수 아니면 안 먹는다.” 미친 황제의 시종으로 구르던 한 달, 원래 모습인 루체른 공녀로 돌아오면 다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황제는 내 백금발 한 올까지 기억하고 있었고, 나를 ‘특별 보좌관’이라는 인질로 삼아 다시 옆에 두었다. “내 것에 대한 소유욕이 강하거든. 엘리노아, 네가 다른 놈 이름을 외우는 건 불쾌해.” 질투에 눈먼 황제와, 조카 바보가 된 마탑주 숙부님, 그리고 엘리노아만 바라보는 사고뭉치 오빠들 사이에서 나의 평화로운 백수 라이프는 영원히 멀어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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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미친 황제의 침실에서 도망쳤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황제의 침실에서 살며시 열린 커튼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침대 위에 누운 사내의 얼굴을 비추었다.​단정하게 감긴 긴 속눈썹과 날카로운 콧날.굳게 다물어진 붉은 입술까지.헝클어진 흑발마저 완벽한 조각상 같은 이 남자는 신의 사랑을 듬뿍받은게 분명하다.​하지만 나는 안다.​저 어여쁘게 붉으스름한 입술이 열리는 순간! 내 인생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리라는걸 말이다.​​‘...입만 다물면 참 완벽한데.’​​나는 침대 머리맡에 서서 잠든 카엘루스 황제를 내려다보며 짧게 혀를 찼다.​하지만 속지 말자!​저 남자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오밤중에 갑자기 샐러드 잎사귀 수를 세어오라고 시킬 인간이니까.​‘홀수면 기분 나쁘다. 다시 세어와.’​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진다.​​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다.​​나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낡은 신발을 집어 들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숨을 참으며 한 발짝씩 문을 향해 뒷걸음질을 쳤다.​​“잘 있어라, 블랙 황궁. 그리고 미친 황제님. 다시는 보지 말자고.”​​마침내 문고리를 잡은 순간,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빠져나온 내 발걸음은 절박함과 희열로 가득 찼다.​지금 뿐이다.​이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유일한 기회는.​달빛조차 먹구름 뒤로 몸을 숨긴 채 도망치기 완벽한 밤이었다. 나는 황궁의 거대한 대리석 기둥 뒤로 몸을 바짝 붙인 채 숨을 죽였다.​철컥, 철컥.​규칙적인 금속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며 복도를 울렸다. 철갑을 두른 기사들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나는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을 억눌러야만 했다.당장 냅다 달려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목 끝까지 치밀었으나, 안타깝게도 내게는 저들에게 맞설 힘도, 운도 없었다. 소리 없이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것만이 내 유일한 도피 전략이었다.​“하아, 내 팔자야.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겨우 전언 하나 전하겠다고 발을 들인 황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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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미친 황제에게 정체를 들켰다.
​​그날 이후로 내 일상은 정말 어이없음의 연속이었다.​"엘리안, 저기 날아가는 새의 깃털 개수가 궁금하군."“???”“뭐 해? 가서 세어 와라”“?????”“내가 먹기 전에 지금 당장 이 샐러드에 있는 잎사귀 수를 세어 와라. 난 짝수 아니면 안 먹는다.”“???????”​이런 생뚱맞은 미션은 차라리 귀엽다.​진짜 문제는 그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내 수명이 1년씩 단축된다는 거다.슉슉— 소리와 함께 뺨을 스치는 서늘한 감각.이건 시종을 부리는 게 아니라, 사형수랑 놀아주는 간수 같은 것과 가깝지 않은가!​그의 안식처이자 나의 강제 수용소였던 태양궁에서 겪은 기행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손이 발이 되도록 바닥을 닦고, 그의 변덕을 맞추던 그! 굴욕의 시간들! 하지만 괜찮다.​그래, 이 끔찍한 ‘블랙 황궁’ 생활도! 오늘로 드. 디. 어. 종지부를 찍을 테니까!​​***찌릿—!​​"윽!"​​내 아련한 회상을 깨고 목덜미를 파고드는 통증에 입술을 짓이겼다.위장 아티팩트가 뜨거운 스파크를 내뿜고 있었다.큰일이다.마력이 바닥나고 있다는 최악의 신호였다.​​찰랑 거리던 짧은 갈색 머리칼 끝 자락이 눈부신 백금빛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평범했던 에메랄드빛 눈동자 역시 본래의 시린 청색을 되찾으려 거칠게 일렁였다.​자의든 타의든, 오늘 반드시 이 황궁을 벗어나야 했다.만약 그 미친 황제가 본인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지금 이 모습을 혹시라도 알게 된다면···.​상상만으로도 뒷목이 서늘해져 소름이 돋았다.​​"거기 누구냐! 멈춰라!"​​그때, 날카로운 외침이 정적을 찢어발겼다.하필이면 야간 순찰 중이던 기사였다.​​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렸다.우아하고 조용하게 사라지겠다는 계획은 기사의 우렁찬 고함과 함께 밤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잡아라! 폐하의 침소 근처에 침입자가 나타났다!"​​우당탕탕—!​쉽지 않을 거라 생각 하긴 했지만 역시나 ​고요했던 황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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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황궁보다 무서운 건 우리 오빠들이다
​​우여곡절 끝에 내 방 창문이 보이는 곳까지 다다르자 긴장이 탁 풀렸다.빠르게 내 침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녹이고자 조용히 창문을 넘어 들어가자마자…​"아가씨! 대체 어디서 무얼 하다 오셨길래 몰골이 이 모양입니까!"​나를 반긴 것은 호환마마보다 무시무시하다는 유모, 마르타의 외침이었다.나는 황급히 커튼을 닫으며 멋쩍게 씨익 웃었다.아무래도 마르타를 속이기에는 무리였나 보다.​아아. 한 달 만에 돌아온 푹신한 내 방이다!​빠르게 침대 쪽으로 날아가듯 가서 페르시안 카펫 위로 흙 묻은 부츠를 탈탈 털어대니 마르타의 얼굴이 울그락붉그락 변했다.​"쉿, 마르타! 목소리 좀 낮춰줘. 나 큰 오빠한테 걸리면 진짜 끝장이라고.""끝장이 나도 벌써 났어야죠! 머리카락 꼴 좀 보세요. 뺨에 이 생채기는 또 뭐고요? 한 달 동안 남부 별장에서 요양하신다더니, 대체 어디서 구르다 오신 겁니까!"​마르타는 경악하며 내 망토를 거칠게 벗겨냈다.갓난아기 때부터 나를 키워온 그녀의 눈을 속이는 건 역시 불가능에 가까웠다.​사실 나는 침대에 누워 숨 쉬는 운동을 제일 좋아하고,고기 요리를 산더미처럼 해치우면서,하지 말라는 것만 꼭 골라하는 청개구리이자 사고뭉치,엘리노아 루체른 공녀이다.​그리고 공작저 식구들은 밖에서 사람들이 보는 그 우아하고 도도한 백금발 공녀와 내 진짜 모습이,그 괴리가 한 백만 광년쯤 동떨어져 있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아우, 몰라. 나중에 다 설명할 테니까 일단 먹을 것 좀! 한 달 동안 빵가루랑 풀때기만 씹었더니 위장이 등에 달라붙었어. 고기 듬뿍 얹은 파이로 부탁해, 유모!""정말이지…! 씻기 전엔 절대 안 됩니다!"​마르타가 혀를 차며 욕실로 향하는 사이,침대에 드리워진 두꺼운 벨벳 캐노피 뒤에서 불쑥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살아 돌아왔네, 우리 막내?"​능글맞은 그 목소리가 고막에 닿는 순간,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나를 저 지옥 불길로 밀어 넣은 원흉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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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도망친 쥐새끼는 루체른의 꽃이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황제에게 잡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하아… 오라버니, 정말 말도 마세요. 그 지긋지긋한 데뷔탕트 준비!!"​나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오빠도 알겠지만 루체른가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예법 선생들이, 마땅히 루체른의 공녀라면 완벽해야 한다며 숨도 못 쉬게 잔소리를 해대니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잠시 남부 별장으로 피해 간 거예요.​큰 오라버니가 워낙 바쁘시니 몰랐겠지만 그나마 한가한 카시안 오빠가 뒤처리를 잘 해준 덕분에 겨우 숨통 좀 트고 온 거라고요!"​카시안에게 약간의 죄책감 플러스 공범의 굴레를 씌우는 완벽한 프레임이었다.스스로에게 뿌듯함을 느끼며, 이것도 이자쳐서 받아 내리라 다짐했다.칼라일의 눈썹이 움찔거리는 틈을 타 나는 쐐기를 박았다.​"그런데 오라버니, 남부 성벽 외곽 쪽이 마물 때문에 아주 시끄럽더라고요. 남부가 그 모양이면 북부는 어쩌나 걱정돼서 밤잠을 설쳤다니까요. 오라버니도 요즘 그것 때문에 집무실에서 사시는 거 아니에요?"​'사고 친 동생'에서 가문을 걱정하는 속 깊은 동생으로 살짝 틀어 포지셔닝을 변경하는 순간, 칼라일의 살벌한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의 승리다.​"… 북부는 안정적이다. 하지만 네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줄은 몰랐군."​막내에게서 나온 의외의 걱정 어린 한마디에 칼라일은 오묘한 눈길로 막내를 쳐다보더니 결국 눈길을 거두고, 엘리노아가 조금이라도 더 편히 쉴 수 있도록 카시안 오빠의 뒷덜미를 짐짝처럼 낚아채 방을 나섰다.​문이 닫히기 직전의 0.5초!나는 사라져 가는 카시안 오빠를 향해 엄지와 검지를 사삭-! 비비며 아주 명확하게 '빠른 입금 요망’ 신호를 보냈다.​그는 피눈물을 흘릴 듯한 기세로 '웃기는 소리! 너야말로 진짜 제삿날인 줄 알아라'라는 살벌한 눈신호를 보냈지만,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우아한 미소로 화답하며 가느다란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어 주었다.​‘살펴 가셔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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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황제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황궁 북쪽에 있는 정원 쪽문 앞에는 기묘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아니, 정적이라기보다는 지독하고 무거운 침묵이었다.​"……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최정예 황실 근위대원들이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대리석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몇몇은 아예 정신을 잃었고, 몇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삐걱거리고 있었다.그들의 기억은 방금 전 무언가에 의해 통째로 도려내진 듯 흐릿했다.​그 수많은 인파 사이로 단 한 사람만이 형형한 기운을 뿜으며 서 있었다.​나른하게 흐트러진 흑발 그리고 어둠 속에서 포식자의 안광처럼 번뜩이는 적안을 가진 제국의 지배자 카엘루스였다.그는 검을 떨어뜨린 채 넋을 잃은 근위대장 엘릭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폐하… 어찌… 제가 왜 여기…. 분명 갈색 머리 소년을…."​엘릭은 '갈색 머리 시종'을 쫓았다는 단편적인 정보 외에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 듯했다.추격의 끝에서 마주한 그 경이로운 광경이 마치 거대한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소년? 아니, 엘릭."​카엘루스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그의 목소리는 나른하면서도 짙은 광기를 품고 있었다.​"그는 평범한 소년 시종 따위가 아니었다. 나조차 예상치 못한… 아주 눈부시고 아름답던 불순물이었지."​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말을 남긴 카엘루스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남은 깨진 아티팩트 조각 하나를 만지작거렸다.​"여신의 재림이라…."​그는 똑똑히 기억했다.찰나의 순간, 밤의 어둠을 찢고 터져 나오던 그 눈부신 백금발과 공기를 압도하던 신성한 권능의 파동을 말이다.​‘나를 향한 기억의 끝을 도려내소서.’​조용하면서도 청량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했다.빛의 파동이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며 뇌리에 박힌 그녀의 존재를 아주 잠깐 지우려 했던 그 이질적인 감각까지도.​그것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다.신의 축복을 받은 아주 특별한 혈족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권능이었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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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푸딩 먹으러 왔을 뿐인데
푸른 바다를 그대로 떠다 옮겨 놓은 듯한 짙은 사파이어 색은 내 눈동자 색과 완벽하게 공명했다.부드러운 실크가 물결처럼 찰랑거렸고, 소매 끝단에 섬세하게 수놓아진 은색 자수는 마치 파도 위에 부서지는 햇살 같았다.허리 라인을 살짝 뒤로 뺀 덕분에 코르셋의 압박은 사라졌지만, 오히려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실루엣이 평소보다 나를 더 여유롭고 고고해 보이도록 만들었다.​무엇보다 차갑고 투명하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어두운 블루 드레스 위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자 마치 한여름 밤의 서늘한 달빛을 몸에 감은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세상에, 아가씨…. 역시 오늘도 제 눈은 틀리지 않았어요!"​릴리는 이미 자신의 수고는 다 잊은 듯,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황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이 드레스 색이 아가씨의 그 푸른 눈동자를 집어삼킬 듯 강조해주고 있잖아요! 거기다 눈부신 백금발까지…. 이건 반칙이에요. 이따가 길 가던 사람들이 다 넋을 잃고 쳐다봐서 상점가 전체가 마비되면 어떡하죠?""에이, 설마 그 정도겠어? 이제 됐지? 얼른 가자, 너 ‘올 어바웃 푸딩'가고 싶다며!"​나는 릴리의 과장 섞인 찬사를 가볍게 넘기며 거울 속의 나를 한 번 더 훑어보았다.확실히, 릴리의 안목은 실로 대단하다.우리는 상점가행 마차에 몸을 실었다."와, 정말 오랜만에 나온 상점가네요!"​마차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릴리가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나 역시 숨 막히는 궁전에 한 달이나 처박혀 있다가 탁 트인 거리를 마주하니 막혔던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제국에서 가장 번화한 에뜨와르 상점가는 나와 릴리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다.​반듯하게 깔린 대리석 보도 위로 다양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고, 길 양옆 늘어선 고급 부티크들의 쇼윈도에는 햇살을 받은 유리와 보석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수줍게 맞잡은 연인들의 손과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까지. 거리에서 생동감이 넘쳐흘렀다.​무엇보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고소한 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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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평화로운 외출은 오래가지 않는다.
​​​“아가씨, 그 물건은 뭔가요? 모양이 참 독특하네요. 혹시 타국에서 온 귀한 향수병일까요?"​​푸딩 생각에 잔뜩 신이 난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어… 글쎄. 그런가 봐. 주인을 찾아주기엔 너무 멀리 가버렸으니 일단 내가 가지고 있을게."​​나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하며 은 원통을 만지작거렸다.기분 탓일까?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 표면에서 기분 나쁜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무의식 중에 내 안의 이능력이 원통 표면에 살짝 스친 순간이었다.​​찰칵—!​​아주 작은 파열음과 함께 매끄럽던 은 원통의 표면이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그리고 원통 한가운데, 숨겨져 있던 문양 하나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어?'​​그 문양을 확인한 순간, 내 혈관 속의 피가 단숨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검은 가시덩굴이 반으로 쪼개진 왕관을 옥죄고 있는 섬뜩한 문장은 바로 한 달 전,망나니 둘째 오빠 카시안이 내게 그 미친 심부름을 시키며 은밀히 보여주었던 그 문양이었다.​​— 잘 들어, 막내야. 이 문양 있는 놈들은 다 진짜 미친놈들이야. 절대, 엮여서는 안 되는 새끼들이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보면 바로 도망쳐야 한다.​​오빠의 경고가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미친. 미친! 미친!!!​​방금 나랑 부딪힌 그 앳된 소년은 분명 정황상 반란군의 전령이거나 최소한 그에 준하는 위험한 물건을 운반하던 놈이다.​​‘내 평화로운 일상이! 간신히 그 지옥에서 탈출했는데! 왜 내 손에 이 시한폭탄이 들려 있는 거냐고!’​​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물건을 길바닥에 냅다 던져버리려던 찰나였다.​​"저쪽이다! 방금 이 골목으로 들어갔다!"​"검은 후드를 쓴 자다! 황실 근위대의 이름으로 명한다, 당장 상점가의 출입구를 봉쇄해라!"​​골목 입구 쪽에서 철갑이 부딪히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황실 근위대라니? 맙소사.​​어젯밤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따돌렸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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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오라버니의 낯선 얼굴
문을 열려던 찰나, 아주 미세하게 열린 문틈 사이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네 실수가 불러올 파장이 어느 정도인지 너는 정녕 모르는 모양이군.”​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내가 아는 목소리가 아니었다.언제나 능글맞게 실실거리던 카시안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살벌한 억양이었다.​숨을 죽이고 문틈으로 시선을 밀어 넣었다.거대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서 있는 카시안의 입매는 칼날처럼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그 앞에는 검은 로브를 쓴 길드원 하나가 덜덜 떨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길, 길드장님…! 상점가 쪽에서 누군가와 부딪히는 바람에… 그만 그 정보가 든 물건을 흘렸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일대를 뒤지고 있지만…!” "닥쳐라."​카시안의 목소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그 안에 든 것이 만약 황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우리 길드는 물론이고 루체른도 끝장이야."​쾅—!​카시안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에 내 심장도 바닥으로 떨어졌다.​"어떻게든 오늘 밤 안으로 회수해. 그걸 주워 간 놈이 누구든, 모가지를 비틀어서라도 반드시 내 눈앞에 가져와야 한다. 알겠나?"​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끼쳤다.상점가에서 부딪힌 사람, 흘린 물건, 그리고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가문 자체가 끝이라는 무언가의 정보…​바지 주머니 속의 은 원통이 무겁게 느껴졌다.​'말도 안 돼… 카시안, 오빠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거야? 설마, 황제를 돕는 게 아니라… 뒤에서 치려고 했던 거야?'​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렸다.바로 그때, 카시안의 시선이 화살처럼 문틈을 꿰뚫으며 고개를 확 돌렸다.​“… 누구냐. 거기 쥐새끼처럼 숨어있는 놈.”​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슈슉—! 퍽!​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단검 한 자루가 문설주에 깊숙이 박혔다.​동시에 나를 향해 노려보는 그의 안광은 내가 알던 팔불출 둘째 오빠의 것이 아니었다.그것은 어둠 속에서 먹잇감의 숨통을 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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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오빠의 생명줄을 주웠습니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창문으로 뛰어내릴까?’​머릿속에서 빨간 비상벨이 미친 듯이 울려 댔다.주머니 속 은색 원통이 족쇄처럼 느껴졌다.그 순간, 나는 황궁 도서관에서 몰래 탐독했던 수많은 로판 속 생존 법칙 하나를 필사적으로 끄집어냈다.​[법칙 1. 최선의 방어는 압도적인 뻔뻔함이다!]​쾅—!​“오라버니이!!!”​집무실 문이 부서져라 열리고 씩씩대며 내가 튀어나오자, 방 안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조금 전까지 부하를 압박하며 반란군 수괴의 포스를 풍기던 둘째 오빠 카시안은 내 화려한 등장에 눈알이 튀어나올 듯 놀라며 들고 있던 깃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헉! 마, 막내야?! 네가 왜 여기…!”​카시안은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고 있던 길드원을 발로 뻥! 차서 책상 밑으로 밀어 넣으려다 실패했다.​“윽!”​나는 덜덜 떨리는 다리에 힘을 팍 주고는 특유의 철부지 말괄량이 톤으로 소리를 질렀다.​“아니, 멀쩡한 사람을 왜 발로 차고 난리야! 지금 통로 끝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서 내 고막을 테러한 건 카시안 오빠거든?! 누가 들으면 아주 나라라도 팔아먹은 줄 알겠어.”​나는 책상 밑으로 반쯤 처박힌 길드원을 한심하다는 듯 훑어보았다.그리고는 다시 카시안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며 쐐기를 박았다.​“그래봤자 고작 정보 길드 주제에 뭐 그렇게 대단한 일 이길래 이 난리법석인 건데? 설마… 진짜 나라라도 팔아먹었어?” “야, 너 말이 씨가 된다고, 무슨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고 그래! 나라를 팔아먹다니, 나를 뭘로 보고!”​카시안이 제 발 저린 도둑처럼 펄쩍 뛰며 누가 들을까 내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그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이리저리 굴러지는 것을 보니 확신이 생겼다.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이 사람이 진짜…?​“이건 뭐랄까 단순히(?)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문제라고… 아니, 내 일생일대 가장 중요한 ‘생명줄’이 걸린 문제란 말이야!” ‘생명줄? 역시… 반역에 성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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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잊혀진 신전의 주인
[수도 외곽 지하, 잊혀진 신전]​“……가져오지 못했다?”​거대한 여신상 아래 핏빛 휘장 너머에서 흘러나온 고요한 목소리는 그 자체로 지독한 공포였다.바닥에 이마를 처박고 있던 소년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변명 한마디조차 내뱉지 못했다.​“죄, 죄송합니다… 상점가에서 누군가와 강하게 부딪혔는데, 아무래도 그때 흘린 모양입니다. 당장 돌아가서 찾아오겠습니다!”​스윽—.​붉은 휘장이 걷히며, 짙은 어둠 속에서 감히 봐서는 안 될 ‘그분’이 친히 모습을 드러냈다.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와 메마른 잿빛 머리카락 그리고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번뜩이는 뱀처럼 세로로 찢어진 기형적인 은빛 동공을 가진…​“…….”​그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신전 전체가 기괴한 소름을 토해내는 듯했다.인간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묘한 이단적인 외모를 가진 그는 바로 지하 신전의 진정한 주인인 ‘자하크’였다.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간 자하크는 엎드린 소년의 머리 위에 그의 크고 차가운 손을 얹었다.​“아… 앗! 끄아아악!”​신전의 정적을 찢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자하크의 은빛 눈동자가 번뜩이는 순간, 소년의 기억은 산산조각 나며 자하크의 뇌리로 생생하게 흘러 들어갔다.마법사들조차 금기로 여기는 끔찍한 금술, 바로 ‘기억 추출’이었다.​자하크의 머릿속에 소년이 겪은 찰나의 순간들이 휘르륵 스쳐 지나갔다.활기찬 상점가의 소음과 중심을 잃은 자신을 붙잡아주던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후드 틈새로 얼핏 보였던 상대의 얼굴까지.​찬란하게 빛나는 백금발을 가진 그녀는 시린 청색 눈동자로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기억 속 그녀는 이 음습한 지하 신전과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눈부신 존재였다.​자하크의 입가에 잔인하고도 흥미로운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길이 닿아 기억이 뒤엉키다 이내 산산조각 부서져버린 소년은 짧은 시간 내에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완전히 망가진 채 숨을 거두었다.​영혼이 빠져나간 빈 껍데기가 바닥을 뒹굴었으나, 자하크는 단 한 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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