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9
By:  데이지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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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네트 창립 30주년 송년회. 정찬영 회장은 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선언한다. “하나뿐인 내 딸의 남자를… 이 자리에서 찾겠다.” 그날 이후, 회사 전체는 ‘회장의 딸’이 누구인지 찾기 위한 조용한 전쟁에 빠져든다. 그리고 그들 몰래, 정 회장의 딸 정민영은 까만 뿔테 안경 너머로 세상을 또렷하게 바라보며 법무팀에 신입으로 들어와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평생 공부만 해온 그녀 앞에 세 남자가 서서히 다가온다. 말 한마디 없는 경호팀의 남자 최강 분석으로 사랑을 이해하려는 남자 강산 질투를 감춘 채 속삭이는 그림자 유나연 입술이 스칠 듯 가까워지는 순간마다 민영의 마음은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밤, 그녀의 입술이 머무는 곳에서 사랑도, 회사의 운명도 함께 뒤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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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그 겨울, 샹들리에 아래에서

1화. 그 겨울, 샹들리에 아래에서

겨울 밤 공기는 유난히도 얇았다.

호텔 현관을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코끝을 

한 번씩 훔치며 목도리를 풀었다.

라오네트 창립 30주년이자 2025년의 마지막을 보내는 송년회.

호텔 최상층 그랜드 볼룸은 이미 온기가 꽉 차 있었다.

하얀 테이블보 위에 정갈하게 놓인 와인 잔들,

한쪽 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샴페인 타워,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지는 샹들리에의 금빛 조명들.

직원들은 이름표가 달린 가슴을 조금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며 자리를 나눠 앉았다.

어느 쪽 테이블은 벌써 와인병이 반 이상 비어 있었고,

어느 쪽은 아직 물만 마시며 상석을 힐끔거렸다.

“와, 진짜 장난 아니다. 역시 1위 기업 클라스.”

“야, 조용히 해. 임원 테이블 다 들리겠다.”

웃음 섞인 속삭임들이 이리저리 스쳤다.

잔이 부딪히는 가벼운 소리, 

싱그러운 과일 향이 섞인 샴페인의 향기가 공기 위로 번졌다.

무대 앞, 가장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는

라오네트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이름,

정찬영이 앉아 있었다.

그는 검은 턱시도 위에 조금 큰 듯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한때는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처럼 강렬하던 눈빛은,

이젠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게 되는 묘한 기운을 느꼈다.

“회장님, 오늘 컨디션은 어떠십니까?”

옆자리에 앉은 부회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정찬영은 잠시 잔을 굽어보다가,

입꼬리를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올렸다.

“이 정도면… 뭐, 아직 건배 제안쯤은 할 수 있지.”

농담처럼 흘린 말이었지만,

부회장은 그 웃음 뒤에 숨어 있는 피로를 놓치지 못했다.

그의 손등 위로 혈관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턱 라인이 전보다 더 가늘어 보이는 것도.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수백 명의 직원들 가운데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다.

올 한 해 실적은 얼마나 잘 나왔는가.

내년 승진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을까.

회장 연설은 얼마나 길까, 그리고 식사는 언제 시작될까.

볼룸 한 켠, 스피커에서 잔잔한 재즈가 흐르고 있었다.

사회자를 맡은 진행 요원이 마이크를 잡자

조명은 자연스레 무대 쪽으로 집중되었다.

“네, 모두 자리로 앉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라오네트 창립 30주년 송년의 밤,

메인 순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웅성임이 조금씩 잦아들고,

중간중간 남아 있던 웃음들이 서서히 입속으로 숨었다.

“먼저, 오늘의 주인공이신 분을 모셔야겠죠.

라오네트의 창립자이자, 우리 모두의 회장님.

정.찬.영. 회장님을 모시겠습니다!”

박수 소리가 폭발하듯 터졌다.

테이블마다 일어나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짧은 영상을 찍는 사람들,

눈빛이 살짝 반짝이는 임원들.

정 회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팡이는 짚지 않았다.

자리에 놓인 잔만 한 번 쥐어보았다가,

그대로 내려놓고 빈 손으로 무대를 향해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명이 그의 발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무대 위에 올라선 그는 우선 마이크 옆에 놓인 

물컵을 한 모금 들이켰다.

사람들이 숨을 고르는 시간이기도 했다.

“올해도… 수고 많았네들.”

첫마디는 거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볼룸의 공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지난 30년 동안,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나 혼자 잘나서가 아니야.”

잔잔한 웃음이 터졌다. 그 특유의 말투였다.

자기 자랑이라기보다는, 조금 멋쩍어하면서도 당당한.

“동대문 쪽, 습기 찬 반지하에서 시작했지.

옷걸이 열 개, 내 디자인 열 벌.

비 맞은 옷들 말리려고 밤새 드라이기로 쏘이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이 호텔 샹들리에 아래서 여러분하고 이렇게 잔을 들고 있다는 게,

내게는 아직도 좀, 꿈 같은 일이야.”

몇몇 오래된 직원들의 눈빛이 순간 젖었다.

그때를 함께 겪은 사람들에게는

‘반지하’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 왔다.

정 회장은 한 번 웃고, 시선을 천천히 객석으로 훑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그를 바라보는 수백 쌍의 눈동자.

그 안에는 기대, 긴장, 계산, 존경,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라오네트는… 이제 내가 혼자 만들고 이끄는 회사가 아니지.

여기 있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끌어온 회사야.

그래서 올해도, 진심으로 고맙다.”

박수 소리가 다시 한 번 퍼졌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었다.

잠시, 박수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그는

왼손으로 마이크 스탠드를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아주, 짧지 않은 숨을 들이켰다.

무대 가장 앞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미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숨은, 평소보다 조금 길다.

그러나 그건 오늘, 그가 마음속에 숨겨온 말을 

꺼내기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오늘은… 예년과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해.”

잔이 테이블 위에서 살짝 흔들렸다.

직원들의 자세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몇몇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몇몇은 눈썹을 올린 채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정찬영은 입술에 짧은 미소를 올렸다.

그러나 그 미소 끝에는

묵직한 무엇인가가 매달려 있는 듯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제안 하나 하도록 하지.”

볼룸 안의 소리가 한순간 가늘어졌다.

재즈 음악조차도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말끝을 길게 늘이지 않았다.

마치 오래 전부터 이 말을 되뇌어온 사람처럼,

준비된 듯 자연스럽게 다음 문장을 꺼냈다.

“하나뿐인 내 딸의 남자가 되어,

그리고 훗날 라오네트를 이끌어 갈 사람으로…

스스로를 시험해볼 생각 없는가.”

찰나의 정적.

누군가의 숨 들이키는 소리가

가까운 테이블 어딘가에서 또렷하게 들렸다.

“……예?”

누군가 낮게 내뱉은 말이 중얼거림처럼 번졌다.

그 다음은 순식간이었다.

“딸의, 남자?”

“회장님 따님이… 우리 회사에 있다고?”

“지금 농담 아니지?”

“야, 장난치지 마. 이거 진짜면 인생역전인데?”

연회장의 공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긴장된 웃음이, 다른 쪽에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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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그 겨울, 샹들리에 아래에서
1화. 그 겨울, 샹들리에 아래에서겨울 밤 공기는 유난히도 얇았다.호텔 현관을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코끝을 한 번씩 훔치며 목도리를 풀었다.라오네트 창립 30주년이자 2025년의 마지막을 보내는 송년회.호텔 최상층 그랜드 볼룸은 이미 온기가 꽉 차 있었다.하얀 테이블보 위에 정갈하게 놓인 와인 잔들,한쪽 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샴페인 타워,그리고 그 위로 쏟아지는 샹들리에의 금빛 조명들.직원들은 이름표가 달린 가슴을 조금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며 자리를 나눠 앉았다.어느 쪽 테이블은 벌써 와인병이 반 이상 비어 있었고,어느 쪽은 아직 물만 마시며 상석을 힐끔거렸다.“와, 진짜 장난 아니다. 역시 1위 기업 클라스.”“야, 조용히 해. 임원 테이블 다 들리겠다.”웃음 섞인 속삭임들이 이리저리 스쳤다.잔이 부딪히는 가벼운 소리, 싱그러운 과일 향이 섞인 샴페인의 향기가 공기 위로 번졌다.무대 앞, 가장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는라오네트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이름,정찬영이 앉아 있었다.그는 검은 턱시도 위에 조금 큰 듯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한때는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처럼 강렬하던 눈빛은,이젠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그러나 그의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은 여전히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게 되는 묘한 기운을 느꼈다.“회장님, 오늘 컨디션은 어떠십니까?”옆자리에 앉은 부회장이 조심스레 물었다.정찬영은 잠시 잔을 굽어보다가,입꼬리를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올렸다.“이 정도면… 뭐, 아직 건배 제안쯤은 할 수 있지.”농담처럼 흘린 말이었지만,부회장은 그 웃음 뒤에 숨어 있는 피로를 놓치지 못했다.그의 손등 위로 혈관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턱 라인이 전보다 더 가늘어 보이는 것도.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수백 명의 직원들 가운데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다.올 한 해 실적은 얼마나 잘 나왔는가.내년 승진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을까.회장 연설은 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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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회장님의 딸
정 회장은 그 모든 웅성임을 조용히 받아 안는 얼굴이었다.아주 잠깐, 눈가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가곧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내 말이 갑작스러웠을지도 모르지.”그는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런데 말이야. 회사를 이끌 사람을, 이제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그 말에 임원 테이블 쪽에서 묵직한 긴장감이 흘렀다.승계. 후계자.그 단어들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았음에도모두가 떠올리기에 충분한 분위기였다.“내 딸은… 공부만 하느라,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본 녀석이야.”살짝 웃음이 터졌다.그러나 그 웃음은 금방 가라앉았다.어쩐지 그의 어조가 자랑과 안쓰러움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아직 어린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 하지만, 회장 자리를 억지로 떠안길 수는 없네.그렇다고 내가 애지중지 키워온 라오네트를바깥 사람에게 통째로 맡기기도… 쉽지는 않고.”그의 손가락이 마이크 스탠드를 한 번 가볍게 쥐었다 풀었다.그 작은 동작 안에 계산되지 않은 솔직함이 스며 있었다.“그래서 생각했지. 내 딸의… 남자가 되어줄 사람.그 사람이라면, 내가 떠난 뒤에도딸과 회사를 함께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떠난 뒤. 그 단어에 아주 예민한 몇몇이 눈썹을 찌푸렸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그저 ‘나이가 드셨으니 언젠가는’ 정도로 받아들였다.정 회장은 잔을 든 손을 들어 올렸다.조명이 잔 표면에 반사되어 반짝였다.“회사 창립기념일, 2026년 8월 16일까지.그때까지 내 딸의 남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주저 말고, 라오네트에 몸을 던져보게.”그의 말끝에, 누군가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사회자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지더니곧 억지 웃음을 띠려 애를 썼다.“물론, 조건은 있어.”정 회장은 다시 한번 시선을 쓸어내렸다.수십, 수백 쌍의 눈동자가 자석에 끌리듯 그에게 꽂혀 있었다.“내 딸에게 진심일 것. 라오네트를 사랑할 것.그리고, 나보다 내 딸의 편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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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겨울 복도에서 스친 숨결
호텔 최상층 복도는 볼룸의 화려함과 달리조명이 한 톤 낮아 조용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정민영은 그 복도로 거의 숨을 몰아쉬며 빠져나왔다.자리에서 일어선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해서 등을 찌르는 듯한 기분이었고,아버지의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서 잔잔한 울림으로 흔들렸다.차갑게 식은 공기가 예상보다 더 깊게 폐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여덟 달… 그 짧은 시간 동안 누군가가 나의 ‘남자’가 되라고?민영은 손끝을 벽에 댔다.대리석 표면이 의외로 매끄러웠다.그 차가움 위에서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아버지, 정말 왜 그러셨어요.”혼잣말이 흘러나온 순간,마치 목구멍에서 잠겨 있던 감정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아버지는 늘 자신의 세상을 딸에게 직접 내어준 사람은 아니었지만,그렇다고 이렇게 수백 명 앞에서딸의 미래를 ‘선언’해버릴 사람도 아니었다.그래서 지금 이 상황은 민영에게 충격에 가까웠다.그녀는 숨을 정리하려 잠시 벽에 등을 기대려 했다.그러나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오는 작은 발소리가그녀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톡… 톡… 톡…복도 특유의 잔향이 섞인 발소리였다.민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그곳에서, 기둥의 그림자 사이로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검은 정장. 단단한 구두. 동요 없는 시선.최강.라오네트 전담 사설 보안팀.그의 존재는 볼룸 안에서 사람들 사이를 흐르던 소란과반대로 조용했고 묵직했다.그는 민영을 향해 성급하게 다가오지 않았다.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조심스럽게 거리를 유지했다.경호 인력 특유의 배려였다.“……괜찮으십니까.”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복도에 울리지 않도록 적당히 눌러져 있었다.차갑지도, 또 과하게 다정하지도 않은중립에 가까운 톤.그러나 그 중립성 속에 미묘한 온도가 숨어 있었다.민영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아… 네. 괜찮아요. 그냥 잠깐… 공기 좀 쐬려고요.”말을 꺼내는 순간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얇게 들려서,민영은 그 사실에 더 놀랐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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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회장의 딸은 과연 누구일까?
복도는 여전히 잔잔했고,창문 밖 겨울밤의 바람은 그 너머에서 얇게 흐르는 것처럼 들렸다.민영은 창문 아래 난 좁은 벤치에 조심스럽게 앉았다.볼룸에서 쏟아져 나오는 음악 소리는이 거리까지 닿지 못하고 단지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는 정도로만 존재했다.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아버지의 말이 해리처럼 번졌다.“여덟 달 동안 스스로를 증명해보게.”그 문장 뒤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민영은 완벽히 알지 못했지만,알아서는 안 되는 느낌도 같이 있었다.“……그러니까요, 아버지… 왜 이런 선택을….”민영은 이마에 손을 댄 채 낮은 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그 순간에도 그녀의 귀에는아버지의 발표 뒤로 퍼져 나가던직원들의 웅성임이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정씨 성 가진 신입만 몇인데?’‘우리 부서에도 두 명 있어.’‘진짜라면… 인생 바뀌는 거 아냐?’‘라오네트의 후계자라고?’‘야, 그 신입 법무팀 정민영씨, 혹시…’민영의 심장이 그 기억만으로도 살짝 조여드는 듯했다.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보면 그 순간 들킬 것만 같았다.자신이 그들이 입에 올리는 ‘그 딸’이라는 사실을.정 회장이 딸을 보호하기 위해얼마나 극단적으로 정보를 숨겨왔는지민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모든 사람 앞에서갑자기 이토록 큰 ‘제안’을 할 줄은생각해본 적도 없었다.아버지의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일까.이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민영의 눈가가 얇게 젖었다.그러나 눈물이 흘러내리기 전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바로 그때였다.복도 끝, 볼룸에서부터 들려오는 낮은 말소리와 함께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강산.어둑한 조명 아래에서도그의 눈빛은 단정한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었다.타고난 관찰자, 모든 것을 분석하려 드는 남자.그는 복도에 서 있는 최강을 먼저 발견하고잠시 걸음을 멈췄다.보안팀…?그럼 저쪽 끝에 있는 사람은….그의 시야 끝에 민영의 실루엣이 작게 걸려 있었다.강산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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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이름표 아래 숨겨진 온기
연회장 문이 다시 닫히자, 안의 소란스러운 열기와바깥의 차가운 복도 공기 사이에는얇은 막 하나가 생긴 듯했다.민영은 그 문턱을 넘어 들어서는 순간,수많은 시선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은이상한 착각을 느꼈다.아무도 날 모를 텐데. 그런데 왜… 이렇게 숨이 가빠지지.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도그녀의 손끝은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특히 오른손 아버지의 말이 뇌리에 박혔을 때자기도 모르게 움켜쥐었던 그 손은아직도 굳게 말린 채였다.테이블은 의외로 조용했다.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불편할 만큼.같은 법무팀 입사 동기 나연이콕 찌르듯 민영을 바라보다가,부드럽지만 어딘가 칼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디 갔다 온 거야? 도망친 줄 알았네.”말은 가볍게 던져진 농담처럼 들렸지만,그 속에는 묘한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화려한 메이크업과 도시적인 분위기,또렷한 콧대 위로 내려온 조명 아래나연의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민영은 짧게 미소 지었다.“그냥… 잠깐 공기 좀 쐬고 왔어.사람이 너무 많아서…”“음. 너처럼 조용한 타입은 이런 행사 힘들지.”말투는 친절했지만 말끝은 매끄럽지 않았다.민영은 그 의미를 굳이 묻지 않았다.그녀는 그냥 자신의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잔에 남아 있던 샴페인이조명에 반사되어 담금질된 듯 반짝였다.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세상은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그녀에게 기대하는 듯했다.그때였다.멀리서 행사 스태프가 테이블을 옮기다큰 쟁반을 놓치는 소리가 났다.쨍그랑!잔이 두 개 깨져나갔고그 소리는 사람들의 대화를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민영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갑작스런 소리에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오늘은 유난히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그 순간 자신 쪽으로 떨어지는 유리 파편 하나.민영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그런데 파편은 다리 근처까지 오지 못했다.‘탁.’짧고 단단한 소리.누군가가 신속하게 쟁반 모서리를 발로 밀어파편의 방향을 바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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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읽히기 시작한 이름
연회장이 다시 조금씩 안정되는 듯했지만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었다.잔에 담긴 샴페인의 거품이표면을 넘어오지도 못하고 금세 가라앉는 것처럼,그 안의 분위기는 잔잔하게 흔들리는 표면 아래에서 끓고 있었다.정민영은 주변의 대화를 듣지 않으려 애썼다.하지만 귀는 생각보다 솔직했다.“정씨 성 가진 애들 다 긴장하겠네.”“우리 부서 정주희는 아까부터 화장실만 들락날락하던데?”“10월 입사자들 중 누가 제일 가능성 있어 보이냐?”“아니, 회장의 딸이면 사원으로 뽑히겠냐? 말도 안 되지.”“그렇지. 최소 대리부터 시작하지 않을까?”민영은 들릴 듯 말 듯한 마지막 대사에손끝으로 잔의 표면을 천천히 훑었다.아니야. 사원으로 시작하는 게 맞아.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하지만 그 말은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작은 조약돌처럼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그 순간 나연이 민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근데 정 사원.”그녀는 이미 반쯤 흥이 올라 있었고,입꼬리는 지나치게 부드러워 보였다.“아까 복도에서… 누구랑 있었어?”민영의 심장이 순간 멈칫했다.하지만 표정은 애써 자연스럽게 유지했다.“…잠깐 바람 쐬러 갔다가,보안팀 직원이랑 마주쳤어. 그게 다야.”나연은 잔을 돌리며 피식 웃었다.“보안팀…? 근데 그 사람,너한테 유난히 친절하던데?”그 말은 생각보다 칼날처럼 들어왔다.민영은 손에 쥔 잔을 더 단단히 잡았다.“그냥… 경호 차원에서 그런 건가 보지.”“그래? 음… 글쎄.”나연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 안에는 질투와 의심이 다 들어 있었다.어떤 감정을 먼저 꺼낼지는그녀 스스로도 정하지 못한 눈빛.“너는… 그런 쪽에 관심 없겠지?”갑작스레 나연은 질문을 바꿨다.목소리가 낮게 잠겼다.“남자들 말이야.”민영은 조금 당황했다.“어? 음… 잘 모르겠어.”“모르겠다는 건 없다는 거지.”나연은 민영의 반응을 읽어내려는 것처럼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연애해본 적도… 없고?”“…응.”민영은 솔직하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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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와인 향 사이로, 서로 다른 눈빛
연회장 내부는 이제 어느 정도 다시 평정을 찾은 듯 보였지만,그 평정은 진짜 고요가 아니었다.잔을 부딪히는 소리, 테이블마다 들리는 가벼운 웃음,웅성임이 적당히 섞인 공기…겉으로 보기엔 화기애애했지만모두가 조금씩 다른 의도를 품고 있었다.민영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잔 옆에 놓인 냅킨을 괜히 접었다 폈다.손가락 끝에는 아직 떨림이 남아 있었다.몸이 아니라 마음이 떨리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아까… 그 말.“제가 있습니다.”그 말이 왜 이렇게 오래 남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단순히 보안팀 직원의 멘트일 뿐인데,아직도 가슴 안쪽이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안 돼… 이런 감정 가지면 안 돼.나는 지금… 그런 위치가 아니야.민영은 그런 생각으로 자신을 다잡으려 했지만손끝에 전해지는 미세한 열감은 쉽게 식지 않았다.그리고 그때.조용히, 그러나 흐름을 바꾸는 기척이 다가왔다.“정 사원님.”테이블 옆에 서서자연스레 인사하듯 고개를 숙이는 남자.강산.그의 셔츠 소매는 정확히 손목에서 반 마디 위에 걸쳐 있었고,수트 어깨선은 딱 맞아서 구김 하나 없었다.매 순간 자신을 관리하는 사람의 태도였다.그러나 더 돋보이는 건 그의 눈빛이었다.조용히 샴페인을 들고 있으면서도눈만큼은 무언가를 계속 추적하는 듯했다.“아까 놀라셨죠?”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와인병이 떨어지는 바람에 여기저기 소동이 많아서.”민영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당황했어요.”“보통 이렇게 큰 행사에서사람들이 흥분하면 사고가 자주 납니다.”강산은 잔을 살짝 기울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래서 마실 때나 이동할 때 조심하셔야 합니다.”그는 마치 본인이 직접 챙기겠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었지만또한 ‘누군가가 이미 당신을 챙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한미묘한 색도 섞여 있었다.민영은 그 미묘함을 정확히 느꼈다.“…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떨어졌다.그러나 진짜 감정은 한 층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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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숨길 수 없는 틈
연회장의 공기는 이미 따뜻했으나민영에게는 하나도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오히려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는 잔들,수백 개의 웃음과 목소리들은그녀에게는 먼 바다처럼 들렸다.멀리서 이따금 터지는 웃음소리,누군가는 인사하느라 손을 흔들고,누군가는 술잔을 바닥까지 비우며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하지만 그 복잡한 흐름 속에서민영의 귀에는 한 사람의 목소리만이잔향처럼 반복되었다.“정 사원님을 향한 시선이 많습니다.”“제가 보고 있습니다.”그 말들 위로 그의 낮은 음색이 겹쳐졌다.“…아닙니다.”강하게 부정하는 목소리. 그 안에 단단한 물결이 있었다.물결은 차갑지 않았고,오히려 민영의 마음을 더 흔들어버리는 온도를 품고 있었다.민영은 조용히 잔을 들었다.샴페인 기포가 잔 위로 천천히 퍼졌다가 사라졌다.그 사라짐이 마치 지금 자신의 숨결처럼 가벼웠다.그녀는 스스로를 꾸짖듯 깊이 숨을 들이켰다.흔들리지 마.이런 감정은, 지금은…그러나 흔들림은 감정이 아니라, 현실이었다.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조용히 다가왔다.“정 사원님, 자리 옮기셔도 됩니다.이쪽이 조금 조용합니다.”누군가의 목소리였지만 민영은 알아챘다.말보다 먼저 시선이 닿았기 때문이다.최강.그는 사람들 사이의 틈으로 조용히 다가왔다.그 어떤 서두름도 없지만필요할 때마다 정확히 나타나는 사람처럼.민영은 그를 올려다보았다.그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적었다.그 적은 변화가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다.“…저기요.”민영은 조용히 말했다.“지금… 저 때문에”“정 사원님 때문이 아닙니다.”그의 대답은 민영의 말을 끊었지만조심스러운 결은 있었다.“아까도 말씀드렸듯저는 필요한 범위 안에서 움직입니다.”“하지만 아까는… 너무…”민영은 말끝을 흐렸다.“너무 직접적으로 저를”“지킨 것이 불편하셨습니까.”그는 묻고 있었지만그 안에 ‘물러나겠다’는 의지는 없었다.오히려 확인하고 싶다는 결이 느껴졌다.단단한, 그러나 조심스러운 방식으로.민영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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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조용히 무너지는 밤의 숨
연회장의 공기는 샴페인의 향과 가벼운 웃음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정민영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유리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음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잔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연회장 중앙을 바라보았다.사람들 사이, 빛 아래 서 있는 아버지.정 회장은 여전히 건재한 듯 보였으나그의 눈빛은 계속해서 어딘가 멀어지는 흐름을 타고 있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말을 하며 활짝 웃던 얼굴이지금은 살짝 굳어 있었다.그 작은 굳음 하나가 민영의 심장을 서늘하게 조였다.뭔가… 뭔가 조금… 이상해.아버지는 원래 몸이 좋지 않아도절대 티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민영에게조차 제대로 아픈 내색을 하지 않던 사람.그런데 지금 그의 어깨가 일순간 굳어지는 모습,손가락 끝이 떨리는 모습이민영의 눈에 너무 크게 박혀버렸다.잔을 쥔 손이 부드럽게 흔들렸다.“…아버지…”그녀는 입 안쪽에서 작은 숨을 삼켰다.“왜 그러지…”그때였다.“정 사원님.”조용히, 그러나 정확히민영의 뒤편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그 목소리는 민영의 멀어져가는 감각을한쪽으로 다시 붙잡아당겼다.최강.그는 민영의 바로 옆에서 어떤 방해 없이 숨을 고르는 시간을 주려고 말을 천천히 꺼내고 있었다.민영은 그를 올려다보았다.눈을 맞추는 것조차 힘들 만큼내면이 흔들리고 있었다.“…저… 조금…”그녀는 숨을 삼켰다.“아버지가… 조금… 이상하신 것 같아서…”그 말을 내뱉는 순간민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 흔들림을 최강은 정확히, 너무 조용히 보았다.그러나 그는 민영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단지 그녀가 지금 가족 문제로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만은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녀의 시선이아버지가 있는 자리로 향해 있었다.그 사실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최강은 말없이 민영의 시선을 따라연회장 중앙 쪽을 바라보았다.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중년 남성.사진에서나 행사에서 자주 봤던‘정 회장’이라는 이름이 떠올랐지만그가 민영의 아버지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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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잠시만, 여기 있어 주세요
연회장의 음악은 어느새 조금 느린 템포로 바뀌어 있었다.잔을 부딪히는 소리도 줄어들고 복도 쪽에서는 코트를 들고 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부드럽게 이어졌다.그런데 그 모든 변화 속에서정민영은 단 하나의 장면만 머릿속을 맴돌았다.아버지가… 조금 이상하신 것 같아서…그녀의 말.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의 떨림.그리고…“거짓말입니다.”“손이 떨리고 있습니다.”최강의 낮은 목소리.그 모든 장면이 리플레이처럼 머릿속에서 반복되고 있었다.내가… 왜 그 말까지 했을까.민영은 가늘게 숨을 들이켰다.흉부가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말을 뱉은 건 분명 자신인데말을 정리할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그녀는 아직, 그런 말이 ‘누구에게나 쉽게 꺼낼 말이 아님’을 인지하지 못했다.다만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입이 먼저 움직여 버렸다는 것만은 확실했다.그 순간 등 뒤에서 조용히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정 사원님.”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민영은 천천히 돌아보았다.최강.그는 여전히 조명보다 한 톤 어두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하지만 그 어둠은 섬뜩한 것이 아니라민영의 불안정한 마음을조용히 감싸는 종류의 온기였다.그는 한참 전보다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서 있었다.“…아까 말씀하신 게…”최강의 목소리는 낮았고기계적이지 않게 부드러웠다.“…많이… 걱정되십니까.”민영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그 질문에 답하려면 너무 많은 감정을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죄송해요.”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최강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조용히 눈을 깜박였다.“죄송…?”“저기요…”민영은 입술을 깨물었다.“…저는 지금… 최강 씨랑…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닌데…”말은 떨어지지 않고 서성이다가 툭~하고 떨어졌다.“…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되는 건데…”그 한 문장 안에는후회, 부끄러움, 불안, 죄책감이 섞여 있었다.민영은 고개를 더 숙였다.“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말이 그냥…”그녀의 목소리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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