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초연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남자의 품에서 연정이를 데려와 작은 목을 잡았다.“애 죽고 싶으면 이리 와.”동시에 여초연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모두 달려 나왔다.연정이의 울음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쳤고 너무 울어서 목이 다 쉬어 있었다.구승훈은 눈을 내리깔고 싸늘한 얼굴로 여초연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원하는 게 뭐야?”여초연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헬기 착륙시켜.”“내가 바보인 줄 알아? 헬기가 착륙하고 당신이 연정이랑 떠나면 내가 괜한 걸음 하게 되잖아.”그런데 여초연의 손이 갑자기 힘을 주었다.“그러면 아이가 죽게 놔두던지.”연정이가 더 세게 울었고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그의 어두운 눈동자에 서늘한 섬광이 번뜩였지만 이내 그가 손짓했다.준봉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사람들과 함께 중앙에서 멀어졌다.헬기가 천천히 내려왔다.여초연의 손은 여전히 연정이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구승훈은 그녀가 얼마나 무자비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순간만큼은 감히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쥐도 새도 모르게 여초연이 정말 연정이에게 상처를 입힐까 봐 두려웠고 자신이 진짜 움직이면 연정이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그는 이 방법을 사용하여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다.헬리콥터가 착륙하고 여초연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헬기에 탑승했다. 뒤따라오던 남자는 두 사람을 끝까지 보호했다.세 사람이 헬기에 오르자 경호원 4명이 뒤를 따랐다.구승훈은 조금씩 상승하는 헬기를 바라보다가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기내에서 기내 문을 마주 보고 있던 남자가 연정이를 안아 들었다.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이며 옆에 있는 준봉을 바라보았고 준봉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조종석에 있는 조종사의 어깨로 칼이 날아들어 박히자 기체가 순식간에 휘청거렸다.연정이를 안고 있던 남자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해야 했다.기체가 이쪽으로 기울어지는 그 순간 구승훈의 총도 방아쇠를 당겼다.연정이를 안고 있던 남자의 팔에서 갑자기 피가 솟구쳤고 연정
퍽!준봉이 남자를 발로 차자 남자는 입에서 피 한 모금을 뿜으며 곧바로 실신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구승훈은 얼굴에 별다른 표정 하나 없이 발밑에 떨어진 주사기를 바라보았다.“괜찮아. 주사기 챙겨.”준봉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이미 연정이를 안은 채 자리를 떠났고 준봉은 바닥에 놓인 주사기를 바라보다가 저쪽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사람 데려가!”밤이 깊어 연정이가 구승훈의 품에 안겨 잠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준봉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앞을 향해 달렸다.구승훈은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며 마음이 이미 다 녹아내렸다.“대표님, 그 약...”구승훈이 멈칫하다가 연정이 얼굴을 쓰다듬었다.“하리한테는 말하지 마.”“하지만...”“걱정하지 마, 돌아가서 민준이 형 찾아가면 돼. 아직 두 모녀랑 오래 있고 싶거든.”이 말을 듣고 준봉은 안도했지만 왠지 모를 막연한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그 시각 국내에서 강하리는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병원을 찾았다.심준호의 도움으로 전문의들이 도착했지만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았다.강하리가 창백한 얼굴로 중환자실 앞에 서 있는데 심준호가 부드럽게 토닥였다.“너무 걱정하지 마.”강하리의 눈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심준호는 얼굴을 찡그렸다.“하리야, 네가 다칠까 봐 보호한 거지 너한테 부담이 되고 싶어서 지켜준 게 아니야.”강하리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잘 안다. 당연히 선배는 자신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지켜줬겠지.하지만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그렇게 좋은 사람이 자신 때문에 평생 이렇게 의식불명 상태로 살아야 하는 건가?심준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두 사람이 심씨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는 거의 정오가 되어 있었다.백아영은 특별히 강하리가 좋아하는 요리를 준비했는데 가족들이 음식을 먹기 직전, 밖에서 도우미가 달려왔다.“어르신, 사모님, 주씨 가문 사람들이
강하리는 그냥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미란은 그 모습에 더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오늘 그쪽에서 데려온 전문의도 진단했고 해찬이 상태가 좋지 않은 건 다들 다 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 해찬이는 아직 젊고 결혼도 못했는데 앞으로 결혼도 어렵게 됐어요. 그래서 우린 다른 건 필요 없고 하리가 해찬이와 결혼했으면 좋겠어요.”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심문석이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어림도 없어!”백아영도 얼굴이 굳어졌다.평소 성실하고 능력도 있어 눈여겨보던 후배 주해찬이 이런 사고를 겪게 된 게 안타깝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이용해 손녀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절대 안 돼!”그녀는 직접적이고 단호하게 대답했다.두 번의 거침없는 거절에 석연란은 순식간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아버님, 언니, 왜 말을 그렇게 하세요? 강하리 때문에 우리 해찬이 그렇게 됐으니까 하리가 평생 책임져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심준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숙모, 뭐가 당연하다는 거죠? 막말로 해찬이는 본인이 원해서 하리를 지켜준 거예요. 본인이 원한 건 원칙에 따라 타인에게 보상을 강요할 수가 없어요.”“너!”석연란은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원칙 따위는 상관없어. 어쨌든 해찬이가 하리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해찬이 책임져야지!”심준호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왜요, 하리한테 강요라도 하시게요?”석연란의 얼굴은 점점 더 추해졌다. 이제 강하리는 심씨 가문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정말 강요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그녀가 아니었다.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강하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죄송하지만 전 못해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모두 이쪽을 바라보았다.심준호는 잠시 놀라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하리가 죄책감 때문에 동의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주해찬의 현재 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주해찬이 괜찮다고 해도 강하리가 주해찬에게 그런 감정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강하리
구승훈은 심준호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두 눈이 번쩍 뜨였다.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씨 가문에서 결혼이라도 주선하게?”심준호가 헛웃음을 지었다.“우리 집이 구씨 가문이랑 같은 줄 알아?”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조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러면 뭐야?”심준호는 한숨을 쉬었다.“주씨 가문에서 하리에게 주해찬을 책임지라면서 하리한테 주해찬과 결혼하라고 강요해.”구승훈의 가슴이 내려앉았다.“강하리는? 동의했어?”심준호의 눈빛이 번뜩였다.“비슷해.”구승훈은 숨이 턱 막혔다.“비슷하다는 건 무슨 말이야?”심준호가 갑자기 말을 돌렸다.“아이는?”구승훈은 품에 안겨 잠든 말랑한 아기를 바라보며 괜한 복수심에 심준호에게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삼촌, 제 아내 좀 지켜주세요. 주해찬은 조카사위로 적합하지 않아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전화를 끊고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이륙까지 얼마나 남았어?”“한 시간도 안 남았어요.”대답한 준봉이 망설이며 다시 물었다.“대표님, 몸 괜찮으세요? 지금이라도 병원에...”구승훈이 그를 쳐다보았고 준봉은 순간적으로 입 밖으로 나온 말을 삼켰다.“돌아가서 얘기해.”준봉이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네.”구승훈은 그를 바라보며 지시했다.“가서 아기 용품 좀 사와. 가는 길에 쓸 수 있게.”준봉은 당황했다.“대표님, 저는...”“노진우는 하는데 넌 못 해?”“... 할게요!”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고 그가 떠난 뒤에야 구승훈은 다리를 슥 만졌다.그러고는 잠시 후에야 혼자서 웃음을 터뜨렸다.“여초연 여사, 이대로 날 죽게 할 생각은 아니지?”반면 석씨 가문 자매는 심씨 가문에서 나오자마자 석미란이 석연란의 손을 뿌리쳤다.“왜 날 막아?” 석미란은 석연란을 노려보았다.석연란은 답답한 표정이었다.“어르신이랑 백아영 표정 못 봤어? 그리고 심준호도. 심씨 가문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그 세 사람 건드리면 언니가 아니라 어르신이 와도
“아기 때문에?”심준호가 다시 물었다.아이 얘기가 나오자 강하리의 가슴이 아팠다.심준호는 피식 웃었다.“그러면 애가 괜찮으면?”강하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심준호를 바라보았다.“삼촌...”“만약에.”강하리의 눈에서 반짝이던 빛이 순간 사그라들었다.“그래도 안 돼요. 아이는 하나의 이유일 뿐 나랑 그 사람 사이엔 문제가 너무 많아요.”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알아서 생각해. 삼촌은 네가 억울한 일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도 네 생각 굽힐 필요 없어. 주씨 가문이든, 구승훈이든 똑같아.”강하리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감정을 추슬렀다.“삼촌, 정양철 일은 어떻게 돼가요? 그리고 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세요?”심씨 가문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누구도 아버지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정양철은 잡혔으니 걱정하지 마. 그 사람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네 아버지는...”심준호는 실제로 정양철의 샘플을 병원에 보낸 적이 있었다.정양철이 그렇게 말했다면 맞는지 아닌지 일단은 확인해야 했다.진태형은 정양철의 결과가 나오면 다시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아직 확인하고 있어.”강하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이틀 동안 집에서 휴식을 취한 후 B시에 있는 JM 사무실로 출근했다.그녀가 막 안으로 들어서는데 비서가 계약서를 하나 내밀었다.“대표님, 외교부 측에서 저희와 협업할 의향이 있답니다.”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를 받아 살펴봤다.“협상 시간이 오늘 오후라고요? 제가 가볼게요.”때마침 외교부에 도착한 강하리는 현관에 서 있는 진태형을 보았다.“진 장관님.”진태형은 그녀를 보고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여긴 어떻게 왔어요? 교통사고 났다던데.”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저는 괜찮은데 선배가...”주해찬을 언급하자 진태형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다 각자 운명이 있는 거죠. 너무 걱정 마요.”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말
진시연은 눈을 깜빡였다.“병원에서 들었어. 준호 삼촌이 강하리랑 친자 확인 검사를 했대. 강하리랑 친자 확인 검사를 하려고 정양철 샘플도 가져왔다던데. 아빠, 강하리가 미현 이모랑 정양철 딸이지?”진태형의 표정이 수시로 바뀌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말을 꺼냈다.“확실한 정보도 없이 이런 얘기는 하지 마. 미현 이모에 대한 실례야.”진시연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가 외교부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그녀는 차를 가져오지 않아 밖으로 나가 심준호에게 전화를 거는데 통화가 연결되기도 전에 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창문이 내려가며 안쪽에서 진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 씨, 내가 태워다 줄게요.”강하리의 눈빛이 번뜩였다.“고맙지만 됐어요, 진시연 씨.”하지만 진시연은 이미 차에서 내려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가요, 왜 예의를 차려요? 심씨 저택으로 가는 것 아니에요? 나도 마침 할머니랑 할아버지 뵈러 가는 길이에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한 채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차에 올랐다.그녀가 심씨 가문에 돌아갔다는 사실은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하지만 석씨 가문 자매들이 알기 때문에 진시연이 알고 있는 것도 놀랍지는 않았다.사교성이 좋은 진시연은 차 안에서 강하리에게 진태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강하리는 그 말을 들으면서 시선을 내린 채 웃기만 했다.진시연과 진태형은 사이가 정말 좋았고 진태형도 그녀를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제가 자주 덤벙거려서 전에 F대륙에서 의료 봉사할 때 실수로 크게 다치기까지 했는데 다행히 좋은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이 구해줬어요. 안 그랬으면 진짜 죽을 뻔했어요. 그래서 아빠는 항상 제가 철이 없다고 생각해요.”강하리는 시선을 내린 채 이야기를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심씨 가문 별장 앞에 멈췄고 차가 멈추자마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버렸다.심씨 가문 별장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남자는 한 손은 주머니에 넣
강하리가 진시연을 바라보았다.“제가 신경 쓸 건 없죠. 구 대표님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그런데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하며 왠지 모르게 심장이 반 박자 늦춰진 듯싶다가 갑자기 심하게 뛰었다.마치 죽었던 것이 조용히 되살아나는 듯 그녀의 몸 옆에 늘어뜨린 손이 살짝 떨렸다.“들어가서 봐.”구승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강하리가 홱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곧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백아영은 연정이를 품에 안고 입을 다물지 못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연정이가 젖병을 들고 분유를 힘차게 마시고 있었다.눈은 여전히 충혈되어 있었고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이 장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렸다.“연정아...”그녀는 나지막이 부르면서도 이 모습을 방해하면 다시는 딸을 볼 수 없을까 봐 두려운 듯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이리 와, 이 바보야. 왜 아직도 거기 서 있어?”문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강하리를 보고 백아영은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이봐, 연정이는 네가 오니까 우유도 안 먹는다.”강하리의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이 툭 바닥에 떨어지더니 갑자기 그쪽으로 달려갔고 연정이를 만지는 손가락마저 떨렸다.연정이가 강하리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팔을 내밀었다.작은 입이 무언가를 쫑알거리자 강하리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연정이를 품에 꼭 안은 채 눈물을 계속 흘렸다.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연정이의 작은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연정이, 연정이가 돌아온 건가?연정이가 위로하듯 작은 손으로 강하리의 얼굴을 살살 두드리는 동안 강하리는 점점 더 세게 울었다.억눌린 흐느낌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고 이 순간 아무도 더 입을 열지 않았다.원래 미소를 짓고 있던 백아영도 이 순간 갑자기 감정이입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구승훈은 문간에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며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
낯익은 향기가 풍겨오자 강하리의 몸이 살짝 굳어졌다.“강하리, 이제 한 번만 더 기회를 줄래?”구승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고 그의 따뜻한 숨결이 볼에 닿자 순간 머금었던 미소가 굳어졌다.강하리는 그의 숨결을 피해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연정이 이불 가져와야 해.”하지만 구승훈은 놓지 않았다.그는 귓불을 살며시 깨물면서 다시 물었다.“한 번 더 기회를 줄 거야?”강하리가 멈칫하며 시선을 내리고 말했다.“밖에서 기다려.”말을 마친 그녀가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알았어, 그러면 밖에서 기다릴게.” 구승훈은 그녀의 귓가에 입 맞추고 밖으로 나갔다.강하리는 담요를 가져와 연정이에게 덮어주고 그 안에서 평온하게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마음이 녹을 듯이 부드러워졌다.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생각하니 다시 얼굴에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그녀는 한참을 방 안에 서 있다가 심호흡하고 밖으로 나갔다.밖으로 나가자마자 구승훈의 다소 어두운 눈빛을 마주했다.“연정이, 어떻게 된 거야?”구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속삭였다.“미안해.”강하리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엄마가 아기를 데려갔어.”강하리는 멈칫하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우리 애가 사모님께 잘못이라도 했나?구승훈의 입가에는 떫은맛이 가득했다.결국 이 모든 게 그 때문이었다.그는 다가와 강하리를 품에 끌어안았다.“너랑 아이 힘들게 해서 미안해.”강하리는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구승훈을 밀쳤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더 꽉 껴안았다.“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이제 아기가 돌아왔으니까 다시 시작하자, 응?”강하리의 몸이 경직되면서 곧바로 그를 밀어냈다.“안 돼.”강하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연정이가 돌아왔지만 구승훈과 다시 시작할 자신이 없었다.계속되는 상처에 그녀는 정말 무서웠다.앞으로는 그저 연정이와 함께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싶었다.게다가 이젠 주해찬 문제도 있었다.구승훈은 비웃으며 갑자기 앞으로 다가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