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는 고개를 돌려 윤시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얼굴의 절반은 조명이 닿지 않는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깊어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었다.
존재감이 상당한 남자였다.
아버지를 제외하면, 눈빛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남자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문득 그도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달 전 내가 그를 구해 주지 않았다면, 그는 애초에 한씨 집안의 거래에 휘말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그 역시 원치 않는 일을 강요당한 피해자였다.
"윤 선생."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서연이는 내 장녀일세. 자네가 이 아이와 약혼한다고 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거야."
윤시혁이 눈을 들어 아버지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지."
그제야 윤시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보다 훨씬 키가 컸다. 가까이 다가오자 서늘한 기운이 그대로 밀려왔다.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또 다른 반지를 집어 들고,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보았다.
"미리 말해 두겠습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금 꽉 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그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받쳐 들고 약지를 향해 반지를 끼워 주었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았다.
나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며 잠시 멍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도윤과 함께 생일을 축하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얼굴만 겨우 아는 남자와 약혼을 했다.
내 인생은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됐습니다."
윤시혁이 내 손을 놓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내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깊고 짙은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가 담겨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읽어 낼 수 없었다.
"좋아!"
아버지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새어머니도 곧바로 다가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서연아, 시혁 씨는 참 괜찮은 청년이란다. 앞으로 두 사람 사이좋게 잘 지내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내가 이 결혼을 원하는지 진심으로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회의실 안은 온통 웃음소리와 축하 인사로 가득했다.
그곳에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사람은 나뿐이었다.
한성그룹 저택을 벗어나고 나서야 겨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서 들려오는 집안사람들의 부름도 무시한 채 저택 밖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향해 걸었다.
그저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들의 시선에서도,
숨이 막히는 그 집에서도.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저택 근처의 작은 숲에 도착했다.
밤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자 나뭇잎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나는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
참고 있던 눈물이 끝내 쏟아졌다.
나는 두 무릎을 끌어안고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내어 울었다.
왜?
왜 모두가 이렇게 쉽게 내 인생을 마음대로 결정하는 걸까?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왜 내 것 하나 제대로 가질 수 없는 걸까?
심지어 나 자신조차 지킬 힘이 없었다.
5년 전, 나는 큰 사고를 당해 한동안 의식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사람들처럼 건강한 몸을 되찾을 수 없었다.
의사는 내 건강 상태를 장기간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언제 다시 유진이에게 피를 줄 수 있는지만 신경 썼다.
나는 내가 과연 건강한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두 손을 바라보았다. 문득 내가 정말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 인생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다니.
어머니는 나를 떠났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
여동생은 내 모든 것을 빼앗았다.
이제는 내가 가장 믿었던 남자마저 나를 배신했다.
대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 걸까?
바로 그때, 낯익은 기척이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다.
나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나무에 윤시혁이 기대어 두 팔을 교차한 채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여긴 어떻게 왔어요?"
울음 때문에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두 팔을 벌렸다.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는 재촉하지도 않았고, 왜 우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세 그대로 조용히 기다렸다.
마치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다음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동안 쌓아 온 서러움을 전부 쏟아 내기라도 하듯.
그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한 팔로 내 어깨를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괜찮습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울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목이 쉬고 눈이 퉁퉁 부어 아플 때가 되어서야 나는 겨우 그의 품에서 몸을 뗐다.
"좀 나아졌습니까?"
그가 조용히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의 셔츠가 눈물로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죄송해요……."
나는 민망한 마음에 눈가를 훔쳤다.
하지만 그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는 내 옆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따라왔어요?"
"그리고…… 왜 저와 약혼하겠다고 한 거예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당신도 봤잖아요. 한성가 사람들은 전부 저를 싫어해요."
"저와 약혼해 봤자 당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을 텐데요."
윤시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 약혼녀입니다."
그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당신을 지키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죠."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곧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 그의 약혼녀였다.
그는 원래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상대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미안해요."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두 달 전에 제가 당신을 구해 주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에 휘말리지 않았을 텐데……."
윤시혁은 고개를 저었다.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충분히 좋은 선택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해 준 건 처음이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함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이유는 하나뿐인 것 같았다.
"두 달 전 그 사고 때문이죠?"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당신을 구해 줬으니까, 그래서 저와 약혼하기로 한 거예요?"
윤시혁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자 방금 피어났던 기대가 조금씩 식어 갔다.
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역시.
그는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내게 신세를 졌기 때문이었다.
뭐, 그것도 괜찮았다.
나는 이미 익숙했으니까.
"됐어요."
나는 나무를 짚고 일어나 치맛자락에 묻은 흙을 털었다.
"이제 돌아가요."
더는 그에게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몸을 돌려 떠나려는 순간,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서연."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상하게도 심장이 다시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돌려 애써 미소를 지었다.
"왜요?"
윤시혁은 달빛 아래 서 있었다.
밤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차갑고 단정한 눈매에는 처음 보는 부드러움이 어렴풋이 깃들어 있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약속했다.
"앞으로 나는 당신에게만 충실하겠습니다."
내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한 번.
또 한 번.
그의 시선이 머무는 동안,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저 여기 있을게요.”그 말을 들은 윤시혁의 눈이 크게 뜨였다.“뭐라고?”서연은 두 손을 꼭 쥐고 다시 한번 말했다.“여기 있겠다고요.”시혁의 눈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그 순간, 마치 길고 긴 겨울이 끝나고 마침내 첫 햇살이 비친 것만 같았다.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오랜만에 보는 환한 웃음이었다.너무나 눈부신 그 미소에 서연의 마음도 잠시 흔들렸다.시혁은 그녀를 품에 안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하지만 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재빨리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손길을 피한 것이다.그녀는 어색한 듯 귀를 만지작거리며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대신 여기 있는 건 당신의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예요.”“…….”“당신을 용서했다는 뜻도 아니고, 다시 받아들이겠다는 뜻도 아니에요.”시혁이 뻗었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표정마저 굳어 버린 듯했다.몇 초가 지나서야 그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그럼 그다음은?”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서연은 망설이지 않았다.“해독이 끝나면 떠날 거예요.”시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방금 전까지 피어올랐던 희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감추지 못한 실망과 고통만이 남았다.서연은 그의 시선이 줄곧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는 걸 느꼈다.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그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 눈에 담긴 슬픔을 도저히 감당
“데려다줘요!”한서연이 다급하게 재촉했다.“지금 당장 그 사람을 만나야 해요!”직원은 갑작스러운 반응에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서연을 박현우의 개인 진료실로 안내했다.가는 내내 서연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머릿속에서는 직원이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윤시혁은 아직 해독하지 못했다.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에 더 큰 무리를 감수하기까지 했다.그런데도 자신은 그가 이미 괜찮아진 줄 알고 있었다.마침내 두 사람은 흰색 문 앞에 멈춰 섰다.“저…… 여기가 맞아요.”직원이 문 안쪽을 가리켰다.“박현우 선생님이 회장님을 치료하고 계실 거예요.”“고마워요.”서연이 조용히 감사 인사를 건넸다.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마치 더는 서연 곁에 있고 싶지 않은 것처럼.서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진료실 앞에 선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치료 중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잖아요!”문 안쪽에서 박현우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연은 문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예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쪽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현우가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방금 전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여긴 어쩐 일이에요? 어디 아파요?”서연은 긴장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손가락도 저도 모르게 꼼지락거렸다.“저…… 윤시혁 씨를 만나러 왔어요. 아까 점심을 가져다준 직원이 여기 계신다고 해서요.”“아, 그 사람은…….”박현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턱을 문지르며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한 눈치였다.그때 진료실 안쪽에서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여보내.”윤시혁의 목소리였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서연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빠르게 뛰었다.박현우는 난처한 듯 한숨을 내쉬고는 옆으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저기요! 들어가도 돼요?”여자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답할 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검은색 치마에 흰 앞치마를 두른 여자 직원이 식사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그녀는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식판을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점심이에요.”불만스러운 기색을 굳이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차가운 눈빛이 서연에게 향했다.서연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고마워요. 그런데 지금은 별로 입맛이 없어서요.”“그건 제 알 바 아니죠.”직원은 서연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제 일은 식사 갖다 드리는 것까지예요. 더 시키실 일이 없으면 전 이만 갈게요.”서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직원의 태도가 그렇게 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적어도 식사는 가져다주었고, 음식도 꽤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자신을 싫어한다는 건 분명히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화가 나지는 않았다.어차피 남들에게 미움받는 일에는 이미 익숙했으니까.한씨 집안에서 대놓고 비웃거나 일부러 뜨거운 국물을 끼얹던 사람들에 비하면, 이 직원은 오히려 점잖은 편이었다.“왜 저를 그렇게 싫어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서연은 문득 그녀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곧 여기서 나갈 거예요. 더는 폐 끼치지 않을게요.”그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그 말을 들은 직원은 순간 멈칫했다.뺨이 살짝 붉어졌다. 어딘가 민망해하는 눈치였다.“저…… 저도 아가씨를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몇 초 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냥 한씨 집안 사람들이 너무하잖아요!”서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에요?”직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설마 이 일도 모르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우리 회장님이 독에 중독된 것도 전부 한씨 집안 때문이잖아요! 게다가 우리 그룹에서
서연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이미 실종된 상태였다.한유진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지하 주차장에 쓰러졌다. 하마터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뻔했다.그런데 한태준은?그는 사람을 보내 그녀를 찾기는커녕, 실종된 딸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그뿐만이 아니었다.벌써 한유진의 후계자 취임식까지 준비하고 있었다.마치 서연이라는 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서연의 마음이 조금씩 차갑게 식어 갔다.문득 모든 게 우스워졌다.자신이 죽든 살든 한성그룹은 아무렇지도 않게 앞으로 나아갈 테니까.“서연아…….”시혁은 그녀의 이상한 기색을 알아차리고 말을 걸려 했다.“두 분 다 나가 주세요.”서연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시혁을 외면한 채 차갑게 말했다.“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시혁은 입을 다물었다.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결국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가자.”그는 비서를 데리고 병실을 나갔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그제야 서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천천히 침대에 몸을 뉘었다.그녀는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이불 속은 온통 어두웠다.이렇게 있으면 아무도 자신이 우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서연은 입술을 꽉 깨물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억눌렀다.이제 그만 울고 싶었다.하지만 눈물은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왜 모두가 자신에게 이러는 걸까?자신이 대체 뭘 잘못했기에?서연은 몸을 웅크렸다. 가슴속에 쌓인 고통과 서러움을 어떻게든 숨기려는 듯이.그때였다.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흐…….”아주 작고 희미한 울음소리였다.서연은 화들짝 눈을 떴다.처음에는 자신이 낸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그게 자신의 울음소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재빨리 이불을 걷어 내고 경계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병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잘못
시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낮아져 있었다.“너한테 했던 말도 전부 진심이었어. 거짓말은 하나도 없었어.”윤시혁은 원래 자신의 감정을 말로 풀어내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그에게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 많았다.하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서연이 자신을 믿어 주기만을 바라며 평소답지 않게 긴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서연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그저 모든 게 귀찮다는 듯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마치 더는 어떤 설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처럼.믿음?그런 건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아버지부터 강도윤, 그리고 윤시혁까지.몇 번이고 반복된 거짓말에 그녀가 세상에 품고 있던 마지막 기대마저 바닥나 버렸다.한참이 지나서야 시혁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지금 서연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그의 목소리가 점점 잠겨 갔다.그때 서연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시혁 씨…….”그녀가 먼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시혁의 눈빛이 살짝 밝아졌다.“응. 나 여기 있어.”서연은 목에 걸린 듯한 씁쓸함을 삼키고 조용히 말했다.“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시혁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양옆으로 늘어뜨린 두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희미하게 빛나던 눈빛도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너…….”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평정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잠시 후,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래.”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어디 가고 싶은데? 내가 같이 가 줄게.”서연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그가 일부러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은 척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가 떠나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하지만 서연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혼자 나가고 싶어.”시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늘 침착하던 그의 표정에 마침내 금이 갔다.차분하기만 했던 두 눈에 처음으로 뚜렷한 불안이 스쳤다.하지만
그날 지하 주차장에서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정말 그였던 것이다.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그는 정말 자신을 구하러 와 주었다.순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밀려왔다.안도감과 서러움, 슬픔. 그리고 지난 며칠 동안 마음속 깊이 쌓여 있던 두려움까지.그에게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너무나 많았다.당장이라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바로 그때, 곁에 있던 간호사가 갑자기 놀라 소리쳤다.“회장님!”간호사는 재빨리 한쪽으로 물러나더니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박현우는 그 모습을 보고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그는 난처한 듯 코끝을 문질렀다.“아, 그게…… 두 분이 나눌 이야기가 많으신 것 같네요.”그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간호사를 데리고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문이 조용히 닫혔다.병실에는 한서연과 윤시혁, 두 사람만 남았다.서연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회장님?왜 간호사가 그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걸까?윤시혁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한참을 기다렸지만 시혁은 먼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그저 미간을 찌푸린 채, 쉰 목소리로 물었다.“몸은 좀 어때? 아직 아픈 데는 없어?”서연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 웃음에는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나한테 설명할 생각은 없어?”시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나는…….”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하지만 막상 입을 열자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결국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미안해.”그 세 글자를 듣는 순간, 서연의 몸에서 온기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역시 그랬다.이번에도 속은 거였다.강도윤은 그동안 수없이 달콤한 말을 속삭였지만, 결국 망설임 없이 그녀를 배신했다.그런데 윤시혁도 다를 게 없었다.그녀에게 다가왔고, 지켜 주었으며, 영원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정작 자신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