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버린 여자 특수부대원

국가가 버린 여자 특수부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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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그녀를 버렸다. 사랑했던 남자는 그녀에게 죽음을 명령했다. 대한민국 최정예 비밀 특수부대 ‘흑랑’의 부팀장 서이안. 적진에 고립된 그날, 연인이자 지휘관 강도윤은 구조 대신 폭격을 선택했다. 전우들은 전사 처리됐고, 살아남은 이안은 반역자가 되어 지옥 같은 포로 생활을 견뎌야 했다. 5년 후, 죽은 줄 알았던 여자가 돌아왔다. 그녀를 배신한 남자는 뒤늦게 무너지고, 냉혹한 특수전 지휘관 권태겸은 국가가 외면한 그녀의 편에 선다. 그러나 이안이 원하는 것은 사랑도, 복직도 아니다. “내 전우들을 죽인 놈들. 단 한 명도 용서하지 않아.” 국가가 지워 버린 열한 명의 이름. 그날의 진실을 되찾기 위해, 버림받은 여자 특수부대원의 전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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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1화

강도윤은 다른 여자를 책상 위에 앉힌 채 군복 셔츠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

여자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시키자 도윤은 허리를 감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고, 흐트러진 옷깃 사이로 입술을 묻었다. 두 사람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책상이 벽에 부딪혔으며,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서류 몇 장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잠깐만요, 오빠. 문부터 잠가요.”

“이 시간에 누가 오겠어. 다들 출동 준비하느라 정신없을 텐데.”

“서이안 대위가 오면요? 약혼녀가 이런 모습 보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도윤은 여자의 뺨을 감싸 쥐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이안이는 지금 장비 점검하고 있을 거야. 새벽 출동이라 정신도 없을걸.”

그가 다시 입을 맞추자 여자는 그의 군복 깃을 잡아당겼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손을 넣으며 웃음을 흘리는 모습에 도윤 역시 몸을 더욱 가까이 붙였다.

서이안은 반쯤 열린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지만, 방 안의 두 사람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불과 두 시간 전, 도윤은 출동 전날이니 일찍 쉬라고 했다. 자신은 긴급회의 때문에 본부에 남아야 한다면서, 이번 작전만 끝나면 결혼 날짜를 정하자고도 약속했다.

그런 남자가 지금 다른 여자의 허벅지를 감싸 쥐고 있었다.

이안이 문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가려던 순간, 여자가 도윤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냈다.

“정말 이번에는 정리할 거예요? 나 계속 기다리기 싫어요.”

“작전 끝나면 얘기할 거야.”

“그 여자가 안 헤어지겠다고 하면요?”

도윤은 여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웃었다.

“이안이는 내 말 잘 들어. 내가 적당히 설명하면 이해할 거야.”

그 말에 여자는 만족한 듯 그의 목을 끌어안았고, 도윤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았다.

이안은 문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삼 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였다. 위험한 작전에 나갈 때마다 반드시 돌아오라고 말하던 사람이었고, 총상을 입고 병원에 누워 있을 때는 밤새 손을 잡아 주기도 했다. 누구보다 자신의 직업을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믿었기에, 그와 함께할 미래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목숨을 걸고 작전에 나가는 동안, 도윤은 다른 여자와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장 문을 열어젖히고 두 사람을 끌어내리고 싶었다.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기에 저토록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었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복도 끝 전광판에 표시된 출동 시간이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출동까지 두 시간 남짓.

작전 집결지에서는 열한 명의 대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은 구겨진 서류를 다시 펴서 봉투에 넣었다. 떨리는 손끝 때문에 종이 모서리가 몇 번이나 어긋났고, 겨우 봉투를 닫았을 때는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남아 있었다.

복도 모퉁이를 돌아선 뒤에야 막혀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강도윤의 이름이 떠 있었다.

이안은 진동이 몇 차례 이어지는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안아, 아직 안 잤어?”

그의 숨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거칠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여자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가 사라졌지만, 도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출동 준비는 다 했어?”

“본부에 있어요.”

“뭐? 지금 본부라고?”

도윤의 목소리가 순간 굳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출동 서류 때문에 잠깐 들렀어요.”

“아, 그래? 난 회의가 길어져서 아직 못 나가고 있어.”

이안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아직도 회의 중이었어요?”

“응. 이제 거의 끝나 가.”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번 작전 끝나면 우리 여행 가자. 네가 전에 가고 싶다고 했던 곳 있잖아.”

이안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도윤 씨,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요?”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가 곧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너한테 뭘 숨겨?”

그 태연한 목소리에 이안은 더 묻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그를 추궁하기 시작하면 출동 전까지 감정을 수습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에요. 이제 가 봐야 해서 끊을게요.”

“몸조심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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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강도윤은 다른 여자를 책상 위에 앉힌 채 군복 셔츠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여자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시키자 도윤은 허리를 감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고, 흐트러진 옷깃 사이로 입술을 묻었다. 두 사람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책상이 벽에 부딪혔으며,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서류 몇 장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잠깐만요, 오빠. 문부터 잠가요.”“이 시간에 누가 오겠어. 다들 출동 준비하느라 정신없을 텐데.”“서이안 대위가 오면요? 약혼녀가 이런 모습 보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도윤은 여자의 뺨을 감싸 쥐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이안이는 지금 장비 점검하고 있을 거야. 새벽 출동이라 정신도 없을걸.”그가 다시 입을 맞추자 여자는 그의 군복 깃을 잡아당겼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손을 넣으며 웃음을 흘리는 모습에 도윤 역시 몸을 더욱 가까이 붙였다.서이안은 반쯤 열린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지만, 방 안의 두 사람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불과 두 시간 전, 도윤은 출동 전날이니 일찍 쉬라고 했다. 자신은 긴급회의 때문에 본부에 남아야 한다면서, 이번 작전만 끝나면 결혼 날짜를 정하자고도 약속했다.그런 남자가 지금 다른 여자의 허벅지를 감싸 쥐고 있었다.이안이 문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가려던 순간, 여자가 도윤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냈다.“정말 이번에는 정리할 거예요? 나 계속 기다리기 싫어요.”“작전 끝나면 얘기할 거야.”“그 여자가 안 헤어지겠다고 하면요?”도윤은 여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웃었다.“이안이는 내 말 잘 들어. 내가 적당히 설명하면 이해할 거야.”그 말에 여자는 만족한 듯 그의 목을 끌어안았고, 도윤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았다.이안은 문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삼 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였다. 위험한 작전에 나갈 때마다 반드시 돌아오라고 말하던 사람이었고, 총상을 입고 병원에 누워 있을 때는 밤새 손을 잡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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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통화가 끝난 뒤에도 이안은 한동안 꺼진 화면을 내려다보았다.조금 전까지 다른 여자를 끌어안고 있던 남자가 자신에게는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다.이안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 약속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팠다.***새벽 두 시 사십칠 분, 국경 너머 카르반 산맥은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해발 이천삼백 미터에 이르는 산악지대에는 톱니처럼 솟은 석회암 능선이 끝없이 이어졌고, 그 아래로는 수십 미터 깊이의 협곡이 뻗어 있었다. 절벽 사이를 흐르는 급류가 바위를 때리며 거친 소리를 냈으며, 사흘째 이어진 비 때문에 산비탈 곳곳에서는 흙과 자갈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서이안은 헬기에서 내려 마지막 대원의 착지를 확인한 뒤 야간투시경을 내렸다.녹색으로 번지는 시야 속에서 흑랑 대원들이 바위와 나무 사이로 신속하게 흩어졌다.이번 작전의 목표는 국경 너머 무장조직에 억류된 기술자 두 명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흑랑은 일출 전 목표 시설에 진입한 뒤 북쪽 계곡에서 대기할 예정인 항공편으로 철수하기로 되어 있었으며, 사전 정찰 자료에는 진입 경로의 적 병력이 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다.“정태식 상사, 선두 맡아. 준호는 내 옆에 붙고.”“알겠습니다.”김준호 하사가 소총을 고쳐 메며 대답했다.스물셋인 준호는 흑랑에 배속된 지 여섯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혹독한 훈련을 거치면서도 특유의 밝은 성격을 잃지 않은 대원이었다.“대위님, 이번 작전 끝나면 예정대로 휴가 나갈 수 있겠죠?”“상황 봐서. 왜, 중요한 약속 있어?”“여동생 졸업식입니다. 이번에는 꼭 가겠다고 했거든요.”준호가 전투복 안쪽 주머니를 두드리며 웃었다. 그곳에는 여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이안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그러면 더 정신 차려. 무사히 돌아가서 직접 축하해 줘야지.”준호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대원들은 정태식의 수신호에 맞춰 계곡 안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진입한 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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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정 상사, 오른쪽 적을 견제해! 준호는 연막 준비하고!”대원들이 응사하는 동안 준호가 연막탄을 던졌고, 하얀 연기가 젖은 계곡 바닥을 따라 퍼져 나갔다.이안은 승필이 쓰러진 방향을 확인했다.그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오른쪽 허벅지 아래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승필 중사 구조한다! 민재는 응급처치 준비해!”정태식과 준호가 연막 속으로 뛰어들었다.승필은 팔꿈치로 진흙을 밀며 기어오르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같은 자리에서 몸만 비틀고 있었다.준호가 그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었다.“형, 조금만 참으십시오!”“놔…… 너까지 맞아…….”“그런 소리 말고 일어나요!”정태식이 반대쪽 팔을 붙잡았고, 두 사람은 승필을 끌어당기며 바위 쪽으로 이동했다.그사이 바람에 연막이 찢어지면서 적의 총탄이 다시 가까워졌다.이안은 바위 뒤에서 사격을 이어 가며 두 사람의 퇴로를 엄호했다.“조금만 더! 거의 다 왔어!”승필이 엄폐물 뒤로 옮겨지자 박민재 중사가 곧바로 달려들었다.“대퇴부 관통상입니다. 지혈대부터 조이겠습니다!”민재가 상처 위쪽을 조이자 승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출혈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고, 바닥에 고인 빗물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이안은 그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승필아, 정신 차려. 곧 여기서 빠져나갈 거야.”승필은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더니 떨리는 손을 뻗었다.“대위님…… 우리 애가…….”“알아. 어제 백일이었다며.”“사진…… 아내한테…….”그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민재가 급히 상태를 확인한 뒤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총성이 가까워지는 동안 정태식은 바위 너머로 응사하며 계속 뒤를 돌아보았고, 준호는 승필의 손을 붙잡은 채 눈을 떼지 못했다.그러나 민재의 필사적인 처치에도 승필은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민재가 고개를 저었을 때, 이안은 한동안 승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작전 투입 직전 아들의 백일 사진을 보여 주며 웃던 남자가 이제 차가운 진흙 위에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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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이안은 기석을 끌어안고 바위 뒤로 몸을 던졌고, 뜨거운 파편 하나가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며 지나갔다.기석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이안이 그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입가에서는 이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기석아, 나 봐. 정신 놓지 마.”그는 힘겹게 이안의 팔을 붙잡았다.“본부…… 통신 기록…….”“알았어. 내가 챙길 테니까 말하지 마.”“지우면…… 안 됩니다…….”그 말을 끝으로 기석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이안은 그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목 아래로 손을 넣어 맥박을 확인했을 때도 손끝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준호는 멍하니 기석을 바라보고 있었다.“형…….”그때 아래쪽 사면에서 다시 총성이 터졌고, 선두의 정태식이 다급하게 외쳤다.“대위님! 적이 퇴로까지 올라왔습니다!”이안은 기석의 인식표 하나와 통신 장비를 거둔 뒤 준호의 어깨를 붙잡았다.“김준호, 나 봐.”준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여기서 멈추면 우리까지 죽어. 기석이가 지키려던 기록도 가져가지 못해.”준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안은 그를 일으켜 세운 뒤 승필의 시신을 옮기던 대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포탄이 떨어진 곳과 불과 몇 걸음 떨어진 자리였다. 시신을 감싼 방수포는 파편에 찢어져 있었고, 대원 두 명은 부상자를 부축하느라 더 이상 들것을 붙잡을 수 없었다.이안은 잠시 승필을 내려다보았다.그를 끝까지 데리고 가고 싶었다. 그러나 적은 이미 아래쪽 길을 막기 시작했고, 포탄이 한 발만 더 떨어져도 살아남은 대원들까지 잃을 수 있었다.그녀는 승필의 군복을 여며 준 뒤 방수포를 다시 덮었다.“미안하다, 승필아. 반드시 다시 찾으러 올게.”정태식이 대원들에게 이동 신호를 보냈다.이안은 마지막까지 뒤를 돌아보았지만, 빗줄기와 흙먼지에 가려 승필의 모습은 금세 보이지 않게 되었다.기석의 시신 역시 적의 사격이 집중되는 경사면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그의 위치를 머릿속에 새기고 통신 장비를 전투복 안쪽에 단단히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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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자신은 이미 세 차례나 생존 보고를 보냈고, 전사자와 부상자 수까지 정확하게 알렸다. 그런데 작전 기록에는 흑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강 중령님, 지금 저희 위치에 폭격이 승인됐습니까?”도윤의 숨소리가 멈췄다.“그 정보 어디서 났어?”그는 폭격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이안은 차갑게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저희가 살아 있다는 보고를 올리셨습니까?”“이안아, 지금 상황이 복잡해.”“보고하셨냐고 묻고 있습니다.”“상부에서 이미 결정한 일이야. 내가 함부로 바꿀 수 없어.”이안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그는 자신이 폭격을 명령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상부의 결정이라는 말 뒤에 숨었고, 누가 흑랑의 생존 보고를 누락했는지, 구조 요청이 어디에서 막혔는지도 설명하지 않았다.“당신은 알고 있었군요.”“내 말 좀 들어.”“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다리라고 했어요?”“나도 널 살리려고 하고 있어!”도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내가 지금 여기서 반대하면 모든 게 끝나. 너도 알잖아, 군에서 명령이 어떤 의미인지.”이안은 무전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강도윤, 내 부하들이 죽었어.”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오승필 중사가 죽었고, 윤기석 병장도 죽었어. 지금도 세 명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당신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어?”도윤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조금만 더 기다려. 내가 어떻게든…….”“당신이 살리려는 게 나야, 아니면 당신 자리야?”그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그 순간 폐광 밖에서 낮고 묵직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항공기 엔진음이었다.이안은 무전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전원 기상. 폐광 안쪽으로 이동한다.”정태식이 다가왔다.“대위님, 구조기입니까?”이안이 통신 화면을 보여 주자 정태식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이게 무슨 뜻입니까…….”“본부 기록에는 우리가 없어.”이안은 총을 고쳐 메며 갱도 안쪽을 가리켰다.“구조기는 오지 않아. 부상자부터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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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이안은 기둥을 놓지 않았다.민재가 마지막 힘을 다해 그녀의 팔을 밀어냈다.“가십시오!”거대한 암석이 떨어지는 순간 정태식이 이안의 몸을 끌어당겼다.두 사람이 바닥으로 넘어지는 사이 흙먼지가 갱도를 가득 메웠고, 민재가 있던 자리는 무너진 암석 아래로 사라졌다.이안은 몸을 일으키자마자 그쪽으로 기어갔다.“박민재!”대답이 없었다.그녀가 다시 이름을 부르며 돌을 치우려 했지만, 위쪽에서 계속 자갈이 떨어지고 있어 더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정태식이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대위님, 지금 안 가면 나머지도 죽습니다.”이안은 무너진 암석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하던 민재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그녀는 민재의 인식표조차 거두지 못했다. 무너진 지지대 아래로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고, 암석을 치울 만한 장비도 시간도 없었다.그러나 살아남은 대원들은 여전히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이안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정 상사, 부상자부터 수로 쪽으로 보내.”정태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원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민재가 사망하면서 생존자는 아홉 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안과 정태식, 준호를 포함한 여섯 명이 움직일 수 있었고, 나머지 세 명은 부축 없이는 이동하기 어려운 상태였다.이안은 걸을 수 있는 대원 두 명에게 각각 부상자 한 명씩을 맡겼다. 정태식은 출혈이 심한 최 상사를 부축했고, 준호는 남은 부상자의 장비를 나누어 멘 뒤 앞쪽 통로를 확인했다.이안은 무전기를 꺼냈다.화면에는 아직 강도윤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그녀는 마지막으로 송신 버튼을 눌렀다.“강도윤 중령. 흑랑은 현재 아군의 폭격을 받고 있다. 즉시 타격 중지를 요청한다.”응답이 없었다.“전사자 발생. 생존자 다수. 반복한다. 이 좌표에 아군이 살아 있다.”잠시 뒤 무전기에 잡음이 일었다.그리고 도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미안하다, 이안아.”이안은 무전기를 귀에 댄 채 굳었다.“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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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차가운 물이 서이안의 허벅지까지 차올랐을 때, 지하 수로 앞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최 상사님! 제 손 잡으십시오!”김준호의 목소리였다.이안이 손전등을 들어 올리자 좁은 수로를 따라 이동하던 대원들이 한꺼번에 멈춰 있는 모습이 보였다. 최 상사가 미끄러운 바닥에서 발을 헛디뎌 물속으로 쓰러졌고, 그를 부축하던 정태식이 벽에 어깨를 붙인 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폐광 안으로 밀려드는 물살은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세졌다. 산 위에서 계속되는 폭격으로 지하수가 흐르던 통로가 무너진 듯했고, 바닥에 쌓여 있던 자갈까지 휩쓸려 내려오면서 대원들의 발목을 때렸다.이안은 허리춤에 걸어 둔 안전줄을 풀어 정태식에게 던졌다.“정 상사, 최 상사 허리에 묶어. 준호는 앞쪽 지지대에 줄 고정하고!”준호는 곧바로 움직였지만, 물살 때문에 몇 걸음 나아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미끄러운 바위에 무릎을 부딪히면서도 앞쪽 철제 지지대까지 기어간 그는 줄을 두 번 감아 고정했고, 정태식은 그사이 최 상사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이안은 최 상사의 얼굴을 확인했다.그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며, 붕대 아래에서는 피가 계속 배어 나오고 있었다.“최 상사님,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희미한 신음이 대답을 대신했다.이안이 그의 방탄조끼를 붙잡아 몸을 지탱하자 정태식도 반대편에서 팔을 받쳤다. 두 사람이 최 상사를 부축해 이동하는 동안 나머지 대원들은 벽을 짚고 발걸음을 옮겼지만, 부상자 세 명을 데리고 좁은 수로를 통과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뎠다.누군가 발을 헛디디면 뒤따르던 사람까지 함께 넘어졌고, 쓰러진 대원을 일으켜 세우는 사이 물은 조금씩 더 높아졌다.뒤쪽에서 둔탁한 충격음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이안이 고개를 돌리자 폐광 입구 방향에서 흙먼지가 밀려왔고, 곧이어 부러진 목재와 돌조각들이 물살에 휩쓸려 내려오기 시작했다.“전원 앞으로! 멈추지 마!”대원들이 속도를 높였다.이안은 후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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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정태식이 대원들을 이끄는 동안 이안과 준호는 갈림길에 남아 추격하는 적을 견제했다. 총성이 좁은 수로 안에서 울릴 때마다 귀가 먹먹해졌고, 탄환이 벽에 부딪히면서 날카로운 돌조각이 튀어 올랐다.준호가 탄창을 교체하며 물었다.“대위님, 기석 형이 남긴 기록 말입니다.”“지금은 앞을 봐.”“정말 본부에서 우리 위치를 지운 겁니까?”이안은 대답 대신 적이 접근하는 방향으로 두 발을 쏘았다. 앞서오던 남자가 바위 뒤로 몸을 숨기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준호를 돌아보았다.“우리가 살아 있다는 보고를 본부에 보냈어. 그런데 폭격 승인 기록에는 아군이 없다고 되어 있었지.”준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그럼 구조기는…….”“오지 않아.”그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강 중령님도 알고 계셨습니까?”이안은 총을 다시 겨누었다.“그래.”준호는 더 묻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흔들렸지만, 이내 총을 고쳐 쥐고 뒤쪽을 경계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안은 잠깐 가슴이 저렸다.스물셋.아직 여동생 졸업식에 가겠다는 약속 하나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할 나이였다.“준호야, 네가 해야 할 일은 살아서 돌아가는 거야.”그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자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위님도 같이 가셔야 합니다.”두 사람은 서로의 움직임을 확인하며 오른쪽 통로로 후퇴했다.***물길은 점점 좁아졌다.통로가 낮아지는 구간에서는 허리를 굽혀야 했고, 바닥이 깊게 파인 곳에서는 물이 가슴까지 차올랐다. 부상자들은 거의 끌려가다시피 했으며, 대원들은 서로의 전투복을 붙잡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그렇게 얼마를 이동했을까.앞쪽에서 정태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위님, 길이 끊깁니다!”이안이 대원들 사이를 지나 앞으로 나아가자 수로의 마지막 구간이 드러났다.바닥이 갑자기 사라지는 곳이었다.물은 그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고, 어둠 속에서는 폭포처럼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이안은 벽에 몸을 붙인 채 아래쪽으로 손전등을 비췄다. 몇 미터 아래에 바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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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준호가 서 있던 곳이었다.“준호야!”이안이 달려갔지만 바위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준호는 뒤로 물러나려다 발을 헛디뎠고, 한쪽 다리가 갈라진 틈 아래로 빠져들었다. 그는 간신히 손을 뻗어 바위 모서리를 붙잡았지만, 쏟아지는 물이 몸을 계속 아래로 끌어당겼다.이안은 바닥에 엎드려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손 놓지 마!”준호가 이를 악물고 몸을 끌어올리려 했으나 물에 젖은 장갑이 미끄러지면서 팔이 조금씩 내려갔다.정태식이 달려와 이안의 허리를 붙잡았다.“대위님, 같이 끌어올리겠습니다!”두 사람이 힘을 합치자 준호의 어깨가 바위 위로 조금 올라왔다.“됐어, 준호야. 조금만 더!”그러나 그 순간 수로 뒤쪽에서 거대한 물소리가 밀려왔다.폭격으로 무너진 갱도 안쪽에 고여 있던 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었다.검은 물이 좁은 통로를 가득 채운 채 밀려왔다.“정 상사, 몸 고정해!”정태식이 바위에 발을 걸고 버텼지만, 물살은 이미 그들의 무릎을 덮쳤다.준호의 몸이 다시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이안은 손목을 더 세게 붙잡았다.“김준호! 나 봐!”준호가 고개를 들었다.“여동생 졸업식 가야지! 네가 꼭 가겠다고 했잖아!”준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대위님…….”“그러니까 올라와! 여기서 끝내지 마!”그는 남은 힘을 다해 바위를 붙잡으려 했지만, 발아래에서는 물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이안은 정태식에게 몸을 더 잡아당겨 달라고 외쳤다.바로 그때 위쪽 천장에서 암석 하나가 떨어졌다.정태식이 이안을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머리를 정면으로 맞았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충격에 바위 가장자리가 다시 부서졌고, 준호의 몸이 아래로 크게 흔들렸다.이안은 손목을 붙잡은 채 함께 미끄러졌다.“대위님!”정태식이 그녀의 전투복을 붙잡았다.준호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이안의 손을 바라보았다. 찢어진 장갑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손가락은 이미 감각을 잃은 듯 굳어 있었다.“대위님, 이러다 같이 떨어집니다.”“입 다물어. 올라올 생각만 해!”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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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그녀는 줄을 내려 보려 했지만, 남은 줄로는 준호가 있는 바위까지 닿지 않았다. 수로 벽을 따라 내려갈 길을 찾는 동안에도 물살은 점점 거세졌고, 준호의 몸은 다시 아래쪽으로 밀려 내려갔다.“준호야…….”이안은 마지막까지 손전등을 비췄다.그러나 준호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잠시 뒤 그의 몸이 급류에 휩쓸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이안은 바위 끝에 엎드린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그녀는 준호가 추락하는 모습을 보았고, 아래쪽 바위에 부딪힌 뒤 움직이지 않는 모습까지 확인했다. 살아 있을 가능성을 붙잡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본 광경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그가 마지막으로 내밀었던 사진은 이안의 손안에 구겨진 채 남아 있었다.정태식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대위님, 아래쪽 대원들이 기다립니다.”이안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준호를 두고 어떻게 가.”“여기서 더 버티면 그 사람들도 죽습니다.”정태식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저도 준호를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남은 대원들을 살려야 합니다.”이안은 손안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그녀는 천천히 사진을 전투복 안쪽에 넣었다.“……가자.”그 한마디를 꺼내는 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이안이 아래쪽 바위턱에 도착했을 때, 대원들은 부상자들을 둘러싸고 기다리고 있었다.준호가 사망하면서 흑랑의 생존자는 여덟 명으로 줄었다.이안과 정태식, 중상자 세 명, 그리고 이름을 부를 힘조차 남지 않은 대원 세 명이었다.정태식은 최 상사의 상태를 확인한 뒤 이안에게 다가왔다.“대위님, 이대로는 오래 못 갑니다. 최 상사님 맥박이 약해지고 있습니다.”이안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최 상사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고, 다른 부상자들 역시 추위와 출혈 때문에 몸을 떨고 있었다.“밖으로 나가는 길은?”대원 한 명이 손전등을 들어 어둠 속을 비췄다.“수로가 계곡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들어옵니다.”멀리서 희미한 회색빛이 비치고 있었다.새벽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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