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미는 정일범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난 지금 아주 바빠. 어머니도 강성에 안 계신 이 시기에 오빠가 무슨 사고라도 친다면 난 오빠를 도와줄 수 없어.”“에이, 사고 안 친다니까. 난 요즘 매일 출근하지 않으면 장모님 보러 다니는데, 언제 사고 치러 다닐 시간이 있겠어. 게다가 내 나이가 몇 개인데, 정말 사고를 친다고 해도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그럼 다행이고. 일 봐. 나도 나갈 거니까.”이윤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갔다.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에서 걸어 나갔다.정일범은 이윤미가 밖에서 뭘 하는지 궁금했지만 이윤미는 입이 무거워서 함부로 정보를 발설하지 않는 편이었다.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이윤미가 정일범 앞에 섰다. 곧게 뻗은 몸매에 정장까지 더해지니 사람이 더욱 잘생겨 보였다.정일범은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정일범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정일범은 그 층에서 내렸고 이윤미는 계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비서 데스크를 지나치던 정일범이 문득 멈춰섰다. 그러자 비서가 의아한 눈빛으로 정일범을 쳐다보았다.“이윤미의 비서한테 가서 이윤미가 무슨 일로 나가는 건지 물어봐봐.”비서가 바로 대답했다.“이윤미 대표님의 비서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 스케줄을 발설하지 않을 겁니다. 친오빠이시니 직접 물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정일범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정일범은 이윤미가 사인하고 도장을 찍은 서류를 비서에게 넘겨준 후 얘기했다.“이윤미가 사인도 하고 도장도 찍었어.”이건 원래 정일범의 비서가 해야 하는 일이지만 정일범이 직접 다녀온 것이다. 주요하게는 이윤미한테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서였다.정일범은 이윤미와 하예진 사이 커넥션이 있다는 걸 잘 알았다.그래서 하예진을 찾으러 가라고 사람을 보냈는데 실패했다. 하예진이 과연 정말 이윤미한테 물어볼지 말지도 몰랐다.하예진이 의심한다면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당연히 이씨
“그 가문들은 현재 모두 관성에 있고 강성에는 그냥 사업만 좀 하는 정도잖아. 우리 이씨 가문의 일을 좌우할 수 있을 것 같아? 큰이모는 벌써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고 지금 가주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우리 엄마야. 네가 능력이 없어서 가주 자리를 큰이모 후손에게 돌려준다면 모를까, 네가 능력이 있는데 어떻게 가주 자리를 돌려줄 수 있겠어?”정일범이 계속해서 말했다.“하예진에게 그런 능력이라도 있어? 그녀가 강성에 회사를 차렸다 한들 우리 이씨 가문 사람 중에 그녀와 친한 사람이 어디 있어? 네가 갓 돌아왔을 때도 가문 사람들이 너를 쳐다보지도 않았잖아. 하물며 하예진이야 더 말할 것도 없어. 우리 가문 안에서도 엄마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하늘을 뒤엎을 수 있을 것 같아?”말을 마친 정일범은 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 하예진이라는 여자도 큰이모처럼 일찍 죽을지 누가 알아.”정일범이 하예진을 해치도록 사람을 보냈지만 아쉽게도 실패했다.실패가 두려워 차 두 대를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오빠, 방금 뭐라고 했어? 예진 씨가 일찍 죽을 거라고? 혹시 우리 몰래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니지?”이윤미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정일범은 즉시 대답했다.“그럴 리가. 누가 내가 하예진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말했어? 그 여자는 출입할 때마다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다녀서 접근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무슨 일을 꾸밀 수 있겠어?”그는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이윤미가 눈치챌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다. 만약 그녀가 의심을 품고 방윤림을 조사하게 한다면 쉽게 들통날 것이 분명했다.방윤림이 이윤미의 곁에서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정일범의 인맥과 세력은 이제 그녀를 따라잡지 못했다.이윤미는 그녀의 오빠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정일범은 그 시선에 불안했지만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서명과 도장이 완료된 서류들을 들며 말했다.“윤미야,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볼 일이 있으면 얼른 갔다 와. 방해하지 않을게.”이윤미는
이윤미의 눈빛이 깊어졌다.“큰 조카딸은 나보다 겨우 10살 정도 어려서 내 딸로 삼기엔 무리라고 생각 안 해? 만약 정말 양녀로 들인다면 막내 조카딸이 지금 몇 살밖에 안 돼서 더 적합할 텐데.”그녀의 막내 조카딸은 셋째 오빠 정일호의 딸로 고작 여섯 살이다.물론 이윤미도 그냥 말로만 하는 것이지 진짜로 조카를 양녀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그녀는 자신의 피를 이을 아이를 낳고 싶었다.‘데릴사위를 들이지 않는다면 방 비서와... 흠, 시험관 아기를 통해 그의 씨를 빌려도 안 될 것은 없지...’방윤림의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고려하면 두 사람이 사이의 딸은 절대 나쁘지 않을 것이다.이윤미의 조카딸들은 재능이 평범해서 가문의 후계자로 키우기 어렵다. 만약 조카들이 가능성이 있었다면 이은화도 그렇게 서둘러 이윤미를 후계자로 밀어주지 않았을 것이고 일찍이 이윤정이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손녀 세대에 눈을 돌렸을 것이다.방윤림은 이윤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있다면 그는 더욱 충성스럽고 한결같이 이윤미 모녀를 지켜줄 것이다.일거양득이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윤미는 강성의 젊은 청년들을 둘러보았을 때 그녀에게 적합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정말 몇 안 된다고 생각했다.오히려 방윤림이 가장 적합했다.딸을 낳는 일은 급한 문제가 아니니 나중에 다시 생각해도 될 일이다.지금은 가주의 지위가 다음 세대에게 이어질지조차 불확실한 상황이다.이은숙이 정말 이은화에게 살해당했다면 이윤미는 정말 가주 자리를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에 앉으면 가시밭길이 같아 불편할 뿐만 아니라 죄책감도 느낄 것이 뻔했다.정일범이 입을 열었다.“뭐가 문제야? 옛날에는 여자들이 열몇 살에 결혼해 아이를 낳곤 했잖아. 네 막내 조카딸은 아직 몇 살밖에 안 됐는데 무슨 일을 알겠어? 오히려 큰 조카딸이 더 낫지 않아? 생각해 봐. 네가 큰 조카딸을 양녀로 삼으면 열심히 키워서 능력을 갖추게 하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맡길 수 있
이은화는 아들 정일범과 더 이상 말을 주고받을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아들을 꾸짖다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별일 없으면 전화 끊어.”“네, 엄마. 꼭 윤미를 도울게요. 더 할 말 없으시면 엄마도 바쁘실 테니...”이은화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정일범은 이은화가 전화를 끊은 후에야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그는 방금 전 충동적으로 이은화를 비판했을 때의 자신을 떠올렸다.추운 날씨임에도 땀을 흘릴 정도로 정일범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이윤미는 휴지를 들어 그에게 건넸다.정일범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녀가 건네준 휴지를 받아 다시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방금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용기를 낸 건지 모르겠네.”“배짱이 두둑해져서 그런 말을 한 거겠죠.”정일범은 이윤미를 노려보며 투덜댔다.“다 네 탓이야. 너는 엄마랑 통화하면서 왜 갑자기 핸드폰을 나한테 넘겨? 나 지금 엄마 무서워하는 거 몰라? 엄마만 보면 쥐가 고양이 보듯 한다고.”“오빠가 엄마 언제 오시냐고 물어보지 않았어? 나도 몰라서 엄마한테 물어보라고 한 건데. 그럼 답을 알 수 있잖아. 내게 묻지 않아도 되고. 엄마가 무서운 건 오빠가 실수하고 엄마를 실망하게 했기 때문이야. 엄마뿐만 아니라 형수님도 오빠한테 완전히 실망했을 거고. 잘되고 있는 결혼 생활을 스스로 망쳐놓고서... 남자들은 다 그렇지. 아래쪽은 절제 못 하면서 잘 살 생각은 안 하고 항상 일을 벌이려 들어...”정일범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윤미야, 누가 뭐래도 난 너의 친오빠야. 말 좀 가려서 해. 너도 언젠가는 아래쪽을 통제할 남자를 찾길 바랄게. 안 그러면...”그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이윤미는 냉랭하게 말을 건넸다.“내 남자가 감히 나를 배신한다면 당장 내쫓을 거야. 이혼하고 문밖으로 내몰아버릴 거라고. 자진해서 스스로 칼을 들이겠다고 해도 기회조차 주지 않을 테야! 내 결혼에는 조금의 배신도 용납하지 못해.”정일범이 속으
정일범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엄마... 아빠가 어떻게 엄마를 욕하시겠어요? 비록 실수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엄마를 생각하세요. 아빠는 저의 집에 계시면서 매일 가장 많이 하시는 말이 바로 엄마 걱정에 관한 말이에요. 엄마 기분이 안 좋으실 때 누가 엄마를 모시고 산책하러 나가느냐고... 아빠는 또 매일 휴대폰으로 로맨스 소설을 보시면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쫓는 법을 배우신대요. 엄마의 용서를 받아내겠다고 하시면서...”정군호는 이미 스스로 기능을 제거한 상태라 밖에 아무리 젊고 예쁜 미인이 있어도 건드릴 수 없었다.이은화가 색욕이라는 길은 철저히 차단해버린 것이다.정군호는 이혼을 거부했다. 비록 마음속으로 이은화를 극도로 증오하더라도 이혼을 원하지 않았다. 이혼하면 재산을 거의 받지 못하고 완전히 빈털터리로 나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강성에서 정군호는 영원히 이은화를 이길 수 없다.오직 이은화보다 오래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은화가 죽은 후에야 이씨 가문의 어르신 행세를 하며 위세를 부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물론 전제 조건은 새로 오른 가주가 정군호를 존중해 아버지 체면을 살려줄 때만 가능한 일이다.만약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면 정군호가 위세를 부리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정군호는 여전히 꼬리를 내리고 다녀야 할 운명이겠지만...정군호는 평생을 억눌린 채 살아온 것 같았다.역시 이씨 가문의 데릴사위는 쉽지 않은 처지인가 보다.‘그때 내 머리가 고장 났나... 이씨 가문의 데릴사위를 하겠다고 결심하다니.'그가 얻은 유일한 이점은 이은화의 지원 덕분에 정씨 일가가 풍요로운 물질적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점뿐이었다.정군호가 이혼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정씨 일가를 위해서였다.일단 이은화와 이혼하면 정군호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자매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이은화가 조금씩 되찾아갈 것이다.이것이 바로 그가 스스로 칼을 들이대더라도 이혼하지 않은 이유였다.이은화는 피식 웃으며 말
정일범은 지금은 아내 조윤과의 감정이 식었지만 예전에는 사이가 아주 좋았다. 아들과 딸도 있고 자식들에게도 잘 대해주었다. 그는 특히 딸을 가장 아꼈다.이윤정이 친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윤미가 돌아온 후 연약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이자 정일범은 속으로 기뻐하며 이은화가 가주의 자리를 자신의 딸에게 물려주기를 바랐다.비록 그의 딸이 지금은 별다른 능력이 없어 보이지만 아직 어리고 미성년자였다. 이은화가 손녀를 후계자로 키워주기만 한다면 절대 나쁘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것이다.하여 정일범은 특히 딸을 아꼈다.이윤미의 물음을 들은 정일범은 입을 열어 변명하려 했지만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결국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이윤미는 서류들을 모두 확인한 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그래도 어머니 이은화에게 전화를 걸어 해당 프로젝트에 관한 서류 내용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다.이은화의 허락이 있어야 서명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함정을 파놓고 이은화가 돌아오면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엄마, 오빠도 여기 계세요. 오빠가 방금 엄마가 언제 돌아오시냐고 물어보셨는데 엄마는 오빠한테 하실 말 없으세요?”이윤미는 이은화에게 묻고는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핸드폰을 정일범에게 건넸다.정일범은 당황했다.큰 실수를 저지른 후로 그는 이은화가 전보다 더 두려웠다.이윤정의 죽음도 이은화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가장 아꼈던 딸마저도 이은화가 가차 없이 내버렸다. 정일범은 자식들이 이은화의 마음속에서 이씨 가문의 계승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이씨 가문의 모든 것이 그들 형제보다 중요했다!전화를 받기 싫었지만 이윤미가 이미 말을 꺼냈으니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정일범은 황급히 핸드폰을 받아들고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아 추켜세우듯 인사했다.“엄마.”“할 말이 있니?”이은화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장님 정일범에 대해 실망이 컸다.정일범이 이윤정을 아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윤정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