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7화

작가: 봉숭아
방정맞으면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뒤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정민규는 물론 나상민과 더더욱 엮이기 싫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오더니 팔짱을 끼고 나를 대놓고 훑어보았고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소문과 아주 다른데? 찰거머리처럼 정민규한테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더니 아까는 누가 봐도 선을 긋기 급급한 모습이잖아.”

허리를 갑자기 숙인 탓에 숨결이 얼굴에 고스란히 닿았다.

“새로운 수법인가? 밀당하는 거야?”

낯선 사람의 접근이 어색한 나머지 나는 무의식중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커다란 손바닥이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뒤로 잡아당기자 익숙한 향기를 풍기는 품에 쏙 안겼다.

“저리 꺼져.”

정민규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고개를 번쩍 드는 순간 한일자로 꾹 닫힌 입술이 눈에 들어왔고 얼굴에는 짜증 난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왜 화가 난 거지?

하지만 품에 안기는 다정한 스킨십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거 놔.”

이내 품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나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정민규는 내가 도망갈 줄 몰랐는지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려던 찰나 진세라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민규야, 생수 한 병 사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그제야 나를 발견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고은성? 너도 있었어?”

나는 그녀를 흘긋 쳐다보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몰래 민규를 따라온 거야?”

진세라는 우리 둘을 번갈아 살피더니 정민규의 팔을 잡아당기며 천진난만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민규야, 이제 와서 스토킹 당한 거 따져봤자 뭐해? 시간도 늦었는데 여자 혼자서 밖에 돌아다니면 얼마나 위험한데.”

비아냥거리는 말에 반박하려고 했지만 나상민이 싸늘한 얼굴로 불쑥 끼어들었다.

“어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몰라?”

그는 평소에 착하고 다정해 보여도 실제로는 차갑고 야박한 사람이다. 예고도 없이 가면을 벗고 나니 어둡고 매정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마치 한가롭게 햇볕을 쬐고 있다가 갑자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먹잇감의 목을 물어뜯는 초원의 치타 같았다.

겁에 질린 진세라는 서둘러 정민규의 품에 파고들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민규야, 저 사람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정민규는 밀어내는 대신 껴안는 시늉을 했고 누가 봐도 그녀를 감싸주는 의미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사과해.”

그동안 진세라만 편애하는 모습을 줄곧 지켜봤지만 다시금 목격하자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밤 연회 때문에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는데 말이다.

속으로 뻔하면서도 진세라가 비꼬는 걸 묵인했다.

무의미한 전쟁에 연루되어 싸움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가끔은 싫어도 마주해야 할 상황이 오게 된다.

“왜 사과해야 하지? 대체 누구한테?”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민규를 바라보며 두 눈을 빤히 응시하고 도발에 가까운 말투로 되물었다.

정민규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은 느낌이 들었다.

이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뒤돌아서 떠나갔다.

한 번 편애하기 시작하면 평생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길가에 다다랐을 때 정민규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는데?”

나는 황당해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허락이 왜 필요해? 네가 뭔데?”

이제 더는 고분고분 따르고 싶지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고은성!”

정민규의 손아귀에 힘이 불끈 들어갔고 손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움켜쥐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정민규 씨, 당신 때문에 은성이가 아파하는 게 안 보여?”

나상민은 다가와서 정민규의 손가락을 풀더니 나를 등 뒤로 끌어당겨 앞을 가로막았다.

“꺼져.”

정민규는 손을 뻗어 나상민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이 뭔데 나한테 오라 가라야?”

나상민은 멱살을 잡은 정민규의 손을 움켜쥐고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은성한테 물어봐. 과연 꺼져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정민규의 시선이 나를 향했고, 고개를 들자 마치 폭풍전야를 연상케 하는 눈빛과 마주했다.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그만 가보겠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진세라가 뛰어와서 나상민의 손을 잡아당겼다.

“얼른 민규 놓지 못해? 이 손 놔!”

그러고 나서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고은성, 뭐라도 얘기해 봐. 두 사람이 싸우는 꼴 보고 싶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새빨갛게 부어오른 손목을 내려다보자 꾹꾹 참아왔던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했다.

“오늘 밤 처음부터 끝까지 너희들을 건드린 적이 없거든? 일이 있으면 알아서 처리하면 되지 괜히 남의 귀한 시간은 왜 낭비하는데?”

말을 마치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택시를 세우고 현장을 벗어났다.

...

택시에 올라탄 다음 나는 창문에 기대어 시시각각 변하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온몸이 녹초가 되었다.

과거로 환생하고 나니 예전만큼 욕심이 많지 않았다. 현재로서 전생에 상처를 줬던 사람과 선을 긋고 내 삶을 살아가는 게 제일 간절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민규, 진세라 그리고 전생에서 2년 뒤에 만나게 될 나상민과 계속 얽히고설키게 되었다.

나는 문득 전생의 운명을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칠까 봐 겁이 났다.

성지연이 픽업 왔을 때 컨디션은 이미 엉망이었다.

다행히 배려심이 깊은 그녀는 어두운 표정을 발견하자 아무것도 묻지 않고 푹 쉬라고만 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샤워하러 갔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어차피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든 맞이해야 하기 마련이다. 아직 발생하기도 전에 막연한 공포에 질려서 굴복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에 우울했던 마음이 그나마 조금 회복되었다.

앞으로 5일 뒤에 수능이 있는지라 모든 에너지를 대학 입시에 쏟아부어야만 했다.

전생에 그렇게 좋아하던 패션 디자인 전공을 공부하지 못해서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접었어야 했지만 이번 생에는 꼭 이루리라 다짐했다.

다음 날.

성지연과 문제 풀이에 여념이 없을 때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대충 얼버무리는 대답을 듣긴 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수학 문제 풀이법을 확인하려고 복습 노트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미처 찾기도 전에 성지연이 휴대폰을 들고 다가왔다.

입술을 꾹 닫고 자리에 앉아 한참이 지나서도 공부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나는 손에 든 시험지를 내려놓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묶으며 넌지시 물었다.

“누가 연락했는데? 왜 전화를 받고 멍때리고만 있어?”

성지연은 볼펜을 내려놓고 나를 향해 돌아앉았지만 말을 아꼈다.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터진 나머지 손을 뻗어 통통한 볼살을 꼬집으며 달래주었다.

“우거지상 하지 말고 얼른 얘기해 봐.”

“네가 말하라고 했다?”

성지연은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심호흡한 뒤 용기를 끌어내 입을 열었다.

“정민규가 연락이 왔는데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대.”
이 책을 계속 무료로 읽어보세요.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열여덟, 스물 다섯   제100화

    비록 지금 나에게 약을 썼고 내일 모든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고 욕을 먹게 하려고 작정했지만 나는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내가 도울게. 김씨 가문도 형편이 괜찮은 가문이야. 고 대표에게 있어 나쁜 선택이 아니야.”고개를 돌려보니 정민규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오늘 밤은 유난히 길었다.배가 부둣가에 멈춰서자 고민욱이 한 무리 사람들을 걸리고 뛰어왔다.그들은 정민규의 침실로 곧장 향했고 나는 멀리서부터 김다비의 가식적인 목소리를 들었다.“여보, 화내지 마. 아이가 이미 컸으니 말로 해.”곧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도련님, 우리 은성이는 깨끗한 아이인데 앞으로...”고민욱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나는 그의 뒤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물었다.“제가 왜요?”정민규도 올 블랙차림으로 나왔다.“고 대표님 방금 하신 말씀은 무슨 말이세요?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온 건 저한테 무슨 용건이 있어서죠?”“아빠와 아줌마는 혹시 은빈을 데리러 왔어요?”나는 아까 고민욱을 쌀쌀하게 대해던 태도와 달리 웃으며 말했다.“제가 안내할게요.”그런 후 그들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고은빈의 방으로 갔다.고민욱과 김다비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고은빈은 김씨 가문의 도련님과 부둥켜안고 있었고 바닥에는 속옷, 바지, 신발이 널브러졌다.안색이 변한 김다비는 재빨리 방문을 닫았다.“보지 마세요. 그만 봐요.”나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침착하게 말했다.“아빠, 아줌마, 화내지 마세요. 그리고...”나는 그들이 데려온 사람들을 둘러봤다.“함부로 말하며 내 동생의 명성을 어지럽히면 안 돼요. 저의 동생은 아직 18살이 되지 않았거든요.”‘퍽’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따귀를 맞았고 김다비는 씩씩거리며 나를 째려봤다.“고은성, 감히 은빈이를 해치다니!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김다비의 동작이 너무 빨랐다. 그녀가 나를 때리자 정민규는 즉시 나를 몸 뒤로 숨기며 말했다.“사모님, 감히 내 구

  • 열여덟, 스물 다섯   제99화

    정민규가 나를 그의 방으로 데려가자 나는 불편한 척 연기했고 그는 나를 침대에 눕혔다. 나는 두 손을 꼭 쥐고 그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다.설송향이 코끝에서 점점 더 짙게 맡아졌다.더듬거리며 침대 머리맡에 놓인 스탠드를 켜려고 할 때 정민규는 나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움직이지 마.”정민규의 두 눈은 마치 끝없는 심연처럼 아득했다.내가 노려보자 그는 고개를 돌려 나의 귓가에 뽀뽀했다.“고은빈이 밖에서 보고 있어.”이 말을 듣고 나는 저도 모르게 정민규를 쳐다봤다.“잠시만 참아.”나의 손을 잡고 있던 자세가 천천히 깍지를 끼는 자세로 변했고 그는 나의 목에 키스했다.“지난번에 고씨 가문에 프로젝트를 줄 때 그들은 내가 널 좋아하는 걸 알아버렸어. 최근에 정씨 가문에서 고급 요양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고민욱은 전화를 걸어 네가 할머니 건강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며 함께 놀러 가라고 했어.”정민규의 키스가 점점 더 많아져 나는 좀 견딜 수 없었다.어디서 생긴 힘인지 나는 그를 밀어내고 그의 몸에 올라탔다. 두 손으로 그의 몸을 받친 후 나는 머리카락이 흩어져 어깨로부터 가슴으로 미끄러졌다.정민규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보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의 반응을 즉시 알아차렸다.나는 순간 얼굴이 빨개졌고 그의 곁을 떠나려고 했으나 정민규는 손을 뻗어 나의 뒤통수를 잡고 다시 끌어당겼다.불빛이 번쩍이고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민규를 밀쳐버린 후 곧 그의 몸에서 내려와 째려봤다.“정민규, 너 양아치야?”정민규는 여전히 나 때문에 침대에 누운 자세를 유지하며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는데 눈 밑에는 욕망이 깔려있었다.나는 이런 그의 모습이 익숙했다.정민규는 침대를 떠나면 점잖은 선비 같았으나 침대에 오르기만 하면 용맹한 호랑이로 변신했고 내가 울면서 용서를 빌어야 그만둘 때가 많았다.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그의 눈을 피하려고 돌아누웠다.잠시 후 나는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 열여덟, 스물 다섯   제98화

    “와.”성지연은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은성아, 얘네들 너무 귀여워. 나 녹았어.”성지연의 영향을 받아 나의 마음도 홀가분해졌다.20분 후에 돌고래는 서서히 떠났지만 핑크 돌고래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성지연은 낙담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어쨌든 우리가 그들의 생활에 끼어든 것이기 때문이다.한정수가 다가와 그녀를 놀려주었는데 나는 이 두 사람이 어쩐지 수상해 보였다.눈치 있게 자리를 비워주려고 나는 테이블로 가서 주스를 쥐려고 했는데 이때 정민규가 내 팔을 잡았다.그는 나더러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으로 보라고 눈짓했다. 그 방향으로 보니 핑크색 돌고래가 수면에 나타났다.너무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는 나를 보고 정민규가 물었다.“예뻐?”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규는 나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이름도 있어.”나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정민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이름이 젤리야.”젤리. 나는 그때 2학년 때 그의 곁에 붙어 함께 점심을 먹던 일이 생각났다.그날 늦게 가다 보니 식당에는 음식이 다 팔리고 그저 간식인 젤리만 남았다. 간식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일부러 시간을 끄느라 젤리는 모양이 귀엽고 이름도 듣기 좋다고 말하며 나중에 애완동물을 키우면 이름을 젤리라고 짓자고 말했다.시간이 많이 흘러 나는 이미 잊어버렸지만 그는 나에게 이 핑크색 돌고래의 이름이 젤리라고 했다.만약 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기록이 있었다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크루즈가 귀항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저녁에 작은 파티를 열어 2025년을 맞이해야 한저녁 12시가 되니 나는 하품을 했다.고은빈은 우유 한 잔을 들고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우유 먹고 다시 자.”고은빈은 우유를 들고 어색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잠자기 전에 우유를 먹는 습관이 있었지만 사이가 별로인 고은성이 처음이 처음으로 우유를 건넸다.고은빈을 웃는 듯 마는듯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내가 널 관심한다고 생각하지 마. 아빠가 그러는데 너

  • 열여덟, 스물 다섯   제97화

    나는 재빨리 뒷걸음질 치며 손에 든 약을 몸 뒤로 숨겼다.내 반응이 너무 컸는지 정민규는 허공에 정지된 손을 미처 거두지도 못한 채 말했다.“손에서 피가 나.”내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때 성지연과 친구들이 돌아왔다.성지연의 손에는 작은 통이 들려있었는데 재빨리 내 곁으로 와서 보물처럼 나에게 보여줬다.“은성아, 내가 잡은 해파리를 봐. 저녁이면 빛을 낼 수 있다고 했어.”“정말이야?”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통에 담긴 반투명 해파리를 쳐다봤다.“그럼 어항을 찾아 해파리를 담가야지.”그러면서 나는 성지연을 방으로 끌고 가며 정민규를 바라보지 않았다.방에는 해파리를 키우는 데 적합한 공구가 없어 성지연은 한정수를 찾아가 투명한 유리 꽃병을 구해왔다.해파리를 꽃병에 넣은 후에야 나의 손등에 마른 핏자국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성지연은 나의 손을 잡아당기며 미간을 찌푸렸다.“은성아, 너의 손.”“괜찮아.”나는 방금 바늘을 뽑으며 피가 흐른 손등을 힐끗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테이블에서 티슈를 꺼내 닦았다.“아까 바늘을 뽑으며 피가 났어. 걱정하지 마.”“그럼 다행이야. 난 왠지 네가 바다로 놀라고 온 게 시련을 겪으러 온 것 같아. 먼저 안지선때문에 오른손이 다쳤고 그런 후 감기에 걸렸잖아. 넌 모르겠지만 그날 밤 열이 39도까지 올라갔거든.”성지연은 고개를 들어 머루 같은 두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난 놀라 미치는 줄 알았어. 정민규가 온밤 간호하며 물리적 방법으로 해열했고 다행히 넌 새벽이 되어서야 열이 내렸어.”그날 비를 맞은 후의 일에 대해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그저 내가 기절하기 바로 직전에 정민규가 돌아왔다는 것만 알고 있었고 빗속에서 성큼성큼 내 곁으로 걸어온 모습만 기억에 남았다.“그래?”“응. 은성아...”고개를 끄덕이다가 성지연은 잠시 머뭇거렸다.“난 왠지 정민규가 변한 것 같아. 너에게 신경 쓰는 것 같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바다로 나가는 것은 정민규

  • 열여덟, 스물 다섯   제96화

    ...나는 화로 위에 올려져 구워지고 있는 것처럼 더워 피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었다.악몽을 연달아 꾸며 나는 환생 전 정민규가 진세라 전화를 받고 가차 없이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다가 꿈속에서 나는 정민규와 룸에 있었는데 그는 차가운 얼굴로 나에게 진세라를 놓아달라고 말했다.마지막 우리 둘이 관계를 맺은 후 그가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장면이 나타났다.“고은성, 너 정말 징그러워.”“아니... 내가 아니야...”나는 눈을 번쩍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태양이 해수면을 비추며 굴절되어 물결무늬가 나타났다.“깨어났어?”정민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서 울리기 시작했고 나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그의 얼굴에 검푸른 수염이 새로 자라나 피곤해 보였다. 얼마나 잤는지 몰라 나는 핸드폰을 찾으려고 손을 뻗다가 움직이자마자 정민규에게 잡혔다.“움직이지 마. 링거를 맞고 있어.”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뒤늦게야 창가에 링거 주머니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나 얼마나 잤어?”입을 열었지만 나는 거의 소리를 낼 수 없었고 목은 칼날을 문 것처럼 아팠다.정민규는 나를 일으키며 물을 한 컵 먹여줬다.“종일 잤어. 그리고 종일 열이 났어.”나는 물 두 모금을 마시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아직도 바다에 있어?”“응.”정민규는 대신 이불을 덮어주며 물었다.“배고파? 먹을 것 좀 가져다줄게.”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규는 몸을 돌려 나갔다.정민규가 떠난 후 나는 일어서서 침대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을 켜고 성지연에게 문자를 보내 고은빈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성지연은 고은빈이 밖에서 젊은 청년 남자와 놀고 있다고 말했다.답장을 보낸 후 전화가 걸려왔는데 성지연의 목소리는 유난히 즐거워 보였다.“은성아, 깨어났어? 정민규는 참 나쁜 거 있지? 내가 시끄럽다고 방에서 널 돌보지도 못하게 했어. 난 그 자식 마음을 알아버렸어! 무조건 널 독차지하려고 했던 게 틀림없어.”“며칠 동안 정민규가

  • 열여덟, 스물 다섯   제95화

    이튿날 나는 성지연이 깨워서야 겨우 일어났다.그녀는 나를 이불속에서 끄집어냈다.“은성아, 우린 스노클링을 하러 갈 건데 너도 갈래?”“안 가.”아직도 졸렸던 나는 다친 손을 꺼내 보였다.“선생님이 물을 다치면 안 된다고 말했어.”내가 일깨워줘서야 그제야 기억이 난 듯 성지연은 나를 깨우지 않고 몇 마디 당부한 후 떠나갔다.그 후 5분도 아니 되어 잠이 싹 사라진 나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침대에서 일어났다.세수를 다 한 나는 갈아입을 옷을 찾아보려고 캐리어를 열었다.캐리어 안에는 치마뿐이다. 나는 하얀색 원피를 꺼냈는데 펼쳐보니 치마 길이가 겨우 허벅지까지 온다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또 파란색을 꺼냈는데 이 치마는 아까보다 길이가 조금 더 길지만 등과 허리에는 큰 구멍이 뚫려있었다.캐리어에서 나는 겨우 검은색 브이넥 허리를 꽉 조이는 원피를 억지로 골라 입은 후방에서 나왔다.어젯밤에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아서 배가 고팠던 나는 먹을 것을 찾으려고 주방으로 갔다.방에서 나왔는데 밖에 아무도 없었다. 어젯밤에 바닷바람을 맞아서인지 나는 머리가 아팠다.배가 너무 조용해서 나는 그들이 모두 잠수하러 간 줄 알았다. 주방의 회전계단에 도착했을 무렵 고은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았어요. 재촉하지 마세요!”나는 걸음을 멈추고 계단 모퉁이 자리에 섰다.고은빈의 화가 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제가 아직 기회를 찾지 못했잖아요, 내가 기회를 찾아야 고은성에게 약을 먹일 수 있어요! 급하시면 직접 하지 그래요?”‘약을 먹인다고?’나는 난간을 꽉 잡았다.‘그래서 이번에 고민욱이 할머니를 이용해 나더러 조운시에 돌아오게 한 것은 약을 먹여 정민규와 관계를 맺으라는 건가? 그래서 고씨 가문을 등에 업고 싶었던 거야?’어쩐지 고우빈이 사람들과 친하지 않고 거의 무시 당하면서 배에 탔더라니.어쩐지 나에게 속셈이 훤히 보이는 이상한 치마들을 준비했더라니.나는 몸을 돌려 고은빈에게 들키기 전에 먼저 떠났다.심장은 바위에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책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책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