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계약 해지 건에 관해 얘기 좀 하고 싶은데요.”구승훈은 차갑게 웃었다."강 부장, 합의서를 보지 못했어?”강하리는 입꼬리가 굳어났다."봤어요...”“봤는데 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강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정상적인 퇴사를 하고 싶어요. 필요하시다면 후임을 찾아준 뒤 퇴사할 수도 있어요...”구승훈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 없었다. 강하리는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도 구승훈이 불쾌해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강 부장, 우리 회사는 자선단체가 아니야. 애초에 그 근로계약서에 사인했으면 순순히 지켜줘야지.”강하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표님, 회의실에서 분명히 제 퇴사에 동의하셨잖아요.”구승훈은 순간 당시 회의실에서 강하리가 안현우의 러브콜을 받은 일이 생각났다.구승훈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회의실은 무섭게 조용했다.회의실에 사람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구승훈은 탁 하고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탁자 위에 던졌다.회사의 임원들은 모두 가슴이 철렁거렸다.이어 맨 앞에 앉은 남자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강 부장, 내가 퇴사에 동의한 건 맞지만, 네가 마지막에 어떤 선택을 했는지 내가 알려줄까?”강하리는 순간 난감해졌다.강하리가 당시 그 2억 원 때문에 다시 구승훈을 찾았을 때, 그가 한 모든 말을 강하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강하리는 이런 난처함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아뇨, 기억나요.”"기억이 났으면 강 부장은 몸조리 잘하고 얌전히 출근해.”강하리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제가 어떻게 해야 그만둘 수 있는 거예요?”구승훈이 눈을 번쩍 뜨더니 말했다."강 부장, 여기는 모텔이 아니야. 백억을 내놓든지, 건강을 회복해서 출근하든지, 아니면 강 부장이 법정에서 나를 마주하고 싶으면 소원대로 해줄 수도 있어.”구승훈은 멈칫하더니 계속하여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백억원은 이미 내가 강 부장의 지난 3년 동안의 고생을 생각해서 싸게 쳐준 거니까
강하리는 멈칫했다."그 사건, 계속 다른 사람 못 찾았어요?”임정원은 피식 웃었다.“하리 씨가 허락해서 안 찾고 있었는데요. 설마 번복하고 싶은 거예요?”강하리는 문득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지난번에 임정원이 도움이 필요한 자료가 있다고 할 때, 강하리가 거절한 이후로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강하리는 임정원이 분명 다른 사람을 찾았을 거라고 생각했다.임정원이 계속 강하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후에 번역할 게 있으면 메일로 바로 보내줘요. 제가 최대한 일에 방해 안 가게 빨리해서 보낼게요.”"그래요, 그렇게 하죠. 이번 일은 뭐예요?”"계약 해지에 관한 문서인데 메일로 보내드릴까요?”"아뇨, 점심인데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임정원의 말이 제안에 강하리도 거절하기 힘들었다."좋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임정원와 약속한 레스토랑은 병원 근처에 있었다.강하리가 도착했을 때 임정원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얼굴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임정원이 물었다.강하리는 살짝 웃었다."요즘 제대로 쉬지 못했어요.”임정원은 강하리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식사 자리는 그럭저럭 조용하고 온화했다.식사를 마치자, 강하리는 그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잠시 후 임정원은 심란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하리 씨,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계약을 했어요?”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해결하긴 힘들겠죠?”임정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인정하기 싫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도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임정원은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강하리는 이미 그런 결과를 예상한 듯했다.어쨌든, 이건 SH그룹의 법무팀이 내놓은 협의이고 만약 허점을 찾을 수 있다면 구승훈이 이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을 쓰지는 않았을 거다."정말 구 대표님 곁을 떠날 생각이에요?" 임정원이 또 물었다.사실 이 말을 꺼내면 두 사람 모두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강하리는 이 남자가 무슨 꿍꿍이인지 도통 알길이 없었다. 그러나 구승훈이 화가 났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한테 다가가지 않고 멀찍이 침대 옆에 섰다."무슨 일이예요. 그냥 말하세요”구승훈은 눈을 번쩍 뜨고는 강하리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강하리는 원래 힘이 없던 터라 끌어당기는 힘에 못 이겨 구승훈의 품속에 쏙 들어갔다. 구승훈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홱 돌아서서 강하리를 창턱에 대었다."누구를 만나러 나갔어?"구승훈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강하리는 등뒤가 창턱에 배겨서 너무 아팠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하리의 몸부림에 구승훈은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구승훈이 힘을 더 보태자, 강하리는 등에 무딘 칼이 닿은 것처럼 더욱 아파왔다."어느 남자를 만나러 나갔었냐고!”"아파요! 승훈 씨!""아프게 해서 미안해.”구승훈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강하리를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강하리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입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승훈 씨, 이게 무슨 미친 짓이에요! ”"내가 미쳤다고? 역시 강 부장이 좋고 나쁨을 모르네.”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제 다른 사람하고 밥 먹을 자유도 없는 거예요?”그녀와 임정원의 관계는 누가 봐도 결백했다. 그래서 구승훈이 임정원을 질투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오히려 구승훈과 송유라는 누가 봐도 결백하지 않는 걸 알지만, 그는 보란듯이 계속 송유라을 데리고 와서 강하리 앞에서 자랑을 했다.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강하리를 놓아줬다.강하리는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옆에서 그녀가 기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녀가 마침내 기침을 멈추자 비로소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이런 몸 상태에서도 나가서 같이 밥이나 먹겠다니, 임 변호사가 너한테 그 정도로 중요해? 너는 지금 네가 어떤 신분인지 몰라?”방금 기침으로 강하리의 눈가가 붉어 났다.그녀는 약간 붉어진 눈을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강하리가 뭔 대단한 짓을 한 것도 아니다.강하리는 그저 임정원과 간단히 식사한 것이 전부다.갑자기 강하리는 오늘 밥을 먹고 일어났을 때 그녀가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키자, 임정원이 자신을 부축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그게 오늘 임정원과의 유일한 스킨십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고작 그 스킨쉽만으로 강하리와 임정원 사이를 의심한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강하리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구승훈을 바라봤다. "대표님 혹시 저한테 사람을 붙여 저를 감시했어요?”구승훈은 냉정하게 웃더니 말했다. "강 부장, 걱정하지 마. 나 아직 그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 하지만 오늘부터 너한테 사람을 붙이는 게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나몰래 바람피워도 모르겠어!”강하리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강하리는 구승훈을 무섭게 노려봤다."도대체 무슨 뜻이에요?”구승훈은 강하리를 슬쩍 쳐다보고는 폰을 꺼내 그녀 앞에 내동댕이쳤다."강 부장, 네가 직접 봐.”강하리가 내동댕이쳐진 폰을 집어 들고 채팅 기록을 누르자 사진 한 장이 보였다.임정원의 부축을 받는 장면이 매우 교묘하게 찍혀있었다.마치 강하리가 일부러 임정원의 품에 안긴 것처럼 말이다.강하리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도대체 누가 보낸 사진인지 보려고 더보기를 누르자 안현우가 바로 그 범인이었다. 게다가 구승훈의 친구 놈들의 채팅그룹에 보내져 있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계속 밑으로 내려봤다. 이어 안현우가 보낸 톡이 보였다.「강 부장님 정말 예상 밖이네, 승훈이 몰래 밖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니. 승훈아, 이런 나쁜 년도 좋다는 거야? 언제 임신하면 네 아이가 아닐지도 몰라.」강하리는 머리가 어지러워 났다. 그래서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 "이거 다 오해예요. 못 믿겠으면 레스토랑 CCTV를 가서 확인해 보세요. 임 변호사와 저는 정말 평범한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아이에 대해서는......”강하리는 감정이 벅차올라 눈물이 예고 없이 뚝뚝 떨어졌다."대표님 아이가 아니라고 의
강하리는 구승훈의 비수같이 꽂히는 말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임정원의 부축을 받았다고 더러워하다니...'강하리는 구승훈을 훑고는 되물었다."대표님께서 송유라한테 안겼던 곳이 더 많지 않나요?”구승훈은 한쪽에 서서 가벼운 미소만 지었다."강 부장은 유라랑 나 둘 중 누가 갑인지 몰라? 만약 네가 날 책임질 능력이 있다면, 나도 다른 여자는 건드리지 않을 수 있어.”강하리는 구승훈한테 요구할 자격조차 없었기에 더 이상 그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강하리는 그들의 관계가 대등하지 않다는 것을 잠깐 잊고 있었다."저 샤워할 거니까 나가주세요.”구승훈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얀 강하리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너 혼자 씻을 수 있겠어?”"네.”구승훈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장실에서 나왔다.화장실 문이 닫히는 순간 강하리는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그와중에 입술을 꽉 깨물며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못하게 공제했다.한참 울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는지 그재야 옷을 벗고 목욕을 했다.팔에 상처가 있어서 가능한 물에 닿지 않으려 조심했지만 결국은 거즈를 적셨다.방금 구승훈이 팔을 너무 세게 잡아당겨 상처가 다소 찢겼다. 거즈도 이미 붉게 변했다.강하리는 정신을 꼭 붙잡고 몸을 깨끗이 닦았다.누군가 화장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다 씻었어?”구승훈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다 씻었어요.”대답을 들은 구승훈은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에게 옷 한 벌을 건네주었다."이거 입어.”"네.”그때 강하리의 팔뚝에 이미 붉게 물든 거즈가 구승훈의 눈에 띄었다. "간호사 불러올게, 이따가 약도 바꾸자.”강하리의 시선은 땅으로 향한 채 감사하다 인사를 전했다.구승훈은 그런 강하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침착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구승훈이 간호사를 불렀을 때 강하리는 이미 옷을 다 입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 아직도 물이 침대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간호사는 병실로 들어오자 미간을 찌푸렸다."
구승훈이 이렇게 묻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다.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감정을 애써 숨겼다."괜찮아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사람 시켜서 드라이기를 보내라고 했는데 뭐 또 부족한 거 있어? 내가 사람을 시킬게.”"괜찮아요.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가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이리 와, 내가 머리 말려줄게.”강하리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거절했다. "아니예요. 제가 직접 닦으면 돼요.”구승훈의 얼굴은 또 어두워졌다."내 말 못 알아듣겠어?”강하리가 구승훈을 쳐다보자, 그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구승훈이 간호사가 한 그 말 때문에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강하리는 알고 있었다.강하리도 더 이상 다투기 귀찮아서,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구승훈은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살살 닦았다. 마침내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지지 않자 구승훈은 한마디 했다."미안해. 방금은 내가 심했어.”미안하다는 말이었지만 강하리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미안함도 느끼지 못했다. 예상과 벗어나지 않게 구승훈은 곧이어 한마디 했다."하지만 내 탓으로 넘기면 안 되지. 사진이 그렇게 나오면 누구나 오해할 수 있으니 어. 강 부장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강하리는 조용히 웃었다."대표님이 저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있었다면 묻지도 않고 바로 의심하지 않았을 거예요.”구승훈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확실히 강하리를 믿지 못했다.강하리는 외모가 출중했다.하필이면 권력도 없고 배경도 없으니, 그들의 세상에서는 이런 여자는 그저 노리개에 불과하다.하지만 구승훈은 한 번도 강하리를 노리개로 생각한 적이 없다.그와 그녀의 거래는 줄곧 공평했다.이런 돈 거래 중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그 계약뿐이다.그런데 하필 강하리가 거듭 계약을 위반하고 구승훈의 마지노선을 건드렸다."강 부장, 불평해도 소용없어. 이 모든 것은 네가 그 임 변호사를 만나러 가서 생긴 일이야. 네가
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뭐야? 안 믿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나 자신만 믿어. 이런 대답이라면 강 부장 마음에 들어?”구승훈이 진지하게 생각하고는 말했다.강하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구승훈의 말은 송유라 마저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그럼 송유라는요?”구승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을 빤히 쳐다봤다.구승훈이 입을 떼려 하자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전담비서는 밖에 서서 구승훈에게 봉지를 건네주었다.구승훈은 나가 물건을 받고는 강하리에게 물건을 건넸다. "이리 와, 머리 말리자.”강하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소파에 앉아 구승훈이 머리를 말리도록 내버려두었다.머리를 다 말리고 나서야 구승훈이 입을 뗐다."유라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야. 싫은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두 번 다시는 유라와 비교하지 마.”강하리는 잠시 뜸 들이다 머리를 끄덕였다.그때 구승훈의 폰도 울렸다.송유라 전용 벨소리였다.강하리는 순간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대표님, 일이 있으시면 먼저 가셔도 돼요. 저는 좀 쉬어야겠어요.”구승훈은 강하리를 슬쩍 보더니 말했다. "유라가 약을 바꾸러 병원에 왔대, 내가 같이 있어 줘야겠어.”"네."강하리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 위로 푹 올려 썼다. 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불을 끌어 내렸다."피곤하면 좀 자. 난 약 바꾸는 거 보고 올게.”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사실 구승훈과 강하리는 서로에게 별 믿음이 없었다.지금 구승훈이 하는 말도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말썽을 부려봤자 자신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 뿐이었다.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는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그녀는 병실 안이 몹시 답답하게 느껴졌다.결국 옷을 입고 밖에 나가 돌아다니려 했다.그런데 병실 문을 나서자, 강찬수가 병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강하리가 몸을
그날 보경시에서 돌아왔을 때, 아파트 입구에서 강찬수를 마주치지 않아 다행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강찬수가 병원에 달려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병실에 들어서자, 강하리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또 무슨 일이세요.”강찬수가 병실에 들어서자 오히려 조급해 하지 않았다.그는 병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는 혀를 내둘렀다."요즘 병실은 이렇게 고급이냐? 우리 딸 정말 대단하네.”강하리는 그딴 헛소리를 듣기 싫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도대체 뭘 더 원하는 거죠? 당신이 원하는 돈은 이미 드렸잖아요!”강찬수는 바보처럼 웃어댔다."왜, 이렇게 네 아비를 싫어해도 돼?”"지금 대꾸도 하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요!”"쯧쯧, 무슨 성깔이냐!"강찬수는 투덜대다가 탁자 위에 구승훈이 올려놓은 담배를 보고는 주섬주섬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내가 나쁜 일로 찾아온 게 아니야. 너도 이제 나이가 서른이다. 네 어미는 비록 반쯤 죽어가지만, 내가 네 아버지로서 네 평생의 큰일을 결정은 해줘야지. 내가 결혼 상대를 소개해 줄게.”강찬수가 결혼 상대를 소개해 준다니, 강하리는 어이가 없어 차갑게 웃었다. 팔려 가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울 지경이다."괜찮아요. 당분간 연애할 생각이 없어서요.”강찬수는 투덜거렸다."하리야, 난 분명 경고했어. 나중에 내 탓 하지 마라. 내가 좋게 말할 때 내 말 듣는게 좋을 거야. 나를 또 그 반쯤 죽어가는 사람한테 손을 대게 강요하지 마!”"당신, 도대체 무슨 짓 하려는 거예요?”"별다른 생각은 없어. 네가 순순히 선을 보면 돼. 나도 그 년을 건드리기 귀찮아!”그러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피우기 시작했다.담배 두어 모금 빨고 나서야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하리야, 너 설마 남자 있는 거 아니지?”강하리는 몸이 굳어서 뜸 들이다 대답했다. "아니요.”강찬수는 벌떡 일어나 냉소를 지으며 추궁했다. "아니라고? 그럼, 이 담배는 누구 거야?”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
구승재는 문득 그날 밤의 부드러운 입술이 떠올랐다.목젖이 몇 번 움직이고, 심장은 어느새 통제가 안 되기 시작했다.술에 살짝 취한 채 그의 품에 안긴 천아름.붉은 입술은 살짝 열려 있었고, 그걸 바라보는 그의 목이 바짝 말라왔다.순간 정신을 차린 그는 천아름을 품에서 조심스레 떼어냈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꿀꺽 마셨다.그리고 바로 깨달았다. 그건 천아름이 마시던 술이었다.그녀는 벌써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담배 뺏은 것도 모자라서, 이제 술까지 뺏어가?”구승재는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다행히도 조명은 어두웠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그럼 내가 한 잔 더 시켜줄까요? 아름 누나가 ‘술 마셔준다’ 해놓고 이 반 잔도 아까워해요?”“안 마셔. 재미없네.”그녀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구승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까 그건...정말 미쳤었다.순간 그 입술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뻔했으니까.“가요. 데려다줄게요.”“가기 싫어.”천아름은 비틀비틀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구승재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심장이 또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그럼 어디 가고 싶은데요? 별 보러 갈래요?”천아름은 피식 웃었다.“좋아.”차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 어깨에 덮어주고, 핫팩 하나를 손에 쥐여주었다.“이제 좀 말해줄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천아름은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다, 잠시 후 고개를 돌려 구승재를 바라봤다.늘 ‘꼬마 강아지’라며 장난치던 그였지만, 구승재의 얼굴선은 결코 ‘강아지’ 같지 않았다.어딘가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느낌.하지만 성격은, 그 남자와는 달리 훨씬 부드럽고 따뜻했다.그녀는 벽에 살짝 기대더니 손가락을 까딱였다.구승재는 그녀의 손짓에 손바닥에 땀이 맺히는 걸 느끼며 조심스레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누나 예뻐?”천아름의 목소리는 여전히 치명적이고 매혹적이었다.구승재는 순간 목이 탔고, 입술을 몇 번 떨다 겨
천아름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붉은 입술에 가벼운 미소를 띄웠고, 눈꼬리에 스친 표정은 매력적인 얼굴에 한층 더 치명적인 분위기를 더했다.“왜요? 조명현 씨, 또 뭘 부탁하시려구요? 아니면 이번에도 아내분 보석 맞추는 거예요?먼저 말해두는데요...지금은 개인 오더 안 받아요.”조명현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여전히...하나도 안 변했구나.”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살짝 넘기며 웃었다.“그럼. 난 나니까. 왜 변해야 하죠?”말투는 사근사근했고, 아까 그가 ‘아내를 위해’라며 장난처럼 던진 말에도 질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태연했다.혹여 느꼈다 한들, 그건 분명 ‘착각’일 것이다.그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조명현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그래서 내가 약혼했다는 말도, 신경 안 쓰는 거야?”“그건 너 사정이지, 나랑 무슨 상관?”천아름은 휴대폰을 내려다봤고, 마침 구승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더 할 말 없으면, 난 이만.”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명현의 폰도 울렸다.그가 화면을 보는 사이, 천아름은 벌써 자리를 떴다.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조명현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전화를 받았다.표정이 단숨에 바뀌는 걸 보면, 전화기 너머에 있는 여자는 분명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겠지.도시는 이제 막 밤이 시작되는 시각.열 시 반, 술과 음악에 취해 어깨를 부대끼는 청춘들.하지만 바의 한 구석, 천아름 앞에는 이미 비워진 잔만 일곱, 여덟 개가 놓여 있었다.희미하게 흐려진 눈동자, 손끝에 살짝 집은 가느다란 담배. 옆으로는 수많은 남자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한편, 여초천의 수술이 끝나자 구승재는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천아름이 앉은 테이블 앞에 도착한 그는, 그녀 앞에 늘어선 빈 술잔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얼마나 마셨어요?”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하지만 음악 때문인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한 건지 천아름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그저 멍한 시선으로
심준호는 말끝을 망설였지만,강하리는 오히려 단호했다.“딱히 할 말 없어요. 어떤 길은 한두 번은 돌아갈 수 있어도,그 이상은 그냥 시간 낭비예요.”심준호는 한숨을 쉬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밤이 되자, 강하리와 가정부 이모가 병실에 남았다.조시욱은 끝까지 가고 싶지 않았지만 전화 한 통에 결국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연정이는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고,눈을 뜨자마자 입을 열었다.“아빠는?”강하리는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만지며 말했다.“아빠는 일이 있어서, 곧 시간 나면 올 거야.”연정이는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그래도 작게 “응” 하고 대답했다.강하리의 가슴은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저려왔고,그녀는 연정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손연지는 그날 몇 번이나 병실에 왔었고,밤에도 함께 있으려 했지만, 응급 수술 콜에 다시 나갈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아름이 병실로 뛰어들어왔다.연정이를 꼭 안아 들며 말했다.“우리 공주님, 어떻게 이렇게 불쌍할 수가 있어?”강하리는 그저 웃었지만,속으론 같은 생각을 되뇌고 있었다.그래...내 아기, 왜 이렇게 어릴 때부터 힘든 일만 겪어야 해?천아름은 연정이와 잠깐 놀아주고,간단히 뭐라도 먹인 뒤 다시 잠들게 했다.병실이 조용해지자,두 사람은 새로 계약할 광고 모델 이야기를 꺼냈다.강하리는 병원에 있는 와중에도 기획팀에서 보내온 모델 리스트는 꼼꼼히 챙겨보고 있었다.하지만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가기도 전에 병실 문이 다시 한 번 두드려졌다.이번엔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얼굴 생김새는 조시욱과 어딘가 닮은 듯했지만,더 노련하고 세련된 분위기.정장에 코트까지 걸친 모습.선 굵은 이목구비에, 어딘가 유쾌하면서도 위험한 기운.강하리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구시죠?”남자의 눈은 잠시 천아름을 스친 뒤 작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조명현입니다.시욱이 일이 생겨서 제가 대신 물건 좀 가져다드리려고요.”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여초천의 자살 시도는 여초연에게도 꽤 큰 충격이었다.사실 지금이 그녀를 압박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지만, 구승훈은 오히려 이때 물러나겠다는 뜻을 보였다.준봉은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구승훈은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지금 내 상태로는 운전 못 해.”그는 말하면서 셔츠의 윗단추 두 개를 풀었다.“여초연한테 여초천이 지금 응급실에서 치료받는 걸 직접 보게 해. 그리고 말해. 이젠 약 하나만 넘기면 되는 게 아니라,임희주 약도 전부 내놓으라고. 그리고 노민준이 개발한 약, 진시연한테도 주사해. 압박 좀 줘.”준봉은 머뭇거리며 자꾸만 뒷좌석을 힐끗거렸다.구승훈은 눈매가 짙게 내려앉은 채,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할 말 있으면 해.”“선생님, 굳이...임희주까지 구할 필요가 있으신가요? 이런 거 부인께서 알게 되면, 오해가 더 깊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 없이 창밖을 응시했다.그의 눈동자엔 많은 감정이 얽혀 있었다.준봉은 속으로 몇 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구승훈은 그저 조용히 말했다.“만약 네가 강하리 입장이었고 내가 다른 여자랑 껴안고 있는 사진이나,침대 위에 함께 있는 장면을 봤다면...너라면 어땠을 것 같아?”준봉의 이마가 순간 찌푸려졌다.이건 뭐라 말하긴 좀...어쩌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죽여버릴 수도 있고,어쩌면 두 번 다시 보기 싫다고 등을 돌릴 수도 있을 거다.어떤 경우든 자기 목숨은 보장 못 하는 대답이겠지...잠시 고민한 끝에 준봉은 조심스레 말했다.“제가 부인이라면, 아마 정말 많이 화가 났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그렇지. 화도 안 내면 그땐 진짜 끝난 거지.”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거든 호텔 두 달 이내의 CCTV와 투숙 기록 전부 확인해. 임희주랑 나, 같이 드나든 기록이 있는지 봐.”준봉은 살짝 찡그렸지만, 이내 곧 “네” 하고 대답했다.호텔 쪽에서 꽤 빠르게 자료를 보내왔다.구승훈이 비행기를 타기 전, 영상이 도착했다.기록상으로는 구승훈과
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가끔은 자신이 너무 소심한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을까?구승훈도 강하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마침 조시욱을 보게 되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시선을 다시 돌려 강하리를 바라봤다.“아직까지도 나한테 대답 하나 안 해줄 거야? ”구승훈의 말은 쓸쓸했고 억울함이 묻어 있었다.강하리는 입술을 움직이다가 결국 짧게 말했다.“핸드폰 돌려줘.”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당장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얘기가 끝나고 나면 줄게.”강하리는 화가 치밀어 올라 발로 차고 싶었지만 자신의 다친 다리를 생각하니 그럴 가치도 없었다.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누가 나한테 사진을 보냈더라...”구승훈의 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졌고 그는 조용히 그녀의 핸드폰을 꺼내 그녀 손에 건넸다. 처음 사진을 받았을 때 강하리가 삭제하지 않았다.그 후에 일이 터졌고 침대 위의 영상까지 본 뒤에는 그 사진조차 다시 보기 싫어졌기에 그냥 그대로 남겨두었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몇 번 화면을 터치하더니 이내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도촬로 찍힌 사진이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선명했다.임희주는 수줍고 애틋한 얼굴에 구승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래서 그때 이후로 구승훈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혐오감이 밀려왔다.구승훈의 눈동자엔 위험한 기운이 스쳤다.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강하리를 바라봤다.“이게 나 아니라고 하면...믿겠어?”강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핸드폰을 챙겨 들고 조시욱을 바라봤다.“집에 데려다줘.”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그의 눈빛은 복잡하고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고 있었다.“강하리, 넌 처음부터 나를 믿은 적이 없었던 거야?”강하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조소가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신뢰는 항상 서로 주고받는 거야, 구승훈 내가 널 믿지
강하리는 구승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누굴 만나든 그건 당신 자유야. 나랑은 상관없어.”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고, 구승훈은 갑자기 장난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정말 누구든 괜찮아? 임희주만 아니면 다른 사람은 다 후처로 받아줄 수 있어?”강하리는 대답하지 않고 휠체어를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구승훈은 휠체어의 팔걸이를 단단히 잡고 그녀를 다시 제자리로 끌어당겼다.“나, 임희주랑 아무 사이 아니야. 네가 왜 그런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강하리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래서? 당신이 아니라고 하면 다 아닌 거야? 내가 왜 당신을 믿어야 되는데?”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귀 가까이 다가갔다.“내가 진짜 그 여자랑 뭔 일 있었으면... 평생 발기 부전 걸리게 해달라고 빌게. 음, 성기 썩어도 상관없어.”말투가 지나치게 능청스러웠다. 입김이 귓가에 닿자 강하리는 온몸이 얼어붙었고, 본능적으로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때리려 했다.구승훈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그 손바닥을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댔다.“아니면, 내 심장이라도 파내고 싶어? 그것도 괜찮아.”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이내 손을 빼냈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말해봐. 도대체 왜 그런 오해를 하게 된 거야? 정말 내가 잘못했다 쳐도 내 말을 한마디쯤은 들어줄 수 있잖아.”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마음은 이미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다행히도 이번엔 구승훈이 먼저 거리를 두었다.그녀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진심인지 거짓인지 눈빛을 통해 알아내려 했다.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너무 깊고 어두워,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예전에 그녀는 구승훈이 호텔에서 임희주를 안고 있는 사진을 받은 적이 있었다.심지어 안현우의 핸드폰에서 그 장면의 영상까지 직접 본 적도 있었다.사진은 조작일 수 있어도, 영상도 조작일까?하지만 영상이 안현우의 폰에서 나온 거라는 점이 그녀 마음 어딘가에 작은 희망 하나를
조시욱은 짙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디서 얘기할 건데? ”그녀는 구승훈과 눈을 마주쳤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차분하고 흔들림이 없었다.구승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병실을 나섰다.조시욱은 당황한 듯 따라가려 했지만 구승훈은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등을 향한 채 차갑게 한마디 내뱉었다.“조 선생은 그렇게 남의 집안일에 끼어드는 걸 좋아하나 보죠?”조시욱은 굳은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난 단지, 하리가 당신과 단둘이 가는 게 걱정될 뿐입니다.”구승훈이 고개를 돌렸고, 얼굴은 마치 한겨울 서리처럼 싸늘했다.그런데 그가 아무 말 꺼내기도 전에 강하리가 또 먼저 입을 열었다.“따라오지 마.”조시욱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문제 생기면 바로 전화해.”“응.”구승훈은 그녀를 데리고 병원 아래 정원으로 향했다.겨울의 정원은 생각보다 을씨년스럽지 않았고, 몇 그루의 납매가 피어 있어 오히려 단정하고 고고한 느낌이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납매나무 아래로 데려갔다.금빛 꽃잎에서 은은한 향이 퍼졌지만 지금 두 사람 모두 향기를 느낄 여유는 없었다.“난 연정이 양육권 포기 안 해.”강하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구승훈은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하고 나무 아래에 섰다.노란 꽃잎들이 흩날리며 그녀의 얼굴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었다.“왜?”그는 갑자기 몸을 기울였고, 손으로 휠체어 양쪽 팔걸이를 움켜잡았다.너무 가까웠다.그의 숨결이 얼굴을 스칠 정도였다.이 자세는 마치 그녀를 품 안에 가두는 것처럼 느껴졌다.“구승훈, 비켜.”강하리는 냉랭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익숙한 향수 냄새 속에서 임희주의 체취가 느껴져 역겨웠다.구승훈은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고, 눈빛엔 장난기 섞인 악의가 담겨 있었다.“안 비키면?”강하리는 온몸이 들끓었다.역시, 이 뻔뻔한 남자랑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핸드폰을 꺼내 조시욱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하지만 번호를
말이 끝나자마자 구승훈은 심준호의 손에 밀쳐 그대로 흡연실의 유리 벽에 쾅 하고 부딪쳤다.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그쪽을 바라봤다. 마치 말려들까 봐 겁이라도 난 듯 서둘러 자리를 떴다.등이 세게 부딪쳤는데도 구승훈의 표정은 변함없었다.“임희주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그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심준호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럼 임희주랑 관계 있는 사람은 나란 거냐? 한 사람과 자면서도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고, 너 구승훈, 정말 뻔뻔하구나.”구승훈은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외삼촌.”그는 담배를 손가락으로 짓눌러 껐다.“강하리랑 내 사이에서 내가 잘못한 건 인정해. 그래서 지금 벌을 받고 있잖아. 심지어 그녀가 화가 나서 칼로 내 가슴을 찔러도, 난 감수할 거야. 하지만, 내가 하지도 않은 일까지 뒤집어쓸 생각은 없어.”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왜 심준호가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하지만 최근 강하리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자신을 보면 역겨워 하고, 스치기만 해도 손을 씻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구승훈은 벌떡 일어나 나가려 했다.하지만 심준호가 막아 섰다.“어디 가?”구승훈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이미 죄를 뒤집어썼으니, 적어도 무슨 죄인지 알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심준호는 여전히 놓아주지 않았다.둘은 흡연실에서 대치하게 되었다.구승훈의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거기에 살기까지 담겼다.“심준호, 나를 손쓰게 만들지 마.”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그게 무슨 뜻이야?”구승훈은 그의 팔을 거칠게 밀치고 병실 쪽으로 향했다.병실 안에는 아직 몇 명이 연정아 곁을 지키고 있었다.가정부 이모는 백아영 옆에, 조시욱은 강하리 옆에 앉아 있었다.구승훈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네 사람 모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백아영은 여전히 분노가 남아 있었는지 시선을 피했고, 강하리 역시 한 번 쳐다보곤 금방고개를 돌렸다.가정부 이모는 눈짓으로 구승훈에게 말했다.“조 선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