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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作者: 봉숭아
정민규가 날 찾으러 성지연 집 앞에 와 있다니?

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싫어하는 사람을 제 발로 찾아올 리 있겠는가?

심지어 무일푼으로 외박까지 했는데 정작 친아빠라는 인간은 연락조차 없는데 말이다.

아마도 진세라 대신 사과를 받아내려고 찾아왔을 가능성이 컸다.

어젯밤 그녀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볼펜과 시험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날 찾아왔다고 해서 만나줘야 한다는 법이 있어? 기다리다 지치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방학 전 모의고사에서 내가 예상했던 점수보다 2점이 낮았는데 수능에서 2점 차이면 등수가 얼마나 많이 떨어지는지 모른다. 그런데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문제 풀이에 집중했지만 오히려 성지연이 안절부절못했다.

나를 몰래 훔쳐보더니 일어나서 물 마시거나 화장실에 들락거리기도 했다.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재빨리 껐는데 결국 참다못해 볼펜과 종이를 단번에 빼앗아 갔다.

“고은성! 문제 그만 풀고 솔직한 심정 얘기해줄래?”

몇 시간 동안 시험지만 들여다봤더니 눈이 뻑뻑할 지경이다. 마침 볼펜과 종이를 가져간 바람에 겸사겸사 한숨 돌리기로 했다.

“뭘?”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여전히 건조하게 느껴졌다.

“정민규 말이야.”

성지연은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돌리더니 억지로 마주 보게 했다.

“진짜 포기할 거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없으면 못 살았을 정도였잖아.”

그녀가 한 말을 속으로 되뇌는 순간 가슴이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정민규밖에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상처받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일지언정 놓아주기 마련이다.

이미 목숨까지 건 사랑을 해봤기에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진짜 너무 힘들었다.

다시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무력감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갑자기 현실을 자각한 거지.”

나는 성지연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얼마 전에 미친 듯이 아이돌만 쫓아다녔던 너처럼, 어느 순간부터 관심이 뚝 떨어졌잖아?”

성지연이 반박했다.

“그건 내가 더 중요한 일을 찾았기 때문이지.”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성지연의 귓가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난 패션 디자인에 관심이 많거든. 여자들이 자기한테 딱 맞는 옷을 입는 순간 자신감이 넘치고 긍정적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어. 그리고 힘든 사람이 있으면 능력이 되는 선에서 도와주고 싶어. 남자친구는...”

이내 멈칫하며 말을 이어갔다.

“감정 소모가 너무 심해서 지금은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래.”

그러자 성지연이 와락 껴안더니 안쓰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그래! 남은 인생을 원 없이 즐기길 바랄게.”

“알았어.”

나는 웃으면서 성지연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다시 문제 풀이를 시작하자고 말하려는 순간 도우미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 친구분께서 담을 넘고 있어요!”

“네?”

성지연은 나를 놓아주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밖을 내다보았다.

“정민규가 우리 집 담을 넘는다고요?”

“네네.”

그리고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더니 벌떡 일어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은성아,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쫓아내고 올게.”

“내가 갈게.”

이내 성지연을 붙잡고 창밖을 흘긋 쳐다보았다. 흰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부슬비를 맞으며 담장에 잽싸게 올라섰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상대방도 나를 발견한 듯 시선이 정통으로 부딪혔다.

정민규와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여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지만 성지연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골치 아팠다.

“정민규한테 금방 나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전해주세요.”

도우미에게 부탁하고 나서 우산까지 챙긴 다음 미적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가 투명한 우산 위에 사뿐히 내려앉더니 금세 물방울로 변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길가의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정민규는 온몸으로 싸늘한 냉기를 뿜어냈다.

발걸음을 우뚝 멈추는 순간 마침 고개를 돌린 정민규와 눈이 딱 마주쳤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는 그의 이미지에 걸맞았고 무심하면서 왠지 모르게 초조함도 묻어났다.

성지연에게 전화한 지 고작 20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인내심이 바닥 나서 짜증 났단 말인가?

나는 눈썹을 치켜뜨며 실소를 터뜨렸다.

“고은성, 대단한데?”

허스키한 목소리는 비음이 살짝 섞여 있었다.

이내 손목을 만지작거리자 아까만 해도 실내에서 따뜻했던 손이 금세 싸늘해졌다.

날씨가 꽤 쌀쌀했다. 예전 같았으면 행여나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냐는 걱정부터 했을 텐데, 지금은 오로지 내가 아프면 병원비를 청구해야 하나 고민했을 뿐이다.

“뭐가 대단한데?”

이내 우산을 들고 다가가 1m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고개를 살짝 젖혀 올려다보았다.

“전화했을 때 바로 만나러 나오지 않아서? 아니면 우산 쓰고 비를 맞는 널 지켜보고만 있어서?”

말을 이어갈수록 정민규의 안색이 실시간으로 어두워졌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날 화나게 하는 것도, 갑자기 싫다고 학을 떼는 것도, 나상민과 치근덕거리는 것도 다 계획이었어? 그렇게 하면 내가 질투하고 당황할 거로 생각해? 다음 플랜은 뭔데?”

정민규는 쏘아붙이는 와중에 한 발짝씩 다가왔고, 어느새 우산 밑으로 들어왔다.

“아직 무슨 꿍꿍이가 더 남아 있는 거지?”

그를 만나러 오기 전까지 대체 나를 왜 찾아왔는지 도무지 짐작이 안 갔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정민규는 내가 했던 모든 일이 단지 밀당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즉, 심술을 부린다고 여겼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잠시 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 제 주제도 모르는 거야?”

그리고 뒤로 물러서자 정민규는 다시 우산 밖으로 나왔다. 가랑비는 잘생긴 눈썹을 타고 턱까지 흘러내렸고 금세 흰색 티셔츠를 적셨다.

“아니면 문해력이 신의 경지에 이르러 일반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건가? 말하는 족족 거꾸로 해석하는 능력이라도 생긴 거야? 그러다 수능에 빵점이라도 맞으면 어떡하려고?”

비아냥거리는 나를 보자 정민규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고은성!”

“왜!”

나는 눈살을 찌푸렸고 짜증이 슬슬 밀려왔다.

“목소리 낮춰서 살살 얘기해도 들리거든? 귀 안 먹었어.”

정민규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고 이마의 핏줄이 울끈불끈했다. 그러고 나서 연신 심호흡하더니 어금니를 악물고 말했다.

“나상민과 왕래하지 마.”

“네가 뭔데?”

이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친구를 사귀는 건 내 맘인데 무슨 자격으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지?”

“안 된다고 했지?”

정민규의 표정에 짜증이 가득했다.

“네 말을 들어야 할 이유라도 있어?”

그리고 손을 뻗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고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진세라의 가식적인 모습을 똑같이 따라 했다.

“내 남자친구라도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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