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돼요.”노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인수 건의 다음 단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고 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요즘 기명 제약 주식을 누군가가 계속 사들이고 있더라고요. 처음엔 하리 씨가 시킨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강하리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조사 안 해 봤어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하리 씨가 한 줄 알았으니까 굳이 조사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강하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마치 질기게 달라붙는 벌레처럼 그 혐오스러운 감각이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강하리를 따라다녔다.“안 대표님도 누구 데리러 오셨습니까?”노민우가 먼저 나서며 강하리 앞으로 살짝 몸을 움직여 그녀를 가렸다.하지만 안현우의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하리 씨, 오랜만이네요. 이제 인사도 안 해줘요? 아 깜빡했네요. 이제 심씨 가문의 아가씨죠?”그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일부러 한 마디 덧붙였다.“심씨 가문의 아가씨면 뭐 해요? 결국엔 남자한테 버려진 신세가 됐는데.”그 말을 들은 노민우의 얼굴빛이 변했다.“안현우, 그만둬!”하지만 안현우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비웃으며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왜? 아직도 이 여자랑 자고 싶어?”순간, 노민우는 안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안현우는 비틀거리며 손가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맞췄지? 아니면 둘이 이미 잤나? 어땠어, 좋았어?”눈이 뒤집힌 안현우는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였다.“너 이 새끼, 미쳤어?”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뭘 그렇게 흥분해? 우리 중에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기나 해?”노민우가 이를 악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그냥 가요. 저딴 놈이랑 말 섞을 필요 없어요.”강하리가 급히 차 문
최하영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강하리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운전하던 노민우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깃 보며 가볍게 기침했다.“방금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구승훈한테 전화가 와서 하리 씨 도착했는지 묻더라고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민우는 혀를 차며 무언가 더 말하려다 강하리가 화제를 돌렸다.“최 대표님, 요즘 많이 바쁘세요?”최하영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천천히 굴리다 말고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왜요? 저랑 데이트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제가 그런 영광을 누려도 될까요?”최하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다른 사람이라면 힘들겠지만, 하리 씨라면 언제든지 가능하죠.”“좋아요.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예요. 일 끝나면 연락할게요.”강하리는 최씨 가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천아름에게서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다.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는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비쳤다.“예쁘지?”배경에서 손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 예뻐.”“기분 좋아졌어?”“응.”손연지는 웃으며 덧붙였다.“그래, 행복해야 해. 쓸데없는 사람과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친구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곁에 있을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천아름이 나직하게 말했다.“오늘 연지가 구승훈을 봤대. 병원 앞에서 그 여자랑 말다툼하고 있었대.”강하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좀 조심할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에 글쎄 구승훈이 그 여자 데리고 파티에 가고는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올랐어. 흥!”강하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래? 둘 사이가 꽤 좋은가 보네.”“흥! 진짜 좋았다면 그 여자 욕먹게 그렇게 내버려뒀겠어? 난 구승훈이 뭔가 큰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친구야,
“그래, 삼촌이 도와줄게.”심준호는 전화를 끊고 미간을 찌푸리며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자선 경매는 이미 끝난 상태였고 구승훈은 마지막으로 귀걸이 한 쌍을 낙찰받았다.옆에 있던 임희주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구 대표님, 그 귀걸이 누구한테 선물하시려고요?”구승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귀걸이를 챙기며 답했다.“아무한테도 안 줘요. 그냥 자선 행사일 뿐이에요.”임희주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구승훈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그럼 제가 하나 얻어도 될까요?”그 순간, 구승훈이 걸음을 멈췄다.그가 천천히 돌아서 임희주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임 선생, 주제 파악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임희주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낙찰받아 놓고 선물도 안 하면 아깝잖아요.”“아까워도 임 선생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구승훈은 단호하게 말하며 준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 집에 모셔다드려.”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구 대표님께서 직접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준봉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임희주의 앞을 막아섰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마지막까지 구승훈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차에 올랐다.숙소에 도착하자, 임희주의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을 확인한 임희주의 손가락이 순간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망설이다가 이를 악물고 전화를 받았다.“사모님.”여초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사모님인 건 기억하나 보네? 구승훈이랑 재밌게 놀아나느라 다 잊은 줄 알았거든.”임희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사모님, 그럴 리가요.”여초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네가 어떤 존재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구승훈을 이용해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그 말에 임희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사실이었다.구승훈이 강하리와 헤어졌다고 해서 자신에게 감정을 가질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희주는 포기할 수 없었다.만약에, 아주 만약에 구승훈을 정말로 붙잡을 수
심준호의 미간이 꿈틀거리며 깊은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며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리 오늘 나한테 전화해서 이혼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했어. 알아서 잘 처리해.”심준호는 옆에 있던 임희주를 흘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더러운 곳에서 너무 오래 굴러다니지 마. 아니면 나중에 아무도 너를 구해줄 수 없을 거야.”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심준호는 몸을 돌려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돌아서서 임희주를 바라보았다.어둑한 조명 아래, 그녀의 얇은 시폰 드레스는 몸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희미한 불빛에 속살이 아스라이 비쳤다.구승훈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의 눈에 스쳐 간 것은 혐오였다.“임 선생, 아직 볼 일 남았어요?”임희주는 추위에 몸을 떨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할 말이 있어서요.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소였다. 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임희주 씨, 계속 이러시면 담당 의사 바꾸는 수가 있어요.”임희주는 추위에 입술을 떨며 구승훈에게 달려들어 몸을 기대려던 순간, 구승훈에게 몸이 닿기도 전에 노진우가 그녀를 가로막았다.“임 선생님, 사회면에 오르고 싶으신가요?”그 말에 임희주는 이를 악물었다.그녀의 시선이 뜨겁게 불타올랐다.“구승훈 씨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구승훈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지더니 눈빛에 어둠이 스쳐 지나갔다.“임 선생 말을 제가 어떻게 믿죠?”임희주는 입술을 깨물더니 눈가에 금세 촉촉한 이슬이 맺혔다.“저를 그렇게도 못 믿으세요?”“우리 사이에 신뢰라는 게 있었나요?”그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노진우에게 시선을 돌렸다.“돌려보내.”노진우는 즉시 그녀에게 다가갔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점점 멀어져가는 구승훈의 뒷모습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여초연!”구승훈은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보았다.그의 눈빛에
임희주는 노진우를 노려보며 차에 올라탔다.그녀는 차 안에서 핸들을 세게 내리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서서히 가라앉는 분노를 삼키듯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이내 시동을 걸었다. .노진우는 임희주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구승훈에게 다가갔다.“대표님, 왜 동의하지 않으신 겁니까? 이렇게 계속 미루다가는 사모님이 정말로 이혼하실지도 모릅니다.”이혼이라는 단어는 가슴을 깊숙이 찌르는 칼날 같았고 구승훈은 발걸음을 멈추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아직 때가 아니야. 지금 임희주와 손을 잡으면 내가 조급해한다는 걸 눈치채고 나를 이용하려 들 거야. 내가 조급해하지 않으면 결국 누군가는 조급해지겠지.”“하지만 사모님은요? 사모님이 정말로 이혼을 결정하시면 어쩌실 겁니까?”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렸다.“일이 끝나면 사과하고 잘못을 빌어야지.”노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귀걸이를 손에 꽉 쥐고 묵묵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노진우도 따라 들어가려 하자 구승훈이 문 앞에서 돌아서며 이만 가보다는 눈빛을 보냈다.노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오늘은 제가 같이 있겠습니다.”구승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덜 다쳤나 보네?”“하지만 갑자기 병이 도지기라고 하면 혼자서 더 위험합니다.”구승훈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괜찮아. 죽기까지 하겠어?”말을 마치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텅 빈 주택 안에서는 구승훈의 깊은 숨소리만 들렸다.그는 어딘가 공허한 눈빛으로 거실을 둘러보며 강하리와 연정이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그를 기다리던 모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히 떠올랐다.그는 소파 앞 러그에 걸터앉아 손끝으로 귀걸이를 매만졌다.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그는 결국 담배에 불을 붙였다.그러나 막 한 모금 들이마시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고 화면 속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연정이의 얼굴이 있었다.“아빠... 아
구승훈은 임희주의 답장을 보지도 않은 채 도우미에게 전화를 걸어 연정이를 심씨 가문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그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 놓은 뒤 2층 서재로 향했다.강하리와 함께 썼던 침실 앞을 지나던 순간,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 섰고 묘한 정적 속에서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한편, 임희주는 메시지를 보낸 뒤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계속해서 답장만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휴대폰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기다림이 길어지자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고 신호음조차 울리지 않자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마치 한순간에 모든 걸 무시당한 듯한 기분이었다.[구승훈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그래서 협력할 거예요?]처음 구승훈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느꼈던 설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녀는 자신이 유일하게 그를 도울 수 있는 존재라고 확신했기에 과감하게 요구를 내걸었던 것이다.그러나 구승훈은 아예 그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한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임희주는 갑자기 오늘 저지른 충동적인 행동이 후회되기 시작했다.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어야 했는데...어쩌면 그녀가 이혼을 요구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서 강하리가 먼저 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임희주는 불안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생각을 정리했다.어떤 상황이어도 그녀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한편, 바 카운터에서 천아름은 화려한 색깔의 칵테일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다.그녀의 앞에 앉은 구승재는 슬며시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름이 누나, 형수님은 어떻게 된 거예요?”천아름은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녀의 웃음은 이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특유의 매력을 발산했는데 구승재는 그녀의 살짝 올라간 눈꼬리를 보며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누나, 형수님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천아름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궁금해?”구승재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
“왜냐하면... 너무 가슴 아팠거든. 어쩌면 그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지. 하리를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하지만 하리의 감정은 생각해 봤을까?”천아름은 그렇게 말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만약 내가 하리라면,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 텐데. 여자의 마음은 한 번 돌아서면 다시 붙잡기 어려워. 마음을 굳히면 정말 되돌아오지 않는 법이거든.”구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천아름의 얼굴에 스친 슬픔이 그를 멈춰 세웠지만 그녀는 그에게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고 곧장 감정을 추슬렀다.“네가 정말 형을 위하는 거라면 대체 무슨 일인지 말해 봐.”구승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형... 몸이 많이 안 좋아요. 형수님과 연정이한테 폐를 끼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천아름은 가늘고 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그래서 결혼식까지 취소한 거야? 무슨 병인데? 설마 불치병은 아니겠지?”구승재는 씁쓸하게 웃었다.“거의 그렇다고 봐야 해요. 어쨌든 지금은 치료가 불가능해요.”순간 할 말을 일은 천아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구승재의 얼굴에 드리운 슬픔이 묵직하게 다가왔다.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 가볍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별 보는 거 좋아해? 기분 좀 풀어. 누나랑 별 보러 가자.”그 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새벽녘에 강하리가 잠에서 깨고 휴대폰을 확인하자 천아름이 남긴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구승훈 일, 대충 알아냈어. 너 돌아오면 만나서 얘기하자. 그리고 이혼은 잠깐 미뤄둬.]강하리는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내려놓고 세수를 하고는 평소처럼 하루를 시작했다.그때, 기명제약 쪽에서 노민우가 그녀를 찾아왔다.“문제가 생겼어요.”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무슨 문제요?”“이번 인수 건 말이에요. 원래 반대하지 않던 주주 몇 명이 갑자기 협조를 거부하기 시작했어요. 이상한 게, 그 사람들 평소에는 회사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거
강하리는 최하영과 작은 사찰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식당 문 앞에서, 강하리은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바로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요? 추억에 잠기기라도 한 거예요?”강하리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아니요.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식당에는 정자와 누각, 고풍스러운 회랑과 기둥이 어우러진 독특한 건축 양식을 자랑하고 있었다.구승훈과 함께 이곳에 왔던 기억이 떠오르며 그녀의 시선이 한동안 허공을 맴돌았다.이곳 분위기가 좋다는 강하리의 말에 구승훈은 환한 표정으로 앞으로 함께 자주 오자는 말을 했었다.문연진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테이블 위에 놓인 달콤한 요리를 바라보며 그녀는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왜 우리는 함께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걸까?’구승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심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녀가 더 이상 버틸 힘조차 앗아가고 있었다.천아름은 이혼을 잠시 미뤄보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알고 있었다.미루든, 미루지 않든 결과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최하영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불러냈다.강하리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맛있어요.”최하영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말했다.“제 정보가 틀린 줄 알았네요.”강하리는 그가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묻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최 대표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최하영은 공용 젓가락으로 그녀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말했다.“안현우 일이죠? 기명제약 뒤에서 손 쓴 사람, 그 녀석 맞아요. 이제 어떻게 도와줄까요?”강하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가슴 한구석이 더욱 답답해졌다.공항까지 마중을 나간 것도, 시킨 음식이 전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인 것도, 그리고 지금 안현우가 뒤에서 손을 쓰고 있는 것도.최하영이 그걸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