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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스물 세 번째 생일 아침. 이주연이 오빠에게 받은 첫 번째 선물은 축하도, 꽃다발도 아니었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잔인한 한마디였다. 이진성. 서른세 살. 태산건설의 전무이사이자, 그리고 호적상 주연의 이복 오빠이자, 그녀의 숨통을 조이는 가장 잔인한 감시자. 또각. 또각. 복합한 감정을 깨부수는 서늘하고 정제된 구두 소리가 계단 위에서부터 무겁게 떨어졌다. 집 안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아침부터 아주 가관이네." 냉소와 경멸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 검은 셔츠에 완벽한 핏의 슬랙스를 차려입은 남자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언제나 한겨울의 빙하처럼 차갑고 매몰찼다. 진성은 계단 중간에 멈춰 서서 품에 안겨 있는 주연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스물셋이나 처먹고 아직도 엄마 품에 파고들어 애교를 떨고 있나? 유치해서 원." "오빠……." 주연은 떨리는 심장을 숨기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오늘…… 내 생일이야." 진성은 손목시계를 힐끗 눈으로 훑더니, 끔찍할 정도로 무심하게 뱉었다. "그래서?" "……." "뭐, 케이크라도 사다 달라고 징징대는 거야?" 순간, 거실을 채우던 공기가 찢어질 듯 팽팽해졌다. 진성은 한 걸음씩 다가오며 주연의 숨을 조여왔다. "스물셋이면 다 컸잖아. 어린애 취급받는 건 그만해라." 진성의 시선이 주연의 스케치북이 놓인 책상 쪽으로 흘렀다.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그깟 건축이니 뭐니 하는 쓸데없는 취미생활은 당장 집어치워. 대학 졸업하면 적당한 가문 골라서 시집이나 가." "오빠!" "그게 이 집에 네가 유일하게 쓸모를 증명하고, 눈칫밥 안 얻어먹는 유일한 길일테니까." 주연의 얼굴이 종이장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건축을 시작한 이후로, 그가 자신에게 던진 수많은 폭언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여자는 결국 남의 집 대문이나 지키다 죽는 게 숙명이다.’ ‘네가 꿈꾸는 그 모든 건 부질없는 허영이야.’ 참다못한 고미혜가 소리를 질렀다. "진성아! 말이 그게 무슨 소리니! 오늘 기쁜 날이야!" 진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주연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박혀 있었다. "틀린 말 했습니까?" 차갑게 반문한 진성은 마침내 주연 코앞에 멈춰 섰다. 그의 입술 사이로, 주연의 23년 인생을 가두는 가장 잔인하고 흉포한 선고가 떨어졌다. "생일 축하한다, 이주연." 축하라는 단어가 이토록 뼛속까지 저릴 수 있을까. 진성은 가장 낮고, 가장 잔인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었지만." 세상의 시간이 완전히 박살 났다. 주연의 숨이 멎었고,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이진성!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미혜가 기가 막힌다는 듯 가슴을 치며 소리쳤지만, 진성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헝클어진 재킷을 툭툭 털어 입으며 무심하게 돌아섰다. "먼저 회사 갑니다." —쾅! 현관문이 지진처럼 울리며 닫혔다. 집 안에는 진성이 남기고 간 서늘한 한기만이 가득 고여 있었다. 주연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돌부처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어릴 적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존재 자체가 죄악인 것처럼 취급받던 그늘.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그 누구보다 축복받고 싶었던, 단 하루뿐인 그녀의 스물세 번째 생일이었다. 더 이상 미소를 지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긴 생머리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툭, 바닥으로 떨어져 부서졌다. 불과 한 시간 전.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5월의 햇살이 커다란 통유리창을 깨뜨릴 듯 밀려들어 하얀 침대 위를 뒹굴었었다. 이주연. 허리까지 비단처럼 흘러내린 검은 생머리, 화장기 하나 없어도 투명한 우윳빛 피부와 오뚝한 콧날. 어릴 적부터 누구나 그녀를 보며 예쁘다고 했다.. 하지만 주연에게 그 완벽한 외모는 축복이 아니라 숨이 막히는 족쇄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늘 껍데기만 보았다. 그 안에 깃든 영혼이 무엇을 아파하고, 어떤 꿈을 꾸며 가슴 뛰는지는 단 한 사람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주연은 침대 옆 작은 달력을 바라보았다. 5월 20일. 오늘은 그녀의 스물세 번째 생일이었다. "……벌써 스물셋이네." 작게 읊조린 목소리 뒤로 가슴 한구석이 휑하게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축복받아야 마땅한 기쁜 날, 그러나 뼛속까지 스며드는 이 불길한 예감 그때, 조용한 방 문이 살며시 열렸다. "우리 주연이, 눈 떴니? 아침 먹자."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고미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의 얼굴을 본 순간, 주연은 환하게 웃으며 그 품으로 와락 안겼다. "엄마." "우리 딸, 스물세 번째 생일 진심으로 축하해." "엄마…… 너무 빨리 어른이 되는거 같아" "왜?" "아직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건축 공부도 더 깊게 하고 싶고……." 주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어른이 되는 게 너무 무서워, 엄마." 미혜는 피식 웃으며 딸의 등을 다독였었다. 그런데 오빠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주연의 가슴을 후벼 팠다. "……나 먼저 방에 들어갈게, 엄마."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작은 목소리를 남긴 채, 주연은 제 방으로 걸어 들어가 문을 쾅 닫아걸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꾹꾹 눌러 담았던 숨죽인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 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딸의 처절한 흐느낌을 들으며, 고미혜는 그 자리에 멍하니 주저앉아 눈물만 삼켰다. 당장이라도 품에 안아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그 어떤 위로도 이 잔인한 상처를 덮을 수 없음을 알기에 가슴이 찢어졌다. 창밖으로는 눈이 멀 정도로 눈부신 5월의 햇살이 온 세상을 태울 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주연에게 스물세 번째 생일은, 지옥의 문이 열린 날에 불과했다.“아직도 연락이 없다고?” 최진태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벌써 사흘째였다. 김지희가 자신의 제안을 생각해 보겠다고 한 지 사흘이 지났지만, 그녀에게서는 문자 한 통 오지 않았다. 진태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휴대전화를 다시 확인했다. “이 계집애가 정말…….”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소파에 던졌다. 견디다 못한 최진태는 결국 다시 청담동의 회원제 술집을 찾아갔다. 그는 김동혁을 룸으로 불러들여 멱살이라도 잡을 듯 험악하게 협박하며 당장 지희를 불러오라고 독촉했다. “동혁 씨.” ‘네, 변호사님.’ “내가 지난번에 무슨 말 했는지 기억하지?” 동혁은 잠시 침묵했다. ‘……네.’ “사람 일이라는 게 말이에요. 좋은 인연 하나로 잘 풀릴 수도 있고, 반대로 아주 어려워질 수도 있는 거야.” 진태는 느긋하게 덧붙였다. “동혁 씨가 취업 준비 중이라고 했지?” ‘네.’ “그럼 사람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잖아.” 동혁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희한테 연락해 보겠습니다.’ “좋아.” 진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사람이 좋게 말하면 알아들어야지.” 동혁은 이를 악물었다. “이 자식이 정말…….” 사람의 인생까지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입덧이 심해 외출조차 버거운 시아를 대신해, 주연은 어머니 고미혜 여사와 함께 이진성과 시아의 결혼 준비를 발 벗고 도왔다.“주연아, 이 드레스는 어떠니?”고미혜 여사가 태블릿 화면을 딸에게 내밀었다.화면 속에는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델이 서 있었다. 어깨선을 부드럽게 감싸는 레이스와 허리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퍼지는 실크 치마가 우아한 드레스였다.주연은 화면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예쁘네요, 엄마. 그런데 시아 언니한테 먼저 물어 봐야 하지 않을까요?”“그렇지, 그래야지.”고미혜는 한숨을 내쉬었다.“요즘 시아가 입덧이 더 심해졌다더라. 어제는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힘들었다고 하니.”“그 정도예요?”“응. 황장관이 걱정이 많더구나!. 병원에서도 무리하지 말라고 했고.”주연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그럼 드레스 피팅도 힘들겠네요.”“그래서 내가 웨딩숍에 부탁해 놓았어. 시아가 조금 괜찮아지면 집으로 드레스를 몇 벌 가져와서 입어볼 수 있게 해달라고.”“잘하셨어요.”주연은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엄마, 이런 스타일은 어때요? 허리를 너무 조이지 않고, 움직이기도 편할 것 같은데요.”고미혜가 화면을 살폈다.“어머, 이거 예쁘다.”“그렇죠? 시아 언니는 화려한 것보다 단정하고 우아한 스타일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맞아. 시아는 얼굴이 참 곱잖니. 굳이 장식이 많지 않아도 예쁠 거야.”고미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드레스 사진을 저장했다.“역시 딸이 있으니까 좋구나.”고미혜는 딸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우리 주연이가 이렇게 든든한 딸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엄마!”주연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모녀는 서로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주연은
이민성은 차 안에 앉아 한참 동안 운전대를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 박지민과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아버지가 저지른 비열한 짓을 알게 된 민성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아버지를 찾아가 담판을 짓고 싶었지만, 간신히 이성을 쥐어짜며 화를 삭였다.민성은 이를 악물었다.‘아버지…… 도대체 어디까지 하실 생각입니까.’지금 아버지를 만나면 분명 아버지와의 관계는 지금보다 더 돌이키기 어려워질 수 있었다.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최재혁.민성은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최 대표님.”‘어, 이 대표 무슨 일이야?’민성은 피식 웃었다.“살아 계셨네요?”‘뭐?’“아니, 회사에서 얼굴 본 지가 너무 오래 돼서요.”재혁이 웃음을 터뜨렸다.‘무슨 소리야. 오늘도 회사 갔다 왔는데.’“잠깐 들렀다가 사라진 것도 출근으로 칩니까?”‘야, 내가 일 안 하는 사람처럼 말한다?’“그럼 일 좀 하시죠, 대표님.”민성은 일부러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뉴럴링크가 공동대표 체제라는 사실을 혹시 잊으신 건 아니죠?”재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이민성, 너 오늘 왜 이래?’“왜긴요. 공동대표 한 분이 결혼하시더니 회사보다 아내 얼굴 보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요.”‘당연한 거 아니야?’재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신혼인데.’“와…….”민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이렇게 당당할 수가 있나.”‘부러우면 너도 결혼해.’“그러려고 하는데 누가 자꾸 방해하네요.”수화기
지민의 입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돈 좀 빌려달라”는 말에, 민성은 멍한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부유한 명문가에서 아쉬운 것 없이 자란 줄 알았던 지민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에게 이토록 절박한 얼굴로 돈을 요구하다니, 도무지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민성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돈이요?”“네.”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돈 좀 빌려주세요.”민성은 찻잔을 내려놓았다.“박지민 씨.”“네.”“제가 지금 무슨 말씀을 들은 건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지민은 어색하게 웃었다.“그렇죠? 저라도 그럴 것 같아요.”그녀는 두 손으로 따뜻한 카페라테 잔을 감쌌다.손끝이 떨리고 있었다.사실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그녀는 피트니스센터로 오는 내내 고민했다.그러나 막상 민성과 마주 앉아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지민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그래. 이왕 말을 꺼낸 거, 끝까지 솔직해지자.’그녀는 고개를 들었다.“민성 씨.”“네.”“말씀해 보세요.”지민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그리고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민성 씨를 찾아와서 뜬금없는 소릴 하는 이유…… 다름이 아니라, 내가 민성 씨랑 김지혜 씨 사이에 물러나 주는 대가예요."“제가 민성 씨와 지혜 씨가 결혼하실 수 있도록…….”“……네?”민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지민은 애써 웃었다.“제가 더 이상 민성 씨한테 접근하지 않고, 지혜 씨와의 관계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요.”“잠깐만요.”민성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박지민 씨.”
“안녕하세요, 민성 씨.”피트니스센터 탈의실에서 나온 민성은 입구 근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박지민을 발견했다.조금 전 운동복 차림이었던 지민은 어느새 단정한 크림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슬랙스로 갈아입고 있었다.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머리를 자연스럽게 묶은 그녀는 민성을 발견하자 환하게 웃었다.“오래 기다리셨죠?”민성이 다가오며 물었다.“아니에요. 저도 방금 준비 끝났어요.”“어디로 갈까요? 이 근처에 조용한 카페가 하나 있는데.”“좋아요. 민성 씨가 자주 가시는 곳으로 가요.”지민은 밝게 대답했다.민성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봤다.조금 전 운동실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지민의 얼굴은 무척 어두웠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듯 눈가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고, 자신에게 차 한잔하자고 말할 때는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웃고 있었다.‘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민성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누구에게나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법이었다.“그럼 가시죠.”피트니스 센터 근처의 조용한 카페.창가 자리에 나란히 마주 앉은 민성과 지민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지민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일부러 밝고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친구처럼 편안하고 장난기 어린 어조로 민성을 대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었다."여기에 이런 조용한 곳이 있었네요?” 밝은 표정과 달리 그녀의 가슴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박지민, 정신 차려.’그녀는 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아, 지민 씨. 갑자기 차 한잔하자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지. 난 또 중요한 비즈니스 얘기라도 있는 줄 알았네요."민성은 지민이 지난번 파스타 집에서의 우연한 만남 이후로
“박지민 씨.”이경환 사장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우리 민성이 옆에 다른 여자가 서 있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고.”지민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서울 강남의 한 고층 빌딩에 자리한 이경환의 개인 사무실이었다.처음 이 사무실에 들어왔던 날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편안한 마음으로 이곳을 찾은 적이 없었다.“대답해 보게.”이경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도대체 민성이와 어떻게 지내고 있길래 그 녀석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소리를 내 앞에서 하는 거야?”지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사장님, 저는…….”“내가 자네한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줬나?”그가 말을 끊었다.“민성이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라고 했지. 식사도 하고, 운동도 함께하고, 서로 알아갈 기회를 충분히 만들라고 했어.”“네. 그렇게 했습니다.”“그런데 결과가 이 모양이야?”이경환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거칠게 내려놓았다.“그 녀석이 결혼하겠다는 여자가 누군지 알아?”지민은 입술을 깨물었다.“……알고 있습니다.”“알고 있어?”“네.”이경환이 비웃듯 말했다.“그 여자가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사실도 알고 있겠지?”지민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녀는 며칠 전 민성과 함께 있던 지혜의 모습을 떠올렸다.그 날 민성은 세상 부드럽고 따뜻한 눈빛으로 지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이미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서는 자신은 그런 눈빛을 받을 수 없다는것을 깨닫는 날이기도 했다.“박지민 씨!”이경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