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재벌 남편이 무릎 꿇었다

이혼 후, 재벌 남편이 무릎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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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3년. 윤서진이 끝내 기다린 것은 남편 한도윤의 사랑이 아니라, 그가 스캔들의 상대였던 서지아를 직접 공항에서 맞이했다는 뉴스였다. 그녀는 이혼 서류만 남긴 채 한씨 가문을 떠난다. 한도윤은 그녀가 결국 후회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한 달 뒤, 한성그룹 주주총회에 나타난 윤서진은 더 이상 평범한 아내가 아니었다. 그녀는 윤성캐피탈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그제야 한도윤은 자신이 놓쳐버린 여자가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숨겨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되찾으려는 순간, 12년 전 윤씨 가문 몰락의 진실이 두 사람을 다시 갈라놓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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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남편의 생일, 다른 여자의 귀국

밤 11시 48분.

윤서진은 식어버린 수프를 세 번째 데웠다.

“사모님, 제가 할게요.”

가사도우미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먼저 들어가세요.”

“부회장님 아직 안 오셨는데…….”

“오늘도 늦으시나 봐요.”

서진은 익숙하게 웃었다.

오늘은 남편 한도윤의 생일이었다.

결혼하고 세 번째 맞는 생일.

첫해에는 밤 11시가 넘어 돌아왔고, 지난해에는 자정이 다 돼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모님도 너무 늦게까지 기다리지 마세요.”

“네. 고마워요.”

가사도우미가 퇴근하자 넓은 집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진은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을 바라봤다.

놓인 식기는 두 벌뿐이었다.

도윤은 요란한 생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손님을 초대하는 것도, 촛불을 켜고 노래하는 것도.

그래서 서진은 매년 둘만의 저녁을 준비했다.

그가 돌아오면 함께 먹고, 늦으면 기다렸다.

그게 두 사람의 생일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띠링.

휴대폰에 뉴스 알림이 떴다.

[한성그룹 한도윤 부회장, 인천공항서 포착]

이어지는 제목을 본 순간 서진의 손이 멈췄다.

[3년 만에 귀국한 서성그룹 장녀 서지아 직접 마중]

사진 속 도윤은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 앞에서 흰 코트 차림의 서지아가 환하게 웃었다.

다음 사진에는 도윤이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특별한 스킨십은 없었다.

그런데 댓글은 달랐다.

— 역시 한도윤 옆에는 서지아지.

— 두 사람 다시 만나는 건가?

— 한 부회장 아직 미혼 아니야?

서진의 손가락이 마지막 댓글에서 멈췄다.

미혼.

법적으로 한도윤은 결혼한 남자였다.

자신과 혼인신고를 한 지 벌써 3년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결혼식은 양가 가족만 참석한 채 치렀고, 사진 한 장 공개하지 않았다.

한성그룹의 경영권 승계가 마무리될 때까지 사생활 노출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서진은 그 말을 믿었다.

그가 원한다면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자신은 세상에 없는 아내가 되어 있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친구 정은채였다.

[기사 봤어?]

[서진아, 괜찮아?]

서진은 답장을 쓰지 못했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익숙한 일이었다.

괜찮다고 하기에는 더 이상 그럴 마음이 없었다.

문득 지난 3년이 떠올랐다.

혼자 먹은 저녁.

혼자 참석한 병원 검진.

기념일마다 비어 있던 맞은편 의자.

처음에는 바쁜 사람이니까 이해했다.

그다음에는 자신이 더 노력하면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벽시계가 자정을 가리켰다.

서진은 작은 케이크 앞으로 다가갔다.

Happy Birthday, Doyoon.

오후에 직접 주문한 케이크였다.

초에 불을 붙이자 희미한 불빛이 흔들렸다.

“생일 축하해.”

듣는 사람은 없었다.

서진은 혼자 촛불을 껐다.

그 순간 이상할 만큼 마음이 조용해졌다.

울고 싶지도 않았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서진은 휴대폰에서 저장된 번호 하나를 눌렀다.

두 번의 신호음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윤서진 고객님?

“박 변호사님. 늦게 연락드려 죄송해요.”

— 아닙니다. 무슨 일이시죠?

“지난번에 부탁드린 서류요.”

상대가 잠시 말을 멈췄다.

— 이혼합의서 말씀하십니까?

“네.”

— 아직 보관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신다고 하셔서요.

서진은 꺼진 촛불을 바라봤다.

“내일 받을 수 있을까요?”

— 마음을 정하신 겁니까?

“네.”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 알겠습니다. 오전 중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서진은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스테이크와 샐러드, 세 번이나 데운 수프.

마지막으로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었다.

버릴 필요는 없었다.

오늘이 남편의 생일이라는 사실까지 지울 생각은 없으니까.

새벽 12시 43분.

현관에서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한도윤이었다.

그가 코트를 벗으며 거실로 들어왔다.

“안 잤어?”

“응.”

도윤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많이 늦었네.”

서진은 물기 없는 손을 수건으로 닦았다.

“그러게.”

도윤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왜 전화 안 했어?”

서진은 그를 바라봤다.

“했으면 받았어?”

그의 손이 멈췄다.

“무음이었어.”

“그랬구나.”

평소와 다른 대답에 도윤이 미간을 좁혔다.

서진은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식탁 위에 놓아둔 빈 접시를 치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일이면 이 집에 이혼합의서가 도착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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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남편의 생일, 다른 여자의 귀국
밤 11시 48분.윤서진은 식어버린 수프를 세 번째 데웠다.“사모님, 제가 할게요.”가사도우미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괜찮아요. 먼저 들어가세요.”“부회장님 아직 안 오셨는데…….”“오늘도 늦으시나 봐요.”서진은 익숙하게 웃었다.오늘은 남편 한도윤의 생일이었다.결혼하고 세 번째 맞는 생일.첫해에는 밤 11시가 넘어 돌아왔고, 지난해에는 자정이 다 돼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사모님도 너무 늦게까지 기다리지 마세요.”“네. 고마워요.”가사도우미가 퇴근하자 넓은 집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서진은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을 바라봤다.놓인 식기는 두 벌뿐이었다.도윤은 요란한 생일을 좋아하지 않았다.손님을 초대하는 것도, 촛불을 켜고 노래하는 것도.그래서 서진은 매년 둘만의 저녁을 준비했다.그가 돌아오면 함께 먹고, 늦으면 기다렸다.그게 두 사람의 생일이라고 생각했다.적어도 오늘까지는.띠링.휴대폰에 뉴스 알림이 떴다.[한성그룹 한도윤 부회장, 인천공항서 포착]이어지는 제목을 본 순간 서진의 손이 멈췄다.[3년 만에 귀국한 서성그룹 장녀 서지아 직접 마중]사진 속 도윤은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그 앞에서 흰 코트 차림의 서지아가 환하게 웃었다.다음 사진에는 도윤이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특별한 스킨십은 없었다.그런데 댓글은 달랐다.— 역시 한도윤 옆에는 서지아지.— 두 사람 다시 만나는 건가?— 한 부회장 아직 미혼 아니야?서진의 손가락이 마지막 댓글에서 멈췄다.미혼.법적으로 한도윤은 결혼한 남자였다.자신과 혼인신고를 한 지 벌써 3년이었다.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결혼식은 양가 가족만 참석한 채 치렀고, 사진 한 장 공개하지 않았다.한성그룹의 경영권 승계가 마무리될 때까지 사생활 노출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이유였다.서진은 그 말을 믿었다.그가 원한다면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는 사이 자신은 세상에 없는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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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혼하자는 말
“밥은 먹었어?”한도윤이 물었다.서진은 그를 돌아봤다.“그건 내가 물어보려고 했는데.”“난 먹었어.”“지아 씨랑?”도윤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기사 봤어?”“응.”“공항에서 잠깐 만난 거야. 기자들이 알아서 엮은 거고.”“알아.”“그럼 됐네.”서진은 수건을 가지런히 접었다.그 말이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그럼 됐네.도윤에게는 늘 그렇게 간단했다.설명할 필요도, 사과할 필요도 없는 일.그런데 자신은 왜 매번 괜찮다고 말해야 했을까.“신경 쓰여?”도윤이 다시 물었다.서진은 잠시 생각했다.“전에는.”“뭐?”“전에는 신경 쓰였던 것 같아.”도윤이 미간을 좁혔다.“지금은 아니라는 뜻이야?”“응.”그가 대답하지 않았다.서진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케이크는 여기 있어.”“아.”“생일 축하해.”“고마워.”“선물은 서재에 뒀어.”“알았어.”익숙한 대화였다.3년 동안 수도 없이 반복했던 말들.그런데 오늘은 끝에 다른 문장이 붙었다.“그리고 할 말 있어.”도윤이 넥타이를 풀던 손을 멈췄다.“뭔데.”“내일 박 변호사님 오실 거야.”“박 변호사?”“내 변호사.”그제야 도윤이 완전히 몸을 돌렸다.“변호사가 왜?”서진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이혼 얘기하려고.”거실이 조용해졌다.도윤은 몇 초 동안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지아 때문에?”“아니.”“그럼 왜.”서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이유를 설명하려면 지난 3년을 전부 꺼내야 할 것 같았다.처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일들.나중에는 서운해졌던 일들.결국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겨버린 일들.그걸 하나씩 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그냥.”“그냥?”“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도윤의 얼굴이 굳었다.“그게 이유야?”“나한테는 충분해.”“서진아.”그가 낮게 불렀다.“지금 감정적으로 얘기하지 말고.”서진은 그 말을 듣고 잠깐 웃었다.“나 화 안 났어.”“그럼 갑자기 왜 이래.”“갑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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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아내가 달라졌다
다음 날 아침.한도윤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옆자리는 비어 있었다.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서진은 늘 먼저 일어났다.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어젯밤 그녀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이혼 얘기하려고.도윤은 침대에 앉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그 말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결혼한 지 3년.크게 싸운 적도 없었다.서진은 조용했고, 자신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았다.그런데 갑자기 이혼이라니.도윤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새벽에 들어온 업무 메시지가 여러 개였다.늘 하던 대로 답장을 보내려다가 손을 멈췄다.아내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그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부회장님, 일어나셨습니까.”집사가 인사했다.“서진은?”“서재에 계십니다.”“벌써?”“손님이 오셨습니다.”도윤의 발걸음이 멈췄다.“누구.”“변호사입니다.”어젯밤의 대화가 떠올랐다.도윤은 곧장 서재로 향했다.문 앞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재산분할에 관한 부분은 요청하신 대로 정리했습니다.”이어서 서진의 목소리.“네. 그 부분은 그대로 진행해 주세요.”도윤은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문을 열자 서진과 중년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한 부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박정훈 변호사입니다.”도윤은 명함을 받지 않았다.“서진아. 잠깐 얘기해.”“지금 변호사님이랑 상담 중이야.”“알아.”“그럼 조금만 기다려 줘.”도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그동안 서진은 자신이 부르면 하던 일을 멈추곤 했다.이번에는 달랐다.박 변호사가 조용히 일어났다.“필요하시면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아니요.”서진이 먼저 말했다.“상담은 거의 끝났어요.”그녀는 서류를 정리했다.“최종본 보내주시면 확인할게요.”“알겠습니다.”박 변호사가 돌아간 뒤에야 도윤이 입을 열었다.“정말 진행하고 있었어?”“어제 말했잖아.”“나한테 상의도 없이?”서진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이혼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당신 허락을 받아야 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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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시어머니의 반대
“도윤아.”서재 문이 열리며 한미숙이 들어왔다.예고 없는 방문이었다.도윤의 어머니이자 한성그룹 안주인.그녀는 아들 손에 들린 서류를 보자 표정이 굳었다.“그게 뭐니?”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서진이 말했다.“이혼합의서예요.”“뭐?”한미숙이 서진을 돌아봤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도윤 씨와 이혼하려고 합니다.”“서진아.”한미숙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어른 앞에서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꺼내는 게 아니야.”서진은 고개를 숙였다.“갑작스럽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죄송하면 다시 생각해.”“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한미숙의 얼굴이 굳었다.“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서?”도윤이 끼어들었다.“어머니, 제가 얘기할게요.”“넌 가만있어.”한미숙은 서진을 바라봤다.“집이 부족했니? 생활비가 부족했니? 도윤이가 밖에서 무슨 큰 잘못이라도 했어?”서진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예전 같았으면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괜히 분위기를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오늘은 달랐다.“부족한 건 없었어요.”“그런데?”“행복하지 않았습니다.”한미숙이 헛웃음을 흘렸다.“결혼생활이 늘 행복할 수는 없는 거야.”“알아요.”“알면서 왜 이러니?”“그래도 계속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서요.”한미숙이 소파에 앉았다.“지아가 돌아와서 그러는 거라면 신경 쓸 필요 없어. 기자들이 괜히 떠드는 거니까.”“지아 씨 때문이 아닙니다.”“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야?”서진은 천천히 말했다.“제가 이 집에서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그게 무슨 뜻이니?”“도윤 씨 아내인데, 밖에서는 아무도 모르잖아요.”한미숙의 눈빛이 차가워졌다.“그건 처음부터 합의한 일이었잖아.”“네. 제가 동의했어요.”서진은 부정하지 않았다.“그래서 그동안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그런데?”“그 선택을 계속해야 할 이유도 이제는 모르겠어요.”한미숙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러다 날카롭게 물었다.“혹시 재산 문제 때문이니?”도윤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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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당신은 불편하지 않았잖아
서재에 둘만 남았다.도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나 짐 정리할게.”“짐?”“응.”“어디 가려고?”“나가려고.”도윤의 표정이 굳었다.“오늘?”“응.”“굳이 지금?”서진은 잠시 생각했다.“계속 여기 있으면 서로 불편하잖아.”“난 안 불편해.”대답은 즉시 나왔다.서진은 그를 바라봤다.“그게 문제야.”“뭐가?”“당신은 안 불편했잖아.”도윤이 입을 다물었다.“계속.”서진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도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자신은 결혼생활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아내가 조용히 집을 지키고, 자신은 회사 일을 하는 생활.가끔 함께 식사하고, 시간이 나면 여행도 가는 것.물론 약속을 취소한 적은 있었다.기념일을 잊은 적도 있었다.하지만 그게 이혼할 만큼 큰 잘못인가.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서진아.”“응.”“어디서 지낼 건데?”“걱정하지 마.”“내가 모르는 데라도 있어?”“있어.”도윤은 처음 듣는 대답에 당황했다.“어딘데.”“나중에 필요하면 알려줄게.”서진은 문을 열었다.도윤이 다시 불렀다.“윤서진.”그녀가 멈췄다.“우리가 이렇게 끝낼 사이야?”서진은 한참 뒤에야 돌아봤다.“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도윤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래서 3년이나 기다렸어.”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당신이 한 번쯤은 내 마음을 물어봐 줄 줄 알았거든.”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그런데 지금도 당신은 왜 내가 떠나는지보다, 왜 갑자기 이러는지가 더 궁금하잖아.”그 말이 끝나자 서재에 침묵이 내려앉았다.서진은 더 기다리지 않았다.오전 9시 25분.드레스룸에 들어간 서진은 캐리어를 꺼냈다.옷장을 열자 수많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결혼 후 한미숙이 선물한 옷들.공식 행사에 입으라며 준비해 둔 드레스들.한 번도 착용하지 않은 보석들.서진은 그것들을 지나쳐 자신이 직접 산 옷 몇 벌을 골랐다.노트북.책.개인 서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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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결혼반지를 두고 떠나다
캐리어 바퀴가 복도를 따라 조용히 굴러갔다.서진은 마지막으로 침실을 돌아봤다.3년 동안 사용한 방이었다.그런데 자신의 흔적이 사라진 자리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침구도, 커튼도, 벽에 걸린 그림도 그대로였다.마치 처음부터 혼자 살지 않았던 사람처럼.계단을 내려가자 집사가 다가왔다.“사모님, 외출하십니까?”“네.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집사의 표정이 굳었다.“부회장님께서는…….”“알고 계세요.”서진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그동안 감사했어요.”집사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사모님.”“네.”“정말 가시는 겁니까?”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렸다.한도윤이었다.그의 시선이 캐리어에 멈췄다.“벌써 나가?”“응.”“차는?”“불렀어.”“김 실장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괜찮아.”도윤은 미간을 좁혔다.“굳이 그렇게까지 선을 그어야 해?”서진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이제는 내가 알아서 해도 되잖아.”그 말에 도윤이 입을 다물었다.서진은 현관으로 향했다.“서진아.”발걸음이 멈췄다.“나중에 얘기하자.”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응. 서류 보고 연락해.”문이 닫혔다.도윤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서진이 떠나는 모습은 생각보다 조용했다.울지도 않았고, 원망하지도 않았다.그게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잠시 뒤 집사가 다가왔다.“부회장님.”“왜.”“사모님께서 이것을 두고 가셨습니다.”작은 반지였다.도윤은 손을 뻗었다.3년 전 자신이 골랐던 결혼반지.반지를 끼워주던 날, 서진은 환하게 웃었다.그는 그 얼굴을 기억했다.하지만 그날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반지가 손바닥에서 차갑게 식어갔다.“다른 건?”“예?”“서진이가 두고 간 물건.”“대부분 그대로입니다.”“예물도?”“네.”도윤은 반지를 쥐었다.서진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재산도, 선물도, 자신이 누리던 생활도.그 사실이 도윤을 처음으로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녀는 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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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내가 살던 집
한남동을 떠난 서진이 도착한 곳은 청담동이었다.차가 고층 주상복합 건물 앞에 멈췄다.서진은 캐리어를 내리고 건물을 올려다봤다.결혼 전 혼자 살던 집.3년 동안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정기적인 관리는 계속되고 있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 앞에 섰다.출입 인증을 다시 설정한 뒤 문을 열었다.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기가 밀려왔다.거실 전면의 통유리 너머로 한강이 보였다.검정과 회색, 아이보리로 꾸며진 실내.장식은 많지 않았다.스물넷의 자신이 직접 고른 가구들이었다.서진은 캐리어를 내려놓았다.“다녀왔어.”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인사가 흘러나왔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정은채였다.“어디야?”“집.”“한남동?”“아니. 청담동.”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잠깐만. 진짜 나온 거야?”“응.”“도윤 씨는?”“알아.”“그 사람이 그냥 보내줬어?”서진은 창밖을 바라봤다.“잡지는 않더라.”은채가 짧게 욕을 삼켰다.“내가 갈게.”“바쁠 텐데.”“입 다물고 있어. 금방 가.”전화가 끊겼다.서진은 오랜만에 웃었다.은채는 늘 이런 사람이었다.필요할 때는 설명보다 먼저 움직였다.서진은 주방으로 들어갔다.찬장에는 사용하지 않은 컵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그녀는 캐리어에서 낡은 머그컵 하나를 꺼냈다.한남동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도윤은 그 컵이 왜 중요한지 모를 것이다.하지만 서진에게는 달랐다.누군가의 아내가 되기 전부터 쓰던 컵이었다.물을 끓여 차를 내렸다.그리고 소파에 앉았다.누구의 귀가 시간도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식탁을 차릴 필요도 없었다.이상하게 허전했다.동시에 숨이 쉬어졌다.잠시 뒤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열자 은채가 서 있었다.한 손에는 커피, 다른 손에는 먹을 것이 가득 든 봉투가 들려 있었다.“윤서진.”“응.”“너 진짜 이혼하는구나.”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은채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그제야 서진은 자신이 얼마나 오래 혼자 버텨왔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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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윤성이라는 이름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은채가 커피를 내려놓으며 물었다.서진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일단 이혼부터 마무리하려고.”“그다음은?”“아직 생각 중이야.”은채가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정말?”“왜.”“네가 아무 계획 없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잖아.”서진은 대답 대신 웃었다.은채는 거실 한쪽에 놓인 검은 파일을 발견했다.“저거 아직도 안 열어봤어?”서진의 시선이 파일로 향했다.표지에는 짧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윤성.오랫동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이름이었다.은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회장님한테는 연락했어?”“응.”“뭐라고 하셨어?”서진은 휴대폰을 보여줬다.어젯밤 보낸 메시지.[저 이혼하려고 해요.]읽음 표시가 뜬 뒤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그리고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도착한 답장.[와.]은채가 피식 웃었다.“진짜 회장님답다.”서진도 웃었다.“그러게.”“제주 내려갈 거야?”“아직.”“왜?”“먼저 정리할 게 있으니까.”은채는 검은 파일을 바라봤다.“언제까지 피할 생각이야?”서진의 웃음이 사라졌다.윤성.그 이름은 단순한 회사 이름이 아니었다.자신이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외손녀인지 설명하는 이름.결혼 전 서진은 그 이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가족이 가진 돈이나 지위가 아닌, 윤서진이라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그래서 한도윤과의 결혼도 자신의 선택으로 지키고 싶었다.그런데 결과는 어땠을까.그녀는 윤성의 이름을 감췄고, 한성에서는 존재 자체를 감췄다.은채가 물었다.“후회해?”“뭘?”“도윤 씨랑 결혼한 거.”서진은 한참 생각했다.“결혼한 건 후회하지 않아.”“그럼?”“나 자신을 너무 오래 미뤄둔 건 후회해.”은채는 더 묻지 않았다.서진은 검은 파일을 집어 들었다.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서류였다.그 안에는 결혼하기 전의 삶이 남아 있었다.그리고 앞으로 돌아가야 할 곳도.서진은 파일 첫 장을 펼쳤다.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윤성자산관리.그 순간 은채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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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아내가 남긴 빈자리
한도윤은 평소보다 늦게 퇴근했다.한남동 집은 조용했다.현관에 들어서자 집사가 다가왔다.“저녁 준비해 드릴까요?”“됐어.”도윤은 넥타이를 풀며 계단을 올랐다.침실 문을 열자 낯선 풍경이 보였다.정확히는, 너무 익숙한 풍경이었다.침구는 정돈돼 있었고 조명도 그대로였다.다만 서진의 물건들이 사라져 있었다.화장대 위 화장품 몇 개.침대 옆에 놓여 있던 책.항상 의자에 걸려 있던 얇은 가디건.그 정도였다.그는 옷장을 열었다.옷은 대부분 남아 있었다.한미숙이 사준 옷들.공식 행사에 입으라며 준비한 드레스들.서진은 자신의 물건만 가져갔다.도윤은 잠시 옷장 앞에 서 있었다.그녀가 이 집에 남긴 흔적이 생각보다 적었다.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집사가 물었다.“사모님 물건은 어떻게 할까요?”“그대로 둬.”“알겠습니다.”집사가 돌아서려다 멈췄다.“참, 사모님께서 평소 쓰시던 머그컵은 가져가셨습니다.”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컵?”“네.”“그걸 왜 말해.”“3년 동안 늘 사용하시던 거라서요.”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아내가 어떤 컵을 썼는지 떠올려 보았다.기억나지 않았다.좋아하는 음식은?정확히 알지 못했다.최근에 읽던 책은?그것도 몰랐다.그때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서진이었다.[박 변호사님이 서류 전달하셨을 거야. 확인하고 연락해 줘.]도윤은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평소 서진의 메시지는 달랐다.[저녁은 드셨어요?][오늘도 늦어요?][비 온다니까 운전 조심해요.]그런 문장은 없었다.이제 그녀는 필요한 말만 했다.도윤은 전화를 걸었다.몇 번의 신호음 끝에 서진이 받았다.— 응.“어디야?”— 집.“무슨 집.”— 내 집.도윤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런 집이 있었어?”— 응.“왜 나한테 말 안 했어?”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그리고 서진이 물었다.— 당신이 물어본 적 있어?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통화가 끝난 뒤에도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았다.아내가 떠난 첫날.그는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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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윤서진의 또 다른 이름
다음 날 오전.한도윤은 집무실에서 이혼합의서를 읽고 있었다.서류는 예상보다 간단했다.혼인관계 해소.공동생활 정리.개인 소유 재산은 각자에게 귀속.불필요한 분쟁을 피하기 위한 조항들.그런데 도윤의 눈길을 붙잡은 부분이 있었다.서진이 한성가에서 받은 재산에 대해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이상하군.”그가 중얼거렸다.김 실장이 고개를 들었다.“무슨 말씀이십니까?”“서진이 개인 재산.”“네?”“결혼 전에는 뭘 하고 있었지?”김 실장은 잠시 당황했다.“확인해 보겠습니다.”도윤은 서류를 내려놓았다.그동안 그는 아내가 돈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명품이나 보석을 사달라고 조른 적도 없었다.한성그룹 일에 관여한 적도 없었다.하지만 관심이 없는 것과 필요가 없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잠시 뒤 김 실장이 돌아왔다.“부회장님.”“말해.”“사모님 명의로 확인되는 부동산이 있습니다.”“어디.”“청담동입니다.”도윤의 손이 멈췄다.“청담동?”“네. 혼인 전부터 보유하신 것으로 보입니다.”“그걸 왜 지금 알았지?”김 실장은 신중하게 대답했다.“사모님의 개인 재산을 조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맞는 말이었다.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김 실장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과거 금융 관련 법인 자료에서 사모님 성함이 확인됐습니다.”“어디.”“윤성자산관리입니다.”도윤은 고개를 들었다.“윤성?”익숙한 이름이었다.한때 금융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윤성캐피탈.그룹 재편 이후 주요 법인이 해체되거나 독립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같은 윤성이야?”“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대표는?”“현재는 전문경영인 체제입니다.”“실소유주는.”김 실장이 잠시 머뭇거렸다.“지분 구조가 복잡해 바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도윤은 창밖을 바라봤다.윤서진.3년 동안 같은 집에서 살았던 여자.자신은 그녀를 조용하고 욕심 없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그런데 아내에게는 자신이 전혀 모르는 삶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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