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기쁘지... 않아?"
수진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도진은 굳어있던 안면 근육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껍데기뿐인 미소가 그의 얼굴에 기괴하게 자리 잡았다. "당연히 기쁘지. 내일 병원 갔다가 아기용품부터 보러 가자. 전에 네가 갖고 싶다던 한정판 가방도 사줄게." 그의 다정한 음성에 수진은 안심한 듯 도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도진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안의 쓴 침을 삼켰다. 수진과 밀회를 즐기면서도 잠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피임을 챙겼던 자신이었다. '임신이라고?' 머릿속에 의구심이 뱀처럼 똬리를 틀었지만, 도진은 애써 부정했다. 어쩌면 이건, 지수를 주사기 무덤에서 구원해줄 선물이라고 스스로를 속였다."그런건 괜찮아 하지만 우리 아이가 사생아 소리 들을까.... 그게 걱정이야하지만 나는 너와 지수씨를 사의가 나빠지길 원하는 건 아니야."
수진의 자책하는 말투가 평소에는 자신을 향한 애정과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지금의 도진에게는 그저 무거운 납덩어리처럼 다가왔다. 이혼과 사생아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도진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어린 시절 여성편력이 심했던 아버지때문에 힘들어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자신은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하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단지 도진 자신만이 그 잔인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진에게 '아내'란, 처음부터 끝까지 지수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 문제는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아버지는 어머니를 울렸지만, 나는 지수를 울리지는 않아, 지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는 여전히 지수만을 사랑해.' 도진은 술잔 속에 비친 자신의 비겁한 눈을 피했다. " 너는 어떻게 할껀데?" 도진은 수진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난 이혼 할꺼야. 애들한테도 그런 가난한 아빠는 필요 없어. 난 이혼하고 양육권도 가져올꺼야. 도진아 내 아이들의 아빠가 되어줘" 수진은 눈을 내려깔며 처량하게 이야기 했다. 하지만 도진은 대답 대신 모호한 미소를 짓고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도진의 불명확한 대답이 비수처럼 날아와 수진의 가슴이 박혔다. 불안감이 검은 잉크처럼 퍼져 나갔지만, 수진은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지금 눈을 뜨면 눈 앞의 도진이 사라질것만 갔았다. ' 괜찮아. 다 잘될꺼야. 도진씨는 우리의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지도 않을 것이고, 나의 아이들도 사랑해 줄꺼야.' 수진은 떨리는 손으로 도진의 옷자락을 꽉쥐었다. 그것은 확신이라기보다,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 위에서 내뱉는 간절한 주문에 가까웠다.도진이 수진과 헤어진 후 집에 도착했을 때 수진은 악몽을 꾸고 있었다. 이불에 파뭍친 지수는 어깨를 떨며 울며 잠꼬대를 했다.
"아가 미안해 엄마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말을 들은 도진은 방을 나갈려다가 멈짓했다. '너도 그 날에서 벗었나지 못 했던거야?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소파술에 동의 했던거야.'도진의 기억은 3년정 어느날로 가있었다.
하이앤드패션을 지향하며 부분별한 사업확장을 하고 연이은 신제품의 실패로 도진의 CB그룹이 흔들릴때 지수는 자신의 비자금이라며 30억을 내밀었다. 차용증도 필요 없다며 내민 도움의 손길에 도진은 부부사의라도 금전관계는 깨끗해야 한다며 직접 차용증을 작성하여 지수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자금은 지금의 CB그룹을 만든 마중물이 되어 CB그룹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던 어느날 도진은 장미꽃 한다발과 지수가 좋아하는 망고케이크를 구입해 퇴근을 했다.특별한 기념일이 아닌 수많은 평범한 날을 지수가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지수는 장미를 품에 안고 환하게 웃으며 선물이야라는 말과 함게 임신테스트기를 내밀던 모습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도진의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도진아 너 아빠된것 같아." 그 말에 도진은 목이 메이고 가슴 깊은 곳에서 알수없는 만족감이 가득 채웠다. 수진이 도진의 곁에 다가와 조용히 도진의 얼굴을 쓸었다. "왜 울고 그래 좋은 일인데 울지마" 그 말에 도진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진은 수진을 조용히 안으며 말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널 만난게 이 생에 내가 가장 잘한 일이야 사랑해 지수야 내일 같이 병원가자 " 지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때 한줄기의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어둡고 짓눌린 방안.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빛 속에서, 수진은 홀로 TV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화면 속에서는 '참고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서 언론의 수십 가지 취재진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는 김미자의 모습이 잡히고 있었다. 그 마녀 같은 여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수진의 입술 사이로 자조 섞인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악마 같은 년…….'김미자가 내민 가짜 유전자 결과지 한 장 때문에, 수진은 강도진에게 잔인하게 버림받았다. 그뿐인가. 임신 당시 아들을 가졌다며 고맙다고 건넸던 임신 축하금 30억 원을 다시 내놓으라며 협박하고, 법원에서 지급보증서까지 받아내 수진의 목을 죄어왔던 그 악몽 같은 시간들이 선명하게 떠올라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수진은 눈을 차갑게 번뜩이며 노트북을 열었다.다른 강수한의 피해자들이 신분 노출이 두려워 익명의 뒤에 숨어 글을 올릴 때, 수진은 판을 뒤엎을 유일한 기회가 지금임을 직감했다. 수진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실명과 얼굴이 찍힌 신분증, 그리고 과거의 아픈 기록들을 담아 인터넷 메인 게시판에 글을 써 내려갔다.[한수진입니다. CB 강도진 씨와 김미자 이사장에게 당한 가짜 친자확인서 사기극을 폭로합니다.]수진은 강도진이 자신에게 던져주며 쫓아냈던 김미자 측 유전자 연구원의 '가짜 결과서'와, 자신이 직접 대형 병원에 의뢰해 받았던 '진짜 일치 결과서'를 스캔하여 함께 첨부했다.반향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수진의 실명 폭로와 명확한 물증은 가짜 유전자 연구소 사건에 기름을 부었다. 여론은 수진에 대한 거센 동정론과 함께, 강도진 역시 부모의 조작에 놀아난 '불쌍한 피해자'라는 프레임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그러나 그 잠깐의 동정론은 불과 몇 시간 뒤 터져 나온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김미자의 주선으로
지수가 건넨 거대한 건수를 쥐게 된 담당 검사는 윗선의 요구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곧 다가올 검찰 인사이동 시즌, 이번 사건은 단순히 개별 비리로 끝낼 것이 아니라 대대적인 '재벌가 비리 척결'이라는 명분을 걸고 판을 최대로 키워야 하는 대형 실적이었다.다음 날 아침, 중앙검찰청은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A국 유명 유전자 연구원에 대한 전격적인 압수수색을 발표했다.수십 명의 수사관들이 압수수색 상자를 들고 연구원 건물로 진입하는 모습이 수십 대의 카메라 라이브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었다. 검찰의 화려한 언론쇼와 함께, 거머니를 받고 특정 재벌가의 입맛대로 친자확인서를 조작해 준 장부와 음성 파일이 수사 선상에 올랐다는 사실이 세상에 까발려졌다.여론은 그야말로 폭발했다.[재벌가 돈질에 혈통까지 조작해 준 유전자 센터, 전격 압수수색.][네티즌 분노 "돈으로 피도 바꾸는 세상냐? 조작 피해자들에게 천문학적 배상하라!"]소셜 미디어와 주요 포털 사이트는 재벌가의 횡포를 규탄하는 글로 마비될 지경이었다.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요구와 함께, 문제의 유전자 연구원을 거액으로 후원하며 주물러온 '진짜 거물'이 누구인지 추적하는 네티즌들의 수사대가 가동되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거대한 불길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번져나갔다.유전자 연구소의 조작 비리 소식이 연일 메인 뉴스에 도배되자, 그동안 김미자와 강수한의 막강한 세력과 억압에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수많은 피해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거 강수한에게 성폭행을 당해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피해 여성들과, 김미자의 협박에 강제로 아이를 빼앗기거나 쫓겨났던 내연녀들이 인터넷 익명의 그늘 뒤에 숨어 피해 사실을 하나둘씩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익명] CB 강OO 회장의 성폭행 피해자입니다.사회초년생이었던 저를 회식 때마다 옆자리에 앉히며 신체 접촉을 시작하더니, 급기
며칠 동안 깊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지수는 청담동 제이아우라 사무실로 박진우와 이현을 불렀다. 차분한 찻잔의 김이 피어오르는 정적 속에서, 지수가 두 사람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김미자를 공격할 생각이에요."진우와 이현의 시선이 동시에 지수에게로 쏠렸다. 지수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그 첫 단추로, 그녀가 오랫동안 후원해 온 유전자 연구소를 타깃으로 잡았어요."지수의 결연한 선언에 진우는 가만히 지수의 손등을 따뜻하게 토닥여주며 묵묵한 응원을 보냈다.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던 이현이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유전자 검사 결과 조작 비리를 터뜨리는 게 가장 파급력이 크겠네요. 우선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소문을 퍼뜨려 밑작업을 치고, 그 뒤에 대형 탐사보도 프로그램에 익명 제보를 때리는 건 어떻습니까?""저도 그게 가장 완벽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보를 하려면 확실하고 명백한 물증이 있어야 해요."지수가 아쉬움이 섞인 한숨을 나지막하게 내쉬었다."우리가 가진 건 과거 강수한에게 성폭행을 당해 아이를 임신했던 유진 씨가, 가온이를 데리고 강도진의 본가에 갔을 때 김미자에게 직접 들었다는 정황 증언뿐이에요. 김미자가 자신이 후원하는 곳의 검사 결과가 아니면 믿지 않겠다고 했던 그 이야기요."그러자 이현이 피식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전혀 걱정할 게 없다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다."아, 그 걱정이라면 접어두셔도 됩니다, 대표님.""네?""예전에 강도진 아이 건으로 김미자의 뒤를 캐고 조사할 때, 이미 그 유전자 연구원 내부 비리 장부랑 검사 결과 조작 모의 정황이 담긴 녹음 파일까지 싹 다 확보해 뒀거든요."지수가 놀란 눈으로 이
성수동 메인 쇼와 바이어 피칭이 끝난 뒤, CB의 이번 F/W 시즌 수주 실적은 강도진의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제이아우라가 보여준 파격적인 성공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찰스 킴의 이름으로 발표한 세컨드 잡화 라인의 대박 덕분에 지난 시즌과 비슷한 수준의 매출은 방어할 수 있었다. 패션계의 냉정한 시선 속에서도 최소한의 체면은 차린 셈이었다.지난 수주일 동안 대표실과 작업실을 오가며 지쳐있던 도진은 드디어 며칠 만에 포스트 빌리지 자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집은 그저 몇 시간 눈만 붙이고 나가는 거처에 불과했다.거대한 포스트 빌리지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도진을 맞이한 것은 서늘하고 묵직한 적막뿐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사람의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다.한때 이 집을 채우고 있던 이지수와의 흔적은 이제 희미하게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예전처럼 지수의 부재가 도진의 가슴을 짓누르거나 괴롭히지는 않았다. 서서히 지수의 잔상은 도진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는 중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도진의 가슴 한구석을 송곳처럼 파고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수진이 낳았던 그 작은 아이. 핏덩이 시절 인큐베이터 안에서 힘겹게 숨을 내쉬다, 마침내 도진의 품에 안겨 가냘픈 온기를 전해주던 그 어린 생명의 촉감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블랙다이아몬드 사건으로 온 세상이 자신을 압박해 올 때, 도진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었던 그 아이.도진은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 수진이 아이를 위해 화려하게 꾸며두었던 아기방 앞이었다. 아이를 보낸 뒤 문을 잠가버린 채 단 한 번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곳이었다.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자, 오랫동안 갇혀있던 건조하고 먼지 쌓인 공기가 밀려 나왔다.불을 켜지 않은 어스름한 방 안, 도진은 천천히 아기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침대 모서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작은 오프화이트 빛 겉싸개가 눈에 들어
공기 중에 가죽 무두질 냄새와 특수 접착제 향이 서늘하게 감돌고 있었다. 한유현은 며칠째 밤을 지새운 탓에 핏발이 선 눈으로 정면에 올려진 세 종류의 구두와 두 종류의 가방 샘플을 바라보고 있었다.은은하면서도 묵직한 광택을 내뿜는 앤티크 샴페인 골드 장식, 절제되면서도 여성의 발목 라인을 가장 완벽하게 감싸 안는 사선 스트랩, 그리고 과한 장식을 배제한 채 오직 최고급 가죽의 결과 클래식한 골드 버클만으로 품격을 완성한 토트백. 강도진 대표가 지시했던 ‘찰스 킴의 드레스와 어우러지면서도 그 자체로 독보적인 상품성을 지닌 스페셜 잡화 라인’의 완성이었다."유현 디자이너님, 이거…… 진짜 미쳤는데요?"도진이 붙여준 보조 어시스턴트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샘플 구두의 골드 장식을 쓸어내렸다."찰스 디렉터님이 만든 그 딱딱한 드레스 아래에 이 앤티크 골드가 배치되면, 드레스까지 살고 구두는 구두대로 빛날 것 같아요. 당장 바이어 피칭에 내놓아도 대박 날 것 같습니다."유현의 가슴이 뜨겁게 요동쳤다. 찰스 킴의 그늘 아래서 이름 없는 어시스턴트로 짓밟히며 도면을 빼앗기고 뺨을 맞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강도진 대표님이 내준 칼날이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아.’유현이 결연한 표정으로 샘플들을 박스에 정성껏 포장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이 작품들은 도진이 준비한 프리오더 바이어 피칭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빛을 발할 터였다.다음 날 오전, VIP 및 글로벌 바이어 대상 CB 프리오더 피칭 현장.넓은 피칭룸 내부에는 서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찰스 킴은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바이어들에게 자신의 F/W 메인 드레스 라인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이어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이미 며칠 전 제이아우라의 밤 쇼를 경험한 그들에게, 찰스의 전통적인 드레스는 다소 답
유현은 밤을 새워 수십 장의 드레스를 그려 나갔다. 연필심이 무뎌지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짓무를 때까지 종이를 채웠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도진의 마음에 들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원석으로서는 아주 훌륭하지만…… 하이엔드 드레스의 중량감을 잡아줄 입체적인 구조나 패턴 계산에서는 다소 미숙하고 불안정한 스케치입니다."도진의 차갑고도 정교한 지적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초조함과 절망감에 입술을 깨물던 유현의 시선이, 책상 한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도진의 손수건에 닿았다. 깨진 찻잔 파편에 손을 벨 뻔했을 때, 도진이 손수 손가락을 감싸며 다정하게 닦아주었던 그 고급스러운 실크 손수건.유현은 홀린 듯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과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향수 냄새. 찰스의 그늘 아래서 이름 없는 어시스턴트로 짓밟히던 자신을 처음으로 '디자이너'로 바라봐 준 유일한 사람. 자신을 알아봐 준 첫 번째 구원자.'대표님에게 인정받고 싶어. 대표님이 완성된 내 드레스를 보고 미소 짓게 만들고 싶어…….'간절한 갈망이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피어오른 순간, 유현의 손가락 사이로 실크 손수건이 스르륵 흘러내리며 책상 위에 우아하고 입체적인 곡선의 주름을 만들어냈다.유현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억지로 계산해서 그려 넣은 각도가 아니었다. 겹겹이 층을 이루며 아래로 떨어지는 실크 특유의 자연스럽고 깊이감 있는 무게감!유현은 멈췄던 연필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도진이 지적했던 미숙한 중량감과 패턴 계산을 완벽하게 보완한, 마치 겹겹의 장미 꽃잎이 피어나는 듯한 드라마틱한 실크 러플 피날레 드레스가 스케치북 위로 미친 듯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그렇게 완성된 디자인이 도진의 앞에 펼쳐졌다.그곳에는 쇄골 라인을 과감하게 드러낸 오프화이트 튜브톱 드레스가 그려져 있었
전날 시어머니에게 수모를 당하고 돌아온 지수는 K국에 있는 오빠 이지현에게 연락을 했다. " 오빠~ 잘 지내? 너무 오랫만에 연락했지? 실은 나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서 ...." 지금 K국은 아침 6시였다. 지현은 시차도 잊은 채 걸려온 동생의 목소리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우리 공주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 줘야지. 무슨 일인데. 말만해. 오빠가 다 처리해 줄께."여전히 자신을 아껴주는 오빠의 음성이 지수는 목이 메었지만, 간신히 감정을 억눌렀다. " 오빠 나 아이가 생기면 혼자서 회사를 운영하기
3일간 안정을 취한 지수는 외출준비를 서둘렀다.거울 앞에 선 지수의 차림새는 단조로웠다. 연한 하슬색 원피스에 검은색 C사의 핸드백이 전부였다. 초췌해진 얼굴은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ㅇ낳았고 푸석해진 머릿결과 여전희 볼록하게 남아있는 복부는 지수를 실제보다 훨씬 지쳐보이게 했다.누가 이모습을 보고 스물여덟의 꽃다운 나이라 할까. K국의 공주님으로 불리던 지수는 이제 A국의 가정부보다 못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지수는 거울 속 낯선 여자를 뒤로 한채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집을 나섰다.그녀의 차는 도진이 3년전 결혼 기념으로 사준
7일간 입원 치료를 마치고 영양제로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지수는 배아 이식을 끝내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도진에게서는 단 한통의 연락도 없었다.지숙 역시 먼저 손을 내밀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적막하고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거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지수의 귓가에 가정부의 은밀한 전화 통화 소리가 드려왔다."네 사모님 진짜라니까요. 그 여자가 일주일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분명 다른 남자가 생긴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사장님은 방치할수는 없는 거죠 . 네 ,맞아요 제가 어떻게 사모님께 거짓말을 할
도진과 전화를 마친 지수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휴대폰을 조작했다. 익숙한 번호가 아닌, 철저히 숨겨두었던 가른 번호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실장인 혹시 오늘 CB 그룹과 투자 회의가 잡혀 있나요? "라고 물었다. " 네 사장님. 오늘 오후에 미팅이예정되어 있습니다. 혹시 변동사랑이 있으신가요?지수의 입가에 서늘안 미소가 번졌다. 도진이 그토록 화를 내며 중요하도고 외쳤던 미팅은 역시나 지수의 RV인벤스먼트와의 미팅이었다. " 네 변동 사항이 있습니다. 미팅은 그대로 진행해 주세요. 대신 계약서에 싸인은 하지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