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진우는 어떤 정신으로 포스트 빌리지를 빠져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관성처럼 아이들과 함께 살던 집 앞이었다. 하지만 이제 진우에게 이곳은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는, 온기가 꺼진 잔해에 불과했다.
진우는 아이들의 물건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마치 깨지기 쉬운 섬세한 조각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배어 있는 작은 옷가지와 장난감들을 뒤로한 채, 진우는 자신의 몇 가지 소지품과 7년 동안 비밀리에 지켜온 노트북만을 챙겼다. 현관문을 나서는 그의 뒤로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는 흡사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는 듯했다.
진우가 향한 곳은 시내 중심가의 초고층 오피스텔 ‘더 프라임’이었다. 7년 전, 수진과 결혼하며 ‘평범한 가장’으로 살겠노라 선언하며 봉인했던 그의 진짜 요새였다. 지문 인식을 거쳐 문이 열리자, 7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모던하고 차가운 인테리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먼지 하나 앉
남미 B국, 안데스 산맥 줄기 하단부에 위치한 에메랄드 채굴 예정지.CB 그룹과 강도진 대표의 최종 계약 전 현장 검증을 위해 이곳에 파견된 앤더슨은 수송용 SUV에서 내리자마자 차가운 고산지대의 바람을 맞으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의 뒤로는 CB 본사 재무팀과 기획팀에서 파견된 행정 실무진, 그리고 앤더슨이 직접 대동한 전문 지질 스태프들이 연이어 차에서 내렸다.일단 겉으로 보이는 풍경은 유능한 투자자들의 눈을 속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갱도 초입에는 신식 고압 배수 펌프 라인과 균열 방지용 콘크리트 숏크리트 처리가 깔끔하게 도포되어 있었고, 최신형 유압식 굴착 장비와 광석 이송용 컨베이어 벨트가 마치 당장이라도 가동될 것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와…… 생각했던 것보다 설비가 훨씬 잘 갖춰져 있네요! 이 정도면 보고서 사진대로 바로 채굴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다."CB 본사 재무팀 실무진이 입을 떡 벌린 채 감탄을 연발하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서류와 사진만 보며 투자를 망설이던 행정팀 직원은 단숨에 기대를 품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현지 관리팀장과 브로커들의 입꼬리가 은밀하게 올라갔다. A국에서 온 멍청한 엘리트들을 완벽하게 속여 넘겼다는 뿌듯함과 오만함이 그들의 눈빛에 번져 나갔다.그러나 앤더슨과 그가 데려온 지질 스태프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앤더슨은 겉포장에 감탄하는 본사 행정 실무진을 힐끔 바라보고는 카키색 작업용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용 초음파 암반 밀도 측정기와 정밀 지질 스캐너를 꺼내 들었다. 앤더슨의 짧은 턱짓 한 번에, 그와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지질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스태프들은 정돈된 장비들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신속하게 측정 장비를 설치하고 초입부 콘크리트 외벽의 미세 균열 수치와 흡수율을 측정했다."앤더슨 팀장님, 초입부 콘크리트 표면
제이아우라 대표실. '더 문' 2층의 폭발적인 열기와 길게 늘어선 줄을 내려다보던 진우의 비릿한 웃음에 지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강도진을 옥죄어 오는 300억 투자 연장 압박과 200억 RV은행 대출 만기. 그러나 도진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하지만 그에게는 파멸의 결정타가 될 무기가 하나 더 남아있었다. 지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입가를 부드럽게 올려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강도진이 잊고 있는 게 하나 더 있어요. '영원한 사랑' 디자인의 재계약 기간이 다가온다는 걸요."지수의 상큼하면서도 단호한 대답에 진우의 눈매가 유쾌하게 호선을 그렸다."또 한차례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군요. 그래서, 이번엔 얼마나 올릴 거죠?"지수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기울여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통유리창 너머로 제이아우라의 향수를 사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룬 매장 속 사람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그녀는 덤덤하지만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젠 제가 만들 여력이 있는데, 아까운 내 새끼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수 없죠. 거기다 강도진은 에메랄드 광산까지 욕심을 내고 있으니…… 핑크 다이아몬드는 이제 그의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겠어요?"도진에게 빼앗겼던 자신의 분신이자 최고 히트작, '영원한 사랑'을 이번 기회에 CB로부터 완전히 회수하겠다는 지수의 냉정한 결심이었다. 핑크 다이아몬드 신화에 가려진 채 남미 광산이라는 허황된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도진의 앞날에, 지수는 이미 완벽한 퇴로 차단선까지 구축하고 있었다.늦은 저녁, 서초구의 한 조용한 빌라촌.유진의 집 안은 거실 가득 감도는 구수한 차돌된장찌개 냄새와 따스한 주황빛 조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착한 동생 유현이 저녁을 먹으러 온다는 연락에, 유진은 일찍 퇴근해 유현이 좋아하는 반찬들을 정성껏 차려두고 기다리던 참이었다."어 왔어? 어서
CB 그룹 본사 대회의실. 홀리데이 컬렉션 intermediate(중간) 기획 발표회가 열리는 회의실 내부에는 차가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상석에 앉은 강도진 대표는 최근 RV의 박진우 대표에게 핵심 물류센터 3곳을 빼앗긴 상처와 300억 원 상환 유예라는 압박감 때문에 눈밑이 거무튀튀하게 패여 있었다. 남미 에메랄드 광산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쥐었지만, 당장 눈앞에서 이사진과 투자자들에게 보여줄 확실한 신제품 실적이 절실했다."그럼, 이번 홀리데이 컬렉션 전체 라인을 총괄 지휘한 찰스 총괄 디자이너의 발표가 있겠습니다."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화려한 스카프를 두른 찰스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찰스는 자타가 공인하는 CB 그룹 디자인실의 수장이자 최고 실세였다. 비록 아랫사람의 아이디어를 은근슬쩍 탐내고 감각 있는 신입들을 견제하는 시기심 많은 성격이었지만, 수년간 업계 최정상에서 구르며 얻은 시장 감각과 트렌드를 읽는 눈썰미, 그리고 조직을 주무르는 수완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화면에 찰스가 준비한 홀리데이 컬렉션의 메인 및 서브 라인업이 하나씩 떠올랐다. 이사진의 탄성이 흘러나왔고, 도진의 굳어 있던 표정도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객석 뒤편에 앉아 있던 유현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흔들렸다.'……어?'찰스가 컬렉션의 서브 라인업으로 소개한 드레스 슈즈 때문이었다. 클래식한 가죽 바탕 위에 과감하면서도 정교하게 흘러가는 서브 스티치 디테일. 그것은 유현이 며칠 전 디자인을 고민하다가 '라인이 너무 튄다'는 이유로 폐기하고 노트 구석에 치워두었던 미완성 스티치 도안이었다.그러나 찰스는 그것을 그대로 베끼지 않았다. 유현의 서브 스티치 라인을 기초로 삼되, 디자인 총괄로서의 짬밥과 자신의 장기인 화려한 징 장식, 강렬한 색감 배치를 더해 완전히 '찰스 스타일'의 화려한
CB 그룹 회장실 옆에 마련된 화상 회의실.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실내 속에서 대형 프로젝터 화면이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화면 너머로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접속한 세 명의 외국인 얼굴이 분할되어 떠올라 있었다.맞춤 수트를 매끄럽게 차려입고 입가에 자본주의적 미소를 띤 남미 현지 로비스트 로드리게스,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어두운 표정으로 두꺼운 지질 보고서를 뒤적이고 있는 A국의 세계적 지질학 전문가 앤더슨 박사, 그리고 거친 가죽 자켓을 걸치고 햇빛에 그을린 얼굴로 담배 피울 궁리만 하고 있는 현지 채굴 현장 총괄 감독 고메즈.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정적을 깨고 판을 주도한 것은 단연 로비스트 로드리게스였다. 그는 특유의 과장된 손짓과 흥분된 어조로 화면 중앙에 남미 안데스 산맥 일대의 광산 지도를 펼쳐 보였다."강 대표님! 이건 두 번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상위 0.1%의 노다지 프로젝트입니다. 이번 입찰에서 낙찰만 받아낸다면 CB 그룹의 자원 및 보석 사업 부문은 단숨에 남미를 넘어 세계 시장의 주도권을 쥐게 될 겁니다. 수치만 보십시오! 매장량의 무려 80% 이상이 최상급 에메랄드에, 일부 구간에서는 최고 등급의 다이아몬드와 루비까지 대량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전설적인 보석 광산입니다. 남미 전체를 털어도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신이 내린 노다지입니다. 정부 핵심 관계자들과의 밑작업은 이미 제가 완벽하게 마쳐놓았으니, 강 대표님께서는 낙찰 도장만 찍으시면 됩니다. 그 뒤는 그야말로 주워담기만 하면 되는 돈방석입니다!"로드리게스의 눈부신 호언장담에 강도진은 턱을 괴고 앉아 차분
CB 그룹 패션 디자인실의 중간 검토 회의를 앞두고, 디자인실 전체는 전에 없던 기묘한 열기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총괄 디렉터인 찰스가 이번 크리스마스 홀리데이 컬렉션에서 서브 디자인 자리를 하급 및 신입 디자이너들에게 대거 개방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찰스의 그늘에 가려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을 연차 낮은 디자이너들에게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같은 기회였다."수석님, 이번에 제가 제출한 서브 스케치입니다. 연인 간의 클래식한 감성을 살려봤습니다.""수석님! 저는 '나를 위한 선물' 라인에 맞춰 특수 자수 장식을 접목해 봤는데 한번 봐주십시오!"신입들과 2~3년 차 디자이너들은 며칠 밤을 새우며 짠 참신한 아이디어 스케치들을 들고 찰스의 디자이너실로 향했다. 찰스는 상석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아이들이 가져온 스케치들을 쓱쓱 훑어보며 가끔 짐짓 감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호오…… 3팀 김 디자이너, 이 소매 부분의 비대칭 주름 디테일, 꽤 신선한데?""이 디자이너, 버클 장치에 앤티크한 금속 레이스를 덮는 방식은 제법 감각이 있어."찰스는 친절한 선배의 얼굴을 하고 신입들의 스케치 구석구석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는 칭찬 몇 마디를 건네며 스케치북을 거둬 갔다.신입들은 마침내 자신들에게도 빛이 비추는가 싶어 가슴을 졸이며 결과를 기다렸다.하지만 며칠 뒤, 1차 기획 회의 판넬이 디자인실 중앙에 공개된 순간, 신입 디자이너들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어?"스케치 판넬을 확인하던 신입 김 디자이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메인 컨셉 판넬 중심에 걸려 있는 찰스의 메인 라인 착장 스케치 때문이었다. 소매 끝에 잡아놓은 비대칭 주름 패턴과 독특한 드레이핑…… 그것은 분명 며칠 전 자신이 찰스에게 검토받으러 가져
남미 광산 개발권을 집어삼키기 위한 도진의 움직임은 갈수록 집요하고 과감해졌다.현지 고위 공무원이 세팅해 준 로비스트 라인을 가동하기는 했지만, 뼛속까지 의심이 많은 도진은 현지인들로만 팀을 구성하기에는 아무래도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최근 며칠 동안 비밀리에 자원 개발, 지질학, 현지 투자가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직접 만나며 남미 광산에 대한 비공식 정보와 자문을 끌어모으고 다녔다.그러나 도진이 나름대로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한 행적들은, 정재계 및 자원 개발 쪽에 촘촘한 인맥을 가진 아스테리아의 지현을 거쳐 지수의 귀에까지 그대로 흘러들어갔다."오빠, 아스테리아에서 예전에 그 남미 광산 현장 평가한 보고서 있지? 그것 좀 볼 수 있을까?"지수의 연락을 받은 지현은 흔쾌히 아스테리아 내부 보안 문서로 분류되어 있던 현장 평가서를 전달해 주었다.지수는 모니터에 떠오른 문서의 내용을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갔다. 평가서에는 광산의 매장량과 원석의 품질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광산 구역의 80% 이상은 하이엔드급 에메랄드가 매장되어 있으며, 일부 다이아몬드 및 루비 매장 추정. 매장량 규모는 중형 광산 수준.’표면적인 조건만 놓고 본다면 패션 및 주얼리 대기업인 CB 그룹으로서는 눈이 뒤집힐 만한 노다지였다. 원석의 질이 하이엔드급이라는 대목만으로도 도진이 왜 사재와 사운을 쏟아부으려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하지만 의문이 남았다. 이렇게 매력적인 조건의 광산이라면 왜 자본력과 정보력이 뛰어난 아스테리아가 진작에 손을 떼고 철수했는가 하는 점이었다.지수는 지현에게 전화를 걸어 직구로 물었다."오빠, 평가서 봤어. 원석 질도 하이엔드급이고 매장량도 중형 광산 정도면 대박인데…… 아스테리아는 왜 이걸 중간에 포기한 거야?"수화기 너머로 지현의
슬비를 만나고 잠시 RV에서 현재까지 도진의 회사에 투자된 내역을 훝어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지수는 아랫쪽의 축축한 감각에 번쩍 눈을 떳다.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한 것이다. 임신이라는 희망이 이내 절망으로 뒤바뀌는 이 지독한 상실감은, 몇번을 겪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평소와 다르게 일찍 돌아온 도진은 지수를 찾으며 방문을 열었을때 무기력하게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는 지수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 시술은 유난히 지수를 갉아먹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된 지수를 보며, 힘들었을 순간 곁을 지켜주
아침에 일어난 지수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옆자리를 보았다. 몇일 집에 잘 들어오던 도진은 어젯밤 들어오지 않았다.생리가 시작하기 전에 느껴지는 익숙한 배의 묵직한 불편감에 불안감이 든 지수는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만지며 제발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과 편하게 강도진을 떠나기 위해 이번에도 실패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양가적인 생각에 웃음이 났다. 잠시 후 오랫만에 슬비를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던 중 가정부의 통화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이번에는 사장님께서 가출하신 것 같아요. 집에 안들어 오시네요. 아마 작은
진우가 근무하는 HN은행 근처의 조용한 카페. 진우는 초조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슬비를 바라보았다. 슬비는 지현의 비서답게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박진우씨"진우는 서류를 열어보려다가 멈칫하며 슬비를 응시했다."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그리고 이지현태표님의 비서께서 왜 저를 찾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저희 은행은 GS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슬비는 차갑지만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며 서류봉투를 눈짓했다. 거기에는 슬비가 미리 준비한
지수는 사무실 문 앞에서도 도진과 수진의 적나라한 대화를 듣고 있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도진의 목에 팔을 감으며 지수를 반히 쳐다봤다. 도진은 그런 수진을 보며 한 번 씩 웃고는, 손으로 수진의 허리를 쓸며 차갑게 지수를 쳐다봤다" 왜 왔어? 여기가 니가 오고 싶으면 오는 놀이터야?"지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진이 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지수는 도진의 물음에 대답대신 들고 온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툭 던져두고 차갑게 돌아서려했다. 그런 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