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구태윤의 잘생긴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루아야,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는데 뭐가 불만이야?”정루아는 영혼 없는 미소를 지었다.“불만이라니? 나 지금 너무 기분 좋은데?”이내 웃음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이제 만족해?”구태윤의 조각 같은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이때, 휴대폰이 울렸다. 한민혁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왜!”수화기 너머로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와 상사의 짜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한민혁은 침을 꼴깍 삼키며 보고했다.“대표님, 10분 뒤에 회의가 시작됩니다.”구태윤은 아무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정루아는 이미 대본을 챙기고 회의실로 들어간 뒤였다.그녀의 차가운 태도와 냉소가 분노를 유발했다.결국 굳은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정호는 싸늘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정루아를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컨디션이 안 좋은가?”“아니요, 괜찮아요.”정루아가 무덤덤하게 답했다.그녀는 남은 대본을 훑어보며 앞으로 한 달 정도의 분량이 남았음을 가늠했다.정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일할 땐 사적인 감정 끌어들이지 마세요. 목소리에 다 티 나니까.”“네, 알고 있어요.”회의를 마치고는 곧장 녹음실로 들어갔다.오후 내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고 나오니 목이 타들어 갈 듯했다.그녀는 탕비실로 가서 레몬수를 한 잔 타서 조금씩 마셨다.퇴근 후, 곧장 마트로 향해 생필품을 산 뒤 새집으로 배송시켰다.장보기가 어느 정도 끝나자, 경비실로 찾아가 출입을 차단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등록했다.경비원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이 사람은 단지 안으로 발도 못 붙이게 할게요.”정루아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인데요.”그녀는 짐을 챙겨 새집으로 향했다.어둠 속에 숨어 있던 경호원이 정루아의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일거수일투족을 구태윤에게 보고했다.어스름한 차 안, 화면 위로 끊임없이 올라오는 메시지들을 확인한 구태윤의 표정
“아무것도 안 나왔다고?”정루아가 경악하며 되물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이연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나도 이해가 안 가. 열 살에 보육원에 입소한 기록은 분명히 있거든? 그리고 열두 살 때 너희 부모님께 입양된 것도 맞고. 그런데 보육원에 들어가기 전 기록이 아예 없어. 백지상태야.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싹 지워버린 것처럼.”정루아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정시연의 과거가 통째로 삭제되다니.대체 왜 지운 거지?절대 밝히지 못할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아니면 무언가 거대한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이연희가 한숨을 내쉬었다.“내 능력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여기까지야.”“아니야, 이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워.”정루아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다독였다.“이제 그만해.”더 깊이 파헤치다간 이연희까지 위험에 휘말릴까 봐 걱정되었다.“응.”이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침대에 엎드려 손등으로 턱을 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다.“그나저나 정시연은 정체가 뭘까? 너희 부모님이 그렇게 끼고도는 것도 이상하고, 과거까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고... 보면 볼수록 참 수수께끼라니까?”정루아가 시선을 내리깔았다.“나도 모르겠어.”알았더라면 지금처럼 답답하고 혼란스럽지도 않았을 터였다.이연희가 하품을 쩍 했다.“휴... 완전히 막다른 길에 다다라 버렸네. 너무 조급해하지 마, 루아야. 진실은 언젠가 꼭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까.”“응, 알아. 피곤할 텐데 얼른 자.”“그래, 너도 잘자.”“좋은 꿈 꿔.”전화를 끊은 정루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정시연의 과거라면 정석주와 임혜숙이 모를 리 없었다.그렇다면 부모님이 흔적을 지워버린 범인일까?대체 왜 그런 짓까지 한 걸까.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갔다.하지만 이제는 가서 물어보는 것조차 귀찮아졌다.이미 친자 확인 검사를 마친 상태였고, 결과도 조만간 나올 예정이었다.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그녀는 억지로 생각을 털어내며
장옥경은 복잡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정원 그룹은 이제 놓아준 거니?”구태윤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무심하게 쳐다보았다.“하고 싶으신 말씀이 뭡니까?”“내가 말한다고 들을 거냐만은...”장옥경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그래도 엄연히 루아의 친정이잖아. 이렇게까지 들쑤셔 놓으면, 앞으로 루아가 부모 얼굴을 어떻게 보겠니?”그러자 구태윤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받아쳤다.“정 회장이 루아한테 손을 댔어요.”장옥경은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기가 찬다는 듯 덧붙였다.“결국은 그 집 부녀간의 일이지, 네가 대대적으로 판을 벌일 필요는 없잖아.”“엄마, 이미 끝났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씀 해봤자 무슨 소용입니까?”구태윤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호했다.하지만 장옥경은 느낄 수 있었다. 아들의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것을.그녀는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태윤이 곁을 지켜준 덕분인지, 불안해하던 구하준은 금세 안정을 되찾고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그는 아이를 병상에 조심스레 눕힌 뒤 병실을 나섰다.이내 차를 몰아 정시연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병실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이 그를 보자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대표님.”“응.”구태윤은 짧게 대답하고 곧바로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뜻밖의 방문에 정시연은 깜짝 놀랐다.“태윤 씨,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구태윤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내일부터 본가로 들어가서 요양하도록 하세요.”정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내 처지에 본가로 들어가면 서로 껄끄럽기만 하잖아요.”“껄끄러울 게 뭐 있죠? 형수님은 하준의 친모에요. 감히 누구도 입을 놀리지 못할 겁니다.”구태윤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남한테 말 못 할 짓이라도 저지른 게 아니라면 말이죠.”“그럴 리가...”정시연은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렸다.“그럼 태윤 씨 뜻대로 할게요.”구태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형수님 명의의 회사는 이미 사
정루아는 또다시 숨 막히는 압박감이 느껴졌다.결국 저도 모르게 손으로 목을 쓸어내렸다. 기분이 얼떨떨했다.저만치 앞서가는 냉정하고 오만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가슴 밑바닥에서 참담한 슬픔이 밀려왔다.더는 그에게 반항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그저 처량하게 뒤를 따라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지금껏 해온 모든 발버둥이 겨우 목숨만 유지하기 위한 짓처럼 느껴져 실소가 터져 나왔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정루아는 구석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마치 폭우를 흠뻑 맞은 사람처럼, 축 처진 어깨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풀이 죽은 정루아의 모습에 구태윤은 눈살을 찌푸렸다.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가 먼저 발을 내딛자, 정루아는 넋이 나간 채로 뒤를 따랐다.지문 인식으로 도어록을 해제하고 집 안으로 들어서던 그때, 구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화면을 확인하더니 수화기를 귀에 대었다.“여보세요?”거리가 가까운 탓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흘러나왔다.장옥경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무언가 급하게 쏘아붙이고 있었다.“알았어요. 지금 갈게요.”구태윤은 짧게 대답하곤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시선을 돌려 정루아를 바라보았다.자신이 떠난다는 소식에 먹구름이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그와 함께 있는 게 그리도 싫은 건가.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이내 무심한 척 말을 건넸다.“호텔에 말해서 저녁 챙겨주라고 할 테니까, 따로 배달 음식 같은 건 시키지 마.”“응.”정루아가 건성으로 대답했다.구태윤은 돌아서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루아야, 정말... 나한테 더 할 말 없어?”돌아온 것은 ‘쾅’하고 닫히는 문소리뿐이었다.구태윤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는 고개를 돌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구하준이 다쳤다.
정루아가 대답했다.[아닐 거예요.]강우현이 금세 답장했다.[하지만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이 연달아 터진 적은 처음이라고요. 구 대표님을 만난 이후로 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어요.][혹시 언제 시간 괜찮아요? 만나서 얘기하면 안 돼요? 만약 정말 구 대표님이 한 짓이라면, 루아 씨가 그분 좀 말려주세요.]정루아의 손가락이 움찔했다.한창 망설이고 있는 찰나, 머리 위에서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1층입니다.”정루아는 즉시 휴대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차는 정문 앞에 대기해 있었고, 기사가 깍듯이 문을 열어주었다.“대표님, 사모님.”“네.”구태윤이 담담하게 응대하며 정루아를 먼저 차에 태운 뒤, 자신도 반대쪽 문으로 올라탔다.정루아는 줄곧 창밖만 응시했다. 표정은 극도로 차가웠다.구태윤이 문득 입을 열었다.“며칠 뒤에 연회가 있어. 나랑 같이 가자.”정루아는 단칼에 거절했다.“싫어. 안 가.”하지만 구태윤은 개의치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연회에 참석하든가, 집에 갇혀 있든가, 둘 중 하나 골라.”정루아는 이를 악물었다.지금 손에 칼이라도 쥐여 준다면 망설임 없이 그를 찔렀을 것이다.“협박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뭐야?”그녀가 비꼬듯 쏘아붙였다.구태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이렇게라도 안 하면 네가 내 말을 안 들으니까.”정루아의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어차피 다 헛수고야. 그럴수록 난 당신이 더 밉거든.”구태윤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노골적인 거부와 혐오는 들을 때마다 거슬렸다.하지만 이 굴레는 끊어낼 수 없는 악순환에 빠진 것만 같았다.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나지 못했다.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정루아를 바라보았다.“그래서, 결정은 했어?”“집에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정루아는 단지 그와 함께 연회에 참석하기 싫을 뿐이었다.남들 앞에서 다정한 부부 시늉하는 것,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구태윤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또다시 감정이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것을
배다인은 감정을 억누르고 코웃음을 쳤다.“너도 결국 남편 믿고 이러는 거잖아.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면서.”정루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양반 빨리 내 앞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어? 얼마나 성가시게 구는데.”말문이 막힌 배다인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이때 배진욱이 입을 열었다.“됐어, 그만하고 따라와.”배다인은 정루아를 째려보고 곧바로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회사로 돌아온 정루아는 녹음실에서 2시간을 더 보냈다.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진 후였다.그런데 자리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그녀의 얼굴이 싸늘해졌다.상대방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왜 야근까지 했어? 배고프지?”구태윤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왔다.“오지 마!”하지만 정루아는 뒤로 물러서며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이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구태윤은 우뚝 멈춰서서 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지금 나 피하는 거야?”“당연하지.”정루아는 극도로 경계했다.“내 생각 따윈 안중에도 없고, 심지어 그런 끔찍한 짓까지 꾸미고 있잖아. 난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구태윤이 나지막이 웃었다.“거참 실망하게 해서 어쩌나.”이내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정루아는 머리털이 쭈뼛했다.그가 더는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책상을 사이에 두고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구태윤의 화만 더 돋우는 꼴이 되었다.구태윤은 맞은편에 서서 책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발로 걷어찰 기세였다.“루아야, 넌 어차피 독 안에 든 쥐야.”구태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괜한 수고 하지 마.”정루아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흘렀고, 심장이 조여드는 듯했다.어떻게 해야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나 너무 피곤해. 집에 가서 쉬고 싶으니까 제발 더 이상 괴롭히지 마, 응?”정루아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끝까지 맞서봤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