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슬비는 장기간의 해외 출장에서 복귀하자마자 지현의 사무실로 향했다. 문 앞에서 몇 번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거울도 보지 않은 채 떨리는 손으로 화장을 고쳤다. 심호흡 끝에 노크를 하고 들어선 사무실. 지현은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한 3피스 정장 차림으로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헤어와 지적인 금테 안경. 그 완벽한 모습에 슬비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서 있었다. 20년을 봐온 얼굴인데도, 그를 마주할 때면 매번 첫사랑의 열병이 도졌다. 정적을 깬 건 지현의 나직한 음성이었다.
“언제까지 구경할 거야? 계속 볼 거면 관람료라도 내고 보든가.”
서류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채 던진 농담에 슬비의 양 볼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도진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전날 밤, [The Origin] 쇼의 거대한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영상 속 ‘Z’의 손길이 망막에 낙인처럼 찍힌 탓이었다. 핀셋을 쥐던 절도 있는 각도, 원석을 털어내던 미세한 습관까지. 그 익숙한 실루엣은 지독하리만큼 지수를 닮아 있었다.쇼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도진은 홀린 듯 지수의 손만을 쫓았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눈을 비비며 일어난 지수의 손등 어디에도 세공사의 고단함이나 미세한 상처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3년 내내 도진의 곁을 지키던, 결점 하나 없이 매끄럽고 정갈한 ‘사모님’의 손 그대로였다.‘그래, 내 괜한 오해였어. 그 여자가 무슨 수로…….’도진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지수가 그 손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정교하게 흔적을 지웠는지, 그 부드러운 손끝 너머로 얼마나 날카로운 칼날을 갈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였다.반면 수진은 탐욕으로 잠을 설쳤다. 스크린 위에서 타오르던 옐로 다이아몬드, 수백 개의 멜리 다이아몬드, 그리고 차가운 블랙 로듐으로 조형된 장미 줄기. 복귀작 ‘이별’이 뿜어내던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자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반드시 저 보석을 내 목에 걸고 말겠어.’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 목줄이 될지도 모른 채, 수진의 심장은 비뚤어진 소유욕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다음 날 아침, 지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도진의 출근 준비를 돕고 있었다. 무심한 듯 우아한 손길로 넥타이를 매만져주자 도진의 팽팽하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졌다.“오늘 입양센터에 가볼 생각이야.”지수의 덤덤한 목소리에 도진의 눈이 커졌다. 최근 얼음처럼 차갑기만 하던 지수가 먼저 예전처럼 자신을 챙기며 ‘입양’을 언급하다니. 도진은 전날의 불안이 완전히 씻겨 내려가는 해방감을 느꼈다.“그래,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조심히 다녀와.”
전 세계 패션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거대한 해일, [The Origin] 쇼가 마침내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K국 최고의 보석 유통 기업이자 원석 공급의 거대 축인 ‘오닉스 사’의 수장 지현이 주최한 이번 쇼는 단순한 패션쇼 그 이상이었다. 자회사인 ‘아스테리아’가 보유한 희귀 원석의 압도적 위상을 각인시키기 위해, 양국을 대표하는 정상급 디자이너 20명이 선발되어 아스테리아의 원석으로 빚어낸 결정체들을 선보이는 자리였다.하지만 업계가 진정으로 술렁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번 쇼가 디자이너들의 경연장이자, 동시에 수년간 자취를 감췄던 전설적인 디자이너 ‘Z’의 복귀를 공식화하는 거대한 무대로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행사장 로비는 선택받은 자들의 열기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그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도진과 수진이 발을 들였다.수진은 입구에서부터 한껏 어깨를 치켜세웠다. 지수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도진의 공식적인 파트너로 선 이 순간이 그녀에겐 인생의 정점이었다. 지수 일행이 서 있는 로비 한복판에 다다르자, 수진은 보란 듯이 어깨를 내리고 살짝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제 배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도진의 아이를 가졌다는 강력한 ‘정당성’을 과시하려는 비릿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지수 곁에 선 남자를 확인한 순간, 수진의 표정에 날카로운 금이 갔다.“……박진우?”경멸이 섞인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기억하는 전 남편은 평범한 은행원의 틀에 갇힌 지루한 남자였다. 하지만 오늘 그곳의 진우는 달랐다. 최고급 비스포크 수트와 능숙한 매너.
지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서울의 부와 권력이 응집된 성북동의 한 저택. 시향회에서 안목을 나눴던 정계의 거물, 강인주 여사와의 만남을 위해서였다.저택의 입구에서 검은색 슬랙스에 은회색의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지수는 자신의 옷차림을 한 번 더 점검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하지 않으나 기품 있는 차림새는 상대에 대한 예우인 동시에, 스스로의 안목을 증명하는 명함과도 같았다.“여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지수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강 여사가 평소 수집에 열을 올린다는 정보를 입수해 공들여 구한 ‘달항아리’였다. 티 없이 맑은 백자의 유려한 곡선을 확인한 강 여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뭘 이런 걸 다 준비했어.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작은 성의입니다. 여사님의 공간에 이 항아리의 여백이 편안하게 스며들었으면 좋겠습니다.”자신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존중하는 지수의 화법은 강 여사의 꼿꼿한 자존심을 기분 좋게 충족시켰다. 지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물었다.“여사님의 탁월한 안목이 오늘은 어떤 귀한 자리에 머물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지수의 말 끝에는 불필요한 서두도, 조급한 제안도 없었다. 그저 고요한 응시만이 강 여사에게 전달될 뿐이었다. 강 여사는 지수의 그 기분 좋은 당당함에 화답하듯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석 달 뒤에 내 딸아이 결혼식이에요. 드레스나 턱시도는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내 의상이 문제네. 시향회 때 보여준 그 완벽한 스타일링이 필요해서 말이야. 혹시 한복 디자인도 가능한가?”지수는 강 여사에게 오기 전 파악했던 혼사 정보를 상기했다. 여당 중진 의원의 딸과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포식자라 불리는 기업
블레싱 나이트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도진과 수진이 발을 들였다. 오늘의 드레스 코드는 ‘미드나잇 블루 앤 실버’. 밤하늘의 깊은 청색과 은하수 같은 은빛이 어우러진 연회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보석함 같았다.도진은 수진이 고심해서 골라준 미드나잇 블루 수트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행사장에 들어선 지 5분도 되지 않아, 도진은 주변의 시선이 비릿한 조소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저 패턴…… S&C의 시그니처 아닌가?” “맞네. CB 그룹 대표가 하필이면 합병 전쟁 중인 경쟁사 메인 컬렉션을 입고 오다니. 드레스 코드는 맞췄지만, 상도덕은 내다 버렸군.”수진은 당황한 도진의 안색도 모른 채, 제 허리에 감긴 실버 시퀸 드레스의 자락을 매만지며 우쭐거렸다. “도진 씨, 다들 우리만 봐요. 미드나잇 블루가 당신한테 정말 잘 어울린다니까!”수진은 몰랐다. 지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지수는 도진의 비즈니스 관계도를 머릿속에 통째로 넣고 의상을 골랐었다. 하지만 수진에게 의상은 그저 ‘예쁘고 비싼 것’일 뿐이었다.도진은 소매 끝단 단추 구멍에 미세하게 새겨진 S&C의 은색 심볼을 발견한 순간, 그것이 마치 살을 지지는 낙인처럼 느껴져 숨이 막혔다. 평소라면 지수가 수만 번 확인했을 그 작은 디테일이, 이제는 그의 무능과 수진의 무지를 폭로하는 지독한 증거가 되어 소매 끝에서 차갑게 번득이고 있었다.급하게 오느라 수진이 준비한 옷을 아무 생각 없이 걸친 제 잘못도 있었지만, 도진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치미는 수치심에 도진은 수진의 손을 날카롭게 뿌리쳤다.“우리가 S&C와 경쟁 중인 거 잊었어? 지금 날 망신 주려고 작정한 거야?”도진은 수진을 매섭게 비난하며 게스트룸으로 향했다. 최태준 비서실장에게 급히 연락해 CB의 수트를 가져오라 명령했지만, 급조된 의상은 드레스 코드는 맞췄을지언정
CB 그룹 대표실의 묵직한 마호가니 문이 열리고, 수진이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을 들였다. 도진의 ‘개인 비서’라는 명찰을 단 첫 출근길, 그녀의 손에는 서류 가방 대신 직접 조향한 향료병들과 화려한 소품들이 가득했다. 수진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집무실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은 이제 지수의 흔적을 지우고 오직 자신의 색으로만 채워질 공간이었다.수진은 가장 먼저 창문을 넓게 열어젖혔다. 지난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수의 취향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형성되었던, 은은한 시더우드와 숲의 내음이 감돌던 사무실 공기를 사정없이 환기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조향한 진한 장미 향 디퓨저를 곳곳에 배치했다. 머리가 아릿할 정도로 달콤하고 비릿한 향기가 순식간에 공간을 점령했다.이어 그녀의 손길은 도진의 집무 책상으로 향했다. 지수가 선물하여 도진의 손때가 짙게 묻어있던 만년필을 대신하여, 그곳에 자신이 새로 구입한 화려한 만년필로 채우고 수진은 만족의 미소를 띠었다.“이제야 진짜 도진 씨 방 같네.”수진은 자신의 향과 물건으로 채운 업무 공간을 지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지수의 세심한 손길이 닿아 칼같이 정리되어 있던 도진의 슈트 사이에서, 그녀가 골라준 무채색 넥타이들을 거칠게 뒤로 밀어버렸다. 그 자리에는 자신이 선물한, 채도가 높고 화려한 무늬의 실크 타이들이 전면에 배치됐다. 도진의 몸에 닿는 모든 것을 자신의 취향으로 물들이겠다는 명백한 영역 표시였다. 도진의 일상이 오직 자신만을 향하도록 만드는 작업에 수진은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오후가 되어 외부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도진은 집무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진한 장미 향에 멈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평정심을 유지해주던 차분한 향기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앉은 자극적인 냄새가 묘하게 그의 신경을 긁었다. 수진이 달려와 재킷을 받아냈지만, 도진의 시선은 책상 위 낯선 금장 소품들에 머물렀다
K국의 경제 지도를 움직이는 거대 기업 '오닉스'의 사옥 최상층. 평소라면 오차 없이 완벽한 슈트 차림으로 부하 직원들을 긴장시켰을 지현이, 오늘따라 헝클어진 머리와 살짝 풀어진 넥타이 차림으로 초조하게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었다.[나 급해. 제발 도와줘.]메시지를 전송한 지현이 마른세수를 하며 읊조렸다.“이 녀석들에게만은 절대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았는데.”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10년 지기 소꿉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오~ 황태자 이지현이 우리에게 SOS를?][이건 백퍼 여자 문제다 ㅋㅋㅋ][이 형님들께 고하도록 허락하마.]친구들의 깐족거림에 지현의 잘생긴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건 10년 치 놀림감을 제 손으로 상납하는 꼴이었지만, 지금 그에겐 체면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고백 이벤트 아이디어가 필요해.]지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요란한 진동과 함께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지현은 모든 전화를 무심하게 거절하고 차가운 텍스트만 남겼다.[메시지로만 소통해.][진짜 이지현이 여자가 생겼어? 야, 내가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너의 성적 취향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했는 줄 알아?]‘나도’, ‘나도’ 연이어 올라오는 친구들의 고백에 지현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이놈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한 거야? 지현은 이 인간들과 인연을 끊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쏟아지는 아이디어들을 확인했다. 꽃길, 풍선, 공개 이벤트……. 지현은 그런 흔해 빠진 방식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담아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결국 친구들을 차단하듯 밀어내고 지현이 선택한 마지막 비상구는 동생 지수였다.“오빠!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어.&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