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혜가 즐겨 먹었다는 말에 윤해준이 반응했다. 앞에 놓인 과일을 보고 있자니 전에 생기발랄하던 안다혜가 떠올랐다. 아무 생기 없이 침대에 누워있기만 하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활기찬 모습이었는데 말이다.옆에 선 한문수는 안다혜를 바라보다 시선을 윤해준에게로 돌렸다.‘아니. 이 여자는 도대체 어떻게 해준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거지?’안소현이 말을 심하게 하긴 했지만 한문수는 그래도 상대해 보려 했다. 눈앞에 보이는 기회는 그게 뭐든 다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정성을 많이 쏟으셨네요. 형수가 좋아하는 과일까지 사 오고 말이에요.”‘형수?’안소현과 임원은 앞에 선 사람이 누군지 몰라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한유라는 한문수가 입을 열자 뾰로통한 표정으로 한문수를 바라봤다.‘어떻게 된 거야? 왜 이런 쓸데없는 말에 대꾸하고 있어? 우리랑은 아무 상관도 없잖아.’안소현이 난감한 표정으로 기침하며 물었다.“이분은 누구예요?”한문수가 웃으며 말했다.“저는 해준이 친구입니다. 알고 지내는지는 오래됐어요.”“형수가 아프다는 말에 병문안 왔어요. 의사도 제가 데려온 거예요.”이 말에 안소현이 한시름 놓았다.‘아, 이 남자가 데려온 거였어? 그러면 윤해준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네? 그저 잘생긴 친구를 뒀을 뿐 결국에는 보잘것없는 기생오라비잖아.’이렇게 생긱한 안소현은 마음이 차분해졌다.‘그래도 내가 훨씬 낫네. 적어도 허종혁처럼 돈 많은 남자를 찾았잖아. 다른 건 몰라도 앞으로의 생활은 보장된 거 아니겠어?’‘허씨 가문이 민성에서는 그래도 알아봐 주는 가문인데 기생오라비 따위가 무엇으로 비길까.’기분이 좋아진 안소현은 그나마 진심이 담긴 웃음으로 한문수에게 답했다.“아, 매부 친구구나. 그러면 가족이죠. 너무 거리 둘 필요는 없어요.”이 말에 한문수가 넋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해서 윤해준에게 대들던 안소현이, 동생에게도 좋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안소현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쨌든 태도를 바
“그래요? 그러면 다혜 언니가 된다는 사람이 왜 다섯 날째가 되어서야 보러온 거예요?”윤해준이 차갑게 웃었다.“아니면 그 언니라는 말이 그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인가요?”안소현은 날카로운 윤해준의 지적에 어떻게 반항해야 할지 몰랐다. 임원도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다.“큰 아가씨, 어떻게 된 거예요?”임원이 다급하게 캐물었다.“작은 아가씨가 아픈 거 오늘 알았다면서요? 설마 진작 알고 있었던 거예요?”이 말에 안소현은 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임원을 여기로 데리고 온 게 살짝 후회되기도 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반대편에 서서 그녀를 공격하고 있으니 말이다.이렇게 생각한 안소현은 짜증이 치밀어올라 임원을 대하는 태도가 거칠어졌고 아예 무시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도움도 안 되는데 대꾸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윤해준은 그런 안소현이 너무 우스웠다.‘아직도 체면만 차리겠다, 이거지?’“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안소현이 멈칫하더니 웃었다.“오기 싫어서 안 온 게 아니라 다른 일이 있어서 못 온 거예요.”“게다가 회사에서 다혜 업무를 인수인계 받고 있었어요. 다혜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거 엄마가 계속 숨기고 있었거든요...”안소현이 우물쭈물하며 말하자 꽤 그럴싸해 보였다. 이에 윤해준은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심이 아니니까 핑계만 늘어놓지. 하지만 중요하지 않아. 다혜 옆에는 나만 있으면 돼. 다른 사람은 그냥 스치는 바람일 뿐이야.’임원은 안소현의 말을 들으며 의문을 해소했다.‘오기 싫은 게 아니라 너무 바빠서 못 온 거구나. 하긴, 회장님이 알려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까?’임원은 안소현을 오해했다고 생각해 죄책감 가득한 눈빛으로 안소현을 바라봤지만 안소현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일관했다.옆에서 지켜보던 한문수와 한유라는 안소현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입장이 딸리는데 안소현의 입만 거치면 더 트집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문수와 한유라는 눈빛을
‘내가 아프면 종혁 씨도 나를 이렇게 챙길까?’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안소현은 일을 겪지도 않았는데 이런 행운이 절대 차려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안다혜를 질투하게 된 것이다.‘왜 안다혜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늘 이렇게 좋은 것만 주어지는 거야? 손만 뻗어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들을 가져가네.’윤해준은 안소현이 들어와도 인사 한번 하지 않고 안다혜를 바라보며 불만을 털어놓았다.“들어오겠다고 난리더니 그다음은요?”안소현은 안다혜만 살피느라 이 말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임원이 안소현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얼른 윤해준의 말에 대답하라고 눈치를 줬다. 윤해준을 만난 건 처음이지만 그 아우라에 놀란 것이다. 그런 아우라는 회장인 김미진에게서도 본 적이 없었다. 임원은 오늘 윤해준을 처음 봤지만 신분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안소현은 그제야 반응하고 마른기침하며 이렇게 말했다.“그... 별건 없고 내가 그래도 다혜 언니잖아요. 얼굴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동생이라 관심차.”“왜요? 내가 내 동생 얼굴 좀 보겠다는데 안 돼요?”정신을 차린 안소현은 두려울 게 없다는 태도로 웃으며 윤해준을 바라봤다. 한문수와 한유라는 안소현의 정체가 궁금해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언니임을 알고 그 배짱을 이해했다. 윤해준에게 이렇게 세게 나가는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번 어떤 여자가 윤해준에게 대들었다가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다. 이에 비하면 안소현도 인물이긴 인물이었다.안소현이 당당하게 나가자 한유라와 한문수뿐만 아니라 임원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임원은 보기만 해도 살이 떨리는데 안소현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니 말이다. 따라서 안소현에 대한 인상도 조금 좋아졌고 사무실에 짱 박혀 업무만 숙지하는 것이 아닌 더 많은 업무를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안소현이 자기 재능을 마음껏 펼친다면 안다혜 못지않게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아마도 전에는 몸이 안 좋아서 회장님이 집에만 있으라고 했나 보네. 능력은 안다혜 못지
윤해준의 신경은 온통 의사에게 쏠려 있었다. 안다혜에게 어떤 치료를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중요한 타이밍에 한 의사가 문을 두드렸다. 윤해준이 언짢은 표정으로 그쪽을 쏘아보자 의사는 차가운 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윤해준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중요한 일이어야 할 거예요. 아니면 중요한 일이었는데 잊어버렸다거나.”이렇게 말하는 듯한 윤해준의 눈빛에 의사는 당황하기 시작했다.‘도대체 어떤 사람이면 저런 눈빛을 지을 수 있는 거지?’얼핏 봐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 같았다. 의사는 몸을 덜덜 떨며 이렇게 말했다.“저기. 윤해준 씨. 밖에 두 사람이 와 있는데 한 사람은 자기가 안다혜 씨의 언니라고 하고 한 사람은 안다혜 씨의 동료라고 합니다. 문병하러 왔다고 하네요.”“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의견을 물어보려고 들어온 겁니다. 들여보낼까요?”윤해준이 안다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안다혜가 안소현을 싫어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동료라는 사람은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다혜와 사이가 좋았던 동료인가? 사이가 좋았는데 내가 쫓아버린 거면 다혜가 깨어나서 원망할 것 같은데.’이렇게 생각한 윤해준은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들여보내요.”안다혜 곁을 지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언니라는 사람이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해도 일단 몸을 사려야 했다. 윤해준도 이것까지 생각하고 사람을 들여보내라고 한 것이다.안으로 들어온 안소현과 임원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시간이 조금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들어왔기 때문이다.임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안 대표,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병문안을 왔는데 이렇게 많은 난관을 거쳐야 한다니 이해할 수가 없네요.”안소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지만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매부가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신경 쓰지 마세요. 일단 들어가 보자고요.”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임원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안에 있는 사람 우리 회사 대표에요. 상황이 어떤지 보려고 같이 따라온 거예요.”외국 의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오늘 임시로 불려 온 거라 아직 모르는 게 많았고 환자의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그러다 이상한 사람이라도 들여보내면 업무에 지장을 줄 게 뻔했다.그때 한 의사가 입을 열었다.“일단 우리 보스에게 확인해 볼게요.”안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빨리 확인해 줘요.”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가 윤해준의 의견을 물었다. 치료비를 내는 사람이 누구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다. 앞에 있는 두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니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다.사람을 잘못 알아봐서 내쫓은 거라면 시간만 지체할 뿐이지만 알아보고도 내쫓은 거라면 정말 큰 일이었다.침대맡에 선 윤해준은 의사가 안다혜에게 주사를 놔주는 걸 보고 마음이 아팠다.‘우리 다정이 너무 고생한다.’‘제발 깨어나기만 해. 그러면 내가 더 잘해줄게.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게 지켜줄게.’이렇게 생각한 윤해준은 안다혜의 손을 꼭 잡고 얼굴에 비비며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의사들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은 처음이라 어디서부터 처리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환자 가족이 뿜어내는 숨 막히는 아우라에 의사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옆에서 지켜보던 한문수도 내심 긴장했다.‘이 사람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외국에서 심혈관을 전공한 권위자들이라며? 왜 안다혜 앞에서는 이렇게 쩔쩔매는 거지?’마음이 불편해진 한문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안다혜를 치료해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걸지 않았지만 안다혜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안다혜가 조금만 반응을 보여도 윤해준의 신뢰도가 높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를 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한유라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옆에 가만히
[자기야. 그 의사들 매부라는 사람이 데려온 거 맞아.][오자마자 안다혜 병실로 들어갔어. 기세등등하던데 뭘 조사해 낼까 봐 두렵다.]내용을 확인한 안소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정말 매부가 데려온 사람들이었어? 도대체 정체가 뭐야?’‘아무나 데려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어떻게 허종혁보다 더 능력이 좋지?’이렇게 생각한 안소현은 옆에 앉은 임원을 까맣게 잊은 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임원은 잘 걸어가던 안소현이 갑자기 속도를 내자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이가 있어 빨리 걸으면 숨이 찼지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일단 마음에 담아뒀다. 뒤에 회사로 돌아가면 예의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안소현을 일러바쳐야겠다고 생각했다.임원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전에 안다혜와 지낼 때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안다혜는 능력이 좋을뿐더러 예의가 발라서 임원을 볼 때마다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니 인사를 받는 사람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다만 안소현은 아니었다. 따라서 웃긴 하지만 그 웃음에서 진심이나 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는 노력 정도로만 보였다.임원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안다혜에게 별일이 없기를 기도하며 얼른 나아서 출근하기를 바랐다. 이렇게 생각한 임원은 걸음을 재촉하며 안소현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했다. 아니면 너무 많이 뒤처져 안소현이 어느 방으로 들어가는지 놓칠 것 같았다.두 사람이 안다혜가 있는 병실에 도착했을 때 밖에 외국인 의사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모두 하얀 가운을 입고 엄숙한 표정으로 옆 사람과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나도 이런 상황은 처음인데요.”“그러게요. 위장염으로 실려 왔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혼수상태죠?”“다른 사정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은 나도 알겠는데 그 사정이라는 게 뭘까요?”의사들이 병실을 둘러싸고 토론했지만 안다혜의 문제가 뭔지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안소현은 그런 의사들을 둘러보며 긴장하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