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여자는 긴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채 섬세하고 완벽한 곡선이 돋보이는 심플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하얀 얼굴과 살짝 물기를 머금은 눈, 자세히 보면 붉은 입술이 살짝 부어 있었다.그리고 남자의 손가락은 여자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두 눈에 애틋함과 사랑이 흘러넘쳤다.누가 보더라도 무척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하필 이 타이밍에 진시연이 나타났다.그들을 발견한 진시연은 순간 당황했다.얼마 전 강하리와 구승훈이 또다시 싸웠다는 소리를 들었고 구승훈이 연성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둘이 다시는 화해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또다시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그녀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보다가 일그러지는 표정을 애써 감추었다.“하리 씨.”진시연의 목소리엔 놀라움이 가득했다.“해찬 오빠 보러 왔어요?”구승훈의 말에 살짝 흔들리던 강하리의 심장은 진시연을 보는 순간 순식간에 다시 차분해졌다.진시연이 놀라긴 해도 그 놀라움이 결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진시연은 강하리에게 질문을 마친 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구승훈 씨, 언제 돌아왔어요? 왜 말 안 했어요?”구승훈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진시연 씨, 우리가 친한 사이인가요?”진시연의 미소가 살짝 굳어졌고 구승훈은 무표정하게 진시연을 바라보다가 강하리를 데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두 사람이 두 발짝도 떼기 전에 진시연이 갑자기 외쳤다.“하리 씨,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는데 시간 날 때 보러 올 수 있어요?”하지만 강하리는 진시연을 무시했고 진시연은 굴하지 않고 다시 소리쳤다.“아빠가 하리 씨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도 안 와요. 하리 씨 때문에 아빠가 불효자라는 말을 들어야겠어요?”그제야 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추며 진시연을 돌아보았다.“아빠가 집에 가든 말든 그건 아빠가 알아서 할 일이죠. 그런 일까지 날 탓할 필요는 없어요, 진시연 씨.”진시연은 순간 억울한 표정으로 말없이 구승훈을 바라보았고 구승
하지만 꼭 눈치 없이 끼어드는 사람 때문에 이젠 침대가 아니라 소파도 겨우 애원해야 차려질 것 같았다.구승훈은 걸어가며 달래는 어투로 강하리에게 말했다.“왜 저런 여자랑 말을 섞어.”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뿌리쳤고 그는 그 틈에 바로 허리를 감아왔다.강하리가 몇 번 몸부림쳤지만 남자는 더 단단히 감쌀 뿐이었다.두 사람이 커플처럼 가까워진 것을 본 진시연은 엘리베이터 입구에 서서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최상층을 눌렀다.주해찬은 화장실에서 강하리가 간병인을 부르는 통화를 듣고 쓴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오늘 밤 강하리에게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강하리가 그를 단지 선배로 생각한다는 걸 잘 알았고 입 밖에 꺼내면 둘 사이가 더 어색해질 것만 같았다.하지만 오늘 구승훈이 강하리를 벽에 밀착해 키스하는 모습을 본 순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주해찬은 심호흡을 한 뒤 시선이 다리로 향했다.여전히 포기가 안 되었다.강하리가 그를 좋아하지 않으면 물러날 순 있어도 그녀의 곁에 남아있는 남자가 구승훈이라는 사실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갑자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주해찬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들어와요.”그는 대답하고 휠체어를 밀어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방문객을 본 그는 살짝 당황했다.강하리가 부른 간병인이 온 줄 알았는데 진시연일 줄이야.“무슨 일로 왔어?”진시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우연히 지나가다가 보러 왔지. 좀 어때? 다친 건 잘 회복하고 있어?”주해찬이 웃었다.“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진시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떠날 생각이 없었다.주해찬은 그녀가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진시연, 할 말 있으면 그냥 해.”진시연도 주해찬을 바라보며 더 말을 돌리지 않았다.“해찬 오빠, 강하리 좋아하지?”주해찬은 잠시 멈칫했다.“응. 비밀은 아니지만 너랑은 상관없
진시연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굳어버렸다.주해찬의 성격이 온화하고 그의 약점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막무가내로 찾아온 건데 주해찬이 받아들이기는커녕 되려 그녀를 협박할 줄은 몰랐다.진시연의 입꼬리가 살짝 굳어졌다.“해찬 오빠, 정말 강하리가 구승훈이랑 만나게 놔둘 거야?”주해찬은 정말 원치 않았지만 강하리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진시연, 오늘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진시연은 내키지 않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해찬이 강하리에게 손대지 않아도 할 사람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진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해찬 오빠, 생각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해.”주해찬은 진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소 우울한 웃음을 내뱉었다.솔직히 아주 잠깐 마음이 흔들린 건 사실이었다.인간의 욕심이란 원래 끝이 없으니까.그는 심호흡하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들고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차 안에서 강하리는 주해찬의 연락을 확인하자마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간병인 문제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주해찬이 이렇게 말했다.“하리야, 진시연 조심해.”강하리는 멈칫했다.“선배, 무슨 일 있어요?”주해찬이 피식 웃었다.“아무것도 아냐.”강하리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면 주해찬이 전화를 걸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선배...”“하리야.” 주해찬은 강하리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내가 너한테 한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것 때문에... 날 멀리하지도 말고. 알았지?”강하리의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가며 이윽고 입술을 다문 채 웃었다.“안 그래요.”“그럼 됐어.”주해찬의 목소리엔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전화를 끊은 강하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구승훈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주해찬이 또 오래?”정신을 차린 강하리가 답했다.“아니.”그녀는 문득 주해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주해찬과 멀어질 생각은 없었지만 그
별장 문 앞에는 정원이 있었고 불이 켜져 있지 않은 정원에 달빛이 환하게 비추자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안은 채 리시안셔스가 가득한 정원을 지나갔고 강하리는 묵묵히 꽃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이사 가자고 했던 곳이 바로 여기라는 걸 알 것 같았다.강하리는 왠지 모를 느낌이 들며 오랜만에 마음속 안정을 느꼈다.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니 남자의 서늘한 옆태엔 아직 미소가 살짝 남아 있었다.기억 속 구승훈은 잘 웃는 사람이 아니었고 항상 그녀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 아니면 설령 웃는다고 해도 무심한 조롱의 표정이었다.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녀를 볼 때면 항상 미소를 짓고 있었다.강하리가 시선을 거두며 구승훈의 어깨에 기대자 걸음을 멈춘 구승훈이 품 안에 안긴 강하리를 내려다보았다.“자기야, 이러면 나 못 참는데.”하지만 강하리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았다.“언제는 참은 것처럼 얘기하네.”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하지만 이러면 내가 당장 네 옷을 벗겨버릴 수도 있어.”강하리의 몸이 경직되자 구승훈은 웃으며 그녀를 안고 별장으로 들어갔다.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별장 안 가구와 인테리어는 그 익숙한 아파트로 돌아간 듯 러그부터 컵 하나까지 모두 똑같았다.전부 그녀가 직접 산 것이었지만 구승훈과 함께 가차 없이 버린 것들이기도 했다.그런데 지금 그 물건이 구승훈과 함께 눈앞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강하리는 깜짝 놀라서 잠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그땐 싫다고 했는데 아직 좋아해?”구승훈이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묻자 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좋아. 늘 좋아했어.”숨이 턱 막힌 구승훈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이미 잠겨 있었다.“자기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강하리의 손가락이 그의 옷깃을 감싸 쥐며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곧장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숨돌릴 틈도 주지 않은 채
둔탁한 아픔이 구승훈의 가슴을 강타했다.그는 몸을 숙여 강하리를 품에 꼭 안고 입맞춤했다.“미안해 자기야, 미안해.”강하리는 눈시울을 붉힌 채 그의 목덜미를 콱 물었다.구승훈이 거짓말을 했다는 분노를 모두 쏟아내듯 자비 없이 강하게 깨물었다.구승훈은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강하리가 깨물도록 내버려두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을 깨물고도 아직 미움이 풀리지 않은 듯 그의 어깨를 두 번 더 세게 치고 나서야 그를 놓아주었다.구승훈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시선이 붉어진 그녀의 눈가로 향했다.“아직도 화났어?”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고 그의 눈빛에는 아픔이 가득했다.“화 풀어, 응?”강하리는 붉어진 눈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앞으로 나한테 또 거짓말하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구승훈이 괜히 마음에 찔렸지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몸에 관한 것 빼고 다시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또 깨물 거야?”강하리가 그를 밀어냈다.“가죽이 너무 두꺼워서 물기도 힘들어.”구승훈의 입가에 마침내 작은 미소가 번졌다.“안 두꺼운 데 있는데 한번 물어볼래?”멈칫한 강하리는 그가 어디를 말하는 건지 깨닫고는 이내 얼굴을 붉혔고 구승훈은 웃으며 일어나 그녀의 옷을 정리해 주고는 그녀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내려줘, 나 혼자 걸을 수 있어.”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을까?”강하리가 구승훈을 밀어내자 혀를 찬 구승훈이 옆에 있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간 그는 옷장에서 미리 준비해 둔 강하리의 옷 한 벌을 꺼낸 뒤 문 옆에서 기다렸다.안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멈추고 나서야 구승훈은 문을 두드렸다.“강 대표님, 시중 들어드릴까?”“필요 없어!” 강하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고 구승훈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나온 강하리는 몸을 닦을 때가 되어서야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
“어디 다친 데는 없나 내가 잘 살펴봐 줄게.”강하리가 그 말의 뜻을 알아채기도 전에 구승훈이 큰 손으로 그녀의 목욕 타월을 낚아챘고 그녀가 깜짝 놀라는 사이 구승훈은 이미 타월을 민첩하게 열어젖혔다.순식간에 살결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구승훈이 제대로 보기도 전에 강하리가 옆에서 이불을 잡아당겼다.구승훈은 몸을 꽁꽁 가린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씰룩거릴 수밖에 없었다.“강 대표님, 내가 참다가 죽길 바라?”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속옷을 가져와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가서 씻기나 해.”구승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순식간에 검게 물든 눈동자를 번뜩이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기다려.”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강하리는 이불속에 감춘 손을 꽉 말아쥐며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개자식!”얼굴에 달아오르는 열기를 참으며 이불 속에서 옷을 입고 타월을 두른 뒤 드레스룸으로 향했다.잠옷을 찾아 입은 강하리는 잠시 안방을 돌아보았다.구승훈이 얼마나 준비했는지 모르겠지만 침실의 구조도 연성의 집과 똑같았다.심지어 침대 시트마저 그녀가 직접 산 것이었다.침울한 눈빛으로 침대 옆에 서 있던 강하리는 허리를 굽혀 침대 협탁 위에 놓인 사진을 집어 들었다.석연란이 몰래 찍은 사진 중 하나로 사진 속 남자는 그녀를 차에 밀어붙이고 있었다.강하리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별 사진을 다 꺼내놓는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구승훈이 뒤에서 다가와 그녀를 감싸 안았고 남자의 손이 거침없이 그녀의 가슴으로 향했다.잠시 어루만지던 그가 물었다.“다쳤어?”말을 마친 그의 손이 잠옷 옷깃 사이로 안을 파고들었다.“확인해 볼게.”말로는 확인한다면서 손으로는 거침없이 그녀의 잠옷을 찢고 다른 한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은 채 그대로 키스했다.강하리가 그의 입술을 깨물자 구승훈은 곧바로 몸을 뒤집어 그녀를 덮쳤다.안방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구승훈이 무의식적으로 침대 협탁을 열었다가 행동을 멈추었다.“안전한 날
구승훈은 강하리의 거부감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는 손을 뻗어 강하리의 턱을 잡고 강하리가 자신을 올려다보게 했다.“자기야, 나 밀어내지 마.” 강하리는 여전히 입술이 창백한 채 코끝이 시큰거렸다.그녀가 구승훈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나 다시 데려다줘.”구승훈은 그녀가 여기서 잠을 못 이룰 거라는 걸 알았기에 굳이 강요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강하리의 옷을 챙겨주러 갔다.두 사람이 별장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강하리가 묵묵히 앞서 걸어가자 구승훈은 말없이 뒤에서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따라갔다.잠시 후 그는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 강하리의 손을 잡았고 강하리는 멈칫했다.구승훈은 침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꿈 꿨어?”강하리의 입가가 파들 떨리며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야.”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을 떼어내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구승훈은 잠시 제자리에 서 있다가 곧바로 따라갔다.차 안의 공기엔 적막감이 돌았다.분명 올 때만 해도 두 사람 다 기분이 좋았는데 임신이라는 두 글자로 이렇게 됐다.강하리의 얼굴은 여전히 핏기 없이 창백했고 구승훈도 더 묻지 않았다.두 사람이 심씨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출장에서 막 돌아온 심준호를 만났다.심준호는 두 사람을 보고 살짝 놀라며 농담을 건네려던 찰나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발견했다.“삼촌.” 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저 먼저 올라갈게요.”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올라가서 좀 쉬어.”강하리가 올라간 뒤에야 심준호는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왜, 또 무슨 짓을 해서 하리 화나게 했어?”구승훈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내가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하면 믿겠어?”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렸고 구승훈은 돌아서서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슨 꿈을 꾸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꿈을 꾸며 연정이를 부르던 그녀는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렸다.아마... 연정이에게 무슨 일이
강하리는 코끝이 시큰거리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할머니.”백아영은 별다른 말 없이 강하리에게 연정이를 안겨주고 돌려보냈다.연정이를 품에 안고 나서야 강하리는 꿈속의 공포에서 깨어난 듯 안도감을 느꼈다.구승훈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 강하리가 침대에 앉아서 잠든 연정이를 바라보고 있었다.“폭발하는 꿈 꿨어?”그는 다가와 강하리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강하리는 계속 연정이만 바라보다가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나지막이 답했다.“응.”구승훈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잡았다.“자기야, 앞으로 정말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 모녀가 다시는 괴롭힘 당하지 않게 할 거야.”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고개만 끄덕였을 뿐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밤늦게 침대에 누웠지만 둘 다 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준봉은 심씨 가문 별장 입구에 일찍 차를 주차했다.“나가려고?” 심준호가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구승훈이 대답을 하고는 저쪽에서 연정이에게 밥을 먹이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일이 좀 있어서.”심준호도 식당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진씨 가문 두 어르신이 혼사를 결정한다는 소리가 들려. 나이가 있긴 하니까.”구승훈이 콧방귀를 뀌었다.“언제부터 진씨 가문에서 하리 혼사를 결정하게 된 거야? 심씨 가문은 내버려둘 건가?”심준호는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었다.“하리만 원하면 우린 간섭하지 않아.”그는 말을 마치고 구승훈의 어깨를 두드렸다.구승훈의 눈에는 여전히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하리는 원하지 않을 거야.”심준호는 미소를 지으며 강하리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하리야, 난 구승훈이 네가 자기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꼴을 못 보겠다. 진씨 가문에서 소개해 준 사람도 괜찮다며?”구승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삼촌, 할머님이 며칠 전에 결혼 얘기를 하시던데요.”“...”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다가가 고개를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
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을 밀쳐내려 했지만 연정이의 웃음소리에 잠시 망설였다.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구연정은 강하리와 구승훈을 보고 흥분했던 것도 잠시, 곧 다시 기운이 빠졌다.구연정은 힘없이 구승훈 어깨에 기댄 채 한 손은 구승훈의 옷자락을, 다른 한 손은 강하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그가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아가씨는 현재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입니다. 며칠 입원이 필요할 것 같아 이미 병실은 준비해두었습니다. 곧 간호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 많으셨습니다.”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연정이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강하리는 침대 곁에 앉아 연정의 손을 꼭 잡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다른 한쪽에서 의사와 연정이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의사가 떠난 뒤에야 그는 강하리 옆으로 돌아왔다.“의사 말로는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대. 너무 걱정하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연정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그녀 곁에 앉아 손을 잡으려 하자 강하리는 황급히 그 손을 빼냈다.“이제 돌아가요. 나랑 아주머니가 있으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조시욱이 오기 편하게 나더러 가라는 거야?”강하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다가 이내 비웃듯 말했다.“여기 남아 있으면 임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까?”구승훈은 끝내는 강하리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임 선생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 정말 나 못 믿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빼내려 하자 구승훈이 낮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연정이 깼어.”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연정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분노에 찬 강하리를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