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나는 온몸을 떨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 순간 유진이 갑자기 손을 뻗어 내 턱을 움켜쥐었다.
억지로 내 얼굴을 들어 올리게 했다.
날카로운 손톱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네 목숨이 네 마음대로 될 거라고 생각해?"
유진이 내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서서히 차갑게 변했다.
"난 아직 네 피가 필요해. 그러니까 넌 그렇게 쉽게 죽을 수도 없어."
그녀가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심지어 네가 언제 죽을지도 네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는 거야."
"정말 불쌍하다, 언니."
말을 마친 유진은 내 턱을 거칠게 놓았다.
그리고 가볍게 웃으며 내 옆을 지나갔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등이 문에 세게 부딪혔다.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유진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설마……
도윤이가 정말 나를 배신한 걸까?
문득 연회장에서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렇게 다정하고 진심 어린 눈빛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내가 자신의 여자 친구가 된 순간, 그는 정말 행복한 얼굴로 웃어 주었다.
그동안 나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그 모든 게 거짓말일 리 없어.
말도 안 돼!
도윤이는 나를 사랑해.
나는 그를 믿어야 해.
유진이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두 손으로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한서연, 정신 차려."
나는 혼잣말로 스스로를 다그쳤다.
겨우 몇 마디 들었다고 도윤이를 의심하면 안 되잖아.
더는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하면서 다른 생각을 잊어야 했다.
그때 문득 저녁 식사가 떠올랐다.
새어머니는 예전부터 내게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성가에서 먹고사는 만큼 집안일이라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떠맡아야 했다.
그래도 다행히 나는 요리를 좋아했다.
주방에 있을 때만큼은 잠시나마 모든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한식으로 저녁을 준비하기로 했다.
소고기와 당근, 양파, 표고버섯을 꺼냈다.
소고기 잡채를 만들 생각이었다.
된장찌개도 끓이고, 노릇하게 부친 계란말이와 밑반찬도 몇 가지 준비하기로 했다.
먼저 소고기를 얇게 썰어 간장과 배즙, 다진 마늘, 참기름을 넣고 골고루 버무렸다.
고기에 양념이 배도록 잠시 옆에 두었다.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강도윤과의 채팅창을 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전화를 걸었다.
그냥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었다.
유진이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도윤이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그런데……
전화벨이 한참 동안 울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유진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도윤 오빠는 정말 다정하더라…….'
나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설마 유진이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인 걸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스스로를 달랬다.
"분명 바쁜 걸 거야. 도윤이는 그룹 보안을 담당하잖아. 지금도 밖에서 순찰하고 있을지 몰라."
그래.
분명 그럴 거야.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당근과 양파, 표고버섯을 먹기 좋게 썰어 가지런히 놓았다.
불려 둔 당면도 냄비에 넣었다.
"진정해, 서연아."
나는 채소를 썰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도윤이를 믿어야 해."
그때였다.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했다.
한유진에게서 메시지가 온 것이었다.
화면을 내려다보니 음성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보낸 사람: 한유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채팅창을 닫으려던 순간, 실수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휴대폰에서 익숙하면서도 묘하게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도윤 오빠…… 나 좀 더 꽉 안아 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쨍그랑!
손에 들고 있던 접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미리 썰어 둔 토마토와 채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야! 한서연! 지금 뭐 하는 거야!"
주방을 관리하는 아주머니가 버럭 소리쳤다.
"눈은 장식이야? 멀쩡한 접시를 왜 깨뜨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방금 그 목소리……
분명 유진이었다.
그렇다면 유진이 부른 남자는……
도윤이였다.
"뭘 멍하니 서 있어? 빨리 치우지 않고!"
아주머니가 다가와 나를 거칠게 밀쳤다.
나는 몇 걸음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발바닥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깨진 도자기 조각이 신발 밑창을 뚫고 발바닥에 박힌 것이었다.
하지만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주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유진을 찾아가야 했다.
이 모든 게 사실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휴대폰 속 음성 메시지는 이미 재생이 끝난 뒤였다.
하지만 유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두 손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제발 아무것도 상상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당장이라도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유진의 방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마침내 유진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문은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도윤 오빠…… 조금만 살살……."
이어서 낮게 숨을 몰아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방 안에는 따뜻한 주황빛 조명이 켜져 있었다.
반쯤 열린 방문은 마치 일부러 틈을 남겨 둔 것처럼 보였다.
안에 있는 모습을 직접 확인해 보라는 듯이.
나는 문 앞에 서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야……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닐 거야.
떨리는 손을 들어 천천히 방문을 밀었다.
진한 향수 냄새와 묘하게 낯선 분위기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침대 위.
두 사람이 서로 뒤엉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유진은 남자의 목을 두 팔로 꼭 끌어안고 있었다.
다리까지 그의 허리에 감은 채 품에 안겨 있었다.
남자의 흰 셔츠는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져 있었다.
드러난 넓은 등은 너무나 익숙했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그 뒷모습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강도윤이었다.
정말 강도윤이었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나는 비명을 지를까 봐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남자가 문 앞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어두운 조명 아래, 마침내 그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수없이 입을 맞추고, 수없이 그의 품에 안겼던 얼굴.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욕망에 취한 표정만 가득했다.
눈물이 한 방울 뺨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나를 영원히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던 남자.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 줄 거라고 믿었던 남자.
그가 정말 내 여동생과 함께 있었다.
그것도……
내 스물한 번째 생일에.
“저 여기 있을게요.”그 말을 들은 윤시혁의 눈이 크게 뜨였다.“뭐라고?”서연은 두 손을 꼭 쥐고 다시 한번 말했다.“여기 있겠다고요.”시혁의 눈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그 순간, 마치 길고 긴 겨울이 끝나고 마침내 첫 햇살이 비친 것만 같았다.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오랜만에 보는 환한 웃음이었다.너무나 눈부신 그 미소에 서연의 마음도 잠시 흔들렸다.시혁은 그녀를 품에 안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하지만 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재빨리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손길을 피한 것이다.그녀는 어색한 듯 귀를 만지작거리며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대신 여기 있는 건 당신의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예요.”“…….”“당신을 용서했다는 뜻도 아니고, 다시 받아들이겠다는 뜻도 아니에요.”시혁이 뻗었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표정마저 굳어 버린 듯했다.몇 초가 지나서야 그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그럼 그다음은?”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서연은 망설이지 않았다.“해독이 끝나면 떠날 거예요.”시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방금 전까지 피어올랐던 희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감추지 못한 실망과 고통만이 남았다.서연은 그의 시선이 줄곧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는 걸 느꼈다.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그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 눈에 담긴 슬픔을 도저히 감당
“데려다줘요!”한서연이 다급하게 재촉했다.“지금 당장 그 사람을 만나야 해요!”직원은 갑작스러운 반응에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서연을 박현우의 개인 진료실로 안내했다.가는 내내 서연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머릿속에서는 직원이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윤시혁은 아직 해독하지 못했다.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에 더 큰 무리를 감수하기까지 했다.그런데도 자신은 그가 이미 괜찮아진 줄 알고 있었다.마침내 두 사람은 흰색 문 앞에 멈춰 섰다.“저…… 여기가 맞아요.”직원이 문 안쪽을 가리켰다.“박현우 선생님이 회장님을 치료하고 계실 거예요.”“고마워요.”서연이 조용히 감사 인사를 건넸다.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마치 더는 서연 곁에 있고 싶지 않은 것처럼.서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진료실 앞에 선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치료 중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잖아요!”문 안쪽에서 박현우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연은 문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예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쪽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현우가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방금 전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여긴 어쩐 일이에요? 어디 아파요?”서연은 긴장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손가락도 저도 모르게 꼼지락거렸다.“저…… 윤시혁 씨를 만나러 왔어요. 아까 점심을 가져다준 직원이 여기 계신다고 해서요.”“아, 그 사람은…….”박현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턱을 문지르며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한 눈치였다.그때 진료실 안쪽에서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여보내.”윤시혁의 목소리였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서연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빠르게 뛰었다.박현우는 난처한 듯 한숨을 내쉬고는 옆으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저기요! 들어가도 돼요?”여자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답할 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검은색 치마에 흰 앞치마를 두른 여자 직원이 식사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그녀는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식판을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점심이에요.”불만스러운 기색을 굳이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차가운 눈빛이 서연에게 향했다.서연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고마워요. 그런데 지금은 별로 입맛이 없어서요.”“그건 제 알 바 아니죠.”직원은 서연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제 일은 식사 갖다 드리는 것까지예요. 더 시키실 일이 없으면 전 이만 갈게요.”서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직원의 태도가 그렇게 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적어도 식사는 가져다주었고, 음식도 꽤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자신을 싫어한다는 건 분명히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화가 나지는 않았다.어차피 남들에게 미움받는 일에는 이미 익숙했으니까.한씨 집안에서 대놓고 비웃거나 일부러 뜨거운 국물을 끼얹던 사람들에 비하면, 이 직원은 오히려 점잖은 편이었다.“왜 저를 그렇게 싫어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서연은 문득 그녀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곧 여기서 나갈 거예요. 더는 폐 끼치지 않을게요.”그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그 말을 들은 직원은 순간 멈칫했다.뺨이 살짝 붉어졌다. 어딘가 민망해하는 눈치였다.“저…… 저도 아가씨를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몇 초 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냥 한씨 집안 사람들이 너무하잖아요!”서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에요?”직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설마 이 일도 모르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우리 회장님이 독에 중독된 것도 전부 한씨 집안 때문이잖아요! 게다가 우리 그룹에서
서연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이미 실종된 상태였다.한유진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지하 주차장에 쓰러졌다. 하마터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뻔했다.그런데 한태준은?그는 사람을 보내 그녀를 찾기는커녕, 실종된 딸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그뿐만이 아니었다.벌써 한유진의 후계자 취임식까지 준비하고 있었다.마치 서연이라는 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서연의 마음이 조금씩 차갑게 식어 갔다.문득 모든 게 우스워졌다.자신이 죽든 살든 한성그룹은 아무렇지도 않게 앞으로 나아갈 테니까.“서연아…….”시혁은 그녀의 이상한 기색을 알아차리고 말을 걸려 했다.“두 분 다 나가 주세요.”서연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시혁을 외면한 채 차갑게 말했다.“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시혁은 입을 다물었다.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결국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가자.”그는 비서를 데리고 병실을 나갔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그제야 서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천천히 침대에 몸을 뉘었다.그녀는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이불 속은 온통 어두웠다.이렇게 있으면 아무도 자신이 우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서연은 입술을 꽉 깨물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억눌렀다.이제 그만 울고 싶었다.하지만 눈물은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왜 모두가 자신에게 이러는 걸까?자신이 대체 뭘 잘못했기에?서연은 몸을 웅크렸다. 가슴속에 쌓인 고통과 서러움을 어떻게든 숨기려는 듯이.그때였다.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흐…….”아주 작고 희미한 울음소리였다.서연은 화들짝 눈을 떴다.처음에는 자신이 낸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그게 자신의 울음소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재빨리 이불을 걷어 내고 경계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병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잘못
시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낮아져 있었다.“너한테 했던 말도 전부 진심이었어. 거짓말은 하나도 없었어.”윤시혁은 원래 자신의 감정을 말로 풀어내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그에게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 많았다.하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서연이 자신을 믿어 주기만을 바라며 평소답지 않게 긴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서연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그저 모든 게 귀찮다는 듯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마치 더는 어떤 설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처럼.믿음?그런 건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아버지부터 강도윤, 그리고 윤시혁까지.몇 번이고 반복된 거짓말에 그녀가 세상에 품고 있던 마지막 기대마저 바닥나 버렸다.한참이 지나서야 시혁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지금 서연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그의 목소리가 점점 잠겨 갔다.그때 서연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시혁 씨…….”그녀가 먼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시혁의 눈빛이 살짝 밝아졌다.“응. 나 여기 있어.”서연은 목에 걸린 듯한 씁쓸함을 삼키고 조용히 말했다.“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시혁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양옆으로 늘어뜨린 두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희미하게 빛나던 눈빛도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너…….”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평정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잠시 후,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래.”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어디 가고 싶은데? 내가 같이 가 줄게.”서연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그가 일부러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은 척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가 떠나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하지만 서연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혼자 나가고 싶어.”시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늘 침착하던 그의 표정에 마침내 금이 갔다.차분하기만 했던 두 눈에 처음으로 뚜렷한 불안이 스쳤다.하지만
그날 지하 주차장에서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정말 그였던 것이다.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그는 정말 자신을 구하러 와 주었다.순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밀려왔다.안도감과 서러움, 슬픔. 그리고 지난 며칠 동안 마음속 깊이 쌓여 있던 두려움까지.그에게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너무나 많았다.당장이라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바로 그때, 곁에 있던 간호사가 갑자기 놀라 소리쳤다.“회장님!”간호사는 재빨리 한쪽으로 물러나더니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박현우는 그 모습을 보고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그는 난처한 듯 코끝을 문질렀다.“아, 그게…… 두 분이 나눌 이야기가 많으신 것 같네요.”그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간호사를 데리고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문이 조용히 닫혔다.병실에는 한서연과 윤시혁, 두 사람만 남았다.서연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회장님?왜 간호사가 그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걸까?윤시혁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한참을 기다렸지만 시혁은 먼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그저 미간을 찌푸린 채, 쉰 목소리로 물었다.“몸은 좀 어때? 아직 아픈 데는 없어?”서연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 웃음에는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나한테 설명할 생각은 없어?”시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나는…….”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하지만 막상 입을 열자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결국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미안해.”그 세 글자를 듣는 순간, 서연의 몸에서 온기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역시 그랬다.이번에도 속은 거였다.강도윤은 그동안 수없이 달콤한 말을 속삭였지만, 결국 망설임 없이 그녀를 배신했다.그런데 윤시혁도 다를 게 없었다.그녀에게 다가왔고, 지켜 주었으며, 영원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정작 자신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