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아저씨, 저 좀 납치해주세요.

조폭아저씨, 저 좀 납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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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에빌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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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아의 아버지가 도박으로 진 빚을 갚으러 온 남자들이 집을 뒤집어엎었다. 깨진 접시. 엎어진 식탁. 그리고 이미 어디론가 튀어버린 아버지. 한 남자가 서아의 턱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손 치워.”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가에 선 남자 하나. 검은 셔츠.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이곳에 있는 누구도 감히 거역하지 못하는 눈. 강태준이었다. “애는 건들지 말랬지.” 그 한마디에 남자가 서아에게서 손을 뗐다. 태준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도망친 서아의 아버지를 찾으러 가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서아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태준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 내려왔다. “저 좀 데려가세요.” 남자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뭐?” “납치해 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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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스스로 납치를 택했다.

윤서아는 불행에 익숙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엄마는 서아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집을 나갔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현관문이 닫히던 소리와, 그날 이후 엄마의 옷장이 텅 비어 있었다는 것만 기억했다.

아버지는 처음 며칠 동안 엄마를 찾았다. 그러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 욕을 했고. 돈이 떨어지면 화를 냈고. 돈을 구하지 못하면 서아에게 손을 댔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말했다.

 

“밥 안 해놨냐?”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밥을 차렸다.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울지 않는 것. 대꾸하지 않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알아채는 것.

그렇게 열아홉이 됐다.

“윤서아.”

교실 뒤쪽에서 누군가 불렀다. 서아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서아야.”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나 부르는 거야?”

“응.”

“왜.”

“오늘 매점 갈 건데 같이 갈래?”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같은 반 학생이었다. 얼굴은 알고 있었다. 이름은 몰랐다.

“싫어.”

“…왜?”

“그냥.”

서아는 다시 책을 펼쳤다. 상대는 어색하게 웃다가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몇몇 아이들이 작게 속삭였다.

“쟤 진짜 혼자 다니네.”

“그러게.”

“말 걸어도 맨날 저래.”

서아는 들었지만 모른 척했다. 상관없었다. 친구가 없어서 불편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친구가 생기면 귀찮아진다.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설명해야 하고. 왜 매번 같은 옷을 입는지 설명해야 하고. 왜 방과 후 바로 집에 가는지도 설명해야 한다.

그런 것들은 전부 피곤했다. 서아는 혼자가 편했다. 정확히는.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게 편했다.

그런데. 그런 서아를 계속 바라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한도윤. 전교 1등. 학생회장. 교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부잣집 아들.

그리고 이상하게도. 서아에게만 자꾸 말을 걸었다.

“윤서아.”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왜.”

도윤이 웃으며 책상 위에 초콜릿 하나를 올려놓았다.

“이거 먹어.”

“싫어.”

“왜?”

“안 받아.”

“그럼 여기 놓고 갈게.”

“가져가.”

“싫은데.”

 

서아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도윤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내가 너한테 관심 가지면 안 돼?”

“응.”

“왜?”

“귀찮으니까.”

“그럼 귀찮아해.”

서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이상한 애네.”

“많이 듣는 말이야.”

도윤은 웃으며 돌아갔다. 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초콜릿을 한참 바라봤다. 결국 먹지는 않았다. 하지만 버리지도 않았다. 그게 서아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수업이 끝났다.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서아도 가방을 들었다.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일곱 통. 전부 아버지였다.

서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리고 곧바로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돈 가져와.]

서아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지웠다.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아버지는 또 도박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잃었겠지. 서아는 익숙하게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자. 술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왔냐.”

거실에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서아는 신발을 벗었다.

“네.”

“돈은.”

“없어요.”

“없어?”

“네.”

아버지가 탁자를 걷어찼다. 쾅! 서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내가 돈 가져오랬지.”

“없다고 했잖아요.”

“이 새끼가.”

서아는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도망치면 더 화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일이면 된다니까요.”

“뭐가?”

“돈.”

아버지의 눈이 번뜩였다.

“어디서 구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가?”

비웃음이 터졌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서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 집 안에서는 한참 동안 욕설과 고성이 이어졌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서야 조용해졌다. 서아는 자기 방 바닥에 앉아 있었다.

손등에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그녀는 약을 바르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 아프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계산했다. 아버지가 진 빚이 얼마나 되는지. 내일 누가 찾아올 가능성이 있는지. 자신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정말 아무것도 없다면. 어디로 도망칠지. 서아는 휴대전화 메모장에 숫자를 적었다.

하나씩. 차분하게. 그러다 문득. 거실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젠장…….”

이어지는 중얼거림.

“내일 사람들 온다고 했는데…….”

서아의 손이 멈췄다. 사람들. 그 말의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돈을 갚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사람들.

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 집에서 도망쳐야겠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서아는 집 앞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서 낯선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 어디 갔어?”

“아침부터 안 보입니다.”

“돈 떼먹고 튀었네.”

서아는 가만히 서 있었다. 도망칠까. 경찰에 신고할까. 아니. 둘 다 답이 아니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자신까지 위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발걸음은 결국 집 안으로 향했다.

거실은 엉망이었다. 깨진 접시. 뒤집힌 식탁. 뜯겨진 서랍. 그리고. 남자 하나가 서아를 발견했다.

 

“어?”

시선이 마주쳤다.

“그 새끼 딸인가 본데?”

다른 남자들이 돌아봤다. 서아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아버지는요?”

“그걸 우리가 너한테 물어봐야지.”

남자가 다가왔다.

“네년 아버지 어디 갔어?”

“몰라요.”

“거짓말하지 마.”

“정말 몰라요.”

남자가 서아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애새끼가 말귀를 못 알아듣네.”

서아는 팔을 빼내려 하지 않았다. 괜히 반항하면 상황이 더 나빠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현관문이 다시 열렸다. 남자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구두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일정한 간격으로. 그리고 문가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셔츠. 단정한 검은 머리.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

그런데. 그 남자가 들어오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남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서아의 눈이 남자를 향했다. 그가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엉망이 된 집. 깨진 그릇. 그리고 남자의 손에 붙잡혀 있는 서아. 그의 시선이 서아에게 닿았다.

잠시. 정말 잠시. 눈빛이 멈췄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손 치워.”

서아를 붙잡고 있던 남자가 움찔했다.

“형님, 이게 그놈 딸인데—”

“애는 건들지 말랬지.”

차갑고 낮은 목소리. 화난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거역하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남자가 곧바로 손을 놓았다. 서아의 팔이 자유로워졌다. 남자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몸을 돌렸다.

 

“가자.”

그가 문을 향해 걸었다. 그 순간. 서아가 움직였다.

“잠깐만요.”

남자가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서아가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망설임 하나 없이 말했다.

“저 좀 데려가세요.”

남자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뭐?”

서아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납치해 달라고요.”

집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남자는 한참 서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차갑게 말했다.

“애새끼를 밑에 까는 취미는 없어.”

서아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저 밥 잘해요.”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청소도 잘하고.”

서아가 말했다.

“뭐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아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러니까.”

차갑게 식은 눈이 그를 향했다.

“저 좀 데려가 주세요.”

남자는 그 눈을 바라봤다. 울지도 않았다. 살려달라고 빌지도 않았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겠다는 눈. 그 눈을 보는 순간. 강태준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너무 익숙했다. 자신도 한때. 저런 눈으로 세상을 견뎠으니까.

 

“이름.” 

“윤서아.”

“나이.”

“열아홉.”

 

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따라와.”

서아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가방 하나만 챙겨. 그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그날. 윤서아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선택을 했다.

스스로 납치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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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스스로 납치를 택했다.
윤서아는 불행에 익숙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엄마는 서아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집을 나갔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현관문이 닫히던 소리와, 그날 이후 엄마의 옷장이 텅 비어 있었다는 것만 기억했다.아버지는 처음 며칠 동안 엄마를 찾았다. 그러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 욕을 했고. 돈이 떨어지면 화를 냈고. 돈을 구하지 못하면 서아에게 손을 댔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말했다.“밥 안 해놨냐?”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밥을 차렸다.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었다.울지 않는 것. 대꾸하지 않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알아채는 것.그렇게 열아홉이 됐다.“윤서아.”교실 뒤쪽에서 누군가 불렀다. 서아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서아야.”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나 부르는 거야?”“응.”“왜.”“오늘 매점 갈 건데 같이 갈래?”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같은 반 학생이었다. 얼굴은 알고 있었다. 이름은 몰랐다.“싫어.”“…왜?”“그냥.”서아는 다시 책을 펼쳤다. 상대는 어색하게 웃다가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몇몇 아이들이 작게 속삭였다.“쟤 진짜 혼자 다니네.”“그러게.”“말 걸어도 맨날 저래.”서아는 들었지만 모른 척했다. 상관없었다. 친구가 없어서 불편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친구가 생기면 귀찮아진다.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설명해야 하고. 왜 매번 같은 옷을 입는지 설명해야 하고. 왜 방과 후 바로 집에 가는지도 설명해야 한다.그런 것들은 전부 피곤했다. 서아는 혼자가 편했다. 정확히는.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게 편했다.그런데. 그런 서아를 계속 바라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한도윤. 전교 1등. 학생회장. 교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부잣집 아들.그리고 이상하게도. 서아에게만 자꾸 말을 걸었다.“윤서아.”서아가 고개를 들었다.“왜.”도윤이 웃으며 책상 위에 초콜릿 하나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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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충실하게 옆에 있을게요.
차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윤서아는 뒷좌석에 앉아 창밖만 바라봤다. 자신을 납치한 남자의 차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고급스러웠다.검은색 세단. 가죽 시트.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낯선 거리. 서아는 손에 쥔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태준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서아 역시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던 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 그제야 태준이 룸미러를 통해 서아를 바라봤다.“후회 안 해?”서아가 눈을 들었다.“뭘요?”“따라온 거.”“안 해요.”대답이 너무 빨랐다. 태준의 눈빛이 미세하게 가라앉았다.“겁도 안 나나?”“무서운데요.”“그런 얼굴로?”“무서운 거랑 티 내는 건 다른 거잖아요.”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아도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태준이 물었다.“내가 누군지는 알아?”“조폭이잖아요.”“그게 끝이야?”“알 필요 없죠.”서아가 담담하게 말했다.“어차피 저도 아저씨한테 필요한 사람은 아니잖아요.”“그런데 왜 따라왔지?”“필요한 사람이 되면 되니까요.”태준의 눈이 룸미러를 통해 그녀를 향했다.“뭘 할 수 있는데.”“밥.”“그거 말고.”“청소.”“그거 말고.”서아가 잠시 생각했다.“거짓말.”태준의 시선이 멈췄다.“사람들이 무슨 생각하는지 눈치채는 것도 잘하고.”“…….”“필요하면 아버지보다 더 잘 팔 수도 있어요.”차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말조심해.”목소리가 낮았다. 서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틀린 말 아니잖아요.”“네 목숨을 거래하는 게 그렇게 쉬워?”“저한테는 익숙해요.”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서아는 그가 자신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선을 그었다.“불쌍해하지 마세요.”“누가 그런다고 했지?”“눈빛이 그래요.”“착각이야.”“그럼 다행이고요.”태준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입가가 아주 조금 굳어졌다. 재수 없는 계집애였다. 겁도 없고. 눈치도 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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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골치 아픈 계집애
“아주 충실하게 옆에 있을게요.”문이 닫혔다. 강태준은 복도에 한참 서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열아홉짜리 계집애 하나가.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보통은 울거나. 살려달라고 빌거나. 집에 보내달라고 난리를 쳤다. 그게 정상이다.그런데 윤서아는 달랐다. 납치를 부탁했고.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고. 심지어 협박까지 했다.태준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려다 멈췄다. 이내 담배를 다시 집어넣었다.“형님.”뒤에서 부하가 다가왔다.“말해.”“저 애… 정말 데리고 계실 겁니까?”태준이 그를 바라봤다.“내가 버리라고 했나?”“아닙니다.”“그럼.”부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조사해 볼까요?”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뭘.”“윤서아 말입니다.”잠시 침묵. 태준은 낮게 대답했다.“해.”“어디까지—”“전부.”태준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학교, 가족, 주변 사람들.”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나한테 왜 왔는지도.”다음 날 아침. 서아는 평소처럼 눈을 떴다. 낯선 천장.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어제 일이 떠올랐다.납치. 강태준. 그리고 자신의 선택.서아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옷장에는 새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하지만 손대지 않았다.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었다. 새 옷을 받는 순간부터 빚이 생기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에 있던 남자가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어디 가십니까?”“주방이요.”“왜요?”“밥 하려고요.”“……밥을요?”“네.”남자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서아는 그를 지나쳐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은 호텔처럼 넓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재료가 가득했다. 서아는 한참 안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사람 몇 명 먹어요?”뒤따라온 남자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열 명 정도?”“그럼 이걸로 충분하겠네요.”서아는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냈다. 손놀림이 능숙했다. 계란을 깨고. 채소를 썰고. 국을 끓였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부하들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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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아저씨도 만만치 않아요.
다음 날 아침.서아가 눈을 떴을 때. 방 안에는 교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서아는 한동안 그걸 바라봤다. 그리고 방문을 열었다. 복도 끝에 서 있던 남자가 그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학교 가십니까?”“네.”“형님이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요.”“알아요.”“그런데 왜—”“학생이니까요.”서아는 신발을 신었다.“차는 어디 있어요?”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정말 가시게요?”“네.”“형님이 알면—”“알겠죠.”서아가 일어섰다.“그래도 갈 거예요.”잠시 후. 태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형님.”“왜.”“윤서아가 학교 간다고 합니다.”잠시 침묵.“막아.”“……네.”전화가 끊겼다. 하지만 몇 초 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형님.”“왜.”“막으려고 했는데.”“그런데.”“…제가 못 막았습니다.”태준의 미간이 좁혀졌다.“왜.”“윤서아가 그냥 가버렸습니다.”“…….”“차도 자기가 알아서 타겠다고.”태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놔둬.”“네?”“학교 보내.”부하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괜찮으십니까?”“대신.”태준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붙여.”“누구를?”“사람 하나.”교실. 서아가 들어오자 아이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았으니 이상할 만했다. 하지만 서아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책을 꺼냈다.“윤서아.”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들자 한도윤이 서 있었다.“어디 갔었어?”“집에.”“연락도 안 되고.”“원래 연락 안 해.”도윤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으며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냈다.“이거.”초콜릿이었다. 며칠 전과 똑같은 것. 서아는 초콜릿을 바라봤다. 그리고 가방을 열었다.“이거.”서아가 초콜릿을 하나 꺼냈다. 도윤이 건넸던 바로 그 초콜릿이었다.“…어?”“돌려줄게.”“왜?”“안 먹었어.”“그럼 먹으면 되잖아.”“싫어.”도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왜 싫은데?”“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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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너무 익숙해서
아침부터 이상했다. 서아가 현관을 나서자 검은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와 같았다. 다만 오늘은 운전석에 앉은 남자 외에 한 명이 더 있었다.“타십시오.”서아가 차 안을 살폈다.“오늘도 감시예요?”“안전 때문입니다.”“같은 말 아닌가.”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아는 한숨을 내쉬고 차에 올라탔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준이었다.“내려.”서아가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목소리였다.“왜요?”“학교 앞에 사람이 하나 있을 거다.”“봤어요.”“그 사람 시선에서 벗어나지 마.”“알겠어요.”“그리고.”잠시 침묵.“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마.”서아가 피식 웃었다.“제가 애도 아니고.”“윤서아.”목소리가 낮아졌다.“여긴 네가 살던 동네가 아니다.”그 말에 서아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알아요.”“그럼 기억해.”전화가 끊겼다. 서아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이상했다. 태준의 말은 명령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협박처럼 들리지 않았다.교실에 들어가자 도윤이 먼저 알아봤다.“윤서아.”서아가 자리에 앉았다.“왜.”“어제 연락 안 했잖아.”“연락처도 없는데.”“아.”도윤이 멋쩍게 웃었다.“그러네.”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그럼 번호 줘.”“싫어.”“왜?”“필요 없어서.”“친구끼리는 번호 있잖아.”“우리 친구 아니잖아.”도윤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웃었다.“그럼 친구부터 하면 되겠다.”서아는 그를 바라봤다.“끈질기네.”“응.”“이러는 목적이 뭔데?”도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그냥?”“네가 자꾸 혼자 있으니까.”서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불쌍해서?”“아니.”도윤은 고개를 저었다.“혼자 있는 게 편한 사람도 있잖아.”서아가 순간 말을 멈췄다. 도윤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혼자 있고 싶은 건지, 혼자 있을 수밖에 없는 건지는 모르겠어서.”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점심시간. 서아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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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말 좀 들어라, 꼬맹아.
밤이 깊어질수록 저택 안의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서아는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택 안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많았다. 전화가 계속 울렸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도 잦았다.서아는 책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형님 오셨습니다.”서아의 손가락이 책장을 넘기던 동작을 멈췄다.잠시 후. 태준이 들어왔다. 검은 셔츠 소매는 걷혀 있었고, 표정은 평소보다 더 차가웠다. 그는 서아를 발견하자 걸음을 멈췄다.“아직 안 잤어?”“네.”“방에 들어가.”“왜요?”“시키는 대로 해.”서아가 책에서 눈을 들었다.“싫어요.”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순간 굳었다. 태준도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뭐라고?”“아직 안 졸려요.”“윤서아.”“네.”“방으로 들어가.”“왜요?”“오늘은 밖에 나오지 마.”“무슨 일 있었어요?”“네가 알 필요 없어.”“그럼 더 궁금한데요.”태준의 미간이 좁아졌다.“궁금하면 다 알아야 하나?”“제가 여기 인질이라면서요.”서아가 책을 덮었다.“인질이면 상황 정도는 알아야 제가 제 몸을 지키죠.”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말 좀 들어라.”서아는 눈썹을 올렸다.“싫은데요.”태준의 표정이 싸늘해졌다.“꼬맹아.”서아의 표정이 굳었다.“…뭐라고요?”“꼬맹이.”태준이 무심하게 반복했다.“말 좀 들어라, 꼬맹아.”“저 열아홉이에요.”“그래.”“애 아니거든요.”“내 눈에는 애야.”서아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아저씨 눈이 이상한 거 아니에요?”주변의 남자 하나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태준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입은 안 작네.”“아저씨가 먼저 시비 걸었잖아요.”“그래서?”“저도 받아주는 거예요.”“꼬맹이가 말대꾸는 잘해.”“꼬맹이라고 부르지 마세요.”“싫어.”“저도 아저씨 말 안 들을게요.”“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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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진짜 이상한 아저씨
저택의 문이 닫혔다. 서아는 방 안에 있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저.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윤서아.”태준이었다. 서아가 문을 열었다.“왜요?”“잠깐 이야기하지.”태준은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복도에 선 채 서아를 바라봤다.“네 아버지.”서아의 눈빛이 순간 굳었다.“잡았어.”“…….”“그리고 지금 밖으로 못 나오게 해놨어.”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준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다가 낮게 말했다.“네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까.”서아가 고개를 들었다.“알아서 처리한다고 했잖아요.”“그래.”태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물었다.“혹시.”서아의 눈이 마주쳤다.“내가 그 사람을 아예 처리하는 것도 원하지 않나?”순간. 서아의 표정이 멈췄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만큼 어리지 않았다. 서아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태준은 재촉하지 않았다.“대답 안 해도 돼.”“……아저씨.”“왜.”“그 사람…… 제 아버지예요.”“알아.”“쓰레기 같은 인간인 것도 알아요.”서아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그래도…….”말끝이 흐려졌다. 태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서아는 손가락을 꾹 움켜쥐었다. 평생 미워했다.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숨을 죽였고. 돈을 요구할 때면 방으로 도망쳤고. 폭력이 시작되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가족. 끔찍하게 망가져버린 가족이라도. 완전히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무서웠다.“저도… 모르겠어요.”서아가 낮게 말했다.“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진짜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니까….”서아가 눈을 내리깔았다.“무서워요.”태준의 눈빛이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그럼 안 한다.”서아가 고개를 들었다.“…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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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누가 나가도 된댔지.
서아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책상 위에는 전날 학교에서 가져온 문제집이 놓여 있었다. 서아는 잠시 그것을 바라봤다.그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공부를 해야 했다. 더 많이. 지금보다 훨씬 더.원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전교 상위권. 선생님들도 성실하다고 평가했고, 시험을 보면 늘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서아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장학금.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등록금을 스스로 해결하고. 취직해서 돈을 벌고.강태준에게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 그게 서아가 생각한 유일한 출구였다.‘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어.’태준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밥도. 옷도. 학교에 다니는 것까지. 하지만 서아는 그게 오히려 불편했다. 공짜로 받는 것들이 쌓일수록. 언젠가 자신이 갚아야 할 빚처럼 느껴졌다.그래서. 빨리 나가야 했다. 자기 힘으로.학교. 서아는 쉬는 시간에도 책을 놓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도 문제집을 펼쳤다. 도윤이 맞은편에 앉았다.“윤서아.”“왜.”“너 요즘 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원래 했어.”“원래도 하긴 했는데, 뭔가 필사적이랄까?”“시간 없으니까.”도윤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무슨 일 있어?”“없어.”“거짓말.”서아가 펜을 내려놨다.“한도윤.”“응.”“나 너한테 부탁 하나 해도 돼?”도윤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응. 뭐든.”서아는 잠시 망설였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더더욱. 하지만 목표가 있었다.“한국대학.”“응?”“장학금 받고 들어가야 하는데.”도윤이 눈을 깜빡였다.“네가 좀 도와줄 수 있어?”“당연하지.”대답이 너무 빨라서 서아가 오히려 당황했다.“왜 바로 대답해?”“네가 나한테 처음 부탁한 거잖아.”도윤이 웃었다.“당연히 도와줘야지.”서아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조건 있어.”“뭔데?”“공짜로는 싫어.”도윤이 피식 웃었다.“그럼 내가 공부 알려주는 대신 네가 나중에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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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선을 넘게 만들지는 마.
서아는 여전히 집에 돌아오면 곧장 책상 앞에 앉았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쉬는 시간에는 문제집을 펼쳤고, 점심시간에는 도서관으로 향했다.성적을 올리는 것.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그것만 생각했다. 그래서 남에게 신세지길 싫어하면서도 도윤에게만은 도움을 요청했다.전교 1등인 한도윤은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줬다. 불필요한 말도 하지 않았다. 서아에게는 그게 편했다.“이 부분은 네가 개념은 아는데 응용에서 자꾸 막혀.”도윤이 문제집을 가리켰다.“이 유형만 따로 풀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알겠어.”서아는 필기했다.“고마워.”“별거 아닌데.”“그래도.”서아는 더 말하지 않았다. 도윤 역시 묻지 않았다. 그게 편했다.하교 시간. 서아가 교문을 나서자 검은 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태준이었다. 서아는 차에 올라탔다.“왔어요.”“그래.”짧은 대답.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 차가 출발하고도 태준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서아는 창밖을 바라봤다.“오늘도 공부했어?”“네.”“누구랑.”“한도윤이요.”태준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한 번 두드렸다.“또?”“네.”“매일 붙어 있네.”서아는 그 말에 태준을 바라봤다. 표정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공부를 잘 가르쳐줘서요.”“선생을 붙여주겠다고 했잖아.”“싫어요.”“왜.”“돈이 들잖아요.”태준이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내가 내는 돈인데.”“그러니까 싫어요.”서아는 담담했다.“제가 나갈 때까지 계속 빚지는 기분이 드니까.”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서아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한도윤한테 배우는 건 제가 나중에 밥 한 번 사면 돼요.”“그게 더 편하고?”“네.”차 안이 조용해졌다. 한참 뒤 태준이 말했다.“그놈이 너한테 뭘 바라는 건 아니고?”서아가 눈을 돌렸다.“모르겠어요.”“모르는데 계속 만나?”“공부 때문에 만나는 거니까요.”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아는 그 침묵의 의미를 짐작했다. 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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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그건 용납 못 해.
“내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마, 꼬맹아.”차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아는 한동안 태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이 남자가 대답하지 않을 때는 아무리 물어도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다.“알겠어요.”태준이 힐끗 그녀를 봤다.“뭘 안다는 거야?”“아저씨가 싫어하는 건 안 하겠다고요.”“어쩐일로 말 잘 듣네.”“대신 조건 있어요.”태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뭔데.”“저도 아저씨가 싫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해요.”“…….”“이유도 모르고 무조건 따르지는 않을 거예요.”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꼬맹이 주제에 조건도 많아.”“제 인생이니까요.”짧은 대답. 태준은 피식 웃었다.“그래.”“뭐가요?”“그건 마음에 드네.”서아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태준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다음 날. 서아는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교실에 들어서자 도윤이 이미 와 있었다.“왔어?”“응.”“이거.”도윤이 프린트물을 내밀었다.“어제 말한 장학금 조건 정리해봤어.”서아의 손이 멈췄다.“직접 찾은 거야?”“응. 학교별로 조금씩 달라서.”서아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성적 기준. 지원 조건. 등록금 전액 장학. 생활비 지원 여부. 하나씩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고마워.”“도움 됐으면 좋겠다.”“도움 돼, 많이.”도윤이 웃었다.“그럼 됐어.”서아는 프린트물을 가방 안에 넣었다.“나중에 밥 살게.”“또 밥 얘기야?”“빌린 건 갚아야 하니까.”도윤의 표정이 잠시 멈췄다.“너는 뭐든 그렇게 생각해야 해?”“뭘.”“누군가에게 도움받는 것을 전부 빚이라고.”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싫었다. 정확히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받으면 갚아야 했다. 안 그러면 언젠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했다.도윤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말했다.“그럼 밥 한 번만 사.”“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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