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저녁 여섯 시.
붉게 물든 노을이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이주연은 침대 끝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은 스물세 번째 생일. 하지만 축하받고 있다는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침부터 이진성이 내뱉은 한마디가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주연은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 언제쯤이면 오빠가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줄까. 열 살 때는 중학생이 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고등학생이 되면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어느새 스물셋.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진성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부르르르.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김지혜. 주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친구. 그리고 가장 오래된 편이었다. "응, 지혜야." "너 울었지?" 다짜고짜 날아온 한마디. 주연은 얼른 눈가를 문질렀다. "아닌데." "이주연." 지혜가 한숨을 쉬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널 봤는데 내가 네 목소리도 구분 못 할 것 같아?" "..." "또 오빠 때문이지?" 주연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이어진 침묵. 이내 지혜가 단호하게 말했다. "삼십 분 줄게." "뭐?" "씻고 나와." "나 오늘 나가기 싫어." "싫기는." "오늘 네 생일이잖아." "생일이 뭐가 좋아..." 주연이 힘없이 웃었다. "그냥 오늘은 자고 싶어." "안 돼." 지혜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오늘 하루까지 그 인간 때문에 망치게 둘 순 없어." "..." "대학교 마지막 생일이잖아." 그 말에 주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 대학교 마지막 생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스물세 살. "어디 가는데?" 잠시 후 들려온 지혜의 대답. "클럽." "...뭐?" "요즘 제일 핫한 데." "나 클럽 안 가." "술도 못 마시잖아." "오늘은 마셔." "싫어." "준비하고 나와." 잠시 뜸을 들이던 지혜가 웃으며 덧붙였다. "안 나오면 내가 집까지 데리러 간다." 뚝. 전화가 끊겼다. 주연은 휴대전화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참..." 친구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한 시간 후. 강남. 금요일 밤의 거리는 이미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했다. 건물마다 네온사인이 반짝였고, 웃음소리와 음악이 뒤섞여 밤을 더욱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클럽 입구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주연!" 멀리서 손을 흔드는 김지혜가 보였다. 짧은 갈색 단발머리에 크림색 니트를 입은 그녀는 언제나처럼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주연을 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너 설마..." "이렇게 입고 온 거야?" 주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흰 블라우스. 연청색 롱스커트.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청순함 그 자체였다. 지혜는 이마를 짚었다. "여기가 클럽이야." "소개팅 아니고." "근데 왜 첫사랑 룩으로 왔어?" 주연은 해맑게 웃었다. "이게 제일 편해서." 그 순간. 주변을 지나가던 남자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향했다. 화려하게 꾸민 여자들 사이에서도 주연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꾸미지 않았기에 더욱 아름다웠다. 지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 남자들 다 큰일 났네." 그때 다른 친구들도 달려왔다. "주연아!" "생일 축하해!" "오늘은 무조건 신나게 노는 거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주연은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었다. 잠시나마 아침의 상처를 잊은 듯했다. 클럽 문이 열리자 강렬한 비트가 심장을 두드렸다. 화려한 조명이 붉고 푸른 빛으로 교차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비췄다. 처음 보는 세상. 주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작게 감탄했다. "와..." "신기하지?" 지혜가 칵테일 한 잔을 건넸다. "오늘은 아무 생각 하지 마." "딱 하루만." 주연은 잔을 받아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오늘만큼은... 정말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오늘 밤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같은 시각. 클럽 2층 VIP석. 한 남자가 술잔을 든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 185센티미터가 넘는 큰 체격. 값비싼 맞춤 정장. 잘생긴 얼굴.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욕망과 오만함만이 가득했다. 최진태. 국내 최고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 그리고 재계에서는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는 남자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술잔을 기울이다가 한 여자를 발견했다. 긴 검은 머리. 새하얀 피부. 그리고 누구보다 맑은 미소. "...이주연?" 상류층 모임에서 몇 번 마주쳤던 여자. 수없이 접근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호의를 받아주지 않았던 여자. 오늘은 아무런 경계도 없이 친구들과 웃고 있었다. 최진태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마치 오래전부터 탐내던 사냥감이 스스로 덫 안으로 걸어 들어온 것처럼. 그는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걸음씩 VIP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시선은 단 한 번도 이주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냥이 시작되고 있었다.병원 응급실의 자동문이 열렸다.재혁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평소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접수대로 곧장 다가간 그가 다급하게 물었다."조금 전에 교통사고로 들어온 김민성 환자 어디 있습니까?"간호사가 모니터를 확인했다."김민성 환자분 보호자세요?"재혁은 잠시 멈칫했다.가족은 아니었다.하지만 민성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연락을 받을 사람은 자신이었다."...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입니다.""병원에서도 제게 연락을 주셨고요."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응급 처치는 끝났고 지금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간호사를 따라가는 재혁의 발걸음이 빨라졌다.커튼으로 나뉜 응급실 침대들이 차례로 지나갔다.그리고 마침내,침대에 누워 있는 민성이 보였다."...민성아."민성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팔에는 고정 장치가 되어 있었고 머리에는 치료받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재혁의 얼굴이 굳어졌다."야."민성이 힘없이 웃었다."왔냐?"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친구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펴본 뒤에야 굳어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사람 놀라게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민성이 피식 웃었다."안 죽었잖아."재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지금 농담이 나오냐?"그때 담당 의료진이 다가왔다.재혁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상태가 어떻습니까?""팔에 골절이 있고 머리 쪽도 치료가 필요한 상처가 있습니다. 다행히 현재 검사상 크게 걱정되는 소견은 없지만 가벼운 뇌진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섰을 때, 서울의 밤공기는 이미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극장 앞은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고,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웃으며 지나가고 있었다.주연은 아직도 재혁의 손끝에 남아 있던 따뜻한 온기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조금 전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그의 손을 잡았던 순간.재혁은 놀랐지만 끝내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그 짧은 시간이 주연에게는 오래도록 기억될 행복이었다."배고프시죠?"주연이 밝게 웃으며 물었다.재혁도 미소를 지었다."영화를 보니까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갔네요.""근처에 괜찮은 한식집이 있는데...""같이 가실래요?""좋습니다."두 사람은 조용한 골목 안쪽에 자리한 작은 한식당으로 들어갔다.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실내에는 잔잔한 국악 선율이 흐르고 있었고, 창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앞에는 따뜻한 차가 먼저 놓였다.잠시 후 정갈한 한정식이 차려졌다.주연은 한동안 말없이 음식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아이들이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재혁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민우가 웃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기분이 좋더군요."주연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그건...""재혁 씨 덕분이에요."재혁은 작게 웃었다."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주연 씨와 지혜 씨가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고 계시잖아요."주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건물을 새로 고쳐 주시고.""책도 사 주시고.""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 주시고.""재혁 씨가 오신 뒤부터...""행복나무가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잠시 말을 멈춘 그
지혜가 민성과 함께 약속이 있다며 먼저 보육원의 문을 나서자, 남겨진 재혁과 주연은 아이들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낸 뒤 오후 늦은 시각에야 비로소 보육원을 나섰다.겨울의 끝자락에 부는 차가운 공기가 두 사람의 뺨을 스쳤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던 중, 주연은 문득 며칠 전 재혁이 지나치듯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일하느라 극장에서 영화 한 편 제대로 본 적이 없네요.’주연은 걸음을 멈추고 문득 고개를 돌려 재혁을 바라보았다."재혁 씨." "네~?" "오늘 영화 보러 가요."재혁은 잠시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영화관이요?""네.""영화관이 어떻게 생겼을까요!...""기억도 안 납니다."주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설마.""정말요?"재혁은 어깨를 으쓱했다."회사 시작하고 나서는.""극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렸습니다."주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그럼...""오늘 제가 알려 드릴게요.""극장이 어떤 곳인지."재혁도 따라 웃었다."좋습니다.""오늘은 선생님 말씀 잘 듣겠습니다."두 사람은 함께 차에 올랐다.종로.오래된 대형 영화관.주말이라 그런지 극장 로비는 사람들로 가득했다.팝콘을 들고 있는 연인.사진을 찍는 커플.팔짱을 끼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람들.그 사이를 함께 걷는 재혁과 주연도 누가 보아도 연인처럼 보였다.주연은 매표소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오늘 영화는...""'왕의 그림자'래요.""조선 왕실을 배경으로 한 사극인데.""요즘 정말 인기 많대요."재혁은 티켓을 받아 들며 말했
행복나무 보육원.따뜻한 봄기운이 조금씩 겨울을 밀어내고 있었다.창문을 활짝 열어 놓은 보육원 안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스며들었다.주연과 지혜는 김미숙 원장을 도와 사무실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낡은 서류철을 새 파일에 옮겨 담고, 후원 물품 목록을 다시 정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다."지혜야.""이건 2월 후원 내역 맞지?""응. 그건 새 파일에 넣으면 돼."두 사람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일을 이어 갔다.잠시 후에는 아이들 방으로 올라가 이불을 개고 책장을 정리했다.주연은 바닥에 흩어져 있던 장난감을 하나씩 제자리에 올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이 방도 많이 달라졌네.""공사하기 전보다 훨씬 밝아졌어."지혜도 창가의 커튼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들도 요즘 표정이 훨씬 좋아."두 사람의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미숙 원장은 조용히 웃었다.'참 예쁜 아이들이다.'그 시각.보육원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의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다."재혁 아저씨!""패스!"재혁은 편안한 니트와 운동화를 신고 아이들과 함께 공을 몰고 있었다.회사에서의 냉철한 대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아이들과 함께 뛰고, 넘어지고, 크게 웃는 그의 얼굴에는 순수한 즐거움만 가득했다.그때였다.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운동장 앞에 멈춰 섰다.차에서 내린 사람은 민성이었다.오늘의 그는 평소와 달랐다.몸에 꼭 맞는 정장 대신 활동하기 편한 캐주얼 셔츠와 면바지, 흰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었다.재혁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왔냐!"민성이 웃으며 다가왔다."늦었지?"재혁은 공을 발끝으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토요일 오전.주연은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잠시 후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재혁 씨도착했습니다.문자를 확인한 주연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지혜야.""재혁 씨 왔대.""내려가자."두 사람은 아이들에게 줄 과자와 과일, 음료가 담긴 쇼핑백을 양손 가득 들고 현관을 나섰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지혜는 슬쩍 주연을 훑어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오늘은 아주 작정을 했네."주연은 괜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뭘.""평소랑 똑같거든?""거짓말."지혜가 웃으며 말했다."평소 같으면 청바지에 운동화 신고 나갔을 사람이.""오늘은 크림색 니트에 플레어스커트까지.""누가 보면 데이트 가는 줄 알겠다."주연은 얼굴이 붉어졌다."...토요일이잖아."그 한마디에 지혜는 더 크게 웃었다."그래.""토요일이라 나도 오랜만에 꾸며 봤다."평소 청바지와 후드티를 즐겨 입던 지혜 역시 오늘만큼은 따뜻한 베이지색 원피스에 롱코트를 걸치고 있었다.평소와는 또 다른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났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아파트 입구에는 검은 SUV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차에서 내린 재혁은 두 사람을 보자 잠시 말을 잊었다.겨울 끝자락의 햇살 아래 서 있는 두 사람은 평소보다 훨씬 밝고 따뜻해 보였다.잠시 시선을 머물던 재혁이 미소를 지었다."오늘...""두 분 다 유난히 아름다우시네요."주연은 순간 귀까지 붉어졌다."갑자기 그런 말씀을..."지혜는 장난스럽게 웃었다."재혁 씨.""칭찬은 주연이한테만 하셔도 되는데요?"재혁은 웃
토요일 아침.햇살이 거실 창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주연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세탁을 마친 옷을 정리하고,보육원 아이들에게 줄 간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현관 앞에 가방까지 미리 가져다 놓았다.오늘은 재혁이 지난번 서점에서 함께 고른 책들을 행복나무 보육원으로 가져오는 날이었다.생각만 해도 괜히 마음이 설렜다.욕실 문이 열리며 지혜가 머리를 말리며 나왔다.거실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주연을 바라보던 지혜가 피식 웃었다."아침부터 왜 이렇게 바빠?"주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책도 챙겨야 하고.""아이들 간식도 확인해야 하잖아."지혜는 팔짱을 낀 채 한참 동안 주연을 바라보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래서.""재혁 씨랑은 어디까지 진도 나갔는데?"주연이 놀란 듯 뒤를 돌아봤다."뭐?""왜?""키스도 했잖아.""이제 손도 잡고 데이트도 하고.""다음은 뭐야?"주연은 얼굴이 붉어지며 쿠션을 집어 던졌다."김지혜!"지혜는 웃으며 쿠션을 받아 안았다."농담이야, 농담."잠시 웃음이 이어졌다.하지만 지혜의 표정은 이내 조금 진지해졌다."주연아.""...언제 말할 거야?"주연의 손이 멈췄다."뭘?""네가...""...재혁 씨 아내라는 거."거실 안이 조용해졌다.주연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도.""이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지혜는 조용히 친구를 바라보았다.주연은 씁쓸하게 웃었다."처음에는...""재혁 씨가 나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