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리고 그 사람은…….”
주연은 잠시 말을 멈췄다.입 밖으로 꺼내려니 2년 전의 기억이 생각보다 선명하게 되살아났다.백화점에서 최진태를 보는 순간 굳어버렸던 몸.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끝이 차가워졌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재혁은 재촉하지 않았다.그저 주연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한참 후 주연이 입을 열었다.“2년 전에…… “재혁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주연은 천천히 2년 전 이야기를 시작했다.최진태와 얽히게 된 일.그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큰 충격과 수치심을 느꼈는지.그리고 그 일을 빌미로 최진태와 결혼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렸던 것을.주연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재혁의 얼굴에서 조금씩 표정이 사라졌다.그는 단 한 번도 말을 끊지 않았다.하지만 소파 위에 놓인 손에는 어느새 힘이 들어가 있었다.이른 아침, 채 밝지 않은 여명의 빛이 창가를 두드릴 때쯤 재혁은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 잠시 천장을 바라보던 재혁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어젯밤 아쉽게 헤어져야만 했던 주연의 얼굴이었다. 하루라도 떨어져 있는 시간이 아까울 만큼 그녀가 그리웠고, 당장이라도 품에 안고 싶었다. 재혁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회사로 곧장 향하지 않았다. 주연이 머무는 아파트로 향하기 전, 그는 유명 베이커리와 죽을 살 수 있는곳을 들렀다. 주연이 아침으로 가볍게 먹을 샌드위치와 향긋한 커피, 그리고 아직 완전히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한 지혜를 위한 부드러운 전복죽까지 정성스럽게 포장했다. 바로 그때, 핸드폰 화면에 주연으로부터의 메시지가 반짝였다. ‘재혁 씨, 오늘 아침은 제가 지혜랑 같이 있으려고요. 보육원 원장님도 지혜 잘 챙겨주라고 연락이 와서요. 오늘은 보육원에 나가지 않고 지혜 옆에 있어 줘야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아침이 이른 시간이었다. 재혁은 차에서 내려 주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뒤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재혁의 입가가 저절로 올라갔다. “잤어?” “재혁 씨?” 그제야 잠이 조금 깬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봐.” “네?” “문 앞이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뭐라고요?” 재혁이 웃었다. “현관 앞이라고.”
깊은 진심과 묵직한 다짐을 나누었던 거실의 공기를 뒤로하고, 재혁은 주연을 태운 차를 몰아 지혜의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차 안은 아까 전의 긴장감 대신, 서로를 향한 단단한 신뢰와 애정이 빚어낸 은은한 온기로 가득했다. 운전대를 잡은 재혁의 한쪽 손은 여전히 주연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있었다.잠시 후, 차는 지혜의 아파트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조수석 문을 열고 내려 주연의 손을 잡은 재혁은, 그녀를 그냥 올려보내지 않고 아파트 현관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스쳤지만, 주연을 바라보는 재혁의 눈빛만큼은 봄날처럼 따스했다."…… 왠지 오늘 밤은 발걸음이 잘 안 떨어지네."주연이 도어록에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재혁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주연아.”주연이 돌아봤다.재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그리고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잘 자.”“재혁 씨도요.”“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알았어요.”재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다정하게 웃었다."오늘은 편히 쉬어. 내일 아침 출근길에 데리러 올게." 주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주연이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 있던 지혜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연을 맞이했다."어? 주연아? 너… 오늘부터 재혁 씨 집에서 같이 지내는거 아니었어?”“왜 다시 이쪽으로 와?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지혜가 정말 걱정하는 얼굴을 하자 주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아무 문제 없어.”“정말?”“응.”“그런데 왜?”주연은 지혜를 바라봤다.“너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람은…….”주연은 잠시 말을 멈췄다.입 밖으로 꺼내려니 2년 전의 기억이 생각보다 선명하게 되살아났다.백화점에서 최진태를 보는 순간 굳어버렸던 몸.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끝이 차가워졌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재혁은 재촉하지 않았다.그저 주연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한참 후 주연이 입을 열었다.“2년 전에…… “재혁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주연은 천천히 2년 전 이야기를 시작했다.최진태와 얽히게 된 일.그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큰 충격과 수치심을 느꼈는지.그리고 그 일을 빌미로 최진태와 결혼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렸던 것을.주연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재혁의 얼굴에서 조금씩 표정이 사라졌다.그는 단 한 번도 말을 끊지 않았다.하지만 소파 위에 놓인 손에는 어느새 힘이 들어가 있었다.손등의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였다.2년 전 이창수 회장이 내밀었던 결혼 조건.3년의 계약.재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창수 화장은 딸을 그 망나니와 결혼 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었다.주연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경청하던 재혁의 손이 꽉 쥐어졌다. 하얗게 질린 너클 뼈 위로 핏줄이 곤두섰고, 그의 눈동자 속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그의 아내, 세상 누구보다 아껴주고 보호해야 할 여자가 세상의 차가운 폭력 앞에 방치되었던 그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만약 그 최진태라는 놈이 지금 당장 눈앞에 나타났더라면, 재혁은 이성 따위는 집어치우고 목이라도 조를 수 있을 것 같았다.주연이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순간 단단하게 굳어 있던 재혁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재혁은
주연이 따뜻한 차를 몇 모금 마시는 사이, 재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작은 카드와 몇 개의 열쇠가 들려 있었다. 재혁이 그것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주연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건 뭐예요?” “집 비밀번호는 당신 휴대전화에 보내놨어.” “네?” “그리고 이건 필요한 열쇠들.” 주연이 눈을 깜빡였다. 재혁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제 나 없을 때도 언제든 들어와.” 주연은 재혁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열쇠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 작은 열쇠 하나가 이상할 만큼 마음을 울렸다. 이제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는 곳. 재혁이 없어도 들어올 수 있는 곳. 자신의 물건을 두고— 자신의 옷을 걸어두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 우리 집. 주연은 천천히 거실을 둘러봤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그런데 할 일이 정말 많겠네요.” “뭐가?” “이 집이요.” “왜?” “너무 삭막해요.” 재혁도 덩달아 거실을 둘러봤다. “뭐가 부족한데?” “많이요.” 주연은 손가락으로 하나씩 가리키기 시작했다. “일단 쿠션도 좀 놓고, 거실에 화분도 두고…….” 벌써 머릿속으로 집을 바꾸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여기 작은 테이블 하나 있으면 좋겠어요. 조명도 좀 따뜻한 걸로 바꾸고.” 재혁은 그런 주연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봤다. “또?” “주방도요.” “주방?” “냉장고에 물밖에 없잖아요.” 재혁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지갑을 꺼냈다. 잠시 후 블랙 카드 한 장이 주연 앞으로 내밀어졌다. 주연이 당황한 표정으로 카드를 바라봤다. “이건 또 뭐예요?” “집 꾸미는 비용.” “재혁 씨.” “사람 사는 집처럼 만들어준다며.” 재혁은 카드를 주연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집 좀 사람 사
부모님과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온 주연의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가벼웠다.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몇 번이나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2년 동안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내려놓은 기분이었다.엄마를 다시 안았고—아버지와 같은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감정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제는 도망치지 않았다.재혁은 운전하면서도 그런 주연을 몇 번이나 곁눈질했다.“좋아?”주연이 고개를 돌렸다.“뭐가요?”“집에 다녀온 거.”주연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어요.”재혁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다행이네.”“재혁 씨가 같이 가줘서 그런 것 같아요.”신호에 차가 멈췄다.재혁이 주연을 바라봤다.“앞으로도 같이 갈게.”주연이 웃었다.“네.”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앞으로도—함께. 지혜가 있는 임대 아파트로 가기 전, 두 사람은 재혁의 집에 먼저 들렀다.낮에 백화점에서 구입한 옷과 물건들을 가져다 놓기 위해서였다.현관문이 열리고 주연이 안으로 들어섰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처음 왔던 날이 선명했다.모델하우스처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으면서도 사람 사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집.냉장고를 열었더니 물밖에 없어 자신이 기가 막혀 했던 것도 떠올랐다.그때는 이곳이 그저 재혁의 집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주연은 현관에 서서 천천히 집 안을 둘러봤다.이제 여기가…… 내 집이기도 한 거구나.묘한 기분이었다.재혁이 양손
집을 나온 진성은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었지만 곧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두 손을 운전대 위에 올린 채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사실 약속 같은 건 없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둘러댄 핑계였을 뿐이었다. 조금 전 식탁에서 오가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주연. 그런 주연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던 어머니. 딸을 대견하게 바라보던 아버지. 그리고 주연을 바라볼 때마다 눈빛부터 달라지던 재혁. 진성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다들 아주 행복해 죽겠네.” 혼잣말을 내뱉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더 답답해졌다. 그는 결국 자주 가던 칵테일 바로 차를 몰았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바 안에는 제법 사람들이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잔잔한 재즈가 흐르고 있었고, 긴 바 테이블 위로 은은한 조명이 떨어졌다. 진성은 구석진 자리를 골라 앉았다. “늘 드시던 걸로 드릴까요?” 바텐더의 물음에 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후 술잔이 놓였다. 진성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평소라면 이곳에 오기 전 유하에게 연락했을 것이다. 같이 술을 마시든 아니면 그녀의 집으로 향하든.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유하에게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진성은 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저녁 식사 자리가 다시 떠올랐다. 특히 주연과 재혁이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치며 웃던 모습이 자꾸만 생각났다. 재혁이 테이블 아래에서 주연의 손을 잡아주는 것도 보았다. 주연도 싫지 않은 듯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비웃었다. “좋을 때지.” 그런데 이상했다. 비웃고 싶은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른 감정이 올라왔다. 부러웠다. 진성의 표정이 굳었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