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는 곧장 차를 몰고 떠났다.강하리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꽃을 든 채 집으로 돌아갔다.손연지는 그녀의 품에 들린 꽃을 보자 순간 당황했다.“그거... 구승훈이 준 거야?”강하리는 눈가가 파들파르르 떨리며 대답하지 않고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그날 밤, 그녀는 내내 잠들지 못했다. 방 안 가득 리시안셔스 향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다음 날, 강하리는 아침 일찍 최하영과 약속한 골프장에 도착했다.최씨 가문의 사업은 줄곧 회색 지대를 배회하고 있었지만 최하영 본인은 의외로 반듯한 모습이었다. 40대 남자가 가져야 할 배짱과 침착함도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다.강하리는 최하영을 보고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고 최하영 역시 강하리를 보자마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 대표님 실제로 뵈니 사진보다 훨씬 예쁘시네요.”전에 강하리를 만난 적은 없지만 김주한의 일 때문에 최하영은 강하리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었다.최씨 가문의 권력자로서 수없이 많은 여자를 만나봤던 그는 강하리의 사진을 봤을 때만 해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를 직접 보고 나니 확실히 구승훈의 눈이 높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편한 스포츠 룩을 입었음에도 강하리는의 미모를는 감출 수 없었다.“한 번 쳐볼까요? 치면서 얘기하죠.”최하영이 손에 든 골프채를클럽을 흔들면서 들자 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최 대표님 먼저 하시죠.”“레이디 퍼스트가 먼저죠.”강하리도 더 망설이지 않고 공 쪽으로 걸어가 골프채를 예쁘게 휘둘렀다.최하영의 눈빛이 잠깐 번뜩였다. “강 대표님은 아실지 모르겠지만 공치는 습관이 구 대표님과 무척 닮으셨네요.”강하리는 싱긋 웃었다.“눈썰미가 좋으시네요. 구 대표님께서 배웠거든요.”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구승훈을 언급하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며 마음속 어딘가 툭 건드려진 것 같았다.최하영은 웃음을 터뜨렸다.“어쩐지, 보아하니 두 분이 보통 사이는 아닌가 봅니다.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그토록 희귀한 정보로
골프를 다 치고 나니 곧 점심시간이 다가왔다.최하영은 강하리에게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고 식사 자리에서 그가 신사답게 술도 권하지 않고 에티켓을 지킨 덕분에 즐거운 식사 자리가 되었다.식사가 끝날 무렵에야 최하영이 말을 꺼냈다.“그 땅, 강 대표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세요?”강하리는 다소 마음이 혼란스러워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최 대표님, 이 문제는 제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나중에 다시 얘기할까요?”최하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네, 그럼 강 대표님께서 약속 잡으실 때까지 기다리죠.”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함께 식당에서 나온 뒤 곧장 차로 향했다.차 안에서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사실 그녀는 김주한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다.당시 구승훈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고 구승훈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김주한을 반쯤 죽여놓았다는 사실조차도 나중에 구승재에게 들은 이야기였다.강하리는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고 다시는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마음 어딘가에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그 틈새에 무시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이 밀려와 강하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구승훈은 매번 그녀가 거절하지 못하는 것만 주는 것 같았다.그녀에게는 이 땅이 필요했다.이 땅이 없으면 정양철과의 내기 계약은 실패로 끝날 확률이 높았다.하지만 지금...어떤 기분으로 구승훈을 마주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노진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강하리 씨, 사업 얘기가 잘 안됐습니까?”정신을 차린 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잘 됐어요.”그녀만 대답하면 최하영은 분명 망설임 없이 그 땅을 대양 그룹에 넘길 것이다.다만... 이 호의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강하리를 보낸 후 최하영은 옆에 있는 룸으로 들어갔다.룸안에서 구승훈은 창가에 서서 강하리가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뒤에야 구승훈은 뒤를 돌아보았다.최하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퇴근하고 갈게요.”구승훈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그래, 데리러 갈게.”“아니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강하리는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다가 다소 무력한 웃음을 지었다.잠시 침묵하던 그는 주방에서 국을 끓이고 있는 가정부를 바라보았다.“해장국은 됐으니까 가서 장 좀 봐오세요.” 가정부는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대표님, 집에 식재료 아직 있는데요.”구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며 느긋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장 다 보고 나면 오늘은 그만 퇴근하세요.”당황한 가정부는 이윽고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하리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요? 달콤한 것 빼고, 물고기나 새우 이런 거 좋아해요?”가정부는 조금 당황했다. 이곳에 온 지 몇 달이 지났지만 강하리를 위해 요리를 해준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다.강하리가 디저트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 대단한 것이다.“대표님께서 오랫동안 같이 살았으니 저보다 더 잘 아시겠죠.”이 말을 들은 구승훈은 눈빛이 어두워졌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불쾌했다.가정부는 다른 뜻은 없었고, 그저 구승훈이 자신보다 더 잘 알거라 생각한 것이었다.하지만 그 말이 조롱처럼 들렸다.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었던 구승훈이 잔뜩 굳은 표정을 하고 있자 더 무서워 보였다.구승훈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가정부는 서둘러 말했다.“일단 장부터 보고 올게요. 언제 한번 아가씨에게 새우만두를 해준 적이 있는데 몇 개나 드신 걸 봐서 꽤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돌아와서 만두 찔게요.”가정부는 말을 마친 후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온몸에 냉기가 감도는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강하리는 오후 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퇴근할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정주현은 서류 챙겨 들고 그녀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왔다.“만나야 할 사람이 두 명 있는데 오늘 저녁은 클라이언트와 먹을까요?”
하지만 그가 차에 타기 전에 노진우가 다가와서 차 문을 막았다.“도련님, 이대로 강하리 씨 차에 타면 강하리 씨 평판에도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정주현은 코웃음 치며 다른 쪽으로 돌아갔고 노진우도 재빨리 뛰어넘어 반대편 차 문을 막았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두통이 밀려오는 느낌에 곧장 밖으로 나가 택시를 불렀다.강하리가 떠나려는 모습을 본 정주현은 화가 나서 노진우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노진우, 넌 진짜 구승훈 개야!”노진우는 정주현을 바라보며 말했다.“도련님은 잘 보이려고 꼬리 흔드는 개 같네요.”말을 마친 그는 정주현이 화를 내기도 전에 차를 몰고 떠나버렸고 정주현은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구승훈 씨, 우리 페어플레이 하자고 하지 않았어요? 대체 강하리 옆에 노진우는 왜 붙이는 거예요?”구승훈은 느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정주현 씨, 그쪽은 매일 곁에 있으면서 난 사람 좀 붙이면 안 됩니까?”정주현이 피식거렸다.“참 간사하시네요.”“당신은 순수한가?”“난 적어도 그 여자한테 장난은 안 쳐요. 구승훈 씨, 정말 강하리를 돕고 싶었으면 그냥 조용히 돕기나 할 것이지 왜 그 기회를 틈타 동정을 바라는 건데요.”구승훈은 나른하게 웃었다.“내가 왜 조용히 도와야 하죠? 이왕 도와줬으면 알게 해야죠.”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전화를 끊었다.강하리는 아파트 문 앞에 서서 망설이다가 노크를 했다.구승훈은 문을 열고 현관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 짙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지문 인식하면 되잖아, 왜 노크를 해?”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남의 집에 왔을 때는 예의를 지켜야죠.”구승훈도 웃었다.“하리야, 여기가 남의 집이야?”강하리는 대답 대신 그의 시선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 신발장을 열었고, 슬리퍼에 손이 닿자 잠시 멈칫했다.그녀가 신던 슬리퍼는 이미 사라지고 옆에는 새로운 신발이 놓여 있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님용 슬리퍼 한 켤레를 꺼냈다.구승훈은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아무 말도
강하리의 몸이 심하게 경직되며 순간 심장 박동이 멈춘 것 같았다.“구승훈 씨, 이거 놔요.”구승훈은 대꾸하면서도 더 꽉 안았다.“하리야, 가만히 있어. 잠깐만 안고 있을게, 잠깐만.”여전히 희미한 술 냄새가 남아 있는 남자의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으며 옅은 담배 냄새도 묻어났다.강하리의 몸이 더욱 굳어졌다.싱크대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그녀의 귓가로 온통 남자의 숨소리가 맴돌았다.심장이 점점 더 세차게 뛰었고 강하리는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이거 놔요.”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놓아주는 대신 그녀의 몸이 으스러질 듯 더 세게 안았다.“하리야, 너무 보고 싶었어.”강하리는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고 본능적으로 남자를 밀어내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며 붙잡았다.“가만있어 하리야, 더 움직이면 내가 너무 힘들어.”당황한 강하리는 홧김에 구승훈의 발을 밟았고, 밟고 나서야 구승훈의 단단한 아래가 그대로 느껴졌다.두 사람은 조금의 틈도 없이 바싹 밀착해 있어 구승훈의 물건이 자신의 허리춤에 닿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구승훈, 이... 이 변태!”구승훈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었다.“너무 보고 싶었어. 가만히 있어, 나 진정 좀 하게.”누구라도 이 상태로는 전혀 진정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는 단지 조금만 더 그녀를 안고 싶을 뿐이었다.주방에서 아내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었다.강하리의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구승훈은 지난 며칠 동안 자신이 보고 싶은 적은 없었는지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하지만 제 발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될 것 같아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구승훈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정말 진정하는 중인듯했다.하지만 그곳의 단단함은 여전했고 강하리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그때 구승훈의 입술이 갑자기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하리야,
강하리는 그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구승훈은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돌아서서 부엌으로 들어가 보온병을 꺼냈다.강하리가 위층에서 내려오자 구승훈도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이거 가져가.”그는 보온병을 강하리에게 건네며 말했고 강하리가 거절하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아줌마한테 국 좀 끓여달라고 했어, 아주 담백한 거. 병원에 가져가서 아주머니한테 드리고 너도 좀 먹어.”그렇게 말한 뒤 남자는 보온병을 강하리의 품에 밀어 넣었다.강하리는 차에 돌아와 멍한 표정으로 옆에 놓인 보온병을 바라보았다.노진우는 강하리의 표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 구 대표님과 무슨 오해라도 있는 겁니까?”정신을 차린 강하리가 꿰뚫어 볼 듯한 그의 시선을 피했다.“아니요.”“없다면 왜 서로 좋아하는 게 화해하지 않는 겁니까?”강하리는 웃기만 했다.“병원으로 가요.”노진우는 그녀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정서원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강하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녀의 눈빛이 더욱 밝아졌다.“오늘은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조금 전 어머님께 식사 준비해 드리는데 굳이 아가씨 오시는 거 기다리겠다지 뭐예요.”간병인이 옆에서 말을 건네자 강하리는 웃으며 보온병을 들고 다가왔다.“엄마, 이제부터는 제가 안 와도 제때 식사 하셔야 해요.”정서원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간병인이 다가와 보온병을 열자마자 감탄했다.“참 정교하게 빚은 새우만두네요. 국물도 최소 몇 시간을 끓였죠? 아가씨도 참 세심해요. 일하면서 이렇게 어려운 음식도 만들고.”강하리는 보온병에 담긴 새우만두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간병인은 작은 국그릇에 담아 강하리에게 건넸다.“얼른 어머님께 드리세요.”강하리는 새우만두를 받아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정서원에게 먹였지만 그녀는 국물을 두 번 정도 마시고는 더 먹지 못했다.강하리가 그녀의 팔다리를 움직이며 씻겨주려는데 정서원이
지난번 강찬수의 계좌에 문제가 생긴 것에 대해 구승훈이 말하려다가 송유라의 팬들이 병원에 찾아와 소란을 피우면서 중단된 적이 있었다.강하리가 구승재에게도 물어봤지만 구승재는 잘 모른다고 했다.이제 강찬수에 대해 알고 싶으면 구승훈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전화를 받고 다소 놀랐다.“강하리?”“네.” 강하리는 대답하고 말을 이어갔다.“구승훈 씨, 강찬수 계좌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서요.”미소 짓던 구승훈의 얼굴이 들려오는 강하리의 목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굳어졌다.강하리의 목소리에서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무슨 일이야?” 말을 마친 그는 강하리가 대답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병원으로 갈게.”전화를 끊은 후에도 강하리의 마음엔 여전히 아픔이 남아있었다.정서원에 대한 안타까움과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함께 밀려왔다.당시 강찬수의 폭력으로 정서원뿐만 아니라 강하리의 운명도 바뀌었다.강하리는 심호흡을 하며 의자에 기대어 감정을 진정시켰다.노진우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더니 그녀를 위해 차 음악을 틀어주었고 강하리는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대표님께서 좋아하신다고 알려주셨어요.”강하리는 그를 힐끗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도착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차에서 내린 그가 강하리의 창문을 두드렸고 차창을 내리자 보이는 여자의 얼굴에 구승훈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여자의 눈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고 눈빛은 분노로 가득 찼다.구승훈은 마음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었죠. 강찬수에 대해 나한테 얘기해 줄 수 있어요?”구승훈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밥은 먹었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배 안 고파요.”지금은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짐작만 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오늘 정서원의 말을 듣고 나니 강찬수가 죽어버린 것조차 원망스러웠다.구승훈은 그녀를 바깥으로 끌어당겼다.“
“울고 싶으면 참지 말고 소리 내서 울어.” 그가 강하리를 껴안자 강하리의 몸이 움찔했다. “구승훈 씨!”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구승훈은 오히려 더 꽉 껴안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안고만 있었고 반항하던 강하리도 점차 잠잠해졌다.소리 없는 눈물이 조용히 그의 셔츠를 적셨다. 구승훈은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밀려와 상대를 더 꽉 끌어안았다.이내 마음을 진정시킨 강하리는 눈물을 닦으며 옆에 있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려 최대한 차분한 어투로 물었다.“구승훈 씨, 이 돈의 출처 확인했어요?” 구승훈은 손으로 붉어진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졌다.“알아봤어. 이 돈뿐만 아니라 다른 비정상적인 송금도 다 확인했어. 처음 네가 강찬수가 누군가의 사주를 지시로 널 협박한다고 의심했을 때 이미 다 확인했어. 하지만 상대는 사채업자였고 그 사이 그쪽 사람들은 이미 죽거나 사라졌어.”강하리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그럼 단서가 전혀 없다는 건가요?”구승훈의 눈빛은 차갑고 무거웠다.“알아보면 언젠가 단서는 나오겠지.”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구 대표.” 강하리가 뒤를 돌아보니 식당 앞에 한 손에 음식을 들고 서 있는 장진영이 보였다.“유라가 여기 생선찜이 먹고 싶다고 해서 포장해 가려고. 구 대표도 알다시피 유라가 생선을 제일 좋아하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강하리를 향해 웃었다.“하리도 있었네.” 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얘기 다 끝났으니까 난 먼저 갈게요.” 말을 마친 그녀가 가려는데 구승훈이 서둘러 그녀를 뒤에서 끌어당겼다. “내가 데려다줄게.” 구승훈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장진영이 끼어들었다.“구 대표, 나 할 말이 있는데.” 강하리는 그 말에 구승훈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차 있어요.” “내가 데려다준다고!”강하리는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는 장진영을 힐끗 쳐다보았다.“노진우 씨가 데려다주는 게 낫겠어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