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기억이 생기기 시작한 무렵부터,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언니는 황후가 될 명운을 타고났으니, 세상의 모든 귀하고 좋은 것은 마땅히 언니의 몫이어야 한다고.
나는 무척이나 순종적이었다.
언니가 눈부신 비단옷을 두를 때, 나는 낡은 명주 적삼을 입었다.
당대 최고의 학자가 언니에게 시와 글을 가르칠 때, 나는 저택의 나이 든 어멈을 따라 조용히 글자를 익혔다.
시회에서 언니가 화려한 재기를 뽐낼 때, 나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것도 모른다고 답할 뿐이었다.
도성의 모든 이가 나를 피하고 꺼렸다.
언니처럼 총명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은 계집이라며 노골적으로 업신여겼다.
나는 단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훗날, 시간이 흘러 언니는 도성 제일의 재녀로 칭송받게 되었다.
반면 나는 여전히 구석에 처박힌 볼품없는 명문가의 여식에 불과했다.
궁중 연회를 하루 앞둔 저녁.
어머니가 사람을 시켜 초록색 긴 치마 한 벌을 보내왔다.
"둘째 아씨. 마님께서 전하라 하셨사옵니다. 큰아씨께서는 장차 태자비 마마가 되실 몸이니 연회에서 절대 큰아씨의 빛을 가려서는 아니 된다고 하시었사옵니다."
나는 늘 그랬듯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옷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에 모든 것을 알아낸 참이었다.
그 옛날, 늙은 도사가 예언했던 고씨 가문의 여식.
황후가 될 명운을 타고났다는 그 여식이 오직 언니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내게 언니의 빛을 가리지 말라 강요했다.
그렇다면 기어이 그 빛을 훔쳐 주리라.
누가 그러던가, 태자에게 시집가야만 황후가 될 명운을 이룰 수 있다고.
황제에게 시집가는 것 역시 그 명운을 이루는 길이었다.
"둘째 아씨, 마님께서 대청으로 드시라 하옵니다."
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어머니 곁을 모시는 계집종이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소인이 주제넘게 한마디 올리자면, 아씨께서는 지체 없이 가시는 편이 좋을 것이옵니다. 공연히 마님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내 몸종 소은이 욱하여 나서려는 찰나, 내가 한발 빨리 손을 들어 녀석을 제지했다.
"알았으니, 가서 말씀드리기나 하거라."
건방진 계집종을 슬쩍 올려다보며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한편, 소은의 눈시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터져나온 목소리에는 억누르지 못한 분노가 섞여 있었다.
"이제는 저택의 개나 소나 다 아씨를 업신여기옵니다! 아씨께서는 어찌하여 나리나 마님께 말씀드려 이 억울함을 풀지 않으시는 겝니까!"
나는 묵묵히 시선을 내리깐 채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나는 여전히 지나온 그 세월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곱 살 때, 고유진이 내가 가장 아끼던 헝겊 인형을 빼앗아 갔다.
울며 어머니께 일렀지만 내게 돌아온 건 사당에서 사흘 동안 무릎을 꿇으라는 벌이었다.
열두 살 때, 몰래 그림을 그리다 고유진에게 들켰다.
고유진은 내가 자신을 뛰어넘을 것이라며 울부짖었고, 아버지는 내 그림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보름 동안 사당에서 무릎을 꿇으라는 벌을 내리셨다.
열세 살 때, 연회에 가기 전 복숭아빛 옷을 골라 입었다.
고유진은 나를 비웃으며 춘정을 품었다고, 사내를 꼬시려는 천박한 짓이라고 조롱했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저 웃어넘기며 고유진의 성격이 솔직해서 그렇다며 감쌌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깨달았다.
내 운명은 오직 내 손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잠시 후, 찻잔을 비운 나는 헛기침을 하며 일어섰다.
"소은아, 가자."
"예, 아씨."
대청에 들어서자,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어머니의 낯빛이 보였다.
어머니는 부채를 팔랑이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일찌감치 사람을 보냈거늘, 이제야 행차하시다니 둘째의 몸가짐이 여간 귀하신 게 아니구나. 세 번 네 번 부르지 않으면 아예 발걸음조차 떼지 않을 작정이냐?"
나는 못 들은 척 넘겼다.
아직은 얼굴을 붉힐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어머니, 부르셨사옵니까. 무슨 연유로 찾으시었는지요."
"너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당부할 것이 있어서다. 내일 열리는 궁중 연회는 겉으로는 명문가 여식들의 꽃놀이라 칭하나, 실상은 태자비를 낙점하기 위한 자리란다."
어머니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 세월, 재주로나 품행으로나 유진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건 네가 더 잘 알 터. 더욱이 유진이는 황후가 될 명운까지 타고난 아이다. 애초에 네가 감히 견줄 상대가 아니지."
"제가 정녕 못난 것입니까, 아니면 어머니께서 보려 하지 않으신 겁니까."
나는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어머니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분통을 터뜨렸다.
"머리가 좀 굵어졌다고 제법 혀를 놀리는구나! 내 어릴 적부터 그리 단속했거늘, 사사건건 네 언니를 질투하고 물고 늘어지니 대체 어찌 가르쳐야 그 미련한 고집을 꺾겠느냐!"
"됐다! 긴말할 것 없다. 연회에서 행여라도 같잖은 수작을 부릴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그저 죽은 듯이 엎드려, 네 언니를 돋보이게 할 역할이나 충실히 해내란 말이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머니는 이내 누그러진 어조로 덧붙였다.
"이 어미도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네 언니가 태자비가 되어 훗날 중궁전의 주인이 되면 너를 위해 번듯한 혼처 하나쯤 못 잡아주겠느냐."
"허나 그것도 네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 때의 이야기다."
"그렇지 않다면... 연회를 앞두고 급작스레 몸져눕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지."
가슴속에서는 서늘한 비웃음이 일었지만, 나는 겉으로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지극히 평온한 목소리였다.
이윽고 나는 어머니를 빤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가 보거라."
다음 날.
나는 초록색 긴 치마를 입고, 자주색 진주 장식 치마를 차려입은 고유진의 뒤를 따랐다.
"어머니, 아무 염려 마시어요! 저와 태자 전하는 어릴 적부터 각별한 사이였사옵니다. 오늘의 연회는 그저 통과의례일 뿐이지요!"
오늘따라 기분이 한껏 들뜬 고유진은 화려한 치마를 펄럭이며 작은 새처럼 지저귀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심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아버지, 어머니. 만약 언니의 혼사가 엎어진다면... 그리고 황실에 시집가는 사람이 바로 저라면, 그때 두 분은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