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거야.”‘좋아한다는 건 누가 알려줘서 깨닫는 게 아니잖아.’‘생각해 봐야 알 수 있는 감정이라면... 그건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지.’“진아야.”성빈은 눈썹을 찌푸렸다. 살면서 이렇게 곤란한 순간은 처음이었다.“괜찮아.”진아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이미 예상은 했었어. 그래도... 내 마음은 꼭 한번 말하고 싶었어. 죽더라도, 확실하게 죽고 싶었거든. 후회는 남기지 않아야 하니까. 안 그래?”그때, 룸의 문이 열리고 직원이 들어왔다. 음식이 가득 실린 카트를 밀고 들어오며 말했다.“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네, 감사합니다.”진아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자연스럽게 성빈에게 말했다.“얼른 먹자. 여기 음식 되게 비싸. 오늘은 내가 내는 날이니까 남기면 안 돼, 싹 다 먹어야 해!”“응...”그 식사는 성빈에게 고문과도 같았다.진아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론 태연한 척 웃고 떠들었지만...‘속은 이미 박살 났어...’‘말 한마디, 웃음 하나에 얼마나 힘을 쥐어짜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겠지...’진아는 지도교수 이야기, 동기들 이야기로 식사 내내 대화를 이어갔다.그렇게 어색하고도 묵직한 한 끼가 흘러갔다.진아는 마지막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진짜 배부르다. 너는?”“나도...”“그럼 나가자.”진아는 가방을 챙겨 들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시간이 꽤 됐네.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얼른 들어가자.”“진아야.”문 쪽으로 가던 진아의 손목이 성빈의 손에 붙잡혔다.“응?”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성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그 얼굴을 보고 진아는 피식 웃었다.“왜? 걱정돼? 괜찮다니까. 나 그렇게 연약한 애 아니야. 알잖아. 한 번 마음 접으면, 깨끗하게 접는 성격이란 거. 우리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 지내면 되지.”“진아야.”성빈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진아의 말을 끊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우리... 사귀자.”“뭐...?”‘지금... 뭐라
돌아가는 길에 시연은 진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어떻게 됐어?]메시지를 보낸 뒤로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못 봤나?’시간을 보니, 지금쯤 진아가 바쁠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시연은 더 이상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지금쯤... 어떻게 되고 있을까?’...오늘은 진아가 진성빈에게 모든 걸 털어놓기로 결심한 날이었다.지금, 진아는 한 식당의 룸 안에 앉아 긴장한 듯 깊은숨을 들이쉬고 있었다.핸드폰이 한 번 울렸지만,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시연의 조언을 받아들인 진아는 결국 성빈을 따로 만나기로 했다.‘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오늘 끝내야 해.’“손님, 안으로 모실게요.”‘왔어!’진아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곧게 펴고, 문이 열리자마자 숨을 삼켰다.성빈이 웃는 얼굴로 들어섰다.“진아야.”“성빈아.”진아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앉아 있어.”성빈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뭘 일어나고 그래? 내가 네 환영까지 받아야 하나?”“응...”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손에 든 물잔을 괜히 빙빙 돌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직원이 다가와 물었다.“두 분, 주문 도와드릴까요?”“좋아요.”성빈이 메뉴판을 받으며 진아를 힐끗 쳐다봤다.“오늘은 네가 사는 거야?”“응!”진아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편하게 시켜. 전혀 신경 쓰지 말고.”“그럼 나 진짜 신경 안 쓴다?”성빈이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우리 진아, 이런 날이 흔치 않잖아. 오늘은 내가 제대로 먹어줘야지!”그러고는 정말 메뉴를 길게 읊기 시작했다.진아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좀... 많은 거 아니야?”‘둘이 저걸 다 먹을 수 있긴 한 건가?’“왜, 아까워?”성빈이 웃으며 진아를 바라봤다.“아니거든?”진아는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계속 시켜.”“어이구, 알겠습니다!”성빈이 주문을 끝내고, 음식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진아는 점점 더 긴장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앉아 있는 얼굴엔 불안이 가득했다.“왜 그래
“아니에요.”“...”두 사람은 이야기하며 웃고, 나란히 걸어 나갔다.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잠시 후, 문이 천천히 열리고, 안에서 유건이 나왔다. 남자의 잘생긴 얼굴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그는 멀어져가는 시연의 가느다란 실루엣을 말없이 바라봤다.유건은 입꼬리를 씁쓸하게 끌어올렸다.‘내가... 도대체 뭘 기대한 거지?’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미련.그 작고 지질한 감정은, 마치 바퀴벌레처럼 끈질겼다.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죽은 줄 알았던 감정이 다시 살아나 미친 듯이 뻗어나갔다.‘웃기고 있네... 정말.’...조이는 신나게 놀다가 지쳐, 온몸이 땀투성이가 됐다.시연은 그런 조이를 안아 들었다.이호민은 바로 가사도우미를 불러, 조이 목욕 준비를 시켰다.시연은 여벌 옷을 챙겨오지 못했지만, 예상대로였다. 조이가 씻고 나왔을 땐 이미 새 공주 드레스가 도착해 있었다.심지어 방금 세탁하고 건조하고, 다림질까지 마친 상태였다.시연은 향긋하게 목욕을 마친 조이를 안고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왔다.식탁에는 이미 모두 자리를 잡고 있었다.다들 조이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자...”고상훈은 손을 벌리며 조이를 향해 다정히 말했다.아기용 식탁 의자도 미리 준비돼 있었다.바로 고상훈의 옆자리였다.“증조할아버지 옆에 앉을래, 우리 조이?”“네!”조이는 말랑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이호민이 바로 맞장구쳤다.“조이는 증조할아버지를 정말 좋아하죠!”“그럼 그럼, 하하하!”고상훈은 배시시 웃으며 입이 귀에 걸렸다.“우리 조이 뭐 먹고 싶어? 증조할아버지가 다 집어줄게.”그 모습은 마치 씹어서 떠먹여 줄 기세였다. 덕분에 시연은 끼어들 틈도 없이 편하게 앉아있었다.시연의 맞은편에는 유건과 리슬이 앉아 있었다.유건은 잠시 고개를 돌려, 조용히 밥을 먹고 있는 시연을 바라봤다.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국을 떠 왔다.따끈한 들깨 버섯 닭백숙이었다.그는 그것을 리슬 앞에 내려놓았다.“응?”리슬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식은땀이 맺힌 시연은 유건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지금 여자 친구한테 오해받고 싶어요?”‘여자 친구? 아, 그 얘기...’유건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놓았다.“지금...”그가 나가려는 찰나, 시연이 그 팔을 덥석 붙잡았다.“어디 가요?!”유건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보고 나가라며?”“이대로 나가면... 리슬 씨랑 딱 마주치잖아요!”‘그래 놓고, 결국 더 오해하게 할 거잖아!’“잠깐 숨어 있어요.”시연은 다급하게 유건을 벽장 쪽으로 끌었다. 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문을 ‘탁’하고 닫았다.유건이 전혀 이해가 안 됐다.‘아니...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 내가 왜 벽장 안에...?’‘나가도 되나?’하지만 나갈 수 없었다. 리슬이 벌써 들어섰기 때문. “시연 씨?”“아... 리슬 씨.”시연은 재빨리 물컵을 챙기고, 케이크 접시를 들며 리슬을 향해 미소 지었다.“저기...”리슬은 시연을 바라보며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혹시, 방금 고유건 본 거 아냐?’시연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시연 씨.”결국 리슬이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묻고 싶은 게 있어요.”“아...”시연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네, 괜찮아요. 말해봐요.”“그러니까... 그게...”하고싶은 말이 입가를 맴돌았고, 어쩐지 부끄러운 듯,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냥... 여쭤보고 싶었어요. 시연 씨랑 유건 씨... 요즘 같이 지내시잖아요. 같은 집에 사시고... 지금 두 분은... 무슨 사이예요?”너무 갑작스러워서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죄송해요...”리슬이 황급히 덧붙였다.“이렇게 직접적으로 묻는 거, 저도 무례하단 거 알아요. 근데... 안 물어보면 계속 마음이 복잡할 것 같아서요.”리슬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전 유건 씨를 좋아해요. 정말, 많이요. 그래서... 시연 씨의 대답이 저한
“좋아요! 너무 좋아요!”시연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진짜야... 이 아이는 뭐든지 진심이네.’조이는 정말로 좋아 죽겠다는 표정.결국, 고상훈과 조이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우르르 몰려서 뒷마당으로 향했다.넓은 잔디밭엔 벌써 그네가 설치돼 있었고, 미끄럼틀에 모래 놀이터, 심지어 회전목마까지 서 있었다.이호민은 옆에서 중얼거렸다.“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일단 이 정도로 해놨습니다만...”“응.”고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계속 지켜봐. 빠진 거 없도록 끝까지 챙겨.”“걱정하지 마세요, 어르신.”고상훈은 품에 안긴 조이를 내려다봤다.조이는 이미 눈을 반짝이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우리 조이, 어디서 놀고 싶어?”“저기요!”조이가 회전목마를 가리키며 외쳤다.“좋지!”고상훈은 당장이라도 뛰어갈 기세였지만, 직접 안을 수는 없었다.곧장 이호민에게 말했다.“얼른! 조이 안아서 태워줘. 조심해, 절대 다치면 안 돼!”“네, 어르신!”이호민은 능숙하게 조이를 안아 회전목마에 올려놓고, 스위치를 눌러 작동시켰다.“히히히...”조이는 신이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소리에 고상훈도 덩달아 들떴다.“얼른! 내 핸드폰 어딨어? 사진 찍어야지!”“여기요, 어르신.”고상훈은 핸드폰을 받아서 들자마자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계속 눌렀다. 조이의 작은 손, 눈웃음,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까지 다 담고 싶었다.‘이 순간... 절대 놓치면 안 돼.’고상훈은 또 중얼거렸다.“이따가 목마를 수도 있겠네... 거기 누구 없나?”조이를 위한 물을 준비해야 했다.“할아버지, 제가 갈게요.”시연은 당황한 듯 웃으며 말했다.‘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그냥 인사하러 온 건데.’“조이 물컵 챙겨왔거든요. 제가 가져올게요.”“그래, 그게 좋겠다.”어린아이들은 자기 물건에 익숙해서, 낯선 컵으로는 물도 안 마시는 일이 다반사니까.“얼른 다녀와. 그리고 주방에 있는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블루베리 케이크도 챙겨와. 아
공기가, 순간 굳어졌다.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은 공간.어딘가, 조금 어색했다.“어라?”제일 먼저 그 침묵을 깬 건 도리슬이었다.리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연을 바라봤다.“시연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고상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둘이 아는 사이였나?’‘세상 참 좁다. 그보다... 유건이 저 녀석 얼굴 보니, 뭔가 더 있는데?’‘나만 모르는 얘기가 또 있나 보지...’‘뭐, 나이도 들었고, 이제 더 이상 일일이 관여하고 싶지 않아.’‘전에야 내가 어떻게든 해보려 했지만, 지금은... 그냥, 그저 흐름대로.’“저는...”시연은 입술을 살짝 떼었지만, 곧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이 분위기... 리슬 씨가 아마 고유건의 다음 아내가 될 수도 있겠지.’‘그런데 고유건의 과거를 알고 있을까?’시연의 눈길이 유건에게로 향했다.‘제발 도와줘요...’하지만 유건은 마치 남 얘기인 듯 무표정한 얼굴.‘저 표정은 또 뭐야? 진짜 모르는 척할 생각이야?’“됐어.”결국, 고상훈이 입을 열었다.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다들 메추리처럼 말도 못 하고.”그러고는 유건을 한번 쓱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리슬아, 유건 결혼했던 거... 너 알고 있지?”“네, 알고 있어요.”리슬은 고개를 끄덕였다.이건 귀국하자마자 들은 이야기였다.한 모임에서 처음 유건을 보고, 단번에 반했던 리슬.‘이 사람이다’ 싶어 부모님께 선언하듯 말했을 때, 부모는 곧장 알려줬다.유건은 이혼한 적이 있다고.하지만, 리슬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오히려 속으로 기뻤다.‘잘 됐지. 이혼했으니까 내가 들어갈 틈이 생긴 거잖아.’‘안 그랬으면, 이렇게 괜찮은 사람을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넘볼 수 있겠어?’그래서인지, 고상훈이 지금 이 타이밍에 그 이야기를 꺼낸 게 의아했다.바로 그때, 고상훈의 시선이 시연에게 향했다.잠시 침묵이 흘렀고, 이내 낮고 진지한 목소리가 나왔다.“시연이... 유건이랑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