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헤어지라고요…… 제 남자 친구와?"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왜? 싫으냐?"
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서연아, 넌 한성가의 장녀야.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지 마라! 무슨 일이든 그룹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알겠어?"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나를 한성가의 장녀라고 부른 이유가 고작 내 남자 친구를 빼앗기 위해서라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치 끝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빛 한 줄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한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게 유진이가 나를 위해 준비한 복수였구나.
내게 남은 유일한 희망마저 빼앗으려는 거였다.
강도윤.
그는 내게 남은 전부였다.
그마저 빼앗기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이번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도윤이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아버지……."
나는 두 손을 꽉 쥐었다.
평생 중 가장 큰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한성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 하지만…… 제발 도윤이만은 빼앗지 마세요."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잖아요. 저는 도윤이 없이는 못 살아요."
열네 살 이후, 아버지의 말을 처음으로 거역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도 조금은 당황한 듯했다.
내 예상과 달리 당장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미간을 찌푸린 채 내 부탁을 생각하는 듯했다.
가슴 한구석에 희미한 희망이 피어났다.
어쩌면……
어쩌면 아버지도 아직 나를 신경 쓰고 계신 걸까?
"여보, 그만해요."
바로 그때, 새어머니 서미숙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연이를 억지로 몰아붙이지 말아요."
그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이가 꼭 좋은 집안에 시집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조건이 조금 부족한 남자와 결혼해도 괜찮아요. 밖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내버려 둬요. 그렇다고 서연이에게 사랑하는 사람까지 포기하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한유진을 바라보았다.
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 아래로 표정이 가려졌다.
누가 봐도 상처받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미숙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 우리 한성그룹의 차기 후계자를 함부로 비웃는다면, 이 엄마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마치 딸을 위해서라면 세상 누구와도 싸울 수 있다는 듯 당당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는 분명한 뜻이 숨어 있었다.
내가 자기 사랑만 챙기느라 동생과 한성가의 체면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한태준은 독선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룹의 이익과 명예만큼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성그룹에 조금이라도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라면 친딸이라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역시나 새어머니의 말을 들은 아버지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한서연!"
그가 버럭 소리쳤다.
"너와 의논하는 게 아니다! 그냥 통보하는 거야!"
"아버지, 제발요……."
나는 다급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도윤이는 제 남자 친구예요. 저희는 정말 사랑하는 사이예요……."
"네가 감히 나와 흥정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아버지가 내 말을 잘랐다.
"자기 몸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네가 한성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고작 개인적인 감정 하나 희생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잖아!"
목구멍이 꽉 막힌 것 같았다.
"저는……."
"사흘."
아버지가 차갑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사흘 안에 강도윤과 헤어져라.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서연아."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갔다.
서미숙도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나는 입을 열어 아버지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한 번 결정한 일을 절대 쉽게 바꾸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계속 반항한다면 그룹의 권력을 이용해서라도 도윤이를 내게서 떼어 놓을 것이다.
설마……
정말 도윤이를 잃게 되는 걸까?
아니.
그럴 리 없어!
도윤이가 나를 도와줄 거야.
온 세상이 나를 외면해도 도윤이만큼은 내 곁에 있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니까.
분명 아버지의 요구도 거절해 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내 남자 친구일 뿐만 아니라 한성그룹 보안팀에서 가장 신임받는 보안 총괄 책임자였다.
아버지도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도윤이를 먼저 만나야 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결정하게 둘 수는 없었다.
"뭐야? 강도윤한테 도와달라고 하러 가게?"
내가 바닥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가려던 순간, 뒤에서 한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유진은 어느새 소파에서 일어나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노골적으로 나를 비웃고 있었다.
"설마 강도윤이 너만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지?"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췄다.
두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나는 유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진실이 궁금해?"
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 도윤 오빠는 정말 다정하더라. 특히 침대에서 말이야. 난 그게 너무 좋던데?"
쾅!
머릿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것 같았다.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설마……
도윤이가 나를 배신했다는 뜻이야?
그것도 상대가 유진이라고?
"말도 안 돼!"
나는 유진을 노려보았다.
"거짓말하지 마!"
"내가 너한테 왜 거짓말을 하겠어?"
유진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하이힐 소리를 내고 천천히 다가왔다.
"못 믿겠으면 오늘 밤 내 방으로 와."
그녀는 내 앞에 멈춰 서서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불쌍한 우리 언니. 그때도 지금처럼 자신 있게 그 사람이 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박현우는 난처한 듯 윤시혁을 한번 바라본 뒤 서연에게 시선을 돌렸다.“아…… 네, 맞아요.”그는 조금 망설이며 대답했다.“그럼 저도 같이 가서 살펴볼게요.”서연이 먼저 말했다.“아, 네. 그러시죠.”박현우는 시혁을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난감함과 어쩔 수 없다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이내 서연을 데리고 진료실을 나섰다.몇 걸음 걷지 않았을 때였다.등 뒤에서 윤시혁의 낮고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안해…….”서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녀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하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박현우는 서연을 다른 치료실로 안내했다.그곳에는 시혁과 마찬가지로 중독 증상을 보이는 그룹 직원 몇 명이 치료를 받고 있었다.서연은 한 명씩 상태를 확인하고, 증상에 따라 약물 배합을 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 환자에게 맞는 해독제를 만들어 냈다.약을 복용한 환자들의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이번 중독 사건이 이렇게 빨리 진전될 줄은 몰랐네요.”박현우는 문틀에 기대어 침대에 누운 환자들을 바라보며 감탄했다.“고생하셨어요.”서연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오랫동안 쉬지 않고 일한 탓에 그녀도 슬슬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그런데 혹시 예전에 이런 독을 본 적 있어요?”박현우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물었다.서연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아니요.”그녀는 손에 든 약품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독의 배합 자체는 기본적인 편이에요. 다만 제가 익숙한 연구 분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에요.”박현우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저 여기 있을게요.”그 말을 들은 윤시혁의 눈이 크게 뜨였다.“뭐라고?”서연은 두 손을 꼭 쥐고 다시 한번 말했다.“여기 있겠다고요.”시혁의 눈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그 순간, 마치 길고 긴 겨울이 끝나고 마침내 첫 햇살이 비친 것만 같았다.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오랜만에 보는 환한 웃음이었다.너무나 눈부신 그 미소에 서연의 마음도 잠시 흔들렸다.시혁은 그녀를 품에 안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하지만 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재빨리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손길을 피한 것이다.그녀는 어색한 듯 귀를 만지작거리며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대신 여기 있는 건 당신의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예요.”“…….”“당신을 용서했다는 뜻도 아니고, 다시 받아들이겠다는 뜻도 아니에요.”시혁이 뻗었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표정마저 굳어 버린 듯했다.몇 초가 지나서야 그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그럼 그다음은?”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서연은 망설이지 않았다.“해독이 끝나면 떠날 거예요.”시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방금 전까지 피어올랐던 희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감추지 못한 실망과 고통만이 남았다.서연은 그의 시선이 줄곧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는 걸 느꼈다.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그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 눈에 담긴 슬픔을 도저히 감당
“데려다줘요!”한서연이 다급하게 재촉했다.“지금 당장 그 사람을 만나야 해요!”직원은 갑작스러운 반응에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서연을 박현우의 개인 진료실로 안내했다.가는 내내 서연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머릿속에서는 직원이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윤시혁은 아직 해독하지 못했다.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에 더 큰 무리를 감수하기까지 했다.그런데도 자신은 그가 이미 괜찮아진 줄 알고 있었다.마침내 두 사람은 흰색 문 앞에 멈춰 섰다.“저…… 여기가 맞아요.”직원이 문 안쪽을 가리켰다.“박현우 선생님이 회장님을 치료하고 계실 거예요.”“고마워요.”서연이 조용히 감사 인사를 건넸다.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마치 더는 서연 곁에 있고 싶지 않은 것처럼.서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진료실 앞에 선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치료 중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잖아요!”문 안쪽에서 박현우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연은 문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예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쪽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현우가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방금 전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여긴 어쩐 일이에요? 어디 아파요?”서연은 긴장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손가락도 저도 모르게 꼼지락거렸다.“저…… 윤시혁 씨를 만나러 왔어요. 아까 점심을 가져다준 직원이 여기 계신다고 해서요.”“아, 그 사람은…….”박현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턱을 문지르며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한 눈치였다.그때 진료실 안쪽에서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여보내.”윤시혁의 목소리였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서연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빠르게 뛰었다.박현우는 난처한 듯 한숨을 내쉬고는 옆으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저기요! 들어가도 돼요?”여자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답할 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검은색 치마에 흰 앞치마를 두른 여자 직원이 식사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그녀는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식판을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점심이에요.”불만스러운 기색을 굳이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차가운 눈빛이 서연에게 향했다.서연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고마워요. 그런데 지금은 별로 입맛이 없어서요.”“그건 제 알 바 아니죠.”직원은 서연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제 일은 식사 갖다 드리는 것까지예요. 더 시키실 일이 없으면 전 이만 갈게요.”서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직원의 태도가 그렇게 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적어도 식사는 가져다주었고, 음식도 꽤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자신을 싫어한다는 건 분명히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화가 나지는 않았다.어차피 남들에게 미움받는 일에는 이미 익숙했으니까.한씨 집안에서 대놓고 비웃거나 일부러 뜨거운 국물을 끼얹던 사람들에 비하면, 이 직원은 오히려 점잖은 편이었다.“왜 저를 그렇게 싫어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서연은 문득 그녀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곧 여기서 나갈 거예요. 더는 폐 끼치지 않을게요.”그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그 말을 들은 직원은 순간 멈칫했다.뺨이 살짝 붉어졌다. 어딘가 민망해하는 눈치였다.“저…… 저도 아가씨를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몇 초 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냥 한씨 집안 사람들이 너무하잖아요!”서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에요?”직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설마 이 일도 모르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우리 회장님이 독에 중독된 것도 전부 한씨 집안 때문이잖아요! 게다가 우리 그룹에서
서연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이미 실종된 상태였다.한유진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지하 주차장에 쓰러졌다. 하마터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뻔했다.그런데 한태준은?그는 사람을 보내 그녀를 찾기는커녕, 실종된 딸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그뿐만이 아니었다.벌써 한유진의 후계자 취임식까지 준비하고 있었다.마치 서연이라는 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서연의 마음이 조금씩 차갑게 식어 갔다.문득 모든 게 우스워졌다.자신이 죽든 살든 한성그룹은 아무렇지도 않게 앞으로 나아갈 테니까.“서연아…….”시혁은 그녀의 이상한 기색을 알아차리고 말을 걸려 했다.“두 분 다 나가 주세요.”서연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시혁을 외면한 채 차갑게 말했다.“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시혁은 입을 다물었다.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결국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가자.”그는 비서를 데리고 병실을 나갔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그제야 서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천천히 침대에 몸을 뉘었다.그녀는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이불 속은 온통 어두웠다.이렇게 있으면 아무도 자신이 우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서연은 입술을 꽉 깨물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억눌렀다.이제 그만 울고 싶었다.하지만 눈물은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왜 모두가 자신에게 이러는 걸까?자신이 대체 뭘 잘못했기에?서연은 몸을 웅크렸다. 가슴속에 쌓인 고통과 서러움을 어떻게든 숨기려는 듯이.그때였다.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흐…….”아주 작고 희미한 울음소리였다.서연은 화들짝 눈을 떴다.처음에는 자신이 낸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그게 자신의 울음소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재빨리 이불을 걷어 내고 경계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병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잘못
시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낮아져 있었다.“너한테 했던 말도 전부 진심이었어. 거짓말은 하나도 없었어.”윤시혁은 원래 자신의 감정을 말로 풀어내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그에게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 많았다.하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서연이 자신을 믿어 주기만을 바라며 평소답지 않게 긴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서연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그저 모든 게 귀찮다는 듯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마치 더는 어떤 설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처럼.믿음?그런 건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아버지부터 강도윤, 그리고 윤시혁까지.몇 번이고 반복된 거짓말에 그녀가 세상에 품고 있던 마지막 기대마저 바닥나 버렸다.한참이 지나서야 시혁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지금 서연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그의 목소리가 점점 잠겨 갔다.그때 서연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시혁 씨…….”그녀가 먼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시혁의 눈빛이 살짝 밝아졌다.“응. 나 여기 있어.”서연은 목에 걸린 듯한 씁쓸함을 삼키고 조용히 말했다.“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시혁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양옆으로 늘어뜨린 두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희미하게 빛나던 눈빛도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너…….”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평정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잠시 후,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래.”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어디 가고 싶은데? 내가 같이 가 줄게.”서연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그가 일부러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은 척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가 떠나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하지만 서연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혼자 나가고 싶어.”시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늘 침착하던 그의 표정에 마침내 금이 갔다.차분하기만 했던 두 눈에 처음으로 뚜렷한 불안이 스쳤다.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