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6화

Author: 윤소정
강지현이 몇 걸음 떼지도 않아 차 안에서 한 남자가 내리더니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상대는 바로 지난번 그녀에게 명함을 건넸던 사람이었다. 다만 오늘은 제복 대신 평범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꼈는데 훨씬 친근한 분위기를 풍겼다.

강지현은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아무래도 일부러 그녀를 데리러 온 듯 차 안에는 오직 그들 두 사람뿐이었다.

“실례지만 누구...”

“저는 대표님 개인 비서 최동윤입니다.”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최동윤은 바로 그 뜻을 알아듣고 대답했다.

“최동윤 씨 대표님은 왜 저를 정략결혼 상대로 선택하셨대요? 우린 서로 일면식도 없을 텐데...”

강지현이 조심스럽게 떠보자 최동윤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대표님 사생활이라 저는 잘 모릅니다. 다만 대표님이 최근에 귀국하셔서 강지현 씨와 모르는 사이인 건 맞을 거예요.”

“그럼...”

강지현은 잠깐 생각하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표님 외모는 어때요?”

이 정도로 신비주의자라면 설마 엄청 못생겨서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비록 정략결혼 상대일 뿐이지만 만약 상대가 너무 못생겼다면 강지현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녀의 질문에 최동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김태하의 옆에서 수년간 일하면서 그의 외모를 걱정하는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최동윤은 이내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전 대표님의 외모에 대해 평가할 자격이 없어요. 이따가 직접 만나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무래도 못생겼나 보다. 강지현도 그만 기대를 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화려한 양옥집으로 들어섰다.

도심이었지만 다소 외진 곳이라 프라이버시가 꽤 잘 돼 있었다.

최동윤은 그녀에게 이곳이 회원제로 운영되는 유명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이고 오늘 식사 자리를 위해 김태하가 레스토랑 전체를 대관했다고 했다.

강지현이 식당 안으로 들어선 후, 최동윤은 입구를 지키던 경호원들과 함께 물러났고 직원이 그녀를 조용한 룸으로 안내했다.

“김태하 씨?”

룸 안에서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빛나며 한 남자의 등을 환히 비췄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부르자마자 강렬한 인상을 주는 얼굴과 마주했다.

깊고 날카로운 눈매, 오뚝한 코, 조각처럼 정교한 입술이 한눈에 들어왔다.

강지현이 넋을 놓고 멍하니 있던 그때,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네. 제가 김태하예요. 앉으세요, 강지현 씨.”

“아... 네.”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우아함을 신경 쓸 겨를이라곤 전혀 없었다.

‘뭐야? 전혀 못생기지 않았잖아!’

“왜요? 제가 못생겼나요?”

강지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쳐다보지 못하자 김태하가 물었다.

그는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압박감을 풍겼다.

그의 질문에 강지현이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못생기지 않으셨어요. 정말 잘생기셨고 완전 훈남이세요.”

여태껏 봐온 남자 중에 역대급 비주얼이었다.

학교 킹카인 이도운은 연예인 뺨치는 외모라 현실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미남이다.

수년간 이도운을 봐온 강지현이기에 웬만한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김태하는 말 그대로 언나더 레벨이었다.

완벽한 이목구비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칭찬 고마워요.”

김태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강지현 씨도 미인이세요.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보내주신 선물 감사드려요.”

강지현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예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은 아닌 듯했다.

“그건 선물이라고 할 수도 없죠. 지현 씨가 좋아한다면 앞으로도 자주 선물할게요.”

그의 예의 바른 말투가 참으로 듣기 편했다.

하지만 강한 거리감과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김태하가 음식을 내오라고 손짓했다.

이곳의 음식은 전부 코스 요리였는데 매우 정교했고 한 접시당 한입에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맛 또한 아주 특별하면서도 식감이 풍부하고 맛있었다.

하지만 음식이 오르는 속도가 너무 느려 강지현은 배가 차지 않았다.

기나긴 식사 시간 동안 김태하는 그녀와 눈만 마주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서먹한 사이라 음식이 있어도 어색함을 면하진 못했다.

김태하가 사람에 대한 요구가 엄격하다는 주병찬이 말이 떠올라 그가 말하지 않는 한 강지현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메인 요리가 끝나고 디저트가 나오기 시작해서야 김태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네, 맛있네요.”

강지현은 디저트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평가가 너무 수준 낮다는 생각에 귓불이 살짝 빨개졌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김태하 씨가 고른 요리들 모두 특별했고 맛도 아주 풍부했어요.”

김태하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내 평가가 전문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강지현은 미식가가 아니었고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자주 오는 것도 아니었으니 어휘력이 당연히 제한적이었다.

“지현 씨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다른 식당으로 바꾸도록 하죠. 지현 씨가 정해요.”

“아니에요. 전 여기가 맛있어요...”

강지현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가 평가하는 듯한 그의 시선에 또 이렇게 말했다.

“여기 음식 맛있어요. 다만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자주 오지 않고 또 김태하 씨를 처음 만나는 자리라 긴장해서 그래요. 다음에 좀 더 편안한 환경에서 만난다면 대화도 많이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결국 본인의 생각을 다 얘기했다.

어차피 정략결혼일 뿐 진짜 연애하는 것도 아니니 그녀의 감정이 가장 중요했다.

“알겠어요.”

김태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제가 말수가 적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네요.”

강지현이 웃어 보였다.

이에 남자도 긴장이 풀린 듯 크고 단단한 몸을 뒤로 기댔다. 검은색 셔츠가 살짝 구겨지면서 그의 훤칠한 몸매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어르신께 전해 들었는데 정략결혼에 대해 이미 동의하셨다고요?”

“네.”

강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안이 좀 전통적인 집안이라 약혼부터 결혼, 혼인 신고까지 모든 절차를 빠짐없이 거쳐야 해요. 제가 요즘 좀 바빠서 지현 씨 며칠만 더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서두르고 싶지 않거든요. 뭐 물론 다른 요구사항이 있다면 제게 말씀하셔도 돼요.”

“괜찮아요. 김태하 씨가 정해주시는 대로 따를게요.”

“알겠어요.”

강지현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김태하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늦었네요.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김태하 씨도 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텐데 왜 저랑 결혼하기로 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저는 지현 씨의 자산이나 주씨 가문에 관심이 전혀 없어요. 단지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주씨 가문은 확실히 좋은 선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김태하는 그녀의 속마음을 단번에 꿰뚫어 본 듯했다.

사실 그녀는 김태하가 자신을 선택한 게 수십조 원의 유산과 관련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기 전에 강지현도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김씨 가문의 자산 역시 엄청났고 권력도 막강했다. 수많은 기업 거물들이 친분을 맺고 싶어도 맺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단지 이익만을 바라볼 리는 없었다.

“집에서 결혼하라고 재촉하나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저는 제 아내가 순종적이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협조해주는 그런 아내요.”

강지현은 그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애초에 이도운이 그녀에게 대시한 이유도 바로 말을 잘 듣고 통제하기 쉬운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의지할 곳 없는 고아였으니까.

강지현은 차분한 눈길로 김태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주상 그룹의 상속 1순위이고 주씨 가문은 해원시에서 뿌리 깊은 가문입니다. 만약 김태하 씨 집안에서 사업 확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제가 가장 좋은 조력자일 거예요. 그리고 전 이제 막 주씨 가문으로 돌아간 터라 홀로 싸우다가 잡아먹힐 수가 있어 김태하 씨의 힘이 필요해요.”

“우리가 결혼하면 김씨 가문에 이득을 더해줄 것이고 저한테는 발판을 다질 힘을 줄 수가 있죠. 각자 필요한 걸 얻는 것이야말로 페어플레이 아니겠어요?”

김태하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했다.

남자는 시간이 귀하다 보니 레스토랑을 나서자마자 누군가 다가와 그에게 공항으로 가야 한다고 알렸다.

눈치 빠른 강지현은 그에게 택시 타고 갈 테니 데려다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김태하는 매너를 지키며 그녀를 차에 태워 보낸 후에야 돌아섰다.

가는 길에 강지현은 주병찬의 전화를 받았다.

두 사람이 오늘 저녁에 만나는 걸 알고 상황을 물으려 전화한 것이었다.

그녀는 분위기가 나름 괜찮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김태하에게서 풍기는 압도적인 카리스마 때문에 옆에 있으면 다소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깊은 밤, 강지현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폰 화면이 줄곧 밝게 켜져 있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이도운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지현아, 이 늦은 시각에 왜 아직도 안 돌아와? 무슨 일 생겼어? 전화는 왜 안 받는 건데?”

강지현은 전화를 들기만 할 뿐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시선은 통유리창 밖의 야경에 사로잡혀 있었고 속으로 자신의 안목을 감탄했다.

“지현아?”

이도운의 다급해진 목소리를 듣고서야 강지현은 정신을 차렸다.

“아, 오늘 거래처를 만났는데 좀 멀리 와서 호텔에 묵었어.”

자신이 이사한 사실을 알고 있을 거로 여겼지만 남자의 말을 듣고 보니 백하린만 신경 쓴 나머지 아직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에 강지현도 아무렇게나 핑계를 둘러댔다.

“호텔에서 편히 잘 수 있겠어? 내가 그냥 데리러 갈까? 주소 보내줘 봐.”

이도운은 안도하는 듯하면서도 목소리에 걱정이 더욱 짙어졌다.

“괜찮아. 오늘 너무 피곤해서 움직이고 싶지 않아.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쉬어야겠어.”

그도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

“알았어. 그럼 내일 회사에서 봐.”

“응.”

강지현이 대충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이도운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여보, 너무 보고 싶다. 여보는 나 안 보고 싶어?”

“...”

한동안 침묵이 흐르자 이도운이 계속 말을 이었다.

“지현아.”

“잠들 뻔했어... 너무 졸려...”

그녀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며 졸린 척했다.

이에 이도운이 아쉬움을 달래며 말했다.

“알았어. 얼른 자. 이만 끊을게.”

“응.”

대답을 마친 강지현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

“...”

뚜뚜 소리에 이도운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텅 빈 듯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강지현에게 달콤한 말을 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감정적인 동요를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요즘 어찌 된 영문인지 자꾸만 그녀에게 묘한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도운아, 나 사랑해?”

이도운이 멍하니 있던 그때, 가느다란 팔이 뒤에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다름 아닌 백하린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도운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는 씩 웃으며 백하린의 손을 잡았다.

“그걸 꼭 물어야 알아? 자기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야. 자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하긴, 백하린은 정말 그가 뼛속 깊이 사랑하는 여자였다.

16살 때, 그녀가 목숨을 구해줬고 그때부터 큰 결심을 내렸다. 평생토록 이 여자를 지켜주고 백년해로하겠다고 다짐했었지...

“그런데 나 무서워.”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강희숙
머가 무섭다는 걸까요?빨리 보러가야죠
VIEW ALL COMMENTS

Latest chapter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740화

    김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만으로도 답은 이미 분명했다.원래라면 가장 먼저 강지현에게 연락해야 했다.그녀는 분명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되었든 살아 있다는 소식 하나만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사람이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두 사람의 감정을 믿지 못하는 거야?”육운성이 답답한 듯 말했다.“넌 아내를 위해 많은 걸 희생했잖아. 만약 네 아내가 고작 네가 지금 이런 모습이라는 이유만으로...”“믿어.”김태하가 낮게 말을 끊었다.“하지만 우리 사이가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한마디 한마디에는 피가 배어 있는 듯했다.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아프게 만드는 말이었다.평소 무뚝뚝한 육운성조차 코끝이 시큰해졌다.“하지만 그녀는 너를 그리워하고 있을 수도 있어. 어쩌면 그녀에게는 네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르잖아.”“시간은 모든 고통을 조금씩 흐리게 만들어. 내 아내는 강한 사람이야. 1년으로 부족하다면 2년, 3년이 지나서 언젠가는 잊게 될 거야. 하지만 평생 나를 돌보며 살아가야 한다면 그녀 역시 평생 고통받게 되겠지.”김태하는 너무나 이성적이었다.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고통스러워한다면 강지현은 자신보다 몇 배는 더 괴로워할 사람이라는 것을.앞으로의 시간 동안 그녀가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고 해도 두 사람은 더 이상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어갈 수 없을 것이다.그러니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녀의 인생까지 빛을 잃게 만들 수는 없었다.어차피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목숨이었고 조금 더 미룬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차라리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고통을 감당하는 편이 나았다.그래서 미칠 듯이 강지현이 그리워도 참아야 했다. 다시는 그녀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됐다.“그러면 가족들은?”육운성이 다시 물었다.“그 사람들도 네가 죽었다고 믿게 할 셈이야?”김태하는 눈가가 붉어졌지만 목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739화

    강지현과 아이들 곁에는 이런 짐 덩어리는 필요 없었다.김태하 역시 지금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겨우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이제 다시 그녀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잔인했다.김태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눈가에서는 끝내 눈물이 흘러내렸다.숨은 점점 거칠어졌고 격하게 들썩이는 가슴을 억누르려 애썼지만 마음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양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두 다리는 아무 감각도 없었다.지금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남은 삶을 그저 누군가의 도움에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김태하, 정신 차려!”육운성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오랜 세월 만나지 못했지만 그는 김태하가 얼마나 자존심 강한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는 결코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었다.김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문 채 입술을 세게 깨물 뿐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입가에는 피가 배어 나왔다.간호사가 급히 다가왔지만 김태하는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았다.그리고 쉰 목소리로 낮게 내뱉었다.“나가.”“모두 나가라고.”육운성은 더 위로해 주고 싶었다.하지만 김태하는 이미 감정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너져 있었다.지금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는 문 앞에 몇 명만 남겨두고 혼자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기로 했다.그날 밤, 육운성은 다시 김태하를 찾아왔다.김태하는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채 초점을 잃은 눈으로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한때 누구보다 빛나던 사람이 이렇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자 육운성의 마음 역시 착잡해졌다.“의사와 이야기를 나눠봤어. 너무 걱정하지 마.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회복될 수 있을 거야.”하지만 그 말은 육운성 자신조차 완전히 믿지 못하는 위로였다.현재 김태하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될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738화

    의사는 현재 나타나는 증상이 정상적인 회복 과정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김태하는 아직 몸속 염증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고 목 역시 심하게 부어 있었다.게다가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체력이 크게 떨어져 온몸에 힘을 주기 어려운 상태였다.“내 일행은...”김태하는 의사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육운성을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은 송준호와 함께 있었다.송준호 역시 다친 상태였고 의식이 희미해져 갈 때마다 그의 곁에서 계속 용기를 북돋아 주던 사람이 바로 송준호였다.육운성은 잠시 멈칫하며 옆에 있던 비서를 바라봤다.사람을 구해 왔다는 보고를 받을 때 김태하 곁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비서 역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그들이 받은 지시는 오직 김태하를 찾아 데려오는 것이었다.설령 김태하 곁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별도의 지시가 없는 이상 함께 데려올 이유는 없었다.무엇보다 육운성은 비밀리에 움직였고 김태하만 찾아오라고 거듭 당부했었다.“미안해. 다른 일행이 있는 줄은 몰라서 너만 데려왔어.”육운성이 담담하게 말했다.애초에 그는 다른 사람까지 구할 생각은 없었다.무엇보다 그런 상황에서 김태하 곁에 있던 사람이 정말 아군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설령 육운성이 직접 그곳에 갔더라도 데려왔을 사람은 김태하 한 명뿐이었을 것이다.김태하는 순간 크게 동요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손으로 몸을 짚는 순간, 양손과 팔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마치 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김태하의 눈에 공포가 번졌다. 입을 여는 순간 목에서는 찢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나... 지금 어떻게 된 거야?”“어떻게 된 일입니까?”육운성 역시 이상을 눈치채고 곧바로 의사에게 물었다.의료진은 즉시 김태하의 상태를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이전까지는 외상이 심했고 뇌 안에 혈종이나 손상이 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신경 손상이 이렇게 심각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정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737화

    하원영은 강지현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주시언에게 모두 들었다.그녀는 자신이 말주변이 없는 편이라 누군가를 위로하는 데 서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도 강지현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냈고 강지현은 한참 뒤에야 짧은 답장을 보내왔다.하원영은 강지현의 상태가 좋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런 방식으로라도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현다영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하원영 씨와 주 대표님은 요즘 어떠세요?”인터넷에는 주시언이 주상 그룹을 떠난 뒤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두 사람의 결혼 역시 석 달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예측까지 나왔다.주병찬은 작정한 듯 주시언을 몰아붙이고 있었고 이 갈등을 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강지현뿐이었다.하지만 강지현은 귀국하자마자 미래 그룹 일에만 매달렸고 주변 사람들 역시 암묵적으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잘 지내요. 그 사람도 많이 노력하고 있고요.”하원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하지만 말과 달리 그녀의 표정에는 걱정이 그대로 드러났다.현다영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맞다! 주단우가 해임됐잖아요. 그 자리가 비었으니까 다른 회사에서 받아주지 않더라도 주상 그룹에는 주 대표님 자리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요?”하원영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그래도 주상 그룹도 결국 주씨 가문과 관련된 회사잖아요. 그건 약속에 어긋나는 일이에요.”현다영은 입술을 삐죽였다.“그렇다면 주시언 씨 아버님이 일부러 발목을 잡는 것도 약속에 어긋나는 일이잖아요.”그녀는 주시언과 하원영이 너무 착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다.이내 현다영은 디저트 상자를 챙겨 들며 말을 이었다.“주 대표님께 한번 물어보세요. 대표님께서 지현 언니를 도와드릴 생각이 있다면 언니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하원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현다영이 떠난 뒤에도 그녀의 눈빛에는 잔잔한 파문이 오래 남아 있었다....M국, 아침.육운성은 식당에서 식사하며 비서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736화

    “왜 말이 없어졌어요?”주단우가 갑자기 침묵하자 현다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녀는 주단우가 더 이상 거짓말을 이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비꼬듯 말했다.주단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은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눈꼬리 쪽으로 흘러내릴 듯 고였고 그는 고개를 돌려 손가락으로 재빨리 닦아냈다.“무슨 말을 더 해? 할 수 있는 설명은 다 했어. 네가 믿지 않는다면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어.”현다영은 자신이 착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조금 전, 주단우가 울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가방을 집어 들고 곧장 룸을 빠져나왔다.술집을 나온 현다영은 주단우가 금방이라도 뒤쫓아올 것만 같아 곧바로 택시를 잡아탔다.차가 한참을 달린 뒤에야 그녀는 창문을 내렸다.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그제야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다.드디어 주단우가 무너지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봤다.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다.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원망을 쏟아낸 뒤 남은 것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허무함뿐이었다....다음 날 오후, 주상 그룹 사내 게시판에 인사 발령 공지가 올라왔다.주단우는 부대표직에서 해임됐고 후임 자리는 회사의 원로 임원이 임시로 맡게 됐다.현다영은 각 부서를 돌며 서류를 전달하던 중 직원들이 주단우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들었어요? 오늘 아침에 회사 앞에 경찰차 왔던 거.”“네, 저도 봤어요. 부대표님이 차에 올라타던데요.”“주단우요? 퇴사한 거 아니었어요?”“무슨 퇴사예요. 조사받으러 간 거래요. 엄 대표를 도와 회사 자산을 꽤 많이 빼돌렸고 회사 관련 규정도 심각하게 위반해서 범죄 혐의까지 있다던데요. 엄 대표가 해외에서 조사받고 있으니까 주단우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모양이에요.”“그러면 감옥 가는 거 아니에요?”“그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해원시에서 제대로 자리 잡기는 힘들겠죠.”현다영은 원래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제735화

    주단우는 원래 누구에게도 자신을 변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 보여주고 싶은 정도였다.이게 모두 업보인 걸까.그동안 다른 사람의 감정을 가볍게 여기고 사랑을 장난처럼 대했던 대가.그래서 이제야 처음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는데 자신의 마음이 짓밟히는 것조차 당연한 일인 걸까.“현다영, 똑똑히 들어. 천루비가 사랑했던 남자는 내가 아니야.”“난 그 아이를 3년 동안 후원했어. 편지도 여러 번 주고받았고 좋은 아이였다는 것도 잘 알아.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병을 앓고 있었어. 오랫동안 그 아이를 다독였지만 결국 끝까지 붙잡지는 못했어.”“독한 말을 했던 것도 인정해.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야.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 버리려는 선택을 난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주단우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하지만 내가 가장 후회하는 건... 그 아이가 내게 몇 안 되는 진심 어린 친구였는데도 더 많이 신경 써주지 못했다는 거야. 정작 가장 힘들어할 때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거고.”주단우의 말을 들은 현다영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거의 1분 가까이 굳어 있었다.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목의 핏줄까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정말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현다영은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이야기를 참 잘도 지어내네요. 주단우 씨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3년씩이나 후원했다고요?”“정말 대단하네요. 그런 거짓말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하마터면 저도 감동할 뻔했잖아요.”현다영은 이를 악물고 한 글자씩 내뱉으며 주단우를 비웃었다.주단우는 끝내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그는 성큼 다가가 현다영을 테이블 모서리 쪽으로 거칠게 밀어붙인 뒤, 그녀의 양팔을 꽉 움켜쥐었다.“끝까지 안 믿겠다는 거야? 어떻게 해야 믿을 건데? 천루비 가족을 직접 찾아가서 증명이라도 해야 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