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찬이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선배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지? 복수는 할 수 있지만 구승훈과의 관계는 제대로 짚고 넘어갔으면 좋겠어.”그녀가 복수를 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는 강하리가 살아가기 위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하니까.하지만 그는 그녀가 구승훈과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이기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기심은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그는 강하리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고 그 아픔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구승훈이 가져다준 것이었다.“하리야, 네가 원하는 게 뭐든 내가 다 도와줄 수 있어. 너...”“선배, 선배도 위험하다는 거 알잖아요.” 강하리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난 선배한테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할 이유가 없어요.”주해찬의 가슴에 저릿한 고통이 느껴졌고 한참 후 그가 쓴웃음을 내뱉었다.자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는 게 싫은 것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그를 자기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닐까?주해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오늘 그녀가 홀로 외롭게 명절을 보내고 있을까 봐 온 건데 지금 보니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주해찬은 잠깐만 머물다 떠났다.강하리는 이후 며칠 동안 입찰 준비에 매진했고 구승훈과도 만나지 않았다.손연지가 연성으로 돌아온 건 설날이 지나고 6일째 되는 날이었다.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가 우는소리를 했다.“하리야, 나 짜증 나 죽겠어. 올해 엄마가 나한테 소개팅을 몇 번이나 주선해 줬는지 알아?”강하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러면 그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은 있어?”손연지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마. 다 이상한 놈들이야.”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물었다.“노민우는 연락 안 왔어?”손연지는 멈칫했다.노민우... 연락이 오긴 했다.심지어 설날 당일에 그녀의 고향 집까지 찾아왔는데 그 멍청이가 올 거면 혼자 오지 여자까지 데리고 왔다는 거다. 일부러 기분 나쁘게 하려고 그러는 건지.“내 앞에서 그 자식 얘기 하지 마
경매장은 B시에 있었고 강하리는 여기저기 정보를 찾아보다가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의 목소리에 웃음이 번졌다.“마음에 드는 것 있어요?”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흥미가 생기는 건 있네요.”심준호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바로 해당 경매 담당자의 연락처를 알려주자 강하리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이미 상대에게 연락했는지 강하리가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자 상대방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알려주었다.“저 인장 각인은 천인배 님 작품인데 자기가 조각하는 모든 것에 흔적을 남기세요.”강하리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그럼 천인배 선생님과 약속을 잡을 수 있을까요?”상대가 웃으며 말했다.“선생님께선 이미 돌아가셨어요.”강하리는 괜스레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인사를 건넸다.“감사합니다.”강하리는 전화를 끊은 후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무슨 일이든 너무 큰 기대를 걸면 안 된다. 그만큼 실망도 큰 법이니까.“뭐래?” 손연지가 기대에 찬 눈으로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유명한 선생님이 남기신 표식이고 별로 특별한 것 없대.”손연지도 혀를 차며 괜히 실망스러웠다.“그래도 하리야, 아주머니께서 평범한 집안 출신은 아닌 것 같아.”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정서원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이 팔찌 갖고 경매 나가보는 건 어때? 아주머니 가족들이 알아볼 수도 있잖아.”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정서원의 가족을 찾고 싶다고 생각했어도 가족을 찾자는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정서원은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 같았다.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다시는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이젠...그녀는 손에 든 팔찌를 바라보더니 잠시 후 말을 꺼냈다.“엄마를 해친 사람이 먼저 볼까 봐 걱정돼. 그러면 내가 제 발로 함정에 뛰어든 셈이니까.”과거 정서원을 해친 사람이 정양철이라고 의심해 왔지만 아직은 추측에 불과했다.손연지는 깜짝 놀라며 순간적으로 그럴 수도 있겠
“무슨 요리 했어? 냄새 좋네.”손연지가 허허 웃었다.“민우 오빠도 배가 고픈가?”노민우는 우울한 표정이었다.“내가 설명했잖아. 엄마 친구 딸인데 명절에 굳이 날 따라다니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안 그러면 난 또 엄마한테 한 소리 들어.”손연지는 그의 설명을 듣기 싫었다.“친구든 뭐든 상관없으니까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마!”노민우는 강하리를 바라봤고 강하리는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구승훈은 그 틈을 타서 바로 걸어 들어왔다.“제일 좋아하는 음식 가져왔는데 같이 식사 좀 해주시겠어요, 강 대표님?”강하리가 그를 슬쩍 보았다.“내가 싫다면 안 먹을 거야?”“그건 아니지.”구승훈은 말을 마치고 곧장 안으로 들어가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손연지는 여전히 노민우를 쫓아내고 있었고 구승훈은 이미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고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노민우는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외쳤다.“승훈아, 나 좀 도와줘.”구승훈은 그를 한번 바라보고는 강하리에게 음식을 집어주었고 강하리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떻게 노민우 씨랑 같이 왔어?”구승훈이 웃었다.“내가 왔을 때 이미 밑에 있던데.”강하리의 눈빛이 반짝이며 저쪽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손연지, 일단 밥 먹어.”손연지는 노민우를 노려보다가 결국 뒤돌아 테이블로 돌아갔고 노민우도 서둘러 따라갔다.네 사람은 보기 드물게 한 자리에서 떠들썩하게 밥을 먹었고 식사를 마친 구승훈은 강하리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강하리가 구승훈에게 최근 입찰 진행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자 구승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하리야, 나 너랑 일 얘기하러 온 거 아니야.”강하리가 멈칫하며 말했다.“그럼 이만 가봐.”“...”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아주머니 유품은? 천아름 씨한테 사진부터 보내려고.”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물건을 꺼냈고 구승훈은 팔찌를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언뜻 보기에도 이 물
구승훈과 강하리는 여전히 심씨 가문 호텔에 머물렀다.두 사람이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로비에서 체크인하고 있던 구정우가 눈에 들어왔다.두 사람을 본 구정우는 처음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형, 강하리 씨, 오랜만이네.”구정우는 여전히 장난기와 살기가 뒤섞인 눈빛으로 웃는 듯 마는듯한 표정을 지었고 강하리는 그를 한번 바라보고는 시선을 피했다.구승훈은 그런 그녀의 등을 살살 쓸어주었다.“옆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강하리도 마다하지 않고 구승훈에게 신분증을 건넨 후 뒤돌아 옆으로 걸어갔다.구정우와 지나친 접점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구정우의 시선은 계속 강하리를 쫓았고 형의 안목이 제법 뛰어난 건 인정할 수 있었다.그냥 봐도 강하리가 문연진보다 훨씬 예뻤다.하지만 그가 강하리가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기도 전에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 눈을 잃고 싶은 건가, 동생?”구정우는 시선을 거두고 구승훈의 차갑고 가라앉은 눈빛을 마주하면서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형, 한 여자하고만 노는 게 질리지도 않아?”구승훈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구정우, 가주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어?”구정우의 미소가 굳어지며 두 눈에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어쨌든 구씨 가문의 가주 자리는 구승훈이 버려서 그에게 차려진 거니까.그리고 돌아가고 싶다는 구승훈의 말 한마디면 구씨 가문 영감탱이가 당장 그를 끌어내리고 구승훈을 앉힐 게 뻔했다.구정우는 속으로 울분이 치솟았지만 겉으로는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변함없는 형이 마음을 감탄하는 거지. 이 동생이 아주 존경해.”말을 마친 그에게 때마침 직원이 방 카드를 건넸고 그는 카드를 받은 후 바로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솔직히 구승훈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이 남자는 분명 부러워할 만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구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당당한 신분에 구씨 가문 모두가 인정하는 가문의 가주였는데 하필 여자 하나 때문에 구씨 가문과 등을 돌렸다.강하리가 아무리 예뻐도 그게 무슨 소용인가
“하리야, 괜찮을 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시큰해지는 눈가를 애써 진정시키며 미소를 지었다.“가서 자.”약을 먹었음에도 강하리는 잠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구승훈은 소파에 누워 침대 위 실루엣을 바라보며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가가 품에 안았다.강하리가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구승훈은 이미 식탁에서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막 나왔을 때 구정우와 마주쳤다.구정우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형, 이따 회의장에서 봐.”그렇게 말한 뒤 그냥 자리를 떠났다.도발적인 말에 강하리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이 찡그려졌다.그녀는 조금 전 구정우의 표정에서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 알 수는 없었다.회의장에 도착해 입찰을 마치고 프레젠테이션할 때 SH그룹 관계자가 입을 열자마자 그녀의 안색이 일그러졌다.SH그룹에서 제시한 입찰서가 그녀의 것과 똑같았다.입찰서가 유출되었다.강하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단상을 바라보았다.분명 이번 프로젝트에 자신이 있었는데 이젠...SH그룹 사람들이 무대에서 내려오자 구정우는 강하리를 향해 피식 웃었다.강하리의 입꼬리는 굳어지고 머릿속에서는 입찰 정보를 흘린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했다.하지만 이번에는 전부 가까운 사람들과 일했기에 누구든 간에 그녀에게는 큰 타격이 될 것 같았다.강하리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자 그 순간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았다.강하리가 고개를 들었다.“구승훈 씨, 내 입찰서...”구승훈이 그녀의 두 눈을 마주하며 큰 손으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걱정하지 마.”구승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차례가 된 나문빈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강하리가 나문빈을 힐끗 쳐다봤지만 나문빈은 미소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쪽으로 향했다.나문빈이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하리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나문빈이 말한 방안은 처음에 구승훈에게 언급했지만 실행하기엔 너무 어려워서 결
강하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사람들한테도 연락해서 오늘 밤 제대로 축하 파티해야지.”축하 파티였지만 사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는 취지였다.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따라다니며 바쁘게 보냈던 사람들이었다.“그래, 그럼 천아름 씨도 초대할까?”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가 캐리어에서 팔찌를 꺼냈다.구승훈의 시선이 다시 한번 그 팔찌로 향했다.최상품의 에메랄드가 그녀의 하얀 손에 놓여 있으니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너무 걱정하지 마, 분명 아주머니 가족을 찾을 수 있을 거야.”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며 팔찌를 가방에 바로 넣었다. “가자, 늦었어.”구승훈은 그녀에게 코트를 입혀주었고 두 사람은 약속한 레스토랑으로 서둘러 향했다.두 사람이 막 자리를 떠날 때쯤 고이선과 문연진이 구석 어디선가 걸어 나왔다.“어때요, 내 말이 맞지? 강하리는 지금 승승장구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쪽은 어때요, 고이선 씨? 친한 친구가 죽고 그쪽도 삼촌 때문에 내내 감옥에 있었잖아요. 왜 다들 강하리한테만 잘해줄까요? 누가 보면 걔가 심준호 조카인 줄 알겠어요.”고이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빛이 사나워졌다.“망할 년, 딱 기다려.”고이선은 그렇게 말하고는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자리를 떠났고 제자리에 서 있던 문연진은 눈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연미숙에게 연락했다.“사모님 말씀이 맞았어요. 고이선은 정말 멍청하네요.”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레스토랑으로 향했고 들어가자마자 안예서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대표님, 죄송해요.”강하리가 웃었다.“왜 그래, 잘못한 거 아니잖아.”안예서가 망설였다.“하마터면 할 뻔했어요.”강하리가 그녀를 살며시 토닥였다.“안 했으니까 착한 거야.”안예서가 코를 훌쩍거렸다.“대표님 보기 너무 미안했어요.”강하리는 계속해서 웃었다.“미안한 건 나지. 나랑 일하면서 가족까지 연루되고. 이미 구승훈 씨한테 어머님 쪽에 경호원 붙여달라고 했어.”안예서는 눈물을 머금었다.“
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그녀의 눈은 순식간에 분노로 가득 찼다.“고이선!” 그녀는 고함을 지르며 그대로 와인병을 집어 들어 고이선을 향해 내리쳤다.하지만 고이선 옆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녀가 맞기도 전에 병은 옆으로 튕겨 나갔다.고이선이 비웃었다.“왜, 이깟 상자 하나 부쉈다고 이러는 거야?”말을 마친 그녀가 뒤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움직여, 뭘 멍하니 서 있어!”고이선의 말 한마디에 몇 안 되는 남자들은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룸 안의 물건을 부쉈고 내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나문빈은 강하리를 보호하기 위해 다가와 구석에 숨을 수 있도록 그녀를 끌어당겼지만 강하리는 붉어진 눈으로 망가진 상자를 바라보았다.밖으로 나온 구승훈은 복도 끝으로 향했다.“할아버지 몸은 좀 어때?”“아직 혼수상태야.”구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일단 가족들부터 안정시켜. 내가 오늘 밤 돌아갈 테니까 특히 네 큰아버지가 이 상황을 틈타 소란 피우지 않도록 지켜봐.”대답을 마친 구승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형, 큰아버지일까?”구승훈은 한참 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모르지.”그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구정우나 문씨 가문 사람일 수도 있었다.강하리를 죽이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능했다.할아버지의 손을 빌려 강하리를 건드리려는 거다.통화를 마친 뒤 고개를 숙인 채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 모금 들이마시고는 뒤돌아 걸어가려는데 몇 걸음도 못 가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저기서 싸움이 난 것 같아. 한 여자가 야구 방망이를 든 남자 여러 명과 함께 복수를 하려는 듯 룸으로 달려가더라. 레스토랑 경비원들도 못 막았어.”순간 멈칫하던 구승훈이 그대로 뒤돌아 뛰어갔고 가는 동안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그가 룸 앞으로 달려갔을 때는 밖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도 달려 들어온 뒤였다.안은 난장판이었다.강하리는 창백한 얼굴로 전화를 걸고 있었고 구승훈이 달려가 그녀를 등 뒤로 보내며 보호했다.강하리는 구승훈
구승훈은 잠시 멈칫했다.“어떻게 된 거야?”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그제야 말했다.“어깨가 좀 아파. 별거 아니니까 가서 약 바르면 돼.”나문빈도 그제야 이를 떠올렸다.“참, 그 여자가 야구 방망이로 강하리 씨 어깨를 때렸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그는 강하리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심각한 거 아니야.”어깨는 아팠지만 뼈나 근육이 다친 건 아닌 것 같았다.고이선이 독하게 내리치긴 했어도 힘은 작았다.지금 그녀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이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을 연루시킨 것도 모자라 정서원이 그녀에게 남겨준 팔찌까지 부러뜨렸다는 사실이었다.“심 변호사님 전화 왔어?” 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구승훈은 이를 무시한 채 곧장 강하리를 치료실로 끌고 들어갔다.강하리는 그가 화가 났다는 걸 알았기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사가 강하리의 어깨를 감싼 옷을 치우자 구승훈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원래 하얗고 부드러웠던 어깨는 이제 멍이 들어 보라색으로 변했다.의사도 덩달아 얼굴을 찡그렸다.“뼈가 무사한지 사진 찍어봐야겠어요.”구승훈은 대답을 하고 강하리를 영상의학과 쪽으로 이끌었다.강하리가 들어가서 사진 찍는 동안 심준호가 도착했다.“강하리 씨 다쳤어?”“어깨 좀 다쳤어.” 구승훈은 표정이 어두웠고 심준호는 얼굴을 찡그렸다.“고이선이 요 며칠 문연진과 연락하더니 이번 일도 그쪽에서 남의 손을 빌려 건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 고이선 일당은 내가 처리할게.”심준호가 구승훈을 슬쩍 보았다.“문씨 가문 쪽엔 네가 해. 준비한 증거들로 이미 충분하잖아?”구승훈은 여전히 굳어진 표정으로 한참이 지나서야 답했다.“그래.”강하리의 진단 결과가 나왔고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구승훈은 천아름에게 연락했고 안예서에게 간병인을 찾아준 뒤 강하리를 데리고 호텔로 돌아왔다.그날 밤, 강북 시장을 꾸준히 장악하던 문씨 가문은 갑자기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