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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그 곳에 있구나

작가: 릴리
last update 게시일: 2026-04-22 17:00:20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

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

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아를 제외한 부속기관만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질환입니다. 

안타깝지만 태아는 자라지 않기때문에 소파술만이 유일한 치료방법 입니다."

순간, 지수의 세상이 암전되었다. 충격으로 정신을 잃어가는 지수를 붙잡으며 도진이 비명 섞인 질문을 던졌다.

"검사가 잘 못 되었을 가능성은 없나요?오진일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의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맞이한 것은 하얀 병실 천장과 소독약 냄새였다. 

도진은 지수의 손을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지수야, 다른 병원 가보자. 여긴 돌팔이가 분명해. 우리아이가 자라지 않다니, 그게 말이 돼?" 

도진의 절규 섞인 슬픔 앞에 지수는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후 찾아간 세 군데의 병원에서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후 지수는 비로소 입을 뗏다.

"소파술 받겠습니다." 

도진은 경악한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지수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해? 조금만 더 기다려 보면 혹시라도....!"

지수의 눈빛은 단호했고,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나 간호학 전공이야 거기다 부인과에 관심이 많아서 제일 열심히 공부했었어. 더 이상 임신을 유지하면 아이도 힘들고 나도 위험해져. 며칠 안 되었지만,난 우리 아이가 아픈 것 싫어." 

지수의 결정은 냉철한 이성이 아니라, 엄마로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그러나 도진에게 지수의 단호함은 '비정함'으로 잃혔다. 아이를 쉽게 포기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도진은 당황스러움을 넘어선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우리 아이야! 어떻게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가 있어! "

도진의 외침이도 지수는 그저 쓸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지수는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다섯 번의 난임 시술을 감내했다. 도진은 그 힘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이를 포기한 지수가 당연히 감당해야 할 고통'이라며 그녀를 방치했다.

지수가 홀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도진의 마음은 서서히 지수라는 성역에서 빠져나와 낯선 곳을 향하고 있었다.

도진은 조용히 지수에게 다가가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만지듯 지수의 눈물을 닦아주고 방을 나나오던 도진의 휴대폰이 반짝였다. 화면에 뜬 이름은 수진이었다. 도진은 조용히 지수와의 상념에서 깨어나 욕망의 현실로 발을 들였다.

다음날 지수는 난임치료로 얇아진 자궁 내막과 저하된 난소 기능을 확인하려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최소 1년은 시술을 중단해야 한다고 선고했다. 지수는 남아있던 6개의 난자는 냉동 보관 하고 가능성이 희박한 3개의 배아는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마지막 희망을 쓰레기통에 전져버리는 폐기 동의서에 서명하고 돌아서는 순간, 진료실 너머에서 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3개월이래. 첫 임신도 아닌데 도진씨 아이라 그런지 더 사랑스러워"

수진의 목소리가 지수의 귀에 들렸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수진이 말하는 '3개월 전'은 도진이 술에 취해 그녀와 처음 밤을 보냈던 시기였다. 

피임을 철저히 챙겼다고 믿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안개처럼 불명확했다. 결국 도진은 자신의 비겁함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기로 했다.

"이제 쇼핑하러 가자. 하지만 많이 걸으면 안 되니까 vip서비스를 이용하자. 백화점에 미리 연락해 뒀어."

도진의 다정한 호위는 지수가 잊고 있던 다정한 온기였다. 수진은 도진의 다정한 호위를 받으며 원무과 앞에 앉아 있는 지수를 향해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수진의 화려한 옷차림과 도진의 헌신적인 태도는 피폐해진 지수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지수의 손에 쥐어져 있던 진료비 영수증은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 종이 조각에는 지수가 포기해야 했던 생명의 가치과, 도진이 버린 신뢰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수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박힌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도진은 수진에게 모든 신경은 쏟은 탓에 곁에 있던 지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지수에게 포상기태는 아이를 잃은 슬픔이었지만, 도진에게 그것은 지수를 버리고 수진을 선택할 완벽한 핑계가 되어 있었다. 

가장 잔인한 축복이 수진의 배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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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진의 집에서 짐을 정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담백했다. 아니, 그것은 정리라기보다 ‘삭제’에 가까웠다. 지수는 거대한 드레스룸에 가득 찬 명품 백들과 화려한 가구들을 무미건조하게 훑어보았지만, 챙겨갈 것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보금자리에 도진의 손길이나 흔적이 조금이라도 묻은 것을 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3년이라는 세월 중 지수가 챙긴 것이라곤 원석과 비즈가 잠든 보석함 세 개,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담긴 포트폴리오와 노트북, 드로잉 패드가 전부였다.작은 가방 하나만을 든 채 지수가 도착한 곳은 고급 주택 단지의 정점이라 불리는 ‘리버파크’였다. 이곳은 단순히 비싼 집이 아니었다. 부와 명예를 넘어, 진짜 자격을 가진 자만이 허락받는 일종의 훈장과 같은 성역이었다. 도진이 소유한 '포레스트'가 과시를 위한 성벽이었다면, 이곳은 지수에게 있어 완전한 해방을 뜻하는 요새였다.지수는 두 채의 집을 하나로 합친 독특한 구조를 선택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벽히 분리된 두 공간은 지수의 새로운 세계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먼저 거주 공간은 대리석과 가죽으로 점철되었던 도진의 차가운 집과는 달리, 스칸디나비아 스타일과 휘게 인테리어가 따사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거실의 통창을 열자 푸른 사파이어를 닮은 청하강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공간에는 지수가 가장 아끼는 포근한 코튼 향과 우아한 동백꽃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도진의 옷깃에서 나던 비릿한 장미 향이 아닌, 오직 지수 자신만을 위한 고결하고 깨끗한 향취였다.반대편 문을 열고 들어선 작업실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차분한 우드 앤 화이트 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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