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라오네트 창립 30주년 송년회. 정찬영 회장은 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선언한다. “하나뿐인 내 딸의 남자를… 이 자리에서 찾겠다.” 그날 이후, 회사 전체는 ‘회장의 딸’이 누구인지 찾기 위한 조용한 전쟁에 빠져든다. 그리고 그들 몰래, 정 회장의 딸 정민영은 까만 뿔테 안경 너머로 세상을 또렷하게 바라보며 법무팀에 신입으로 들어와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평생 공부만 해온 그녀 앞에 세 남자가 서서히 다가온다. 말 한마디 없는 경호팀의 남자 최강 분석으로 사랑을 이해하려는 남자 강산 질투를 감춘 채 속삭이는 그림자 유나연 입술이 스칠 듯 가까워지는 순간마다 민영의 마음은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밤, 그녀의 입술이 머무는 곳에서 사랑도, 회사의 운명도 함께 뒤흔들린다.
View More겨울 밤 공기는 유난히도 얇았다.
호텔 현관을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코끝을 한 번씩 훔치며 목도리를 풀었다.
라오네트 창립 30주년이자 2025년의 마지막을 보내는 송년회.
호텔 최상층 그랜드 볼룸은 이미 온기가 꽉 차 있었다.
하얀 테이블보 위에 정갈하게 놓인 와인 잔들,
한쪽 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샴페인 타워,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지는 샹들리에의 금빛 조명들.
직원들은 이름표가 달린 가슴을 조금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며 자리를 나눠 앉았다.
어느 쪽 테이블은 벌써 와인병이 반 이상 비어 있었고, 어느 쪽은 아직 물만 마시며 상석을 힐끔거렸다.
“와, 진짜 장난 아니다. 역시 1위 기업 클라스.”
“야, 조용히 해. 임원 테이블 다 들리겠다.”
웃음 섞인 속삭임들이 이리저리 스쳤다.
잔이 부딪히는 가벼운 소리,
싱그러운 과일 향이 섞인 샴페인의 향기가 공기 위로 번졌다.
무대 앞, 가장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는 라오네트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이름,
정찬영이 앉아 있었다.
그는 검은 턱시도 위에 조금 큰 듯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한때는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처럼 강렬하던 눈빛은 이젠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게 되는 묘한 기운을 느꼈다.
“회장님, 오늘 컨디션은 어떠십니까?”
옆자리에 앉은 부회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정찬영은 잠시 잔을 굽어보다가, 입꼬리를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올렸다.
“이 정도면… 뭐, 아직 건배 제안쯤은 할 수 있지.”
농담처럼 흘린 말이었지만, 부회장은 그 웃음 뒤에 숨어 있는 피로를 놓치지 못했다.
그의 손등 위로 혈관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턱 라인이 전보다 더 가늘어 보이는 것도.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수백 명의 직원들 가운데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다.
올 한 해 실적은 얼마나 잘 나왔는가.
내년 승진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을까.
회장 연설은 얼마나 길까, 그리고 식사는 언제 시작될까.
볼룸 한 켠, 스피커에서 잔잔한 재즈가 흐르고 있었다.
사회자를 맡은 진행 요원이 마이크를 잡자 조명은 자연스레 무대 쪽으로 집중되었다.
“네, 모두 자리로 앉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라오네트 창립 30주년 송년의 밤,
메인 순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웅성임이 조금씩 잦아들고, 중간중간 남아 있던 웃음들이 서서히 입속으로 숨었다.
“먼저, 오늘의 주인공이신 분을 모셔야겠죠.
라오네트의 창립자이자, 우리 모두의 회장님.
정.찬.영. 회장님을 모시겠습니다!”
박수 소리가 폭발하듯 터졌다.
테이블마다 일어나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짧은 영상을 찍는 사람들,
눈빛이 살짝 반짝이는 임원들.
정 회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팡이는 짚지 않았다.
자리에 놓인 잔만 한 번 쥐어보았다가, 그대로 내려놓고 빈 손으로 무대를 향해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명이 그의 발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무대 위에 올라선 그는 우선 마이크 옆에 놓인 물컵을 한 모금 들이켰다.
사람들이 숨을 고르는 시간이기도 했다.
“올해도… 수고 많았네들.”
첫마디는 거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볼룸의 공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지난 30년 동안,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나 혼자 잘나서가 아니야.”
잔잔한 웃음이 터졌다. 그 특유의 말투였다.
자기 자랑이라기보다는, 조금 멋쩍어하면서도 당당한.
“동대문 쪽, 습기 찬 반지하에서 시작했지. 옷걸이 열 개, 내 디자인 열 벌.
비 맞은 옷들 말리려고 밤새 드라이기로 쏘이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이 호텔 샹들리에 아래서 여러분하고 이렇게 잔을 들고 있다는 게, 내게는 아직도 좀, 꿈 같은 일이야.”
몇몇 오래된 직원들의 눈빛이 순간 젖었다.
그때를 함께 겪은 사람들에게는 ‘반지하’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 왔다.
정 회장은 한 번 웃고, 시선을 천천히 객석으로 훑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그를 바라보는 수백 쌍의 눈동자.
그 안에는 기대, 긴장, 계산, 존경,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라오네트는… 이제 내가 혼자 만들고 이끄는 회사가 아니지.
여기 있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끌어온 회사야. 그래서 올해도, 진심으로 고맙다.”
박수 소리가 다시 한 번 퍼졌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었다.
잠시, 박수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그는 왼손으로 마이크 스탠드를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아주, 짧지 않은 숨을 들이켰다.
무대 가장 앞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미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숨은, 평소보다 조금 길다.
그러나 그건 오늘, 그가 마음속에 숨겨온 말을 꺼내기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오늘은… 예년과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해.”
잔이 테이블 위에서 살짝 흔들렸다.
직원들의 자세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몇몇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몇몇은 눈썹을 올린 채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정찬영은 입술에 짧은 미소를 올렸다.
그러나 그 미소 끝에는 묵직한 무엇인가가 매달려 있는 듯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제안 하나 하도록 하지.”
볼룸 안의 소리가 한순간 가늘어졌다.
재즈 음악조차도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말끝을 길게 늘이지 않았다.
마치 오래 전부터 이 말을 되뇌어온 사람처럼,
준비된 듯 자연스럽게 다음 문장을 꺼냈다.
“하나뿐인 내 딸의 남자가 되어, 그리고 훗날 라오네트를 이끌어 갈 사람으로… 스스로를 시험해볼 생각 없는가.”
찰나의 정적.
누군가의 숨 들이키는 소리가 가까운 테이블 어딘가에서 또렷하게 들렸다.
“……예?”
누군가 낮게 내뱉은 말이 중얼거림처럼 번졌다.
그 다음은 순식간이었다.
“딸의, 남자?”
“회장님 따님이… 우리 회사에 있다고?”
“지금 농담 아니지?”
“야, 장난치지 마. 이거 진짜면 인생역전인데?”
연회장의 공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긴장된 웃음이, 다른 쪽에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문을 나서자 아침 공기가 생각보다 차분하게 민영의 뺨을 스쳤다.차가운 듯하면서도 밀어내지 않는 온도.그 감각이 어제의 밤과 이상하리만큼 닮아 있었다.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민영은 발걸음을 일부러 재촉하지 않았다.늦을 이유도,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는 상태라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하루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다는 확신은 이렇게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영향을 미쳤다.회사 건물 앞에 다다랐을 때, 민영은 유리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눈빛은 고요했고, 표정은 담담했다.그런데도 어딘가 빈자리가 없는 얼굴.어제까지는 늘 한 칸쯤 비워 두었던 마음의 자리가 오늘은 이미 채워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민영은 문득 어제 나눈 말들을 되짚어 보았다.확답, 하지만 고백은 아니었던 말들.그 애매함이 왜 이렇게 편안한지 조금 이상했다.보통은 불안이 따라붙어야 할 텐데지금의 민영에게 그 애매함은 기다림이 아니라 과정처럼 느껴졌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몇 명 내려왔다.그 틈 사이로 민영은 자연스럽게 그를 발견했다.최강은 이미 안쪽에 서 있었고,민영을 보자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인사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동작.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마치 이미 이야기가 끝난 뒤의 정적처럼 안정적이었다.“어제”민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을 꺼내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천천히 정리했다.“집에 가는 길이 생각보다 조용했어요.” 최강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짧게 대답했다.“그렇다면 필요한 말은 이미 다 오간 겁니다.”민영은 그 문장을 곱씹었다.필요한 말은 이미 다 오갔다.그 표현 속에는 더 이상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관계에 대한 전제가 담겨 있었다.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둘은 같은 속도로 내렸다.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걸으며 복도를 지나갔다.사람들의 시
문이 닫힌 뒤에도 민영은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불을 켜지 않은 채,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방금까지 같은 방향을 걸어오던 기척이 아직 문틈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그 온기는 손에 잡히지 않았고, 확인할 수도 없었지만 사라지지도 않았다.민영은 그 사실이 조금 이상하면서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동시에 느꼈다.말로 붙잡지 않아도 남아 있는 감정이 있다는 걸 이제는 몸이 먼저 알아보고 있었다.천천히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와 불을 켰을 때, 공간은 낯설지 않았다.늘 그래왔던 집인데도 오늘은 어딘가 조금 넓어 보였다.마음이 불필요한 짐을 하나 내려놓았을 때공간이 그렇게 느껴진다는 걸 민영은 예전엔 몰랐다.소파에 앉아 등을 기댄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슴 안쪽에서 천천히 정리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강산과 나눈 말들, 최강과 오간 시선들,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이 선택한 태도들.'나는 누군가를 밀어낸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정확한 자리에 놓았을 뿐이야.'그 생각은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오히려 사실에 가까웠다.그래서 마음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다.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조용히 울렸다.이번에도 민영은 급하게 집어 들지 않았다.이미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천천히 화면을 켰다.-오늘 많이 무겁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짧은 문장. 부연도, 확인도 없는 말.그럼에도 그 안에는 민영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가 담겨 있었다.-괜찮아요. 오늘은 생각보다 잘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보내고 나서 민영은 잠시 휴대폰을 쥔 채 가만히 있었다.더 이어가도 되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었다.그 선택지들 중에서 지금의 민영은 침묵을 택했다.그 침묵이 불안에서 오는 게 아니라 확신에서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창가로 가 커튼을 반쯤 열자 도시의 불빛이 조용히 거실 안으로 스며들었다.그 불빛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켜져 있을 텐데 그 수많은 이유들
복도로 돌아온 뒤에도 민영의 발걸음은 한동안 제 속도를 찾지 못했다.아까 강산과 나눈 대화가말 그대로 등 뒤에 남아 천천히 따라오는 느낌이었다.지나간 말인데, 이미 끝난 문장인데 그 무게만큼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어깨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켜도 화면 속 글자들이 곧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민영은 손을 키보드 위에 올려둔 채 잠시 가만히 있었다.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다기보다는 방금 전의 선택이몸에 완전히 닿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마음에 가까웠다.말은 끝났는데 감정은 항상 조금 늦게 도착하네.그 생각이 스치자 민영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후회는 아니었다.다만 상처를 내지 않으면서 방향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다시 한 번 체감하는 순간이었다.“정 사원.”고개를 들자 최강이 책상 옆에 서 있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차분한 표정.그러나 민영은 그의 시선이 아까보다 조금 더 깊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리는 종류의 변화였다.“잠깐 괜찮으십니까.”민영은 의자를 밀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괜찮아요.”그는 굳이 다른 장소로 이동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그 선택 자체가 지금의 민영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처럼 느껴졌다.대신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아까 강산 씨와 이야기하신 것 같습니다.”질문은 확인이 아니라 맥락을 잇기 위한 출발점 같았다.민영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며 담담하게 말했다.“네. 정리해야 할 말이 있었어요.”“정리.”최강은 그 단어를 되풀이하지 않았다.그저 잠시 민영을 바라보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반응이 오히려 민영을 편하게 만들었다.“힘들지는 않으셨습니까.”민영은 그 질문에 잠시 생각했다.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일 것 같았고,힘들었다고 말하기엔 지금의 마음이 그렇게 무너지지도 않았다.“…조금요.”그녀는 솔직하게 답했다.“그래도 필요한 과정이었어요.”최강은 그 말을 곧바로 받아들였다.설득도, 위로
잠은 깊지 않았다.그렇다고 뒤척임으로 밤을 흩뜨린 것도 아니었다.민영은 눈을 감은 채 의식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떠다녔다.꿈과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상태마치 새벽이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얼굴로 머뭇거리는 시간처럼.창밖에서는 아직 첫 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시는 숨을 죽인 채 다음 장면을 기다리고 있었고,민영의 마음도 그와 비슷한 상태였다.무언가를 결론내려야 할 것 같지는 않은데,그렇다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지점.대답을 미루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까.그 생각이 떠오르자, 민영은 오히려 안도했다.선택은 항상 즉각적이어야 한다고 믿어왔던 자신에게이제야 조금의 여지를 허락하는 느낌이었다.이불 속에서 몸을 아주 조금 뒤척이며 민영은 어제의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현관 앞에서 헤어지던 순간, 말을 잇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던 그 짧은 정적.그 안에는 미완의 문장들이 수없이 쌓여 있었지만,그 문장들이 불완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말이 되기 전에도 의미는 이미 있었어.'그 사실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인지 심장은 괜히 조급해지지 않았다.조금 늦게 알아도 되는 답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민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새벽이었다.시계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빛이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커튼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침대에서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며 민영은 창가에 섰다.도시는 이제 막 호흡을 바꾸려는 중이었다.몇 개의 창에만 불이 켜져 있었고, 그 불빛들은 각자의 이유로 잠들지 못한 사람들의 흔적처럼 보였다.'어쩌면 그도 이 시간에 깨어 있을까.'그 생각이 아주 짧게 스쳤지만, 민영은 그 상상을 붙잡지 않았다.지금의 감정은 상대의 행동으로 확인받지 않아도충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다시 침대로 돌아와 이불을 끌어당기며 민영은 몸을 옆으로 돌렸다.베개에 닿은 뺨이 조금 차가웠다.그 차가움은 불편하지 않았다.오히려 머릿속을 정리해 주는 감
복도 끝 전등이 깜빡이며 빛의 끝자락을 흔들어 놓은 순간,민영은 자신의 발밑으로 낯선 기척이 스며드는 듯한 감각을 선명히 느꼈다.그림자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또다시 길게 늘어나 사라지는 흐름은 마치 누군가 민영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민영은 손끝이 차가워질 만큼 긴장했지만 조금 전과는 다르게, 그 떨림은 더 이상 ‘깜빡이는 공포’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이번에는 알 수 없는 기척을 똑바로 바라보려는 스스로를 흔들림 밖으로 꺼내려는 결심에 가까웠다.“…대리님.”민영이 조심스럽게 숨을
복도 끝을 향해 뛰는 동안 민영은 자신의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발걸음보다 먼저 앞으로 쏟아져버릴 것만 같았다.최강의 손은 민영의 손을 꽉 잡은 채 절대 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 단단했고,그 단단함 속에 그녀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 사람을 따라가면 된다’는 감각을 느꼈다.그러나, 그 감각은 복도 저편에서 스치는 한 줄의 그림자 때문에 순식간에 무너질 뻔했다.“…방금… 봤어요…?”민영은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보지 마십시오. 앞만 보세요.”최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더 짧고, 더 단호했
민영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바깥보다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공기 속에서 잠시 숨을 머금었다.회의실은 넓었지만, 그 공간의 차분함이나 밝음을 느끼기 전에 먼저 다가오는 것은 자신이 자리에 앉기 전부터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조용히 머물고 있던 시선의 잔향이었다.테이블 끝에 앉아 있던 상무가 고개를 들었고,그 옆에서 자료를 정리하던 팀장이 민영을 맞이했지만,민영의 시선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한 사람을 향해 멈추게 되었다.그 사람은 회의실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어깨와 팔의 긴장과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으로
정 회장의 몸이 최강의 팔 위에서 완전히 힘을 잃어가는 그 순간, 복도는 더 이상 침입자와 경호 인력이 대치하던 공간이 아니었다.그곳은 이제 한 사람의 생이 흔들리고,한 사람의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겹쳐진조용한 비극의 현장이었다.정 회장의 무게가 순식간에 두 배로 느껴졌다.그건 체중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힘 자체가최강의 팔로 그대로 옮겨오는 느낌이었다.“회장님!!”최강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정 회장의 어깨를 받쳐 들었다.평소라면 절대 흔들리지 않을 그의 팔이 이번만큼은 떨리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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