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4 화

작가: Jino
last update 게시일: 2026-10-15 08:36:49

제4조. 서로에게 진짜로 빠지면 즉시 계약 파기.

(네 조항 중 이것만 밑줄이 없다.)

추석 첫날 아침 여덟 시. 이현의 차가 서윤의 오피스텔 앞에 섰다.

서윤은 조수석 문을 열다 멈췄다. 뒷좌석에 선물 상자가 세 개 쌓여 있었다.

"……이거 다 뭐예요?"

"배, 한과, 그리고 막걸리."

"막걸리는 왜요."

"어제 물어봤잖아요. 아버님 뭐 좋아하시냐고. 서윤 씨가 막걸리라고."

"그건 그냥 한 말인데."

"그냥 한 말이 제일 정확해요. 기획서보다."

서윤은 안전벨트를 매며 창밖을 봤다. 괜히 할 말이 없었다.

컵홀더에 컵 하나가 꽂혀 있었다. 아이스 바닐라라떼. 뚜껑 옆에 매직으로 '시럽 1/2, 얼음 조금'.

"이거 직접 쓴 거예요?"

"카페 사장님이 바빠 보여서요."

서윤은 빨대를 물었다가, 씹기 전에 얼른 입을 뗐다.

고속도로에 올라서자 서윤은 태블릿을 꺼냈다.

"설정 맞춰요. 이모들 질문 폭격 대비."

"설정이요."

"사귄 지 얼마나 됐냐. 석 달. 여름휴가 끝나고부터."

"석 달."

"누가 먼저 고백했냐. 차이현 씨가."

"왜 제가요."

"제가 갑이니까요."

이현은 운전대를 잡은 채 짧게 웃었다. "그럼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물으면요?"

서윤은 태블릿을 톡톡 두드렸다. "그건…… 입사 초부터 몰래 좋아했다고 해요. 그게 제일 그럴듯해요. 로맨틱하고."

"입사 초부터."

"어려워요? 연기가?"

"아뇨." 이현이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꿨다. "그건 쉬울 것 같네요."

서윤은 그 대답이 좀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솔뫼리 본가까지는 두 시간 반이 걸렸다. 마당엔 감나무가 있었고, 평상이 있었고, 대문 앞에 이모 셋이 서 있었다.

나란히. 팔짱을 끼고. 면접관처럼.

"왔다!" 큰이모가 외쳤다.

"생각보다 크네." 둘째 이모가 이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백팔십?"

"백팔십 맞습니다."

"거봐, 내가 맞혔지."

막내 이모는 입을 삐죽였다. "치과의사 총각도 백팔십이었어."

"이모!"

이현은 선물 상자를 든 채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차이현입니다."

"알아, 단톡방에서 봤어." 큰이모가 상자를 받아 들었다. "막걸리네? 우리 제부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대?"

"서윤 씨가 알려 줬어요."

이모 셋의 시선이 일제히 서윤에게 꽂혔다. 서윤은 그냥 웃었다. 무슨 말을 해도 불리할 것 같았다.

그때 마당 안쪽에서 복실이가 튀어나왔다. 낯선 사람만 보면 동네가 떠나가게 짖는 진돗개였다. 작년엔 선 자리 상대 하나를 대문 밖까지 쫓아낸 전적도 있었다.

복실이는 이현 앞에서 두 번 짖었다. 이현이 쪼그려 앉아 손등을 내밀었다. 복실이는 킁킁 냄새를 맡더니, 그 자리에 벌러덩 누워 배를 보였다.

"어머, 복실이가?" 큰이모가 소리쳤다.

"개가 먼저 알아본다더라." 둘째 이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 이모는 복실이를 째려봤다. "배신자."

점심 전까지 부엌은 전쟁터였다.

엄마는 송편을 쪘고, 이모들은 전을 부쳤다. 이현은 거실에 앉아 있으라는 말을 세 번 듣고, 세 번 다 부엌으로 돌아왔다.

"동그랑땡은 제가 뒤집을게요."

"어머, 할 줄 알아?"

"자취 9년 차입니다."

뒤집개가 움직일 때마다 동그랑땡이 정확히 한 번씩 뒤집혔다. 기름도 튀지 않았다. 둘째 이모가 감탄했다.

"손목이 좋네."

"키보드를 쳐서 그런가 봐요."

"서윤아, 너는 뭐 하니?"

서윤은 꼬치전에 파를 꽂다가 고개를 들었다. 파가 거꾸로 꽂혀 있었다.

엄마가 옆으로 와서 파를 바로 꽂아 주며 속삭였다.

"야, 쟤 괜찮다."

"……응."

"근데 너, 쟤 앞에서 표정이 낯이 익다."

"무슨 표정."

"맨날 전화로 '그 차 씨가 또' 하면서 흉볼 때 그 표정."

서윤은 꼬치를 떨어뜨렸다. 엄마는 벌써 송편 찜기 쪽으로 가 있었다.

그리고 점심상 앞에서, 큰이모의 질문이 시작됐다.

"자, 이현이. 우리 서윤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

"이모, 무슨 퀴즈를 해."

"가만있어 봐. 진짜 사귀는지 보려고 그러지."

서윤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계약서엔 그런 조항이 없었다.

이현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고사리요."

서윤이 이현을 봤다.

"그리고 콩송편. 콩이 씹히는 게 싫대요. 깨송편만 드세요."

식탁이 조용해졌다. 엄마가 "어머" 했다. 막내 이모마저 입을 다물었다.

서윤은 식탁 밑에서 이현의 무릎을 톡 쳤다. 어떻게 알았냐는 뜻이었다. 이현은 대답 대신 송편 접시에서 깨송편만 골라 서윤 앞으로 옮겼다.

"회식 때 보면 나물은 늘 고사리만 옆으로 밀어 놓으시더라고요."

"……그걸 봤어요?"

"맞은편이라서요."

또 맞은편이었다.

막내 이모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래도 비교는 해 봐야지. 이게 그 치과의사 총각이야."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79 화

    "……둘 다 넣었어요?""청유형이랑 의문형. 선택권도 드리고, 확신도 드리고.""그거 제 거잖아요. 방금 제가 한 거.""좋은 문장은 오래 가요. 방금 생겼지만."서윤은 웃음이 터졌다. 터지면서 눈가가 뜨거워졌다."네."둘은 반지를 바꿔 끼웠다. 이현이 서윤의 왼손을 잡았다. 넷째 손가락에 11호가 들어갔다. 딱 맞았다. 둘째 이모의 눈은 1밀리미터도 틀리지 않았다. 서윤은 이현의 왼손을 잡았다. 20호가 들어갔다. 역시 딱 맞았다.서윤이 반지 안쪽을 봤다.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1/2'."……시럽이요?""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78 화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77 화

    "엄마가 물음표를 일곱 개 보냈어.""그게 웃겨요?""응. 작년이랑 똑같아서."민지는 이해 못 한 얼굴로 커피를 내렸다. 그러다 서윤의 코트를 봤다. 가슴께가 조금 불룩했다. 민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촉이 좋은 사람이었다."……선배, 오늘 야근 아니죠?""야근이야.""어디서요?""회사 앞."민지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서윤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팀장이 하던 방식이었다. 이 회사 사람들은 다 누군가의 방식을 닮아 가고 있었다.자리로 돌아온 서윤은 지갑을 열었다. 카드칸에서 냅킨을 꺼냈다. 모니터 뒤에 숨겨, 무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76 화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75 화

    "……이번에만요. 특별히.""누가 예약했어요?"직원이 서윤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온장고 쪽을 봤다.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있는 칸이었다.서윤은 알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이 편의점 직원은 거짓말을 이현만큼 못했다."그럼 맞은편 의자는요?""맞은편이요?""파라솔 테이블 의자가 두 개잖아요. 한쪽은 예약됐다 치고. 맞은편은요."직원이 잠깐 생각했다. "……맞은편은 예약 안 하셨어요.""그럼 그건 제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 "원래 제 자리예요. 1년 전부터."직원이 드디어 웃었다. 그리고 포스트잇 하나를 꺼내 계산대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74 화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