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문밖에서 심건모와 제훈이 나누는 말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드라이기를 집어 들고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수영 씨 쪽은 잘 달래두었습니다.”“국장님, 아가씨가 고영훈에게 너무 깊이 집착하고 있어요.” 제훈은 심여진이 사랑에 눈이 멀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를까 봐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고영훈이 총기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여진에게 알려줘.” 심건모가 차갑게 말했다. “오늘은 여진이 생일이니 내 대신 전해줘. 원하는 게 있다면 합리적인 선에서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소방청 보고에 따르면 고영훈 별장의 화재는 전자 기기 폭발로 인한 것이며 송서윤 씨의 소행인 것으로 보입니다.” 제훈의 보고가 이어졌다.제훈은 말을 마치고 물러났다.욕실에서 드라이기 소리가 한참 동안 계속 들려왔다.이윽고 욕실 문이 열리자 심건모는 손을 뻗어 침실 등을 껐다.욕실에서 새어 나온 빛이 카펫 위로 쏟아졌고 문 앞에 멈춰 선 송서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심건모는 소파에 앉아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잠시 망설이던 송서윤이 욕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그녀는 욕실 입구의 불빛 아래 서서 흰색 슬립 잠옷 차림으로 복잡한 눈빛을 한 채 심건모를 바라보았다.심건모는 송서윤에게 다가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와 허벅지를 받쳐 들고 그녀를 침대 위로 안아 올렸다.이불을 덮어준 심건모는 침대 곁에 앉아 송서윤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고영훈 집에 갔어?”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부드러웠다.“내가 케이시라는 걸 알아냈어요.”“어떻게 알게 된 건지 확인해야 했거든요.”“고영훈이 너한테 또 무슨 짓을 했어?”“아무것도 안 했어요.”심건모의 시선이 송서윤의 희고 고운 양손에 머물렀다. 그녀의 좌우 약지에는 각각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왼손 약지의 옥반지는 심건모가 직접 끼워준 것이었다.오른손 약지의 다이아몬드 반지도 심건모가 본 적이 있었다.언젠가 심여진이 가져와 보여주었던 송서윤과
송서윤은 물에 빠진 사람을 붙잡고 나서야 그게 수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송서윤은 뒤쪽에서 수영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가슴을 받쳐 들고 호숫가로 끌어당겼다.호숫가에 다다랐을 때쯤 수영은 당황함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송서윤을 밀쳐냈다.송서윤은 무방비 상태에서 호수 속으로 처박혔고 물을 들이켜며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그대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사람 살려요!”언저리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서지원이 비명을 질렀다. “서윤아!”서지원은 송서윤을 미워하고 원망했지만 결코 사고가 나길 바란 적은 없었다.검은 그림자 하나가 호수로 뛰어들었고 몇 초 뒤 고영훈이 송서윤을 안고 올라왔다.서지원이 즉시 다가갔다. “서윤아, 괜찮아?”끊임없이 기침을 하던 송서윤은 그 부름을 듣고 서지원을 바라보았다.송서윤은 고영훈의 품에 안겨 있었고 서지원은 바로 옆에 있었다.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에 송서윤은 순간 착잡해졌다.“국장님, 심여진 씨가 나를 호수에 밀어 넣었어요. 심씨 가문은 반드시 내게 해명해야 할 겁니다.”바닥에서 일어난 심여진이 대꾸했다. “오빠, 수영의 말 듣지 마. 난 그냥 뺨 한 대 때렸을 뿐이야. 자기가 못 버티고 넘어진 거라고.”“들었죠? 본인이 직접 자백하는 거!” 수영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그래요! 내가 때렸어요! 염치도 없이 영훈 오빠 몰래 다른 남자랑 껴안고 난리를 쳐요? 그러고도 영훈 오빠를 볼 면목이 있어요?”“눈이 삐었네요!”수영은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심여진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전 수영이 동건우와 함께 있었던 걸 심여진이 보지 못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럴 리가 없어. 오빠, 내 눈은 정확해.” 심여진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녀가 사람을 때렸고 그 사고로 수영이 호수에 빠졌음을 입증하고 있었다.“수영 씨를 병원으로 옮겨.” 심건모가 제훈을 바라보자 제훈이 즉시 일을 처리했다. 이어 심건모는 수영을 보며 말했다. “심씨 가문에서 정식으로 사과하겠
“언니,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요?”“우리 오빠랑 리안이도 벌써 왔는데 언니는 왜 아직도 안 와요?”“어렵게 맞이한 생일인데 정말 너무하네요.”휴대폰 너머로 심여진의 뾰로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제야 송서윤은 오늘이 심여진의 생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지금 바로 갈게요.” 송서윤은 전화를 끊고 곧장 심씨 가문으로 향했다.심건모가 보고 싶었다.송서윤이 연회장에 들어서자 이정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서윤아, 몰골이 왜 이리 엉망이니?”이정희의 말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심건모의 시선이 송서윤에게로 향했다.흰 원피스는 여기저기 더러워져 있었고 작은 얼굴 역시...송서윤은 심건모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이정희에게 답했다.“조심하지 않아 넘어졌어요.”“어디 다친 데는 없고?” 이정희가 걱정스레 물었다.송서윤은 고개를 젓고는 심건모의 곁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하지만 이정희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꾸나.”송서윤은 하는 수 없이 이정희를 따라나섰다. 심건모의 시선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송서윤은 이정희가 준비해 준 베이지 색상의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우아한 몸매를 살려주는 긴 드레스에 머리는 꽃봉오리 모양으로 말아 올리고 초록빛 비녀로 고정했다. 가느다란 목선과 정교한 쇄골, 매끄러운 피부가 고스란히 드러나며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그러나 송서윤의 눈에는 오직 심건모뿐이었다. 송서윤은 심건모를 향해 걸어갔다.하지만 심건모의 시선은 그녀에게 머물지 않았다.그의 맞은편에 서 있던 동건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방금 별장 쪽에 불이 났다더군.”“바람 잘 날이 없네, 건모야.”“네 어깨짐이 정말 만만치 않겠어.”동건우 옆에 서 있던 심여진이 긴장한 듯 바짝 다가와 물었다.“설마 영훈 오빠가 사는 동쪽 별장은 아니죠?”그때 고영훈이 수영의 팔짱을 끼고 들어섰다.“고 대
송서윤은 안방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방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지나갔다. 마침내 서재에 다다랐다.어두컴컴한 시야 속에서 벽면의 대형 스크린이 형광빛을 내뿜으며 감시 화면이 띄워졌다. 그곳은 다름 아닌 송서윤의 사무실이었다.그녀의 시선이 노트북에 닿았다.송서윤의 양손이 키보드 위에 내려앉아 빠르게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트북의 잠금이 해제되었다.화면에는 해커 전용 프로그래밍 소프트웨어가 띄워져 있었다.그 찰나, 서재 문이 벌컥 열리더니 고영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장 네 물건 챙겨서 별장에서 사라져. 서윤이 눈에 띄어서는 안 되니까.”서재의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송서윤은 놀란 고영훈과 그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이크와 눈이 마주쳤다.노트북 화면과 Enter 키 위에 놓인 송서윤의 손을 본 제이크가 당황하며 비명을 질렀다.“안 돼요. 케이시! 제 컴퓨터를 망가뜨리지 마세요!”“전 케이시를 해치려던 게 아니에요. 의도적으로 추적한 것도 아니고요. 전 그저 고 대표님의 의뢰를 받고 부인을 찾으려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뿐입니다!”“대표님, 빨리 막으세요!” 제이크는 고영훈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다급하게 소리쳤다.고영훈은 당혹감과 혼란이 뒤섞인 눈으로 송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나를 감시했어?” 송서윤은 조롱 섞인 말투로 물었다.“나를 협박하려고?”“아니야. 협박하려던 게 아니야.”“넌 위험해. 너를 쫓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고. 난 너를 보호하고 싶었을 뿐이야.”“여보, 어머니께서 널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하고 컴퓨터를 멀리하게 하려 했던 것도 분명 같은 뜻이었을 거야.”“그럼 다 오라고 해!”송서윤의 차가운 눈빛은 고영훈의 심장을 뚫는 듯했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고 온몸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송서윤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키를 내리눌렀다.순간, 별장 안에서 연달아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노트북, 벽면의 대형 스크린, 그리
송서윤은 이혜정의 지능과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고하준 역시 그녀를 닮은 듯했다.송서윤의 IQ는 145였고 고하준은 150이었다.누가 뭐래도 고하준은 그녀의 핏줄이었고 그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고하준의 아버지가 누구든 상관없이.고하준의 눈가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송서윤은 부드러운 손길로 고하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고하준은 송서윤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엄마, 제가 잘못했어요.”고하준은 고영훈이 무슨 짓을 해서 송서윤의 마음을 돌렸는지 알지 못했다. 송서윤의 표정은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그 모습은 고하준을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고 송서윤이 언제든 다시 떠나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고하준은 송서윤을 꽉 껴안으며 목이 메어 말했다.“엄마, 다시는 엄마 마음 아프게 안 할게요.”송서윤은 고하준을 가볍게 끌어안고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옆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영훈은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 세 식구가 행복하게 함께하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함께 고하준을 학교에 데려다주었다.고하준은 송서윤과 헤어지기 아쉬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는 교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송서윤이 귓가에 남긴 말 때문이었다.“하준아, 과거에도 미래에도 무슨 일이 생기든 넌 내 아들이야.”대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걸까?고하준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차 안에서 고영훈은 그 누구의 방해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경원시에서의 일은 최대한 빨리 마무리할게. 하준이 데리고 다시 아진시로 돌아가자.”고영훈은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다른 한 손으로는 송서윤의 손을 꼭 쥐었다.송서윤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멀어져 가는 국회 청사 건물과 함께 머릿속을 맴돌던 심건모의 잘생긴 얼굴도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별장에 도착했다.송서윤이 차 문을 열자 어느새 고영훈이 그녀 앞에 서 있었다.고영훈은
송서윤은 착잡한 눈빛으로 고영훈을 바라보았다.고영훈은 송서윤의 손을 움켜쥐더니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가로채 전원을 꺼버렸다.고영훈의 커다란 손이 송서윤의 어깨 주위를 맴돌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는 고영훈의 마음은 고통과 씁쓸함으로 가득 찼다.하지만 그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송서윤은 이제 이혜정의 말조차 듣지 않았다. 그녀는 IT 업계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부 입찰이었지만 다음번엔 또 무엇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고영훈의 주위 사람들이 송서윤의 정체를 알아냈다면 다른 이들 또한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송서윤의 생명이 위협받게 둘 수는 없었다.자신을 원망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송서윤이 곁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고영훈은 송서윤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깊은 눈동자에는 억눌러왔던 애정이 흘러넘쳤다.“나 3년 전 이혼 합의서에 사인 안 했어.”“대외적으로 공개했던 영상 속의 서류도 가짜였고.”송서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영훈이 말을 이었다.“별거 2년도 내 동의가 있어야 성립되는 거야.”“난 동의 못 해.”“넌 여전히 나의 아내고 심건모와의 혼인은 무효야.”고영훈은 송서윤을 품에 안았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다는 충만함이 그의 가슴을 채우며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졌다.고영훈은 커다란 손으로 송서윤의 머리를 감싸며 그녀의 작은 얼굴을 가슴팍에 밀착시켰다. 송서윤은 예전처럼 순종적으로 가만히 있었다.“우리 하준이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자. 우리 세 식구 예전처럼 영원히 함께하는 거야.”“여보, 다시는 실수 안 할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송서윤의 눈빛은 지독히 차가웠고 몸에선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고영훈은 뜨겁게 사랑했던 시절처럼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고영훈은 송서윤의 차가운 시선을 외면했다. 굳어있던 그의 심장에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고영훈이 송서윤을 데리고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동건우는 사진 한 장을 찍었다.그리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