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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last update 게시일: 2026-08-11 19:34:30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의 VIP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유럽 지사의 전담 의전 직원이 깍듯하게 인사하며 짐을 받아들었다.

​파리의 공기는 서울과는 사뭇 달랐다. 코끝을 스치는 쌉싸름한 늦가을의 밤바람과 저 멀리서 빛나는 주황색 가로등 불빛들이 이 도시가 낭만의 심장부임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최고급 세단 뒷좌석에 나란히 올라탄 두 사람은 이내 파리 시내를 향해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창밖으로 고풍스러운 건축물들과 센강의 물결이 스쳐 지나갔지만, 도현의 시선은 밖이 아닌 오직 옆자리의 소율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도현은 차에 타자마자 소율의 손을 깍지 껴 잡고는 제 허벅지 위에 올려둔 채 놓아주지 않았다.

​"도현 씨. 저희 짐은 어떻게 할까요? 제 숙소 주소를 기사님께 먼저 찍어드려야 할 것 같은데…."

​소율이 회사에서 지급해 주기로 한 법인 숙소를 떠올리며 묻자, 도현은 태연하게 소율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짐은 이미 우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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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일간의 계약 연애   78화

    행사가 끝난 뒤, 검은 세단의 뒷좌석.파리의 황금빛 가로등이 창문 위로 미끄러져 지나갔다.소율은 태블릿으로 내일 수정할 계약 조항을 확인하는 척했다. 옆자리에 앉은 도현의 시선이 벌써 십 분째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만 좀 봐요.”“내 남자라며.”“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내 옷매무새는 당신이 본다며.”“본부장님이 빈틈을 보이면 태성그룹 이미지가 손상되니까요.”“나를 믿지만 이자벨의 판단력은 못 믿겠다며.”“전부 맞는 말이잖아요.”도현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한소율 팀장.”“왜요?”“질투했습니까?”“아, 음……조금요.”예상과 달리 순순한 대답이 돌아오자 도현이 잠시 말을 잃었다.소율은 태블릿을 끄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도현 씨가 흔들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그건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도현 씨를 자기 것처럼 건드리려는 건 싫었어요.”“소율아.”“이제야 알겠더라고요. 예전에 제가 다른 남자랑 있을 때마다 도현 씨가 왜 그렇게 예민해졌는지.”“그럼 앞으로 내 질투를 전부 이해해 주겠다는 뜻이야?”“그건 아니죠. 도현 씨 건 여전히 과잉이고, 통제 불능이고, 가끔은 재난 수준이니까.”“차별 대우네.”“대신 함부로 비웃지는 않을게요.”소율이 그의 손을 찾아 손가락을 맞물렸다.“좋아하니까 불안하고, 너무 소중하니까 남에게 한 치도 내어주기 싫은 마음이라는 건 알게 됐으니까요.”장난스럽던 도현의 눈빛이 천천히 부드러워졌다.그는 맞잡은 손을 들어 소율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나는 당신이 질투해서 좋은 게 아니야.”“아까부터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던데요.”“좋긴 하지.”도현은 뻔뻔하게 인정했다.“하지만 더 좋은 건, 당신이 이제 참지 않고 말해준다는 거야. 3년 동안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혼자 도망갈 계획부터 세우던 한소율이, 수십 명 앞에서 나를 자기 남자라고 선언했잖아.”그의 엄지가 소율의 손등을 천천히 쓸었다.“나는 그게 좋아.”

  • 14일간의 계약 연애   77화

    살롱의 전반부는 성공적이었다.소율은 유럽 유통사 대표들에게 ‘각자의 빛’ 캠페인의 핵심을 설명했고, 현장에서 수정한 세부 시안까지 보여주었다. 아시아 시장에 낯선 주주들의 질문에는 소비자 수치와 현지 사례로 답했다. 처음에는 그녀를 도현의 동반자로만 보던 이들의 눈빛이, 십여 분도 지나지 않아 공동 사업 책임자를 대하는 태도로 달라졌다.“한 팀장님의 안건이라면 아시아 출시를 앞당겨도 되겠습니다.”메종 벨루아의 최대 개인 주주인 노신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이사회에서 승인에 힘을 보태죠.”“감사합니다. 다만 생산량을 무리하게 늘리기보다 초도 물량의 품질과 국가별 배송 일정을 먼저 확정해야 합니다. 연말 물류가 혼잡한 만큼, 태성의 기존 유럽망과 현지 협력망을 병행하는 안건을 내일 전달드리겠습니다.”“빈틈이 없군요.”“함께 일하는 본부장님께 배웠습니다.”소율이 도현을 돌아보았다.도현은 대화에 끼어들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의 눈빛. 신뢰와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긴 시선이었다.그때 악단의 연주가 느린 왈츠로 바뀌었다.이자벨이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도현에게 다가왔다.“이제 사업 이야기는 충분히 한 것 같군요. 살롱의 주최자로서 첫 곡을 청해도 될까요?”그녀가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주변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 모였다.도현은 그 손을 내려다보지도 않았다.“제 첫 곡과 마지막 곡은 모두 정해져 있습니다.”그가 소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한 팀장. 춤추시겠습니까?”소율은 도현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기꺼이요, 차 본부장님.”두 사람이 홀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도현의 한 손이 소율의 허리를 받치고, 다른 손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단단히 채웠다. 세 박자의 선율에 맞춰 발을 옮기자 남색 드레스 자락이 물결처럼 둥글게 퍼졌다.“춤도 출 줄 알았어요?”“회장님이 어릴 때 억지로 가르쳤어.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라고.”“회장님은 이것까지 예상하셨나 보

  • 14일간의 계약 연애   76화

    회의는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아시아 지역 캠페인은 소율의 ‘각자의 빛’으로 확정됐고, 양측은 브랜드 사용 범위와 수익 배분까지 대부분 합의했다. 남은 것은 출시 행사의 형식과 계약서의 일부 문구뿐이었다.“오늘 저녁 제 저택에서 메종 벨루아의 겨울 살롱이 열립니다.”이자벨이 마지막 자료를 덮으며 말했다.“본래 사교 행사지만, 주요 주주와 유통 파트너들이 모두 참석하죠. 그 자리에서 합작 브랜드의 첫 티저를 공개한다면 이사회 승인도 빨라질 겁니다.”사업적으로는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그런데 이자벨이 초대장을 한 장만 꺼내 도현의 앞으로 밀었다.“차 본부장님을 제 파트너로 모시고 싶군요.”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태성 임원들은 일제히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누구도 두 여자 사이에서 눈에 띄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도현은 초대장을 보지도 않았다.“한 팀장이 참석하지 않는 자리에 저도 가지 않습니다.”“실무 책임자까지 동반하는 행사는 아니에요.”“그 실무 책임자가 이 프로젝트의 아시아 전략 책임자입니다.”“공적인 이유인가요, 사적인 이유인가요?”이자벨이 도발적으로 물었다.도현은 대답하기 전에 소율을 바라보았다. 거절은 자신의 몫이지만, 참석 여부는 프로젝트 책임자인 소율의 판단까지 들어야 한다는 듯한 시선이었다.소율은 잠시 계산했다.메종 벨루아의 주주와 유럽 유통사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 감정 때문에 포기한다면 이자벨에게 ‘연인의 자격으로 사업을 방해했다’는 명분만 줄 뿐이었다.소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참석하겠습니다.”도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대신 초대장은 두 장이어야 합니다. 차 본부장은 태성그룹의 대표로, 저는 합작 프로젝트의 공동 책임자로 참석하죠.”“제가 차 본부장님의 파트너를 요청한 건데요.”“그분의 파트너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소율이 차분하게 웃었다.“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요.”잠깐의 정적 끝에 이자벨이 초대장 한 장을 더 꺼냈다.“좋아요. 파리의 밤에도 그 자신감을 유지하실

  • 14일간의 계약 연애   75화

    “명품은 설문조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이자벨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소비자가 미처 원한다고 말하지 못한 욕망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예술이고, 그 욕망에 가격을 붙이는 것이 명품이죠. 숫자가 창작자의 직관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동의합니다. 하지만 직관이 시장을 모욕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소율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그래서 저희는 원안을 폐기하는 대신, 메종 벨루아의 미학을 살린 대체안을 준비했습니다.”화면이 바뀌었다.서로 다른 피부색과 나이를 지닌 여성들이 파리의 새벽, 서울의 야경, 교토의 햇살 속에서 각자의 얼굴을 드러냈다. 빛의 색은 모두 달랐지만 마지막에는 하나의 향수병 같은 유리 용기 안으로 모였다.[각자의 빛은, 각자의 방식으로 완성된다.]“‘창백한 순수성’이 아니라 ‘각자의 빛’입니다. 제품의 핵심 성분이 피부를 인위적으로 하얗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장벽과 광채를 회복시키는 데 있다는 점도 더 정확히 전달합니다. 세 국가에서 구매 의향이 기존 안보다 평균 24.2퍼센트 높았습니다.”메종 벨루아 측 마케팅 이사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영상 원본과 세부 수치를 받아볼 수 있겠습니까?”“최종 권한 배분에 합의하는 즉시 공유하겠습니다.”소율의 대답은 부드러웠지만 단단했다.이자벨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희미해졌다.그때 도현이 입을 열었다.“태성 측 입장은 한 팀장의 제안과 같습니다. 아시아 지역 캠페인의 최종 승인권은 태성이 갖고, 브랜드 고유 자산을 변경할 때는 메종 벨루아의 동의를 받는 상호 승인 방식으로 정리하죠.”“차 본부장님은 한 팀장님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시는군요.”“신뢰가 아니라 검증입니다.”도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한 팀장의 제안은 소비자 조사와 매출 예측으로 검증됐습니다. 더 나은 근거가 있다면 지금 제시하십시오. 없다면 개인적인 감상으로 회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고요.”냉정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소율은 테이블 아래에서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 14일간의 계약 연애   74화

    이혜민 회장이 한소율의 옷깃에 태성가의 루비 브로치를 직접 달아준 날로부터 두 달이 흘렀다.파리 생활 9개월 차.차도현과 한소율은 이제 태성그룹 유럽 총괄 지사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식 연인이자, 가장 강력한 업무 파트너로 자리 잡아 있었다.출근하는 순간부터 두 사람은 냉철한 본부장과 유능한 기획팀장으로 돌아갔다. 회의 중에는 사적인 호칭을 삼갔고, 상대의 기획안이라도 허점이 보이면 가차 없이 지적했다. 대신 퇴근한 뒤 펜트하우스의 현관문이 닫히면, 하루 종일 눌러두었던 애정과 그리움을 숨기지 않았다.공과 사의 경계는 분명했다.적어도 두 사람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오전 9시 50분.라데팡스에 자리한 태성그룹 유럽 지사 대회의실에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오늘은 프랑스의 유서 깊은 명품 뷰티 브랜드 ‘메종 벨루아(Maison Belloy)’와 합작 사업의 조건을 확정하는 날이었다. 태성그룹의 바이오 기술과 아시아 유통망에 메종 벨루아의 브랜드 가치와 조향 기술을 결합해, 글로벌 프리미엄 스킨케어 라인을 출시하는 대형 프로젝트.예상 연 매출만 3억 유로에 달했다.이미 기본 합의는 마쳤지만, 브랜드 콘셉트와 아시아 지역 마케팅 권한을 두고 양측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 있었다. 오늘 결론을 내리지 못하면 연말 생산 일정은 물론 내년 봄 동시 출시까지 차질이 불가피했다.소율은 회의 자료의 마지막 장을 확인한 뒤 노트북을 덮었다.딥 네이비색 테일러드 슈트와 단정하게 묶은 머리. 왼쪽 옷깃에는 이 회장이 건넨 붉은 루비 브로치가 고고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중요한 협상 날마다 반드시 착용하라는 말은 없었다.그럼에도 소율은 오늘 아침 망설임 없이 브로치를 골랐다. 그것은 태성가의 이름을 빌리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도 도현의 뒤에 숨지 않겠다고 이 회장 앞에서 했던 약속의 증표였다.회의실 문이 열리며 메종 벨루아 측 대표단이 들어왔다.그 선두에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창업주 가문의 후계자인 이자벨 드 벨루아 백작 부인이 있었다.

  • 14일간의 계약 연애   73화

    ​"당신은 이미 자격을 증명했으니까. 한국에서 내 밑을 3년이나 버텼고, 파리에 와서는 4억 유로짜리 벨에포크 계약을 따냈어. 내가 폭주할 때는 멱살을 잡아서라도 멈춰 세웠고, 회장님마저 수치와 논리로 설득했지."​도현의 입가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깊게 번졌다.​"태성그룹 안주인 자리에 당신보다 완벽한 사람이 있으면 데려와 보라 그래. 내가 직접 기안서부터 검토해 줄 테니까."​"또 일을 그런 식으로 비유하죠?"​소율이 웃으며 도현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하지만 도현은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소율의 허리를 더욱 깊이 끌어안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완전히 없애버렸다.​"그런데 한 가지는 정정해야겠어."​"뭘요?"​"회장님이 당신을 태성가의 안주인으로 먼저 낙점한 건 기쁘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절차가 남았잖아."​도현의 짙은 눈동자가 소율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향해 천천히 내려갔다.​아직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은 가느다란 손가락.​그의 시선에 담긴 뜨거운 의미를 알아차린 소율의 뺨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도현 씨…."​"브로치는 회장님 방식의 승인이고."​도현이 소율의 왼손을 들어 올려 네 번째 손가락 마디에 아주 천천히 입술을 눌렀다.​"내 방식의 계약은 내가 직접 준비할 거야."​낮고 그윽한 목소리가 손끝을 타고 소율의 심장까지 스며들었다.​"이번에는 14일짜리도 아니고, 누가 갑이고 을인지 따지는 웃기지도 않는 계약도 아니야. 당신이 도망칠 기한도, 내가 놓아줄 만료일도 없는 완벽한 종신 계약으로."​소율의 눈가에 남아있던 물기가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그 계약, 조건이 너무 독한 것 같은데요."​"당연하지. 계약 당사자가 차도현인데 허술할 리가 없잖아."​도현이 오만하게 웃으며 소율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올렸다.​"조건은 평생 내 곁에 있을 것. 대가는 내가 가진 모든 사랑. 계약 기간은 무제한. 중도 해지는 절대 불가능."​"아직 정식으로 제안한 것도 아닌데 벌써 조항부터 정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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