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송남지는 질색하며 단호하게 거절했다.“난 그런 취향 아니니까 마음만 받을게요.”민지현은 선물 받은 가방을 애지중지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관장님이 이렇게 통 크게 나오시니 저도 더 이상 아껴둘 수 없겠네요.”그러면서 민지현은 명함 한 장을 꺼내 놓았다.“원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숨겨둔 마지막 카드였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아요.”송남지는 민지현이 건넨 명함을 받아 들었다.명함에 적힌 이름은 송남지도 익히 들어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서경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물로 그 자산을 가늠하기조차 힘든 대단한 재력가였다. 서경에서 돈이 된다 싶은 사업에는 모두 그의 지분이 섞여 있었다.“천남현...”송남지는 그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전에 천남현이 애타게 찾던 해외 작품을 수소문해서 구해준 적이 있거든요. 그때 받은 거예요.”민지현이 말했다.이런 급의 인사들은 명함을 아무에게나 뿌리지 않는다.그들에게 명함이란 일종의 보답이자,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주겠다는 무언의 약속과도 같았기 때문이다.송남지는 명함을 손에 꽉 쥐고 민지현을 벅차게 껴안았다.“지현 씨 고마워요!”포옹을 푼 송남지는 지체 없이 소지품과 차 키를 챙겨 외출 준비를 했다.민지현의 얼굴에 약간의 우쭐함이 비쳤다.“역시 결정적인 순간엔 제가 도움이 되죠?”“도움이라니요. 완전 구세주인데요!”송남지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차 키를 쥐고 문으로 향했다.거침없는 행동파다웠다.사무실을 나서자마자 다른 부서에 와 있던 방송국 관계자가 눈에 띄었다.‘강 총괄? 갑자기 여기까진 웬일이지?’강태건은 송남지를 보자마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다급히 달려와 물었다.“관장님, 박재용 씨와 연락이 닿질 않아요!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그 친구 때문에 프로그램이 펑크 나게 생겼는데. 지금 박재용 씨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인데 불만이 있다면 얼마든지 협의할 용의가 있으니 제발 잠적 같은 건 하지 말아 달라고 전해주세요!”연휴 동안 송남지는 잠시 박재용의 존재를 잊고
송남지는 민지현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하정훈과의 일을 주변 사람들이 다 알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송남지는 그저 민지현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민 실장님, 성은 그룹 투자는 기대하지 말아요. 분명히 말해두는데, 재스민이 거기서 투자를 받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민지현도 바보가 아니었다.송남지의 단호한 태도에서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생겼음을 직감했다.재스민이 성은 그룹의 투자를 받을 수 없다는 건, 곧 하정훈과의 관계에 금이 갔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천억이라는 투자금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이지만, 경기가 좋지 않은 요즘 천억이라는 현금을 선뜻 내놓을 투자자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민지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미간을 찌푸린 채 해결책을 고민했다.송남지는 그런 민지현을 보며 살짝 웃었다.“난 실장님이 하정훈이랑 무슨 일 있냐고 캐묻거나, 그래도 성은 그룹만 한 곳이 없다고 설득할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민지현은 한숨을 쉬며 송남지를 마주 보았다.“같은 여자끼리 그런 걸 꼭 말로 해야 아나요? 성은 그룹이 투자를 포기한다는 말 한마디에 이미 답은 나온 거죠. 시댁에 돈 부탁하는 건 진짜 마지막 자존심까지 다 긁어서 내미는 건데 나중에라도 무슨 일 생기면 그쪽에서 얼마나 유세를 떨겠어요. 남지 씨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송남지는 묘한 감동을 느꼈다.다만 민지현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시댁에 아쉬운 소리 하기 싫은 게 아니라, 이제 곧 시댁이라는 말조차 쓸 수 없는 사이가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민지현은 계속해서 송남지를 위로했다.“세상에 돈 많은 사람이 하정훈 하나뿐인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재스민은 충분히 매력적이에요. 서경 미대 출신인 관장님에 실력파 작가까지 있는데 우리한테 투자하는 건 똑똑한 투자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다만 목표 금액이 천억이나 되다 보니 시간이 좀 빠듯할 뿐이에요.”수억 정도면 몰라도 천억을 한꺼번에 모으는 건 확실히 난제였다.“비서 시켜서 일단 명단부터
기사가 사정하는 모습에 송남지는 차마 모질게 굴지 못했다.이 차를 곁에 두고 볼 때마다 가슴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것과 무고한 사람의 생계를 끊는 것 사이에서, 송남지는 결국 전자를 택했다.송남지는 차 키를 꽉 쥐며 마음속의 불편함을 억지로 삼켰다.“알았어요, 차는 제가 받을 테니 그만 가보세요.”기사는 구원이라도 받은 듯한 표정으로 연신 머리를 숙였다.“감사합니다, 사모님! 정말 감사합니다!”송남지는 입술을 달싹였다.더는 사모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말하려 했지만, 결국 말이 나오지 않았다.멀어지는 기사의 뒷모습을 보며 송남지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제 와서 강조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어차피 머지않아 하정훈이 그 새 연인을 데려오면 그녀가 더 이상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는 건 온 세상이 알게 될 테니까.그녀는 재스민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 심호흡을 하며 평정심을 되찾았다.공과 사는 엄격히 구분해야 했다.송남지는 미소지으며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서며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에게 밝게 인사했다.“다들 고생 많으세요, 조만간 보너스 하나씩 챙겨드릴게요!”“송 관장님, 감사합니다.”아주머니들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별말씀을요.”송남지는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연휴가 끝나면 늘 골치 아픈 일들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은지영과의 투자 조건부 계약이었다.하지만 민지현은 이 일이 얼마나 큰 폭풍이 될지 모른 채 기대에 차 있었다.“관장님, 성은 그룹에서 투자금 천억은 언제 들어오나요? 이렇게 큰 투자를 받고 계약까지 따냈으니, 올해 우리 재스민 사업 계획도 완전히 달라지겠는데요?”송남지는 차분하게 자리에 앉았다. 완전히 자리를 잡고 앉자 그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엄숙해졌다.민지현은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송남지의 기분을 거슬리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평소 송남지는 재스민이 성은 그룹과 엮여 거론되는 것을 몹시 싫어했기 때문이다.민지현은 얼른 말을 바꾸었다. “그러니까 제 말
송남지는 돌아서며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냈다.평소 격조를 중시하던 오가은이 이토록 무너진 음성으로 자신을 부를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아주머니, 아직 하실 말씀이 남았나요?”오가은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이 서렸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수만 가지 감정이 만감을 교차하게 했다.“날이 차구나, 기사더러 데려다주라고 하마.”하지만 결국 그녀가 어렵사리 내뱉은 말은 이것뿐이었다.송남지는 거절하지 않았다.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본채 밖 차고로 향했다.차고에는 하정훈이 아끼던 차들이 여느 때처럼 즐비하게 서 있었다.송남지가 도착하자 기사가 곧 뒤따라왔는데 그가 몰고 온 차는 다름 아닌 하정훈이 그녀에게 선물했던 차였다.송남지는 순간 거부감을 느꼈지만 이내 오늘 이 집을 나가면 하씨 가문과는 남남이라는 생각에 굳이 차 종류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씁쓸하게 웃으며 기사가 열어준 차 문 안으로 힘없이 몸을 실었다.기사가 짐을 싣고 운전석에 올라타자 차는 미끄러지듯 출발했다.하씨 저택에서 재스민으로 향하는 이 길을 송남지는 수없이 오갔지만 오늘 느끼는 심경은 그 어느 때와도 달랐다.무겁게 가라앉은 정적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나직하게 음악을 청했고 흘러나오는 잔잔한 선율에 몸을 맡긴 채 송남지는 깊은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녀의 머릿속은 현재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사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고 단호하게 이혼을 결정한 것이 그저 홧김에 저지른 일은 아닐까 자문해 보기도 했지만 한참을 고민해 봐도 단순히 감정에 휩쓸려 내린 결론은 아니었다.하정훈이 변심했다면, 떠나는 것이 그녀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체면이었다.정월 초여드레, 서경의 모든 직장이 업무에 복귀하고 귀경객들이 몰리면서 도로가 정체되기 시작했다.평소라면 30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가 오늘은 한 시간 가까이 걸리고 있었다.그때 민지현에게서 재촉하는 메시지가 도착했다.[관장님, 올해 첫 회의인데 늦으시면 곤란해요.]시간을 보니 회의까진
금전적인 보상이라...송남지는 눈썹을 모으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어쩌면 이 비참한 결혼 생활의 대가로 거액을 요구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하지만 그녀는 태생부터 계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요즘 시대에 이런 태도가 바보처럼 보일지라도, 송남지는 사랑과 돈을 하나로 묶어버리면 이 세상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남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송남지는 오가은이 내민 마지막 손길을 뿌리쳤다.대신 상대방이 미안해하고 있을 때가 부탁을 들어주기 가장 좋은 때라는 걸 알았기에 딱 한 가지만 요청했다.“금전적인 보상은 필요 없어요. 대신 제게 주셨던 재스민만큼은 계속 제가 운영하게 해주세요.”오가은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남지야, 그건 당연하지. 한 번 준 걸 다시 뺏을 리 있겠니. 나중에 재스민을 운영하다 힘들면 언제라도 연락해라.”송남지는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아무리 재스민이 위태로워져도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은 없을 터였다.송남지는 하씨 가문에서 지내며 사용하던 물건들을 단출하게 정리했다.엄밀히 따지면 그녀의 몫이라 할 수 있는 물건은 꽤 많았으나 대부분 하정훈이나 시부모님이 사준 사치품들이라 본래도 잘 쓰지 않았고 이제 와 챙길 이유도 없었다.오가은은 짐을 싸는 송남지의 곁을 묵묵히 지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24인치 캐리어가 가득 차자 송남지의 가슴엔 형언할 수 없는 씁쓸함이 차올랐다.평생을 평온하게 함께 걷는 연인이란 참으로 드문 법인가 보다.대개의 인연은 시작은 아름다우나 끝은 이토록 허무한 것을.송남지는 나쁜 결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급격한 변화는 감당하기 벅찼다.얼마 전 맨성에서 세상 누구보다 달콤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말이다.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버티겠노라 다짐했건만 발치에 놓인 검은 캐리어는 그녀를 비웃는 농담처럼 느껴졌다.정원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마저 그녀를 바보라고 놀리는 것만 같았다.그 순간 송남지는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지만 캐리어
송남지의 피곤한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고 간밤의 고민이 그녀의 모든 기력을 송두리째 앗아간 듯했다.아침 식탁 앞, 이미란은 여느 때처럼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하종현은 차를 마시며 경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다만 오가은만이 우아하게 꽃을 만지던 평소와 달리 초조한 기색으로 나선형 계단 쪽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무언가 초조하게 기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잠시 후, 검은색 오피스 룩을 차려입은 송남지가 나선형 계단을 내려오며 모습을 드러냈다.오늘 아침 하씨 저택 사람들은 각자 복잡한 심경을 품고 있었다.오직 식사 준비를 돕던 이미란만이 아무것도 모른 채 밝은 모습이었다.이미란은 송남지를 반갑게 맞이하며 말했다.“작은 사모님, 오늘 주방에서 서경의 전통 고기 찐빵을 만들었어요. 분명 입맛에 맞으실 거예요!”이미란은 말을 마치고 따뜻한 두유를 정성껏 따랐다.송남지는 식탁 옆에 섰지만 서둘러 자리에 앉지 않았다.그 사소한 움직임에 이미란은 뒤늦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송남지와 오가은을 번갈아 살피던 이미란은 두 사람 사이의 냉기류를 눈치채고는 재빨리 물러나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러고는 다른 고용인들에게 당분간 식당 근처에 나타나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오가은의 얼굴에서 태연함이 점차 사라져 가자 송남지는 그제야 천천히 입을 뗐다.“어머니, 죄송해요. 실은 어젯밤 어머니와 정훈 씨가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저한테 숨기려 하셨던 일들 대충은 다 알게 됐고요.”오가은은 처음엔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안타까운 듯 말했다.“남지야, 난 진심으로 널 좋아해. 나는...”송남지가 손을 살짝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어머니, 정훈 씨와 정식으로 이혼하기 전까지는 어머니라고 부를게요. 정말 저를 아끼셨다면 제가 광대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이리저리 휘둘리게 내버려 두지는 않으셨을 거예요. 정말 저를 좋아하셨다면, 정훈 씨가 그런 일을 벌이기 전에 따끔하게 혼내주셨겠죠.”송남지는 사실 오가은을 탓하고 싶은 마
송남지가 정신을 차렸을 때, 하정훈은 이미 옷을 갈아입은 후였다. 오늘은 주말이었다.그는 평소보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캐주얼한 홈웨어를 입고 있었다.하지만 그 특유의 고고한 분위기는 어떤 옷을 입어도 감출 수 없었다. 하정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드레스룸 문밖으로 향했다.하지만 송남지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어색함을 느꼈다.목에 남은 자국이 너무나도 선명했기 때문이다.“파운데이션으로 가릴까요?”하정훈은 웃었다. 그는 송남지의 사고방식이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왜 그녀의 목에 흔적을 남겼는지 묻는
하정훈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채유리가 날뛰는 모습을 힐끗 쳐다보다가 얇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찾지 마. 지금 아프리카 초원에서 동물 떼 이동하는 거 보고 있을 거야.”채유리는 어안이 벙벙해 멈춰 섰다.“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여행 가셨다고요?”‘그럼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지? 안 돼!’채유리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냈다.“송남지가 저렇게 안하무인인 이유가 있었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안 계시니 더 알려드려야겠어!”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문득 송남지는 초등학교 시절, 반에서 틈만 나면 선생님께 달려가 고자질하던
양서진도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긴 머리에 남자다운 구석은 하나도 없는, 갓 대학을 졸업한 싱그러운 여대생의 모습인데 어떻게 남자일 수 있단 말인가?“곽 변호사님이 농담하신 거겠죠?”송남지는 미간을 좁혔다.‘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장난을 친 걸까?’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봉사 활동을 하러 왔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약속 시간도 훌쩍 넘었으니 어서 빨리 일에 집중해야 한다.“난 어느 벽을 맡으면 돼?”양서진은 송남지가 이렇게 빨리 일에 몰두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역
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하정훈은 차를 주차한 후 송남지의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몸을 숙여 다가올 때 송남지는 그의 몸에서 나는 우드향을 아주 선명하게 맡을 수 있었다.그녀는 하정훈 생일 때 최미경의 부탁을 받아 하정훈에게 향수를 선물했던 것을 기억했다.하지만 그날 이후로 하정훈이 그 향수를 쓰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정훈 씨 생일날, 내가 선물했던 향수 다시 뿌리는 걸 못 봤네요.”송남지는 잠시 머뭇거렸다가, 혹시 이 말이 상대를 탓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걱정했다.그래서 이어서 변명하듯 말했다.“제 마음을 담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