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지수는 도전에게 연락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119를 불렀다. 하지만 출산이 임막한 임산부처럼 부푼 배때문에 혼자서 움직이는 것조차 무리였다. 지수는 필사적으로 옆방에 잠든 가정부를 불렀다.
"아줌마 아줌마...! 하아, 남 좀... 도와주세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문트에 타고 넘고오는 가정부의 코고는 소리뿐이었다. 이것이 이 집에서 지수의 위치였다. 남편의 무관심 속에 고용인에게조차 무시당하는 철저한 그림자 같은 아내.
지수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K국에 있는 부모님이나 오빠에게 연락한다면 당장이라도 날아오겠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타국인 A국에 와서 만난 친구들은 거의가 간호사거나 가정이 있어 새벽 시간에 도움을 청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K국에서의 지수와 달리, 이곳에서의 지수는 급할 때 도움을 청할 가족도 친구도 없는, 길가에 버려진 강아지 같은 신세였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내 가장 화려해야할 20대가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걸까...'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더 던 중, 바닥에 힘없이 떨어져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혹시나 도진일까 하는 덧없는 디대를 품고 전화를 받았으나, 수화기 너무의 목소리는 잔인할 정도로 정중 했다 . "119입니다. 신고자분, 어디 계신가요?"
혹시나는 없었다. 지수는 눈물을 닦으며 희미한 냉소를 지었다.
"제가 혼자 움직일 수가 없어요 비빌번호 알려 드릴테니 집으로 들어와 주세요."
지옥 같았던 밤은 그렇게 구급차 안에서, 그리고 차가운 응급실 침대 위에서 끝이 났다.
" 복수가 평소보다 많이 찼네요. 힘드셨겠어요. 너무 많이 빼면 몸에 무리가 생기니 일단 2L정도 빼고 경과를 보겠습니다."
의사의 말 뒤로 복부에 익숙한 통증이 느껴졌다. 지난 7일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느꼈던 복수를 빼기위한 굵은 바늘의 차가운 느낌과 복부의 살과 복막을 뚫는 차가운 감각과 통증이었다. 복수가 빠지면서 지수의 호흡은 조금씩 편안해졌고, 비로고 얕은 설잠에 들 수 있었다.
그시간 도진은 고등학교 동창인 민수와 지철 그리고 수진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민수는 계속 울리는 도진의 휴대폰을 힐끗거렸다.
" 오늘따라 제수씨 집착이 심하네. 이 정도 안 받으면 포기 해야 하는거 아니야?"
"냅둬 제수씨가 그런게 한 두번이야? 오늘도 별일 아닌걸로 전화해서 분위기 망칠려고 하겠지"
민수와 지철의 비아냥에도 도진은 아무 맣없이 온더락 잔을 비웠다. 곁에 있던 수진이 도진의 팔을 살면시 흔들며 끼어들었다.
" 그래도 도진아, 한 번 받아봐. 진짜 급한 일일지도 모르잖아. 지수씨 얼마 전에 또 난자 채취했다며? 난 임신이 그렇게 힘든건지 몰랐어. 나는 그런 고민 없이 임신과 출산을 했잖아."
수진의 가시 돋친 동정에 도진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무시해도 관찮아.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할꺼야. 집에 혼자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근데 너는 집에 안 가도 괜찮아? "
" 괜찮아 애들은 시댁에 있고 쓸모없는 남편은 출장이야. 왜? 내가 갔으면 좋겠어?"
대답하며 눈을 흘기는 수진을 보며 도진은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자신의 무릎위에 올렸다.
" 설마 그럴꺼라고 생각했어? 나는 니가 그 남자 곂에 있는 1분 1초도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내 여자가 감히 그런 격떨어지는 사람들과 함게 살아야 한다는게 속상할 뿐이야 "
지수가 죽음의 공포속에 홀로 사투를 벌일 때 도진은 자신의 무관심 속에 서서히 시들어가는 지수를 잊은채 새로운 사랑과 술에 취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었지만, 도진은 지수가 잠든 안방에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닫힌 문 너머로 느껴지는 지수의 숨소리가 마치 자신을 꾸짖는 환청처럼 들렸다. 수진의 아이, 그리고 지수가 데려오려는 이름 모를 아이. 두 생명 사이에서 도진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수진의 아이를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지수와 이혼해 가문을 등질 수도 없는 외통수였다.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다크서클이 튱튱하게 내려앉은 모습으로 서재를 나선 도진이 처음 마주한 것은 지수가 아닌 수진이었다.“니가…… 여긴 왜 있는 거야?”당황한 도진이 수진의 팔을 잡아 서재 안으로 급하게 끌어당기며 물었다. 하지만 수진은 당황한 기색 없이, 자신의 팔을 거칠게 쥐고 있는 도진의 손가락을 하나씩 여유롭게 풀어냈다. 그녀의 손길엔 묘한 소유욕이 서려 있었다.“강 대표님, 오늘 비공개 입찰이 있는 날이라 대표님의 의상을 준비해 드리러 왔습니다.”수진은 연인 강도진이 아닌, 대표이사 강도진을 보필하는 완벽한 비서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공적인 태도와 빈틈없는 차림새에 도진은 오히려 자신이 과민반응을 보였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수진이 코디해준 3피스 스트라이프 수트에 폭이 좁은 넥타이, 그리고 붉은 선혈처럼 빛나는 루비 핀과 커프스링크까지 차려입은 도진은 아침을 먹고 있던 지수의 눈치를 보았으나, 지수는 평소와 다름없이 우아하고 담담했다. 도진은 수진과 함께 마이바흐에 올라타 그녀가 준비한 샌드위치로 허기를 채우며 회사로 향했다.하지만 집무실에 도착한 이후부터 기묘한 위화감이 도진을 괴롭혔다. 서류를 검토하던 도진은 손에 쥔 만년필의 생소한 감촉에 미간을 찌푸렸다. 수진이 새로 준비한 한정판 만년필이었지만, 도진의 손엔 도무지 붙질 않았다.“수진아, 전에 있던 만년필 어디 갔어?”수진은 도진의 질문에 짧게 인상을 쓰더니, 책상 한구석 잡동사니를 모아둔 작은 상자에서 낡
최태준 실장의 하루하루는 절망에 가까웠다. 아스테리아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거대했다. 공급처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움직였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원석의 질이 준수하면 단가가 상상을 초월했고, 가격을 맞추려 들면 꺼내 드는 원석마다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시장가 70%’라는 지현의 호의가 단순한 배려가 아닌, 거대한 제국을 지탱하던 주춧돌이었음을 태준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한편, 아스테리아의 공문을 받은 후 심란해진 도진은 지철이 운영하는 클럽을 찾았다. 2층 VIP 룸에는 친구 민수와 지철이 이미 독한 위스키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오늘 수진 씨는 같이 안 왔어? 임신했다고 유세 부리더니.”민수가 짓궂게 안부를 물었지만, 도진은 피곤한 듯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야근한다고 늦게 들어갔어. 하루쯤은 일찍 가서 쉬어야지.”“오~ 수진 씨도 이제 일을 하는 거야? 그 비서직인가 뭔가?”“됐고, 술이나 마시자. 여자 부를 기분 아니니까 조용히 마셔.”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민수가 자신의 휴대폰을 흔들며 지철에게 말했다.“너 저번에 도진이네 행사 안 왔지? 내가 거기서 끝내주게 예쁜 연주자를 봤는데 너도 볼래? 여기 찍어놨어.”민수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영상을 재생했다. 지철이 흥미로운 듯 화면 속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영상이 시작되자 지철의 눈이 커졌다.“어! 저거 제수씨랑 수진 씨 아니야?”도진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뺏어 들었다. 화면 속에는 연주자 뒤로 지수와 수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지수를 향해 수진이 히스테릭하게 화를 내다 스스로 발을 헛디뎌 넘어졌고, 지수는 그런 수진을 필사적으로 붙잡아 세우고 있었다.순간 도진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얼마 전 병원에서 지수를 가해자로 몰아세우며 퍼부었던 독설들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 지수는 가해자가
도진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전날 밤, [The Origin] 쇼의 거대한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영상 속 ‘Z’의 손길이 망막에 낙인처럼 찍힌 탓이었다. 핀셋을 쥐던 절도 있는 각도, 원석을 털어내던 미세한 습관까지. 그 익숙한 실루엣은 지독하리만큼 지수를 닮아 있었다.쇼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도진은 홀린 듯 지수의 손만을 쫓았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눈을 비비며 일어난 지수의 손등 어디에도 세공사의 고단함이나 미세한 상처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3년 내내 도진의 곁을 지키던, 결점 하나 없이 매끄럽고 정갈한 ‘사모님’의 손 그대로였다.‘그래, 내 괜한 오해였어. 그 여자가 무슨 수로…….’도진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지수가 그 손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정교하게 흔적을 지웠는지, 그 부드러운 손끝 너머로 얼마나 날카로운 칼날을 갈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였다.반면 수진은 탐욕으로 잠을 설쳤다. 스크린 위에서 타오르던 옐로 다이아몬드, 수백 개의 멜리 다이아몬드, 그리고 차가운 블랙 로듐으로 조형된 장미 줄기. 복귀작 ‘이별’이 뿜어내던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자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반드시 저 보석을 내 목에 걸고 말겠어.’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 목줄이 될지도 모른 채, 수진의 심장은 비뚤어진 소유욕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다음 날 아침, 지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도진의 출근 준비를 돕고 있었다. 무심한 듯 우아한 손길로 넥타이를 매만져주자 도진의 팽팽하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졌다.“오늘 입양센터에 가볼 생각이야.”지수의 덤덤한 목소리에 도진의 눈이 커졌다. 최근 얼음처럼 차갑기만 하던 지수가 먼저 예전처럼 자신을 챙기며 ‘입양’을 언급하다니. 도진은 전날의 불안이 완전히 씻겨 내려가는 해방감을 느꼈다.“그래,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조심히 다녀와.”
전 세계 패션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거대한 해일, [The Origin] 쇼가 마침내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K국 최고의 보석 유통 기업이자 원석 공급의 거대 축인 ‘오닉스 사’의 수장 지현이 주최한 이번 쇼는 단순한 패션쇼 그 이상이었다. 자회사인 ‘아스테리아’가 보유한 희귀 원석의 압도적 위상을 각인시키기 위해, 양국을 대표하는 정상급 디자이너 20명이 선발되어 아스테리아의 원석으로 빚어낸 결정체들을 선보이는 자리였다.하지만 업계가 진정으로 술렁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번 쇼가 디자이너들의 경연장이자, 동시에 수년간 자취를 감췄던 전설적인 디자이너 ‘Z’의 복귀를 공식화하는 거대한 무대로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행사장 로비는 선택받은 자들의 열기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그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도진과 수진이 발을 들였다.수진은 입구에서부터 한껏 어깨를 치켜세웠다. 지수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도진의 공식적인 파트너로 선 이 순간이 그녀에겐 인생의 정점이었다. 지수 일행이 서 있는 로비 한복판에 다다르자, 수진은 보란 듯이 어깨를 내리고 살짝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제 배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도진의 아이를 가졌다는 강력한 ‘정당성’을 과시하려는 비릿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지수 곁에 선 남자를 확인한 순간, 수진의 표정에 날카로운 금이 갔다.“……박진우?”경멸이 섞인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기억하는 전 남편은 평범한 은행원의 틀에 갇힌 지루한 남자였다. 하지만 오늘 그곳의 진우는 달랐다. 최고급 비스포크 수트와 능숙한 매너.
지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서울의 부와 권력이 응집된 성북동의 한 저택. 시향회에서 안목을 나눴던 정계의 거물, 강인주 여사와의 만남을 위해서였다.저택의 입구에서 검은색 슬랙스에 은회색의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지수는 자신의 옷차림을 한 번 더 점검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하지 않으나 기품 있는 차림새는 상대에 대한 예우인 동시에, 스스로의 안목을 증명하는 명함과도 같았다.“여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지수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강 여사가 평소 수집에 열을 올린다는 정보를 입수해 공들여 구한 ‘달항아리’였다. 티 없이 맑은 백자의 유려한 곡선을 확인한 강 여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뭘 이런 걸 다 준비했어.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작은 성의입니다. 여사님의 공간에 이 항아리의 여백이 편안하게 스며들었으면 좋겠습니다.”자신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존중하는 지수의 화법은 강 여사의 꼿꼿한 자존심을 기분 좋게 충족시켰다. 지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물었다.“여사님의 탁월한 안목이 오늘은 어떤 귀한 자리에 머물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지수의 말 끝에는 불필요한 서두도, 조급한 제안도 없었다. 그저 고요한 응시만이 강 여사에게 전달될 뿐이었다. 강 여사는 지수의 그 기분 좋은 당당함에 화답하듯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석 달 뒤에 내 딸아이 결혼식이에요. 드레스나 턱시도는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내 의상이 문제네. 시향회 때 보여준 그 완벽한 스타일링이 필요해서 말이야. 혹시 한복 디자인도 가능한가?”지수는 강 여사에게 오기 전 파악했던 혼사 정보를 상기했다. 여당 중진 의원의 딸과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포식자라 불리는 기업
블레싱 나이트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도진과 수진이 발을 들였다. 오늘의 드레스 코드는 ‘미드나잇 블루 앤 실버’. 밤하늘의 깊은 청색과 은하수 같은 은빛이 어우러진 연회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보석함 같았다.도진은 수진이 고심해서 골라준 미드나잇 블루 수트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행사장에 들어선 지 5분도 되지 않아, 도진은 주변의 시선이 비릿한 조소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저 패턴…… S&C의 시그니처 아닌가?” “맞네. CB 그룹 대표가 하필이면 합병 전쟁 중인 경쟁사 메인 컬렉션을 입고 오다니. 드레스 코드는 맞췄지만, 상도덕은 내다 버렸군.”수진은 당황한 도진의 안색도 모른 채, 제 허리에 감긴 실버 시퀸 드레스의 자락을 매만지며 우쭐거렸다. “도진 씨, 다들 우리만 봐요. 미드나잇 블루가 당신한테 정말 잘 어울린다니까!”수진은 몰랐다. 지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지수는 도진의 비즈니스 관계도를 머릿속에 통째로 넣고 의상을 골랐었다. 하지만 수진에게 의상은 그저 ‘예쁘고 비싼 것’일 뿐이었다.도진은 소매 끝단 단추 구멍에 미세하게 새겨진 S&C의 은색 심볼을 발견한 순간, 그것이 마치 살을 지지는 낙인처럼 느껴져 숨이 막혔다. 평소라면 지수가 수만 번 확인했을 그 작은 디테일이, 이제는 그의 무능과 수진의 무지를 폭로하는 지독한 증거가 되어 소매 끝에서 차갑게 번득이고 있었다.급하게 오느라 수진이 준비한 옷을 아무 생각 없이 걸친 제 잘못도 있었지만, 도진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치미는 수치심에 도진은 수진의 손을 날카롭게 뿌리쳤다.“우리가 S&C와 경쟁 중인 거 잊었어? 지금 날 망신 주려고 작정한 거야?”도진은 수진을 매섭게 비난하며 게스트룸으로 향했다. 최태준 비서실장에게 급히 연락해 CB의 수트를 가져오라 명령했지만, 급조된 의상은 드레스 코드는 맞췄을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