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저녁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시간. 도윤의 차가 한남동 본가 앞에 멈췄다. 차에서 내린 도윤은 현관으로 들어서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호출이었다. 저녁 일정 비우고 집으로 와. 할 이야기가 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며칠 전 어머니가 자신의 펜트하우스에 다녀간 뒤— 도윤 역시 그녀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어머니의 개인비서 이실장이 다가왔다. “어머니는?” “서재에 계십니다. 회장님은 저녁 약속이 있으셔서 아직 귀가 전이시고요.”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서재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이명희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차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손도 대지 않은 듯했다. “왔니?” “네.” “앉아.” 도윤이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명희가 아들을 바라봤다. 곧장 본론을 꺼냈다. “서희하고 약혼부터 하자.” 도윤의 눈빛이 멈췄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빨랐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자기가 아니야.” 이명희는 차분했다. “너와 서희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오갔어. 결혼 날짜를 바로 정하기 어렵다면 약혼부터 공식화하면 돼.” 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저한테 시간을 주시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줬잖아
“그런데 너 요즘 어디서 지내?” 지아가 불쑥 물었다. 수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 “옥탑방.” “아…….” “거기 아직 살아?” 수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나 같으면 무서워서 못 들어가. 그 미친놈이 거기까지 알고 있었잖아.” “응.” “설마 아직 거기 사는 건 아니지?” 수아의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말해야 할까. 지아에게만큼은— 말해도 되지 않을까. 나 지금 어떤 남자랑 같이 살아. 그런데 그다음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결혼할 사람은 아니야. 그 사람이 나한테 관심이 없어질 때까지만 같이 있기로 했어.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지아라면 당장 자신의 손을 잡을 것이다. 짐 싸. 나랑 거제 내려가. 그러고도 남을 친구였다. 무엇보다 수아 자신이 부끄러웠다. 평생 평범한 사랑을 꿈꿨으면서— 지금 자신이 선택한 관계는 자신이 꿈꾸던 것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정리했어.” 결국 거짓말이 나왔다. 지아가 눈을 크게 떴다. “집을?” “응.” “그럼 지금 어디 있어?” 수아는 손가락을 꼭 맞잡았다. “대학교 친구 집.” “친구?” “응. 잠깐 신세 지고 있어.”
“선생님, 이것 좀 봐주세요.” “어디 보자.” 수아가 아이의 스케치북 앞으로 몸을 숙였다. 알록달록한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 한가운데 커다란 고양이가 있었다. “고양이야?” “네. 우리 집 땅콩이요.” “땅콩이가 이렇게 커?” “밥 많이 먹어서 뚱뚱해졌어요.” 수아가 웃었다. “그럼 선생님이 땅콩이 수염 그리는 것만 조금 도와줄까?” “아니요. 제가 할래요.” “그래. 그럼 해봐.” 아이는 혀를 살짝 내민 채 그림에 집중했다. 수아는 그런 아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좋았다.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별것 아닌 일에 함께 웃는 시간. 복잡한 생각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수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눈이 커졌다. 지아. “여보세요?” “이수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수아의 얼굴에 반가움이 번졌다. “야, 김지아. 웬일이야?” “너 지금 학원이지?” “응. 수업 중인데 거의 끝나가. 왜?” 전화기 너머로 지아가 웃었다. “나 서울이야.” “뭐?” 수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가 서울에 왜 있어?” —볼일 있어서 올라왔지. 지금 너희 학원 근처야. “진짜?” “응. 얼굴이나 보려고.” 수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어디야? 기다려. 나 금방 끝나.” 수업을 마친 수아가 건물 밖으로 나오자— “이수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아가 고개를 돌렸다. “지아야!”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야, 너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니까!” 지아가 수아를 한 발 떨어뜨려 놓고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다 표정이 굳었다. “팔 좀 봐.” “이제 괜찮아.” “다리는?” “다 나았어.” “어디 봐.” “진짜 괜찮다니까.” 지아는 수아의 팔을
서희의 눈이 커졌다. “약혼이요?” “결혼 날짜를 바로 잡기에는 양쪽 회사 일정도 있고 준비할 것도 많잖아.” 이명희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전에 약혼부터 공식적으로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서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이 뛰었다. 약혼. 공식적인 약속.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자리이자, 다른 여자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자리이다. 서희는 어젯밤의 불안을 감춘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어른들 뜻에 따르고 싶어요.” 이명희의 눈빛에 만족감이 번졌다. “도윤이가 일이 바빠서 자주 연락 하지 못하더라도 너가 이해해라. 결혼하면 한 눈 팔 아이는 아니야. ?” 서희가 부드럽게 웃었다. “도윤 오빠가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요.” “…….” “저는 이해해요.” 이명희가 서희를 바라봤다. “결혼이 꼭 두 사람만의 감정으로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서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특히 저희 같은 집안에서는요.” 그 대답은— 이명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었다. “현성과 태하가 함께하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저도 도윤 오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 이명희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야.” 서희가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다른 생각이 움직이고 있었다. 약혼이 공식화되면 된다. 그렇다면 설령 도윤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고 해도— 그 여자는 결국 정리될 수밖에 없다. 저녁에는 서희의 엄마이자, 현성 그룹의 안주인인 김혜진여사까지 합류했다. 세 사람은 백화점 최상층에 마련된 프라이빗 다이닝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반 고객은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었다. 긴 통유리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졌고, 테이블에는 흰 리넨과 은식기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쇼핑한 드레스들은 직원들이 따로 포장해 서희의 집으로 보내기로 했다. 분위기는 화기
남편 차태하 회장의 중재로 아들에게 잠시 숨 쉴 틈을 주기로 했으나, 이명희 여사의 본심은 단 한 순간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서른 두 해를 살면서 처음으로 아들이 자신의 계획에서 벗어났다. 그것이 정말 잠깐의 호기심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감정인지. 확인할 시간 정도는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정리해야 할 것은 정리해야 했다. 이명희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서류로 향했다. 이수아. ‘잠시 눈을 돌리는 감정 따위에 태하그룹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다.’ 여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도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이명희는 서류를 덮었다. 수아라는 잡다한 존재가 아들의 발목을 잡거나, 도윤 스스로가 헛된 미련을 품을 여지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쐐기가 필요했다. 그 가장 강력하고 완벽한 방법은 바로 한서희와의 관계를 공식화하는 것, 즉 ‘약혼’이었다. 수아에게 도윤을 기대할 이유를 만들어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도윤에게도—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을 너무 오래 주어서는 안 된다. 이명희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서희니?” “네, 어머니.”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호칭에 이명희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오늘 오후에 시간 있니?” “네. 있습니다.” “나랑 쇼핑 좀 하자.” 서희가 잠시 놀란 듯했다. “저랑요?” “왜. 싫으니?” “아니에요. 제가 모시러 갈까요?” 이명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다. 백화점에서 만나자.” “네, 어머니. 몇 시까지 갈까요?” “세 시.” “네.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명희의 표정이 다시 차분해졌다. 역시한서희는 자신의 위치를 아는 아이였다. 오후 세 시. 청담동의 한 명품 백화점. 일반 고객들이 오가는 매장과 완전히 분리된 VIP 전용층에는 별도의 출입구와 엘리베이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예약된 고객만 들어갈 수 있는 프라이빗 살롱. 두꺼운 카펫이 발소리를 삼켰고, 은은
지난밤, 차도진이 흘린 단 한 마디는 서희의 완벽했던 세계에 미세하지만 지울 수 없는 균열을 냈다. 누구도 자신의 자리를 감히 넘보지 못할 것이며, 태하그룹의 안주인이라는 타이틀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오만하게 믿어왔던 서희였다. 그러나 차도윤이라는 오만하고 냉철한 남자가 사적인 공간에 누군가를 숨겨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그녀의 자존심을 무참히 긁어놓았고, 팽팽한 신경을 바짝 날카롭게 만들었다. 대학 시절부터 수많은 여자들이 도윤에게 접근했지만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 서희였다. 본인도 여러번 도윤에게 접근 했지만 도윤은 양가 부모님들이 정략결혼 이야기를 꺼내기전까지는 한 번도 자신에게 관심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남자에게 ‘여자가 생겼다고?’ ‘설마 하니, 그 차도윤이 나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려?’ 분노와 불안은 잠시뿐, 현성그룹의 외동딸답게 서희는 곧바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당장 양가 어른들을 판에 끌어들여 소란을 피우는 것은 스스로의 품위를 깎아먹는 일이었다. 도윤의 펜트하우스. 서희의 표정이 굳었다. 그곳은 자신조차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공간이었다. 태하와 현성. 차도윤과 한서희. 누가 보아도 완벽한 결합이었다. 서희 역시 그렇게 믿었다. 사랑이 뜨겁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결혼하고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보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우선은 도윤의 입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순서였다. 서희는 곧바로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이어진 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 “도윤 오빠.” “무슨 일이야?” 여전히 무심했다. “이번 주 토요일 시간 돼?” 예상대로 도윤은 늘 그렇듯 "이번 주는 좀 바빠."라며 매몰차게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서희 역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서희가 덧붙였다. “우리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데 얼굴 한번 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