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직원이 멈칫했다.“심준호 씨, 이 팔찌 말인가요?”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꺼내서 보여주세요.”직원은 머뭇거릴 틈도 없이 서둘러 꺼냈고 팔찌를 받는 순간 심준호의 눈빛이 그대로 넋을 잃었다.사실 그는 심미현의 팔찌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했다.하지만 할아버지가 그 재료로 팔찌 한 쌍과 방아쇠 반지 하나를 만들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두 팔찌는 각각 누나와 그의 약혼녀에게 줬는데 약혼녀에게 줬던 건 아직 심예진의 손에 있었다.그리고 이 팔찌는 심예진의 것과 똑같았다.게다가...천인배의 독특한 문양에 손가락을 가져간 그의 심장이 박차를 가했다.그 해 천인배는 이 팔찌를 조각할 때 특별한 문양을 새겼는데 보통의 문양은 그린 듯한 물결 모양이지만 그 두 팔찌에는 특별히 시옷 자를 더했다.시옷은 아주 작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물결이 밖으로 휙 삐져나온 것처럼 보인다.옆에 있던 돋보기를 집어 들고 살펴보던 심준호는 숨이 턱 막히며 카운터에 있는 직원을 바라보았다.“이 팔찌는 어디서 났어요?”직원은 똑똑했다.“손님이 복구해달라고 맡긴 건데...”“이름이 뭐죠?” 심준호는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다시 물었다.“강씨 성을 가진 아가씨였는데 구 대표님하고 같이 왔어요. 원래 오늘 가지러 온다고 해서 카운터에 두고 있었는데 아시는 분이세요?”심준호는 시옷 자가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사고가 나서 못 오게 됐어요. 연락해서 내가 여기 있다고 해요. 내가 갖다줄게요.”직원은 서둘러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고 심준호의 시선은 그 팔찌에 머물러 있었다.강하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장면들이 그의 머릿속에 차례로 떠올랐다.그러다 돌아가신 강하리의 어머니를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손에 쥔 팔찌를 바라보았다.만약 진짜라면 그가 대체 뭘 놓쳤던 걸까?직원은 재빨리 통화를 끝냈다.“구 대표님이 전화를 받으셨는데 가져가라고 하시네요.”심준호는
그런데 결국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연미숙은 당당했다.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경찰을 따라 경찰서로 향했는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구승훈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남자는 창문 앞에 등을 돌린 채 서 있었고 밖에서 비추는 햇빛에 잘생긴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며 눈가에 머금은 서늘함을 감추고 알 수 없는 표정만 보였다.연미숙은 발걸음을 멈칫하다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구 대표도 여기 있었네요? 이런 우연이.”구승훈은 냉정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면서 연미숙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우연 아닙니다. 연미숙 씨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주해찬과 강하리를 살해하려 했던 혐의가 있어서 그쪽에 대해 알아봐야겠어요.”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말끔히 사라지더니 곧 한참 후 피식 웃었다.“구 대표가 오해했네요. 난 한 번도 그 사람들을 죽이려 한 적 없어요. 게다가 난 그 사람들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요?”“저도 궁금하네요, 왜 그런 짓을 하셨는지. 아무런 원한도 없이 문연진과 손을 잡고 여러 번 강하리를 건드렸죠. 누굴 속이시려고요?”남자가 조금씩 다가올수록 연미숙의 얼굴은 창백해졌다.문연진이 잡힌 후로 언젠가 이 모든 게 드러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강하리에게 직접적으로 무슨 짓을 한 적이 없었기에 드러나더라도 누가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큰 걱정 없이 지냈다.하지만 이제 교통사고에 연루되니 누명을 벗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연미숙은 이미 앞으로 다가온 구승훈을 바라보며 가슴을 들썩거렸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게다가 연미숙 씨 계좌로 운전기사에게 돈을 보냈던데 그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연미숙은 당황했다.“말도 안 돼요! 난 그런 적 없...”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입을 다물었다.구승훈의 표정이 이미 그 돈이 그녀의 계좌로 넘어갔다고 말해주고 있었다.연미숙은 문득 소름이 돋았다.자신 외에 계좌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정양철과 정주현뿐이었기 때문이었다.주현이가
구승훈은 경찰서에서 나오면서 미리 준비해 온 송금 기록을 손에 들고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사실 정양철의 돈은 연미숙의 계좌를 거치지 않았고 그가 꾸며낸 것에 불과했다.그런데 이런 결말이라니.강하리가 정양철의 딸이라고?말도 안 되는 소리다.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와 정양철의 친자 확인 좀 해줄래?”심준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말이야?”“방금 연미숙이 강하리에게 접근한 이유가 강하리가 정양철의 딸이기 때문이라고 했어.”심준호는 순간 당황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그럴 리가.”강하리가 정말 누나의 딸이라면 절대 정양철의 딸이 될 수는 없다.그는 누나와 진태형이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지 똑똑히 기억했고 누나가 정양철과 바람을 피웠다는 건 죽어도 믿을 수 없었다.구승훈 역시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다.“일단 친자 확인부터 하고 누가 손대지 않게 잘 감시해.”연미숙은 이미 친자 확인을 했다고 여러 번 강조했지만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가장 큰 가능성은 정양철이 연미숙을 칼자루로 삼아 그걸 이용해 강하리를 노린다는 거다.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강하리가 자기 딸이라는 걸 공개하면 그걸 방패로 삼아 자기가 했던 파렴치한 짓을 감출 수 있었다.강하리가 그의 딸이라면 아버지로서 강하리와 그녀의 모친을 해칠 수가 없으니까.오늘 사건도 마찬가지다. 모두 강하리가 정양철의 딸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가 그를 의심하기나 할까.주해찬이 엿들었던 통화가 그의 계획을 망친 거다.입을 막으려 했지만 급하게 준비한 탓에 빈틈을 보였다.구승훈의 얼굴이 점점 차가워지더니 잠시 후 다시 말을 꺼냈다.“정양철이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해.”구승훈이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병동 문 앞에 심준호가 전화기를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가 오는 것을 본 심준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우리 쪽 사람들이 갔을 땐 이미 늦었어. 그래도 공항과 역 주변을 막았어. 대체 어떻게 된 거야?”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그는
“하리 씨, 이 팔찌 하리 씨 거예요? 어머님이 주신 거죠?”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눈앞의 팔찌를 바라보다가 심준호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엄마가 남기고 간 거예요. 심 변호사님... 이 팔찌, 그리고 우리 엄마를 아세요?”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아요.”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는 아픔이 가득했다.“그냥 아는 게 아니라 아주 잘.”그렇게 말하며 그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안에 있던 심미현의 사진을 꺼냈다.강하리는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움찔하며 살짝 위로 올렸다.“심 변호사님, 우리 엄마 사진은 어떻게 구하셨어요? 두 사람...”심준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내 짐작이 맞다면 하리 씨 어머니가 제 누나예요. 하리 씨, 제가 외삼촌이에요.”강하리는 멍하니 심준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외삼촌?”그녀가 눈물을 툭 떨구었다.“심 변호사님이 정말 제 삼촌이에요?”“아마도요. 친자 검사했으니까 곧 결과가 나올 거예요.”그의 말에 강하리는 입을 다물었다.심준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심준호 씨, 신청하신 친자 검사 결과 나왔습니다.”심준호는 다가와 검사 결과를 받아 들고 심호흡을 한 후 열어보았다.혈연관계가 존재한다는 글이 눈에 들어오자 순식간에 눈가가 시큰거렸다.정말이다, 정말...강하리도 그 글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한 방울, 한 방울이 사람의 마음을 때려 옆에서 지켜보는 구승훈도 마음이 아팠다.심준호는 휴지를 꺼내 조금씩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울지 마, 울지 마. 하리야, 울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갑자기 그를 껴안고 더 세게 울었다.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다.“삼촌, 엄마가 그렇게 되고 너무 무서웠어요...”심준호는 순간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듯한 고통에 사로잡혔다.진작 그들을 찾았어야 했다.조금 더 빨리 알았
석미란은 그 말에 폭발했다.“너 미쳤어? 강하리 그 망할 년과 해찬이를 이어주라고?”석연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해찬이가 걔를 지켜주려고 이렇게 됐으니 해찬이를 책임지라고 하는 게 맞지 않겠어?”“하지만 걔는 다른 남자와 아이까지 낳았잖아! 해찬이가 아무리 식물인간이 됐다고 해도 걔가 어딜 감히!”석연란이 웃었다.“만약 심씨 가문 사람이라면? 심미현 딸인 것 같아.”석미란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심씨 가문 사람이라고?강하리 그 망할 년이?B시에서 그 누가 심씨 가문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겠나.게다가 심씨 가문의 첫째인데!“언니, 심씨 가문 첫째 딸이야.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떻게 놓쳐?”“확실해?” 석미란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강하리가 어떻게 심씨 가문 사람일까.분명 아무런 집안도, 배경도 없는 천한 것인데.석연란이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직접 심준호 입으로 자기가 강하리 삼촌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어. 그리고 강하리 그년이 심미현과 닮기도 했으니까 대충 맞는 것 같아.”“근데 해찬이는...”“해찬이도 그 여자 좋아하지 않아?”석미란은 조금 흔들린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강하리가 사실 심씨 가문 딸일 줄이야.진작 알았더라면 애초에 말리는 게 아닌데...강하리는 한참을 울다가 멈췄다.드디어 기댈 곳이 생겼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마음속에 억눌려 있던 억울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아이, 엄마, 정말 마음속에 억울한 것들이 너무 많지만 과거에는 누구도 털어놓을 사람도 없었고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다.오랫동안 쌓여 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터져 나온 거다.심지어 아직도 엄마의 가족을 찾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한바탕 크게 울었다.실컷 울고 나서야 그녀는 부끄러운 듯 심준호를 바라보았다.“죄송해요, 심 변호사님...”심준호가 웃었다.“날 뭐라고 부르는 거야?”강하리는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삼촌.”삼촌이라는 호칭이 나오자 그녀의 눈시울이 다시 살짝 붉어졌다.심준호는 그런 그
구승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려는데 심준호가 말렸다.“나가서 얘기해.”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강하리의 눈물을 억지로 닦아낸 뒤 심준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바깥에 도착하고 나서야 심준호의 표정이 굳어졌다.전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강하리 삼촌의 입장이 되어보니 정말 이 자식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그를 탓할 수만은 없고 지금 강하리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리가 견뎌온 고통은 어찌하나.심준호의 마음속에 아릿한 고통이 퍼져갔다.“승훈아, 앞으로는 하리가 조금의 억울함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 예전 일이 전부 네 탓이 아닌 건 알아. 하지만 그래도 하리가 힘들어했으니까 내가 아니어도 우리 집 어르신들이 분명 너한테 뭐라고 할 거야.”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알 수 없는 그의 눈동자를 가렸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가 피식 웃었다.“제가 자초한 거죠, 삼촌.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에요.”그의 탓이 맞든 아니든 강하리가 견딘 고통은 전부 그가 불러온 것이었다.심준호는 삼촌이라는 호칭에 피를 토할 뻔했다.“지금 날 뭐라고 불렀어?”구승훈은 그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삼촌.”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호칭이었다.둘은 함께 자랐고, 어릴 적부터 형이라고도 부른 적 없던 자식이 이젠 태연하게 삼촌이라고 부른다.“닥쳐! 하리랑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내가 무슨 삼촌이야! 함부로 들러붙지 마.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너희 둘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신 뒤 답했다.“시간 문제야.”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는 심준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승훈아, 하리의 정체를 우리 부모님이 알면 아마 동의하지 않으실 거야. 어쨌든 누나가 너희 집 어르신과 관련이 있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야.”구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심씨 가문 어르신이 억지를 부릴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딸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병동에서는 심준호가 강하리를 위해 과일을 깎고 있었다.“마음의 준비 되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연락드려서 오라고 할게. 아니면 집에 가도 되고.”집이라는 말에 강하리의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이제부터 그녀에게도 집이 생긴 건가?강하리는 시선을 내린 채 심준호가 건네는 사과를 받아먹었다.무언가 말을 하려던 찰나 면밀히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다.강하리가 시선을 들었지만 밖에서 구승훈이 들어온 뒤 문을 닫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었다.문 너머로 어렴풋이 허리까지 오는 검은 머리칼만 보였다.문밖에 있던 진시연은 문이 닫히는 순간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곧 쉬지 않고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병실 안으로 들어온 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왜?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구승훈의 뻔뻔한 말에 강하리는 고개를 돌렸다.“삼촌, 나 집에 갈래요.”심준호는 멈칫하다가 구승훈을 바라봤다.“그래, 집에 가자.”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나도 같이 갈까?”강하리가 거절하려는데 심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가 안 데려가면 안 올 거야?”구승훈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은 어두웠다.강하리가 눈에 띄게 그를 거부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구승훈은 마음이 답답했다.심씨 가문의 딸이 되고 나면 앞으로 주변에 온갖 종류의 남자들이 더 많아질 텐데.구승훈은 손목에 차고 있던 염주를 튕겼다.그는 연정이가 최대한 빨리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심준호는 재빨리 강하리의 퇴원 수속을 도왔고 퇴원을 앞둔 강하리는 주해찬을 다시 만나러 갔다.주해찬의 상태는 여전히 호전되지 않았고 강하리는 죄책감에 가득 찬 채 밖에 서 있었다.그런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석미란이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고 심지어 얘기까지 나누었다.“죄송해요, 나 때문에 선배가 이렇게 돼서.”석미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때문인 걸 알면 보상할 방법을 생각해야지, 강하리.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낼 게 아
강하리는 소파에 앉아 있는 은발의 세 어르신을 코끝이 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반평생 자기 딸과 손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다.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말했다.“제가 선물이 아니에요?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세 사람은 그녀의 호칭에 당황하다가 2초 뒤 정신을 차린 백아영이 벌떡 일어났다.“아가, 지금 날 뭐라고 불렀어?”강하리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할머니.”백아영은 멍하니 강하리를 바라보며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뛰었다.그녀는 강하리와 심준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심준호는 강하리의 팔찌와 친자 확인서를 꺼냈다.“엄마, 하리가 누나 딸이에요.”백아영은 친자확인서를 든 채 손가락을 떨었다.손에 쥔 팔찌를 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심금천 역시 멍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백아영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황급히 품에 끌어안았다.너무 잘 알았다.이 눈물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딸을 위해 흘리는 거다.남자인 심금천마저 두 눈이 붉어졌다.“울지 말고 애부터 챙기자고.”심문석은 한참을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왔다.“아가, 정말 미현이 딸이야?”심준호가 시큰거리는 눈으로 말했다.“맞아요, 할아버지.”어르신의 두 눈이 눈물로 앞이 흐려졌다. 강하리를 통해 기억 속 그 아이가 보이는 것 같았다.“왔으니 됐어, 돌아왔으니 됐다.”강하리가 그를 끌어안았다.“죄송해요, 할아버지. 제가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어요.”재벌가 아가씨인 심미현이 그녀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심문석은 한숨을 쉬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네가 엄마 때문에 고생했지.”강하리가 엄마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힘겹게 보냈는지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그에 비해 그들은 심미현을 위해 해준 게 없었다.백아영은 붉어진 눈으로 강하리 곁으로 다가와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아가,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강하리는 애써 눈가에 담긴 아픔을 감췄다.“아니에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
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을 밀쳐내려 했지만 연정이의 웃음소리에 잠시 망설였다.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구연정은 강하리와 구승훈을 보고 흥분했던 것도 잠시, 곧 다시 기운이 빠졌다.구연정은 힘없이 구승훈 어깨에 기댄 채 한 손은 구승훈의 옷자락을, 다른 한 손은 강하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그가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아가씨는 현재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입니다. 며칠 입원이 필요할 것 같아 이미 병실은 준비해두었습니다. 곧 간호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 많으셨습니다.”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연정이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강하리는 침대 곁에 앉아 연정의 손을 꼭 잡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다른 한쪽에서 의사와 연정이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의사가 떠난 뒤에야 그는 강하리 옆으로 돌아왔다.“의사 말로는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대. 너무 걱정하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연정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그녀 곁에 앉아 손을 잡으려 하자 강하리는 황급히 그 손을 빼냈다.“이제 돌아가요. 나랑 아주머니가 있으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조시욱이 오기 편하게 나더러 가라는 거야?”강하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다가 이내 비웃듯 말했다.“여기 남아 있으면 임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까?”구승훈은 끝내는 강하리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임 선생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 정말 나 못 믿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빼내려 하자 구승훈이 낮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연정이 깼어.”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연정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분노에 찬 강하리를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